[이산의 풋볼리스트] ‘천재’ 구자철 ② KOO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기사입력 2011-02-22 16:41 |최종수정 2011-02-22 16:43
①부에서 계속
[풋볼리스트=이산 객원기자] 런던(영국)= 05~06 시즌 3부 리그(리그1) 브렌트포드에서 프로 1년차 생활을 하고 있던 2006년 1월초, 셰필드 유나이티드라는 2부 리그 클럽에서 제의가 들어왔다. 이후 06~07 시즌을 앞둔 프리 시즌에 브렌트포드의 계약기간 1년 연장 제의를 무시하고 셰필드 유나이티드로 1주일짜리 테스트를 받으러 떠났다.
당시 셰필드 유나이티드는 현재 QPR의 감독인 ‘네일 워녹’이 지휘를 하고 있었다. 워녹 감독은 그 시즌에 프리미어리그로 올라가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스트라이커 수집을 좋아하기로 유명한 감독의 계획에 내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셰필드와의 첫 만남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우선, 대개의 선수들은 계약이 완료된 상태로 팀에 합류했다. 당시, 계약이 안 된 상태에서 1주일짜리 테스트 기회를 받아 합류한 선수는, 나를 제외하면 이란 21세 이하 국가대표로 스페인 레알 사라고사에서 건너온 미드필더 ‘샤류 나라지’와, 당시 7부리그 ‘힛친(Hitchin FC)’에서 온 ‘셰인 힐’이 전부였다. 셰인은 영국 국가대표로 뛴 적이 있고 흑인으로 드물게 프로 감독직을 맡은 경험이 있던 릭키 힐의 아들이었다.
영국 축구는 기술보다 힘과 스피드를 중시
첫날 셰필드 1군 연습구장에서 만난 인물은 셰필드 2군 감독 ‘론 리드’였다. 당시 셰필드 구단 측은 나에 대한 모든 정보를 갖고 있었고 나와 에이전트는 ‘네일 워녹’ 감독에게 1군 테스트 1주일 동안 계약 여부 결정을 내려달라고 요청해둔 상태였다. 만약 계약이 성사되지 않을 경우 브렌트포드로 돌아갈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이 요청에 셰필드 측도 응해 테스트가 진행되었고 이에 나는 몸과 마음 모두 단단히 준비한 상태로 셰필드로 간 터였다. 하지만, 주차장에서 우연히 마주친 ‘론 리드’는 상당히 차갑고 거친 눈으로 인사를 받았다. 그러더니 고개를 끄떡거리며 기분 나쁜 시선으로 나를 한번 쭉 훑어내리는 것이 아닌가?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선수에게 보일 수 있는 태도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래도 선수로서 기분이 나쁠 수 밖에 없었다. 아마 다른 선수였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더니 그는 “저~쪽 유스팀 탈의실로 가 옷을 갈아입으라”고 지시하는게 아닌가. 이 말은 테스트 첫 날 유스팀과 함께 운동한다는 뜻으로 들렸다. 대체 나를 왜 셰필드로 부른 것인지 의심이 가기 시작했다. 고작 1주일 동안 유스팀부터 인정받기 시작해 1군 계약을 맺으라는 뜻이니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요구였다. 간단히 말해, 그냥 집에 돌아가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너무 어이가 없었다. 물론 ‘론 리드’가 어떤 생각을 했던 것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하지만, 다른 테스트 선수 두 명의 신체적인 조건은 뛰어났다는 것과 셰필드 유나이티드 선수들의 체격에 비하면 내 신체적인 조건은 최하위 수준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왜소한 체구가 편견을 준 것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프리미어리그가 세계 최고의 리그 하나로 불리기는 하지만, 아직 상위 5-6개 팀을 제외하고면 기술보다는 빠른 템포와, 힘, 스피드를 집중적으로 요구하는 팀이 대부분이다. 물론 예전의 프리미어리그에 비하면 중하위권 팀들도 기술적으로 크게 발전한 것이 사실이다. 외국인 감독들의 노력으로 경기 스타일도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래도 스페인, 네덜란드 등 다른 유럽권 리그에 비하면 힘과 스피드에 의존해 경기를 풀어가려는 느낌이 강하다.
