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 심화시킨 대기업이 해결 실마리 갖고 있어
미투 운동 속 외국인·이주 여성은 배제돼
▎계층 상승의 사다리가 사라지면서 한국 사회의 양극화도 심화된다. / 사진:이정권 기자 | |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정에 대해 ‘때로는 다스리고 때로는 다스림을 받는’ 정치체제라고 했습니다. 다스리는 지배자와 다스림을 받는 피지배자가 따로 정해져 있다면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닌 것이지요. 민주정을 채택했던 그리스 아테네에선 공직자를 추첨으로 뽑았습니다. 시민이라면 누구에게나 기회가 공평했습니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남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과거 왕정과 식민 지배, 그리고 민주주의의 수사(修辭) 아래 유지됐던 오랜 독재를 종결하고 ‘국민의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찾았으니까요. 그래서 우린 한국의 민주주의를 ‘민주화’라고 합니다. 오랜 투쟁과 인고의 세월을 견디고 우리는 자유와 평등, 민주화를 달성했습니다. 그러나 민주화된 우리 사회에선 모든 구성원이 동등하게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걸로 보이지 않습니다. 과거 약자였던 약자들은 민주화된 사회에서도 여전히 누군가에게 억압당하는 약자로 살고 있고, 강자와 약자의 지위는 더욱 강고해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론적으로는 ‘때로는 다스리고 때로는 다스림을 받는’ 역전이 가능한 가변적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런 사회에 살고 있지 못합니다. 계층 상승의 사다리가 나름 원활히 작동했던 고도 성장기는 추억이 됐습니다. 그리고 이젠 재벌의 세습에 이어 고용세습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역전 가능성이 차단된 사회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지금처럼 ‘부정의’에 대한 분노, ‘정의’에 대한 갈망이 점점 커지고 있는 것도 어쩌면 우리가 모두 국민의 이름으로 ‘민주화’를 위해 투쟁했던 기억을 공유하면서도 실제로 민주화된 사회에서는 또 다른 차별과 착취, 무시와 배제가 상시로 일어나고 있어서일 겁니다.
우리는 ‘데카메론, 정의란 무엇인가’ 첫 회에서 약자가 소외된 ‘배제의 민주주의’로 달려온 우리 사회 부정의의 현상으로 ‘갑을(甲乙) 관계’를 꼽은 진태원 선생님(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의 견해를 들었습니다. 갑과 을은 고정된 신분도 아니고 고정된 대상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지만 사회관계의 매 장면마다 강자와 약자로 등장해 지배와 억압 혹은 대립의 구도를 만들어냅니다.
진 선생께서는 갑을 문화, 부정의의 ‘해법’으로 독특한 민주주의, 이름하여 ‘을의 민주주의’를 제안하셨습니다. 지금의 갑을 관계는 보편적 민주주의로는 감당할 수 없다는 점, 집단으로서의 ‘우리’의 민주화와 평등이 아닌 각각의 사람들의 독특한 정의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저는 이 제안에 아리스토텔레스의 꽃을 떠올렸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꽃이 아름다운 것은 미(美)라는 ‘이데아’가 꽃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라는 스승 플라톤의 말에 “꽃이 아름다운 것은 각각의 꽃이 아름답기 때문”이라고 반박합니다. 아름다움이라는 형상 혹은 본질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 서로 다른 아름다운 것들이 존재하기에 우리는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는 것이지요. 민주주의도 결국 ‘전체를 위한’이 아니라 각각의 독특함, 말하자면 다원성과 차이를 포용해야만 하는 것일 겁니다.
을들은 각각의 이해관계가 다 달라 분열되고 파편화돼 있어 계급처럼 뭉치지 못합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민주화는 뭉쳐서 달성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뭉치지 못하는 주체들은 어떻게 해야 민주주의의 주체가 될 수 있을까요. 약자를 배려하고 보호하는 정책이 해답일까요. 그러나 돌봄 혹은 후견적 민주주의는 을이 주체가 되는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을의 민주주의에 도달하기 위해 어떤 장치를 고안하거나 마련해야 할까요. 우리가 고찰해야 할 과제에 대해서 진 선생의 견해를 계속 듣겠습니다.
빈부격차가 아닌 ‘쏠림’의 시대
▎최근 [을의 민주주의] 저서를 펴낸 진태원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 |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부정의의 핵심은 무엇이며,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정의론 철학자들의 질문은 이로부터 출발합니다.
‘분배의 정의’. 이 질문에 대한 고전적 정의론 이론가들이 찾아낸 답은 이것입니다. 자본주의의 근본 모순을 착취로 이해했던 칼 마르크스, 정의를 ‘기본재’(primary goods)의 공정한 분배의 문제로 간주했던 존 롤스, 정의의 문제를 사람들이 동등한 역량(capability)을 갖도록 보장하는 것으로 파악한 아마티아 센 등이 대표적입니다. 이들은 모두 물질적인 재화의 분배 또는 재분배를 정의의 핵심 문제로 꼽습니다. 우리도 우리 사회 부정의의 문제를 우선 ‘분배’의 관점에서 생각해보도록 하지요.
