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0일 <2015 희망로드 대장정 Hope for child 1편. 유지태, 꿈꾸는 아이들의 땅 DR콩고를 만나다> 편에서는 지구상 최악의 전쟁터, DR 콩고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 배우 유지태 씨가 희망로드 대장정을 시작한다고 합니다.
아프리카 중부 내륙, 콩고민주공화국. 휴대폰 주원료이자 '푸른 금' 이라 불리는 '콜탄' 을 비롯해 다이아몬드, 구리, 고무 등 풍부한 자원을 가진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꼽히는 DR콩고.
1960년 벨기에로부터 독립한 후, 무려 19년이나 이어온 내전은 '세계 2차 대전 이후 최악의 전쟁' 으로 불릴 정도라고 하는데요. 내전으로 인해 가족을 잃고 삶을 송두리째 빼앗겨 버린 사람들. 심지어 내전의 주 무대가 된 도시, 콩고 동부 고마는 10여년 전 화산 용암 분출로 인해 불모지가 되어 주민들은 긴 전쟁의 공포와 더불어 배고픔의 공포를 함께 겪고 있다고 합니다.
'고마 난민촌' 으로 찾아간 유지태. 반군의 위협을 피해 고향을 버리고 난민촌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비도 막아주지 못하는 천막집에서 하루 한 끼 밥을 굶지 않기 위해 반군들이 도사리는 숲으로 하루 8시간씩 걸어간다고 하는데요. 전쟁고아들의 굶주린 신음소리와 눈물이 가득한 DR콩고 난민촌에서 만난 아이들은 총알보다 굶는 것이 더 무섭다고 합니다..
하루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실정이다보니, 난민촌의 많은 사람들은 영양실조를 겪고 있다고 하는데요. 때문에 5세 미만 아이들의 사망률이 50%에 육박하고, 영아 3분의 1이 저체중아라고 합니다.
특히 전쟁으로 인한 가장 큰 희생양은 다름아닌 아이들과 여자들. 오랜 DR 콩고의 내전은 약 3만 명의 아이들을 소년·소녀병으로 전락시켰다고 하는데요. 6살 남짓한 아이들이 총알받이로 끌려가고, 어린 소녀들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과 끔찍한 병을 안겨주는 반군들.
그런데.. 신음과 눈물만 가득할 것 같은 그 곳에서 배우 유지태 씨는 아이들의 눈빛을 통해 콩고의 내일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때문에 유지태 씨가 준비한 이벤트. 다름아닌 자신의 생일조차 모르는 콩고 아이들을 위해 생애 첫 생일 파티를 준비한 것이라고 하는데요. 방송을 통해 전쟁의 그늘에 가려져 있는 아이들에게 웃음을 되찾아 줄 유지태 씨의 희망 프로젝트가 공개된다고 합니다.
시리아 내전 피해 유럽가다 배 전복… 난민 꼬마 시신 터키 해변에 밀려와 SNS 사진 퍼지며 전세계 충격-분노
‘파도야 슬퍼 말아라.’ 2일 소셜미디어에서 급속하게 번진 시리아 어린이 아일란 쿠르디의 사진. 이 아이는 가족과 함께 터키에서 그리스로 가는 밀입국선을 타고 가다 전복 사고로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시신은 파도에 떠밀려 터키 휴양지 보드룸의 해안에서 발견됐다. 아래 사진은 생전의 쿠르디(왼쪽)와 그의 친형. 보드룸=AP 뉴시스
빨간색 티셔츠와 파란색 7분 바지 차림의 꼬마가 해변에 엎드려 있다. 서너 살이나 됐을까. 굴 따러 간 엄마를 기다리다 바다가 부르는 자장노래에 잠든 걸까? 하지만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가 검은 머리칼을 적시고 얼굴까지 적셔도 도통 일어날 줄 모른다.
‘섬집 아기’라는 한국동요 속 주인공 같던 이 꼬마의 사진에 유럽 대륙이 충격에 빠졌다. 2일 터키 휴양지 보드룸의 해변에서 발견된 시리아 난민 어린이의 시신 사진이다. 터키 경찰관들이 찍은 이 사진은 소셜미디어를 타고 ‘표류물이 된 인도주의(Flotsam of Humanity)’라는 해시태그와 함께 급속하게 퍼져나갔다.