볼턴 원더러스의 오언 코일 감독 (사진=연합뉴스) |
- 지난 3월 대한민국 평가전 장소에서 웨스트햄 1군 코치인 케빈 킨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차두리가 인상적이라고 하더라. 유럽 스타일의 축구 선수로 보인다는게 그 이유였다. 많은 프리미어 리그 감독들이 외국에서 선수를 영입할 때 기술적인 부분보다 체격적인 부분을 먼저 보는 것 아닌가?
▶ 많은 프리미어 리그 클럽들이 선수들을 찾을 때 스피드와 힘을 중요시 여기는 것 같다. 물론 나도 스피드와 힘을 원한다. 하지만 나는 무엇보다 축구에 재능이 있는 선수를 찾는다.
지난달 볼턴 원더러스 연습 구장에서 1대1 인터뷰를 위해 만난 오언 코일 감독이 들려준 이야기다. 평소 그의 축구 철학이 궁금했던터라 물어볼 것이 많았지만, 그날 내 주된 목적은 (생뚱맞을지 몰라도) 구자철을 홍보하는 것이었다. 인터뷰 전 내 간략한 축구 경력을 소개하니 놀란 표정을 짓던 코일 감독은 몇몇 흥미로운 질문을 던지며 관심을 보였다. 당초 30~40분을 예상했던 인터뷰는 막상 20분이 지나니 볼턴 언론 담당관에 의해 제지됐다. 애초에는 자연스럽게 구자철에 관한 질문을 이어가려했지만 갑작스럽게 마지막 질문 시간이라는 이야기를 듣자 아쉬움이 밀려왔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나는 악수하는 짧은 시간동안 코일 감독의 두 눈을 응시하며 “한국에 있을 때 제주 유나이티드에서 구자철이라는 선수와 같이 뛰었다. 나는 아직 그런 선수를 본 적이 없다. 내가 본 선수 중에 단연 최고” 라고 말을 꺼냈다. 구단 관계자가 에이전트로 오인할까 싶어 긴장했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듯 당당하게 말을 꺼냈다. 코일 감독은 잠시 정색하는듯 하더니 조용히 “OK” 라고 답했다. 그러더니 두어달뒤 구단 스태프들과 함께 축구 한 게임 예정인데 같이 뛰지 않겠느냐며 초대말을 건네는게 아닌가. 너무 고맙고 황당해 곧장 “OK”라고 답했다.
나는 구자철의 천재성을 믿는다
앞서 이야기했듯, 나는 구자철의 천재성을 믿는다. 첫 칼럼을 쓰고 많은 생각을 했다. 나의 축구 깊이가 터무니 없이 낮을 수도 있겠지만, 내가 경험하고 같이 뛰었던 그 어느 선수들 보다 자철이의 잠재력이 뛰어나다고 느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근래 자철이 플레이를 직접 본적은 없지만 내가 기억하는 자철이는 (굳이 꼽자면) 빠른 주력, 힘, 투지 이외의 모든 능력을 갖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자철이는 노력하는 선수이기도 하다. 가장 큰 장점을 뽑으라면 축구에 대한 생각과 센스라고 말하고 싶다. 뭔가.. 이전에는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느낌이다. 물론 내가 지단등 다른 세계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드랑 뛰어볼 경험이 없어서 비교는 어렵지만 구자철의 잠재력은 그들급이 아닌가 싶다. 브라질 최고 클럽의 하나라는 상파울루에 잠시 있을 때, 브라질 전국에서 날고 긴다는 선수들을 보며 함께 뛰어볼 경험이 있었다. 브라질 선수들은 정말 볼을 신들린 것 처럼 잘 찬다. 그래서, 세심한 면에서는 자철이보다 나은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스케일과 생각면에서는 자철이가 더욱 더 높다고 느껴진다.