‘양극화’. 소수의 부자들이 한 나라의 부를 독점하는 극단적인 부익부빈익빈의 현상을 설명하는 용어입니다. 빈부 격차는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지만 지금 시대는 ‘격차’가 아닌 ‘쏠림’으로 설명됩니다. 1990년을 전후해 자본주의 진영을 중심으로 확산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이후 부각된 새로운 현상입니다. ‘20:80’, ‘10:90’, ‘1:99’ 등 양극화를 설명하는 표현들은 점점 가팔라지고 있습니다.
장하성 고려대 교수가 저서에서 통계 자료들을 인용해 한국 사회의 불평등 상황을 분석한 내용에 따르면 이렇습니다. “1990년대 중반까지 상위 10%의 고소득층은 전체 소득의 29%를 차지했는데, 2012년에는 44.9%까지 치솟았으며, 이것은 상위 5%, 상위 1%의 고소득층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소득 불평등은 고용 불평등의 문제와도 관련이 됩니다. 2018년 현재 비정규직 비율 33%. 이건 정부 통계이고, 노동계 통계에선 45%라고 주장합니다. 어쨌든 노동자의 두세 명 중 한 명꼴인 비정규직의 임금은 정규직의 절반에 불과합니다. 대기업이냐 중소기업이냐에 따라서 임금 격차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이만큼 존재합니다. 1980년대 중소기업 임금 수준은 대기업 대비 90%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60%대입니다. 우리나라 노동자 5명 중 4명이 중소기업에 다니고, 5명 중 1명만이 대기업에 다닌다는 점에서 노동자들의 임금은 대기업 정규직이냐 비정규직이냐, 중소기업의 정규직이냐 비정규직이냐에 따라서 격차가 확 벌어집니다.
국제 통계로 비교해 봐도 한국의 저임금 구조는 심각합니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가운데 저임금노동자 비중이 둘째로 높고, 월 임금 100만원 이하 노동자가 전체 임금노동자 세 명 중 한 명꼴에 해당합니다. 장하성 교수는 이런 숫자들을 늘어놓으며 “믿기지 않는 숫자”라고 했지요.
어쨌든 통계만 보면 1990년대 중반까지는 고도성장 속에서 비교적 균형 있는 소득 분배가 이루어졌지만, 외환위기 이후 저임금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가 양산되면서 소득 불평등과 고용 불평등이 심화된 것으로 나타납니다. 최근엔 각종 현금 복지 등 복지정책을 통해 정책적으로 불평등을 완화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지정책은 최소한의 대책일 뿐 불평등의 골을 메울 수는 없습니다. 원천적 분배를 바로잡지 않고서는 분배의 정의에 한 걸음이라도 다가서기 어렵습니다.
고전적 정의론의 핵심은 ‘물질적 분배’
▎대기업의 돈이 중소기업으로 흘러갈 때 분배 정의도 가능하다. / 사진:연합뉴스 | |
이 대목에서 우리는 대기업, 특히 한국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거대 재벌 기업들의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들은 한국 경제의 성장을 이끌어온 주역이지만, 동시에 성장의 과실을 제대로 분배하지 않고 독점해온, 그리하여 한국의 불평등을 심화시킨 장본인이라는 비판이 나옵니다.
그런데 역으로,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대기업이 분배 부정의의 해결자로서 실마리도 잡고 있습니다. 실제로 대기업이 ‘분배의 정의 실현’에 참여하지 않는 한 해결책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 산업구조는 대기업과 그에 딸린 하청기업이 큰 선단을 이루고 있는 형태입니다. 대기업은 중소기업에 일거리를 주고, 중소기업은 대기업의 수주를 받아 납품하는 구조입니다. 대기업이 벌어서 중소기업에 흘려줘야 전체 산업이 돌아간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대기업에선 하청업체에 대해 원가절감 등의 이유로 ‘단가 후려치기’라는 관행을 매년 반복합니다. 이 과정에서 하청기업들의 수지는 점점 나빠질 수밖에 없고, 그 피해와 부담은 고스란히 중소기업 종업원들에게 전가됩니다. 매년 조 단위의 영업이익을 내는 상당수 대기업들도 과실을 자신들의 협력업체와 나누는 데는 인색합니다. 대기업엔 유보 자금이 천문학적으로 쌓이고, 우리나라엔 이처럼 재투자되지 않고 고여 있는 돈이 늘어갑니다. 나라엔 돈이 많은데 시민들에겐 돈이 없는 현상은 이처럼 돈이 흐르지 않고 고여 있기 때문입니다. 대기업에만 머무는 돈이 중소기업과 피고용인들에게로 흘러 들어갈 수 있는 방안이 마련되지 않으면 우리 사회는 ‘분배의 정의’에 도달할 방법이 없습니다.