인권감시센터의 나딤 후리 사무부총장은 “파도에 휩쓸리는 이 시리아 꼬마의 이미지는 잊을 수 없다”며 “집단적 난민구조 노력의 가장 큰 실패”라는 트위터 메시지를 올렸다. 한 터키인은 “(사진 속에서) 인간은 봤지만 인간성은 보지 못했다”며 “세계는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영국 일간 가디언에 따르면 이 어린이는 시리아 북부 코바니 출신의 아일란 쿠르디(3)다. 코바니는 이슬람국가(IS)와 시리아반군 간에 격렬한 공방전이 펼쳐지는 악명 높은 전장이다. 이를 견디지 못하고 올해 초 고향을 등진 쿠르디 가족은 최근 터키에서 소형 보트에 몸을 싣고 그리스 코스 섬을 향해 떠났다가 보드룸 해변 인근에서 배가 뒤집히는 사고를 당했다. 쿠르디 가족을 포함해 23명을 나눠 태운 소형 보트 2척이 모두 전복돼 어린이 5명을 포함해 12명이 숨졌다. 쿠르디의 형 갈립(5)과 엄마도 목숨을 잃었다.
가슴 아픈 쿠르디의 주검 사진은 ‘난민 문제’를 골칫덩어리로 취급해오던 유럽의 양심을 일깨우기 시작했다. 영국의 인디펜던트는 “파도에 실려 온 시리아 꼬마의 사진이 난민에 대한 유럽의 태도를 바꾸지 못한다면, 대체 무엇이 바뀌겠는가”라고 통탄했다. 허핑턴포스트는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를 겨냥해 “데이비드, 뭐라도 좀 하세요”라는 제목을 달았다. 스페인 일간 엘문도는 홈페이지에 “유럽의 익사”라는 제목과 함께 쿠르디의 사진을 실었다. 이탈리아 일간 라레푸블리카도 “전 세계의 침묵에 대한 사진”이라고 전했다.
국제이주기구(IOM)에 따르면 올해 8월 말까지 지중해를 건너 유럽에 유입된 난민은 35만 명을 넘어섰으며 지중해를 건너다 숨진 난민은 2643명에 이른다.
마치 신께 경배를 드리듯 무릎을 꿇고 상체는 앞으로 기울인 모습이였습니다. 집이 붕괴되면서
그무게로 인해 그녀의 목과 허리는 골절이 되었습니다. 구조팀이 힘겹게 손을 흙속에 넣어 그녀의 생존 여부를 확인했지만 안타깝게도 숨도 쉬지 않았고 체온도 없었으며 몸은 이미 굳은 상태였습니다.
구조팀은 그 여성을 포기하고 급히 다른 생존자 탐색에 나셨는데 그중 팀장이 어떤 이유인지 이상한 느낌이들어 다시 그여성에게로 가서 무릎을 꿇어 웅크린채 굳어있는 그녀의 팔아래 공간을 확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곤 소리쳤습니다. "아기가 있다!!" 구조팀들이 몰려와 그녀아래 흙더미를 조심스레 걷어냈고 꽃무늬 담요로 둘러싸인 3개월 아기를 발견하였습니다. 그 어머니는 집이 붕괴되는 급박한 순간에 아기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웅크려 아기를 지킨것이였습니다. 아기는 그당시 잠들어 있었고 의료팀이 아기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담요를 펴자 그 속에서 휴대폰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문자로 타입이 되어 있었는데
"If you can survive, You have to remember that I love you"
"아가야 만약 생존하거든 엄마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기억해야한단다"라고....이문자를 본 구조팀들은 그자리에서 울음을 멈출수가 없었습니다.
얼마나 어머니의 사랑의 힘이 위대한지 5월 어버이날을 맞아 다시한번 그 사랑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2012년 자전거를 타고 중국 신장에 있는 타클라마칸 사막 남부 초입을 달리는 강철우씨. 타클라마칸은 위구르어로 ‘돌아올 수 없다’는 뜻이다. [사진 강철우]
내 이름은 강철우(62·사진). 퇴직 공무원이다. 지난 2010년 30년간 몸담았던 국가정보원을 떠났다. 처음엔 솔직히 시원했다. 수십 년의 국정원 생활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동반했으니까. 그러나 머지않아 허탈감이 몰려왔다. 퇴직생활은 무료했다. 매일 나가던 직장이 그리웠다. 딱히 노후 계획을 세우지도 않았다. 그저 봉사 활동을 하겠다는 막연한 생각만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먼저 퇴직한 선배를 만났다. 등산과 여행의 달인인 선배는 무력감에 빠진 내게 “자전거를 타라. 자전거로 세계 일주를 해보자”고 권유했다. 호기심이 발동했다. 무엇이든 해보고 싶은 시기였으니까. 퇴직은 했어도 체력만큼은 자신 있었다. 곧바로 훈련에 들어갔다.