만일 내가 자철이를 믿지 못했다면, 신용을 중시하는 영국 축구계의 분위기까지 감안한다면, 처음 독대한 오언 코일 감독에게 자철이 얘기를 꺼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물론, 코일 감독에게는 내가 꺼낸 자철이 이야기가 아무것도 아닌 것일수 있다. 나를 바보 취급해도 상관없다. 그러나 귀에 한번 익은 선수에게 아무래도 눈 한번 더 가는게 인지상정이라고 믿기에 그 순간을 후회하진 않는다.
볼프스부르크의 숙소에서 현지 취재진에게 밥상을 차려주는 구자철 ⓒ풋볼리스트 |
이제 우리는 이제 안다. 그는 거기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지난 10년간 한국 축구는 눈부시게 성장했다. 눈부신 성장의 뒤를 받친 것은 지금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을 가지고 개인운동을 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순수한 축구 선수들이 아닌가 싶다. 세계 어느 나라를 가더라도 우리나라 선수들만큼 운동에 열정적이고 모든 것을 헌신하는 선수들은 찾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그 10년이라는 눈부신 발전기간 동안 숨겨진 많은 천재 선수들도 버려놓았다. 나는 지금이 대한민국 축구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시점이라고 본다. 10년 혹은 20년 후, 앞에서 끌어주는 박지성, 이영표, 설기현 등 대선배들과, 중간에서 우리 젊은 이청용, 기성용, 구자철 등이 이끌어가는 대한민국 축구계를 생각해보라. 그들이 쌓아놓은 인맥과 명성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지난 10~20년 우리 선수들은 잘 뛰어줬다.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대한민국 어디선가는 피땀과 눈물로 운동을 하는 선수가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들이 더 나아갈수 있게끔 뒤에서 듬직하게 믿고 있어줘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우리 선수들은 외롭다. 외국에 나가있는 우리 선수들을 우리가 지켜주지 못하면 누가 우리 선수들을 지켜줄 것인가.
대한민국도 이제 축구 시즌이 돌아오고 있다. 하지만 경기장 밖을 걸어 나오는 선수들은 아직도 외로워 하고 있다. 공항으로 선수들을 마중가고, 그들에게 선물을 건네는 것도 선수들이 무척 고맙게 여길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경기장이다. 경기장을 걸어나올 때 받는 팬들의 진심어린 기립 박수야말로 우리 선수들을 울게 만들고 더욱 더 뛰게 만들 것이다. 그러니, 그곳으로 가자. 천재는 우리 마음속에 있다. 우리는 그들을 믿고 또 살려내야 한다.
이제 축구화를 벗은 나는 대한민국 축구 팬의 한 사람으로서 자철이를 응원한다. 그리고 현재 내 자리에서 내가 할수 있는 최대한의 능력으로 대한민국 축구에 헌신할 생각이다. 내가 2002년에 느낀 역사적인 장면과 감동들을 대한민국 후손에게도 보여주고 싶다. 그리고 그 감동을 느끼게 해준 2002년 월드컵 선수들에게도 진심으로 고개 숙여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다.
얼마 전, 아스날 감독과 인터뷰 요청을 했다. 언제 어떻게 인터뷰 승낙이 떨어질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의 다짐은 굳다. 그리고 그게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너무 걱정하지는 않으셔도 될 것 같다. 센스있게 소개할테니까. ^^
p.s.) 끝으로, 만일 자철이가 이 글을 읽는다면 너무 부담스러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네가 열심히 뛰는 모습만으로도 만족과 희망을 느낀다. 응원의 말을 오랜 시간 생각했는데 잘 떠오르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나 박수를 보낸다.
글 | 이산 (전 영국 프로축구선수) - 1985년생.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유스 아카데미 출신. 잉글랜드와 브라질의 여러 클럽과 K리그 제주 유나이티드를 거쳤다. 지금은 축구화를 벗고 학업과 취재를 병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