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 개 가까운 촛불이 켜졌다. 주말 동안 국정원의 정치공작과 대선개입을 규탄하는 촛불 시국회의가 서울광장에서 열렸다. ‘국정원에 납치된 민주주의를 찾습니다’라는 대형 현수막을 내걸고 진행된 집회에는 주최 측 추산 1만 여명의 시민들이 참석했다.

‘촛불 확산’, 중·고교생도 시국선언

수백 명이 참석했던 6월 말과 비교할 때 촛불이 크게 확산된 셈이다. 수구언론들이 ‘촛불이 꺼지고 있다’라고 주장하는 것과 정반대다. 축소·왜곡 보도를 비웃듯 가족 단위로 참가한 시민들도 많았다.

교복 입은 청소년들도 참가해 시국선언을 했다. 이들은 국정원 대선개입을 규탄하는 시국선언 운동을 전개하겠다며, 7월 17일 제헌절에 맞춰 ‘717명 청소년 시국선언’을 계획하고 있다고 밝혔다.

“중·고등학생이지만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무너져 내리는 것을 그냥 볼 수 없어 시국선언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또 “국정원이 선거에 개입하고 있다는 정황이 드러나고 있는데도 뉴스에서는 그런 것들을 찾아볼 수 없다”며 언론의 축소·왜곡 보도 행태를 비난했다.

 

 

대부분 신문들 ‘촛불 외면하기’

대부분 언론들은 주말 촛불집회를 기사화하지 않았다. 토요일 새벽에 일어난 아시아나 여객기 충돌 사고와 남북실무자 회담 타결 소식에는 많은 시간과 지면을 할애했지만, 국정원 사건과 12.19 부정선거 의혹을 안타까워하며 촛불을 든 시민들에게 카메라를 대는 데는 크게 인색했다.

조선일보는 아시아나 여객기 충돌 사고와 남북 실무자회담 등을 집중 보도하면서 촛불집회와 국정원 사건에 대해서는 단신기사조차 올리지 않았다. 비중 있는 두 사건이 일요일 새벽에 몰리다보니 지면이 부족해 그런 것 아닌가 하여 ‘뉴스 검색’을 해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동아일보도 그랬다. 아사아나 사고 소식과 남북 실무회담 등과 함께 LA 다저스 류현진 선수의 7승 달성, 미국에서 갑작스런 죽음을 맞은 천재과학자 얘기 등을 메인에 올리면서도 민주주의의 근간과 헌정질서를 문란시킨 국정원 사태와 이를 규탄하는 촛불집회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정치면 톱기사에는 ‘박 대통령이 4개 국어를 구사한다’며 대통령의 어학실력에 찬사를 보내는 ‘아부형’ 기사가 등장했다.

중앙일보도 촛불 기피증이 심각한 듯 보였다. 여객기 사고와 남북실무회담 소식 바로 아래 세 번째 꼭지로 국회의원들이 언론사 카메라가 있을 때는 문자 확인을 하지 않는다며 휴대전화에 ‘정보보안필름’을 붙인 의원도 있다는 내용의 기사를 배치했다. 의원들의 휴대전화보다 촛불집회가 기사로서의 가치가 떨어진다는 말인가.

입 맞췄나? TV방송도 마찬가지

입을 마춘 걸까. 지상파 방송도 똑같았다. KBS의 ‘전체뉴스’를 검색하면 혹여 한 두건 정도라도 관련 기사가 검색될까 싶어 ‘촛불집회’를 검색어로 설정해 보았다. ‘촛불집회’라는 말이 기사내용에는 등장해도 제목으로 뽑은 경우는 단 한건도 없었다.

간헐적으로 ‘촛불집회’를 언급한 경우도 있었지만 야당이 ‘촛불집회’를 여당을 위협하는 무기로 활용하려 한다거나, 어버이연합 등 보수단체가 촛불집회에 항의하는 맞불집회를 열었다는 등의 ‘촛불 물타기’ 기사가 대부분이었다.

MBC에서 관련 뉴스를 검색하면 촛불집회 관련 기사가 서너건 등장한다. 하지만 6월 29일 촛불집회가 가장 최근 기사이고, 그 이후로는 촛불집회와 관련된 보도를 내보내지 않았다. SBS도 MBC와 다를 게 없었다.

그나마 어둠에 불 밝힌 건 <오마이뉴스> 와 <한겨례>

그나마 한겨레는 인터넷판 1면에 ‘시민 1만여명 서울광장서 국정원 규탄 촛불집회’라는 제하의 기사를 실었다. 반가웠다. 아마도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느낌이 이럴 것이다.

촛불집회 소식을 1면 톱에 등장시켜 상세하고도 심도있게 보도한 매체는 오마이뉴스 뿐이었다. 언론장악이 극에 달해 깜깜한 공간이 돼버린 우리 사회에서 한줄기 빛처럼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 오마이뉴스에 시민의 한사람으로 감사와 위로를 보낸다.

아이러니다. 극우 성향이 강한 TV조선이 촛불집회를 다룬 기사가 가장 눈에 띄었다. 관련 기사 모두 촛불집회를 비판하기 위한 것이었다. 촛불을 든 시민들의 입장과 주장을 객관적으로 보도한 기사는 단 한 건도 없었다. 촛불집회를 비하 물론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개인비리를 부각시켜 국정원 사건을 물타기하려는 기사도 다수였다.

종편은 가관, TV조선은 촛불 지지 댓글 삭제

TV조선의 대표적인 종북몰이 프로그램인 ‘돌아온 저격수다’(진성호, 장원재, 변희재 등이 진행)는 촛불집회에 대해 원색적인 비판을 쏟아냈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주장에 반대하면 댓글까지 삭제해 왔다는 정황이 포착됐다.

‘돌아온 저격수다’의 ‘시청자소감’에 올린 댓글 중 촛불집회를 지지하는 두 건 모두 글 내용을 볼 수 없었다. 삭제된 것이다. 글의 제목은 ‘국정원 NLL로 대선 물타기하지 말라, 5일째 촛불집회’ ‘국정원 규탄 촛불집회 2일째 현장, 불의에 대한 항거다’ 등이었다.

어떤 근거로 글을 삭제한 걸까. ‘시청자소감’ 운영 규칙에 ‘회원에게 사전 통보 없이 삭제하는 기준’을 만들어 놓고, 이에 해당하는 기준으로 ‘주제 무관’ ‘업무 방해’ ‘타 사용자에 대한 공격’ 등을 이유로 들고 있었다. ‘돌아온 저격수다’의 제작진은 제작목적을 “종북좌파의 감춰진 뒷모습 폭로”라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주제’에 어긋나는 글이라면 댓글까지 깡그리 삭제하나 보다.

빈손의 국민은 우습게 봐도 촛불 든 국민 두려워하는 저들

중·고등학생들이 지난 주말 서울광장에서 ‘717 청소년 시국선언 운동’을 선포하며 내놓은 시국선언문에 이런 글이 등장한다.

“우리 조상님들부터 부모님들이 총 맞고 피를 흘리며 지켜온 민주주의를 이제는 우리 청소년들이 수호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이 자리에 섰습니다... 진짜 국민들이 무섭지 않습니까? 언론 장악해서 국민의 알권리를 박탈하고 온라인 여론 조작해서 진실을 가리면 진짜로 국민들이 속을 줄 알았습니까?

촛불 든 청소년들의 말이 백번 옳다. 저들은 국민을 결코 무서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저들도 국민을 두려워할 때가 있다. 빈손의 국민들은 만만하게 보지만, 촛불 든 국민 앞에서는 겁을 먹는다. 촛불을 들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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