강원도 화천·양구의 산기슭을 누비며 하체를 단련했다. 야영 훈련도 빼놓지 않았다. 강원도 밤하늘의 별을 세며 머나먼 이국땅에서 만날 은하수를 상상했다.
자전거를 타면서 변화가 찾아왔다. 훈련을 통해 인내와 끈기를 배웠다. 페달을 밟으면 온갖 근심걱정이 사라졌다. 자신감이 생겼고 2012년 드디어 1차 자전거 여행 날짜가 잡혔다. 첫 여행의 컨셉트는 ‘실크로드’. 중국 베이징에서 출발해 시안을 거쳐 미얀마·인도로 뻗어가는 4500㎞ 거리의 길을 자전거 한 대에 의지해 4개월 동안 달렸다. 하루 100㎞를 이동한다는 계획만 세웠다. 달리다 지치면 야영을 했고, 마을이 나오면 숙식을 해결했다.
관광도 빼놓지 않았다. 책으로만 봤던 세상을 다시 경험했다. 영화 속 현장을 확인하고 유적지를 둘러봤다. 자전거는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놨다.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2차 여행을 계획했다. 중앙아시아에서 유럽 스페인까지라는 목표를 다시 세웠다. 2014년 5월 파키스탄에서 시작된 2차 여행은 그해 9월까지 4개월 반이나 이어졌다. 낯선 나라 이란에선 뜻하지 않은 환대를 받기도 했다. 바로 한류 때문이었다. 프라이드가 국민차고 드라마 ‘주몽’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 나라. 그들의 따뜻함을 뒤로하고 여행은 이어졌다. 터키를 거쳐 유럽까지 자전거 여행은 순조로웠다. 그러다 뜻하지 않은 복병을 만났다. 아테네에서 동행한 선배가 교통사고를 당했고 그 후유증으로 2차 여행은 로마에서 마무리됐다.
한국에 돌아온 난 지난 4월 29일 삼성서울병원 수술대에 올랐다. 장기기증 때문이다. 나를 두고 올해 2번째 ‘순수 신장기증인’이라고 했다. 순수 신장기증은 혈연이나 친분 관계가 전혀 없는 사람에게 자신의 콩팥을 떼 주는 것이란다. 2차 여행을 준비하다가 우연히 라디오를 통해 한 여성의 딱한 사연을 접했다. 아내가 만류했지만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주는 사람이 더 큰 행복을 느끼니까.
나는 이제 봉사활동으로 인생 2막을 준비하고 있다. 퇴직 전 회사에서 양지나눔회라는 봉사단체를 만들어 활동한 경험도 있고, 2002년엔 1급 사회복지사 자격증까지 땄다. 내가 자리 잡고 살 수 있었던 것은 국가와 사회, 이웃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을 위해 남은 인생을 살아갈 것이다. 수술 회복 중인 난 내년에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알래스카에서 남미 칠레까지 1만2000㎞를 종단하는 3차 자전거 여행이다. 콩팥 하나를 떼 줘도 누구보다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꼭 보여주고 싶다.
【신두팔촉(네팔)=AP/뉴시스】지난 25일(현지시간) 발생한 네팔 대지진으로 2일까지 피해자는 7040명으로, 부상자가 1만4000명으로 확인됐다. 일부 마을은 심각한 지진 피해를 입었지만 여전히 고립돼 있는 상황으로 알려졌다. 지진 피해 지역인 신두팔촉의 파우와토크마을에서 한 여성이 아이와 함께 가옥 잔해 옆에 앉아 있다. 2015.05.03 [사진 영상 제보받습니다] 공감언론 뉴시스가 독자 여러분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뉴스 가치나 화제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사진 또는 영상을 뉴시스 사진영상부(n-photo@newsis.com, 02-721-7470)로 보내주시면 적극 반영하겠습니다.
규모 7.8의 강진이 발생한 네팔에서 희망과 좌절, 분노가 교차하고 있다. 구조 ‘골든타임’(붕괴사고 후 72시간) 이후에도 살아서 구조되는 매몰자들이 나타나고 있는 반면에 생환 가능성은 점차 희박해지는 상황이다. 여기에 네팔 정부의 더딘 수색·구조·구호 작업을 성토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dpa통신 등 주요 외신에 따르면 28일(현지시간) 네팔 수도 카트만두 재난 현장에서는 기적 같은 생환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25일 지진으로 무너졌던 아파트에서는 리시 카날(28)이 매몰 82시간 만에 네팔·프랑스 연합구조팀에 의해 구조됐다. 현지 네팔타임스는 지진 발생 당시 7층짜리 건물 2층에 있었던 카날이 무너진 기둥에 다리가 부러진 상태로 사경을 헤맸다고 전했다. 프랑스 구조팀은 “살려 달라”는 그의 비명을 들은 뒤 네팔 경찰과 함께 6시간의 사투를 벌여 그를 구해냈다. 카날은 AP통신에 “입술이 갈라지고 손톱이 하얗게 변하면서 구조에 대한 희망을 버렸다”며 “목이 너무 말라 내 오줌을 마셨다”고 말했다.
기적 네팔·프랑스 구호요원들이 28일(현지시간) 카트만두 시내에서 무너진 건물 속에 갇혀 있던 리시 카날(28·왼쪽)을 구조해 인근 병원으로 옮기고 있다. 카날은 25일 네팔 전역을 강타한 규모 7.8 지진으로 자신이 살고 있던 아파트가 무너진 지 82시간 만에 구조됐다.
네팔 각지에서 기적의 생환 소식이 이어지고 있다. CNN방송은 매몰 36시간 만에 구조된 네 아이의 어머니의 소식을 전했다. 살고 있던 5층짜리 건물이 무너졌지만 천만다행으로 기둥 사이에 갇혀 크게 다치지 않은 탄카 마야 시톨라(40)는 “36시간 동안 움직일 공간이 없어 누워있었다”고 했다.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도 카트만두 외곽에서 무너진 건물에 갇힌 지 62시간 만에 햇빛을 본 존 KC 사연을 전했다. 네팔 군당국은 전날 중국·터키 연합구조대가 빈민촌 중 하나인 발라주 지역에서 이 남성을 구조했다고 밝혔다. 앞서 발라주에선 같은 날 찬드라 와니 가자무(35)가 53시간 만에 구조됐다.
하지만 지진 발생 72시간이 훨씬 지나면서 추가 생존자가 나올 가능성은 점점 희박해지고 있다. 영국에 본부를 둔 국제구조위원회(IRC) 줄리 리언은 BBC방송에 “산소 공급과 부상 정도, 식수 여부에 따라 간혹 닷새 후에도 살아 돌아오는 매몰자가 있긴 하다”면서도 “하지만 만 사흘이 지나면 생존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고 말했다. 지진 발생 닷새째인 29일 사망자는 5057명, 부상자는 1만915명으로 늘었다.
네팔 당국이 수색 지역을 카트만두 외곽과 산간지대까지 확대했지만 전반적인 피해 규모도 확인하지 못할 정도로 구조작업은 큰 진척이 없다. 이에 가족과 친척의 생환 소식을 학수고대하고 있는 네팔인들의 분노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28일 카트만두 의사당 앞에서 수백명의 시위대가 반정부 집회를 열었다고 전했다. 한 시위 참가자는 NYT에 “정부의 무능력과 어이없는 대책, 만연한 부패로 이번 지진이 점차 인재(人災)가 돼가고 있다”고 비판했다.
네팔 당국이 지진으로 끊긴 도로·통신망을 핑계로 제대로 재난구역에 구호인력을 보내지 않고 있는 데다 외국을 의식해 자국민보다 히말라야의 외국인 등반객에게 구호장비를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네팔 관리들은 세계 각지에서 답지하고 있는 구호품을 제 가족이나 친척들에게 우선 배분하고 있다고 시위대는 성토했다.
안젤리나 졸리는 남들과 다른 행보를 이어온 여배우다. 그녀는 연기도 뛰어나지만, 세상을 바라보고 올바른 행동을 실천하는 것에도 뛰어나다. 이제 그녀는 헐리우드의 인기 배우, 영화감독, 시나리오작가를 뛰어넘어 글로벌 지도자의 한 명으로 뽑힌다.
졸리는 미국 경제잡지 포춘지가 지난 3월 선정한 ‘전 세계 50대 지도자’에 21위에 뽑혔다. 포브스가 선정하는 ‘100명의 유명 연예인’에는 물론 ‘100명의 영향력 있는 여성’에도 매년 단골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타임지가 선정하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대 인물’에도 2008년부터 수시로 오르고 있다.
졸리는 자신의 명성을 개인적으로 누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를 국제사회의 공익을 위해 적극적으로 헌신하고 있다. 유엔난민기구(UNHCR)의 특별사절에 이어 친선대사로 임명돼 활동해왔다. 실제로 전 세계 난민촌을 찾아다니며 활발한 활동을 펴기로도 유명하다.
최근 그녀는 전쟁 지역의 여성 인권을 위한 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분쟁 지역 성폭력 방지 이니셔티브(PSVI)’라는 프로젝트다. 졸리는 지난 6월 영국 런던에서 열린 ‘분쟁 지역에서 성폭력 종식을 위한 국제회의’를 윌리엄 헤이그 영국 외교장관과 공동 주최했다. 여성 노벨평화상 수상자 5명도 졸리와 자리를 함께했다. 이 회의는 전쟁 중 성폭력을 주제로 한 첫 국제회의로 기록된다. 국재사회가 나서 분쟁 중 성폭력을 처벌하지 않은 관행을 타파하고 실질적인 효과가 있는 대응책을 마련하지는 취지다.
피해자들에 대한 국제적 지원 확대 방안도 함께 논의한다. 한국을 포함해 전 세계 100여국이 참가했다. 이 자리에서 졸리는 감동적인 개막연설을 했다.
“분쟁 지역의 성폭행은 침묵과 부인 속에서 자행된 범죄로 우리는 이를 너무도 오랫동안 터부로 여겼다. 엘리노어(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미국 대통령의 부인으로 인권 운동을 펼침)가 말했듯이 인권은 결국 시민사회의 손에 달렸다. 이번 회의에서 변화의 계기를 일구지 못하면 그런 악행은 앞으로도 수백 만명의 삶을 파괴할 것이다…(중략)…아프가니스탄에서 소말리아까지 많은 피해자를 만났다. 우리와 똑같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우린 뭔가 잘못되면 경찰이 나타난다. 이들에겐 그런 게 전혀 없다. 진짜 부끄러운 것은 성폭력 생존자가 아니라 가해자라는 메시지를 전 세계에 보내야 한다.”
안젤리나 졸리는 특히 지난해 가을 유엔총회 기간 중에 나온 유엔의 ‘분쟁 중 성폭력 근절 선언’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성폭력 특별대표와 중동·유럽·아프리카·아시아 12개국 지도자가 뜻을 모아 만든 선언이다. 분쟁 중의 성폭력을 제네바협정과 ‘국제 무력충돌의 희생자 보호에 대한 제네바 협정의 제1추가의정서’의 위반으로 간주해 전 세계 어디서든 관련자를 체포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다.
이 선언은 분쟁 중 성범죄자를 평화협정으로 사면하는 것도 금지해 이들이 설 땅이 없도록 했다. 종군위안부를 포함해 태평양 전쟁 중 일본군의 성범죄도 묻고 있어 우리와도 관계가 적지 않다.
졸리는 분쟁 지역의 강간 및 다른 성범죄 조사 과정에서 피해자들의 안전과 존엄을 지킬 수 있도록 하는 국제 의정서를 마련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이런 인도주의적인 활동에 대한 공로를 인정 받아 지난 6월 영국 왕실로부터 ‘데임(Dame·DCMG)’ 작위를 받았다. 남성의 ‘경(卿·Sir)’에 해당하는 작위다.
할리우드 스타였던 안젤리나 졸리가 세계적인 인도주의 활동가로 변신한 것은 2001년이다. 당시 자신의 출세작인 액션영화 <툼 레이더스> 촬영 차 캄보디아로 갔다가 참상을 목격했다. 지뢰로 발목이 잘려나간 어린이들이 목발을 짚고 축구를 하는 모습 등을 보면서 전쟁의 참화가 지나갔음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인도주의적인 위기를 실감했다. 이런 경험을 한 안젤리나 졸리는 스스로 유엔 난민기구(UNHCR)를 찾아가 도움을 줄 방법을 상의했다.
그런 다음 전 세계 인도주의 위기를 직접 확인하고 지원 방법을 찾지 위해 전 세계의 난민캠프를 찾아 다니기 시작했다. 바로 그 해 처음으로 방문한 현장이 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과 탄자니아였다. 잠시 찾아 사진만 찍고 돌아온 게 아니었다. 그는 유명 인사로서 대접을 사양하고 유엔기구의 직원들과 함께 생활하며 현장을 누볐다.
졸리는 18일 동안 비극의 난민캠프를 돌아본 뒤 인도주의적인 활동이야말로 자신이 일생을 바칠 일임을 자각하게 됐다고 한다. 그래서 다시 캄보디아를 방문해 2주간 현장을 찾아 다녔으며 발길은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으로 이어졌다.
그는 자신이 느낀 것을 즉각 실천에 옮겼다. 유니세프(유엔아동기금)에 100만 달러를 기부한 것이다. 개인이 유니세프에 기부한 최다 금액이다. 그 해 8월 유니세프로부터 친선대사에 임명됐다. 인도주의 활동과 관련한 첫 공식 직함이다. 유엔난민기구의 난민특사로도 임명됐다. 그 뒤 지금까지 전 세계30개국 이상의 난민캠프 등을 다니며 인도주의적 관심을 촉구하고 있다.
졸리는 2002년 한 인터뷰에서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실상을 전 세계에 알리고 싶다”며 “어려운 상황 속에서 그들이 살아남은 것을 높게 평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활동에 따라 졸리는 노벨평화상 후보로도 거론된다.
2003년 나온 영화 <머나먼 사랑>에서 졸리는 아프리카와 아시아 각국의 구호현장을 다니는 사교계 유명 인사 역을 맡았다. 이 영화는 비록 흥행에는 그리 성공하지 못했지만 구호대사로서 졸리의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한편 그가 앞으로 갈 길을 예견하게 해주는 작품으로 평가 받는다. 졸리는 영화 <피와 꿀의 땅에서>를 통해 2011년 감독으로 데뷔했는데 1992년부터 3년 간 벌어졌던 보스니아 내전 중의 학살과 성폭력문제를 다룬 작품이었다.
이 작품을 본 헤이그 장관이 분쟁 중 성폭력 문제를 국제적인 이슈로 제안했다고 한다. 졸리가 국제 문제에 영감을 준 셈이다. 두 사람은 함께 언론 기고문을 작성하는 등 공동작업을 해왔다.
졸리는 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나 ‘가장 섹시한 여성’으로 평가 받고 있다. 그는 <툼 레이더스>가 흥행에 대성공한 이듬해인 2002년 ‘보그’지를 시작으로 2004년에는 ‘에스콰이어’, 2005년 ‘하프 바자’, 2006년 ‘피플’, 2007년 ‘엠파이어’, 2009년 ‘베네티 페어’ 등의 조사에서 이런 평가를 받았다. 아름다움은 명성으로, 명성은 영향력으로 연결되게 마련이다. 이 같은 명성에 경제력은 당연히 따라오 는 것이다.
이미 2006년 AC닐슨의 글로벌 산업 조사에서 졸리와 피트 부부는 글로벌 브랜드들이 광고모델로 가장 선호하는 연예인으로 뽑혔다. 2006년부터 2년 간 시세이도 모델을 한 데 이어 2011년부터 매년 1000만 달러를 받고 세계적인 럭셔리 브랜드인 루이비통 광고 모델을 맡고 있다.
올해 졸리는 최고의 해를 맞고 있다. 지난 8월 23일 프랑스에서 가족·친지 20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비공개로 배우자인 브래드 피트와 결혼식을 올렸다. 2005년 영화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를 찍으며 연인으로 발전, 최근까지 사실혼 관계를 이어왔다. 미국의 연예매체 ‘피플’과 영국의 잡지 ‘헬로’ 등에 게재된 결혼식 사진에서 졸리는 순백색 드레스를 입고 꽃무늬 면사포를 쓴 채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졸리가 출산한 3명의 아이와 입양한 3명의 아이와 함께 부부가 찍은 사진도 함께 공개됐다. 졸리는 최근 배우 생활을 몇 년 안에 정리하고 유엔 활동에 매진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미국 연예매체 US위클리는 지난 6월 “졸리가 영화 <클레오파트라> 촬영 뒤 은퇴할 계획을 밝혔다”고 보도했다. 졸리가 연기보다는 글을 쓰고 영화를 연출하는 것에 더 관심이 많으며 정치나 사회적 문제, 인권 문제 등에 더욱 신경을 쓰면서 유엔과의 일에 집중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배우 안젤리나 졸리를 볼 날은 그리 많이 남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전 세계에 인권문제를 제기하고 온몸으로 뛰는 인도주의 활동가로서 졸리는 오랫동안 우리 곁을 지킬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