이와 함께 앞으로의 (재)분배의 문제와 관련해 반드시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 문제가 ‘4차 산업혁명’으로 야기될 변화에 대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현재의 기술적 발전 및 산업의 전개 방향이 조만간 고용구조의 큰 변혁을 초래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4차 산업혁명이 본격화되면 30년 내에 미국의 기존 고용자들 중 70%가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용 구조의 예고된 거대한 변화는 단순히 대량 실업의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부와 노동, 복지, 생활양식 전반에 걸쳐 큰 변화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현재 우리 사회가 직면해 있는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한층 더 심화된 형태로 전개되리라는 점은 쉽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장기적인 사회 변화의 전망에 입각해 우리 사회의 (재)분배 정의를 숙고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철학에선 분배와 구별되는 ‘인정’(認定, Anerkennung, recognition)을 또 하나의 중요한 정의론 개념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인정은 헤겔 철학에서 유래합니다. 이는 부의 불평등 문제가 아니더라도 다른 수준에서 정의의 문제가 긴급하게 발생한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무시·차별·모욕·배제 같은 행동은 이를 당하는 개인이나 집단의 인격과 자존감에 큰 상처를 줍니다. 이런 행위를 통해 그들이 온전히 인간으로서의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는 것을 방해하는 심각한 ‘부정의의 효과’를 초래합니다.
가령 동일한 정규직 노동자라 하더라도 여성은 남성에 비해 가시적이면서 비가시적인 차별과 무시의 대상이 됩니다. 지난해 미투 운동의 중심에 있던 서지현 검사의 사례는 우리 사회에서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직업 중 하나인 검사 역시 성적 폭력과 차별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하물며 비정규직에 종사하거나 장애인, 성적 소수자, 아르바이트생, 학생 같은 을의 지위에 있는 이들이 얼마나 심각한 무시와 차별, 배제의 대상이 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이론이 있을 수 없습니다.
갑질 부정의의 해법은 ‘인정’
김혜진 노동운동가는 저서 [비정규사회]에서 한국 사회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단지 분배의 차원뿐 아니라 바로 인정의 차원에서도 심각한 불의의 대상이 되어 왔음을 잘 보여줍니다. ‘비정규직 사회’가 아니라 ‘비정규 사회’입니다. 전자가 사회경제적 관점에 기반을 둔다면, 후자는 인간의 실존 전체, 따라서 사회 전체의 성격에 대한 질문에 기반을 둔다는 점이 다릅니다.
“비정규직은 고용 형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고용 형태로 말미암아 삶이 불안정해지고 희망을 잃은 채 불안에 떨며 노동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정규직이 확대되면서 노동자들은 권리를 빼앗긴 이등 국민이 되고 있다.”(김혜진)
이 책에는 비정규직과 정규직 노동자의 차이를 보여주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습니다.
“은행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했을 때, 정규직으로 전환된 사람들에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아이를 한 명 더 낳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이유를 아십니까. 비정규직일 때는 출산휴가를 쓰기도 어렵고 직장 보육 시설이나 탁아 시설을 사용할 수도 없을뿐더러 미래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아이를 더 낳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정규직 일자리를 얻으면서 이런 여건들이 갖춰지자 아이를 더 낳아 키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정상적인 삶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런 모습일 겁니다. 직장을 갖고 가정을 꾸려 아이를 낳고 키워서 훌륭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만든 뒤, 적절한 시점에 은퇴해 여생을 누리다가 삶을 마감하는 것. 그런데 비정규 사회는 우리가 보통 정상적인 삶이라고 부르는 이러한 삶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비정규 체제 안에 있는 우리 모두가 피해자들이다”라는 저자의 말은 그야말로 사태의 핵심을 찌르는 주장이라 할 것입니다. 비정규 사회는 단순히 비정규직 노동자들만이 아니라 정규직 노동자들을 포함한 사회 구성원들 대다수가 보통 정상적인 삶이라고 부르는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어려운 사회, 실로 그것을 거의 불가능에 가깝게 만드는 사회인 것입니다. 특히 고령화 사회를 지나 초고령화 사회로 접어들고 있지만 OECD 회원국 가운데 노인 빈곤율이 가장 높은 우리 사회에서 이는 더욱 절박하게 체감되는 문제일 수밖에 없습니다.
비정규 사회에선 모두가 정상적 삶 어려워
▎지난 1월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본청 앞에서 열린 선거연령 하향을 위한 정당·시민사회 공동 결의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손팻말을 들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 |
따라서 비정규직이 우리 사회에서 점점 늘어가고 실로 보편적인 고용 형태로 바뀌어가는 것은 단순히 좁은 의미의 일자리 문제, 또는 사회경제적 문제에 국한된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의 삶에 있어서 불안정성과 관련된 문제인 동시에 국민 내에서 구조적인 차별을 제도화하는 문제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인정이라는 개념 또는 내적 배제라는 개념은 문화적·일상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무시와 차별, 배제의 문제를 사고하기 위해 필수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적 배제라는 말은 우리 사회의 어떤 사람들의 경우 사회 바깥으로 드러나지는 않으면서, 그 내부에서 차별과 무시, 혐오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대한민국 국민이기는 하지만 정규직 노동자에 비해 열등한 2등 국민으로서 내적인 배제의 대상이 되며, 여성들은 차별과 무시 또는 각종 성폭력의 대상으로 존재해왔다는 점에서 역시 내적인 배제의 대상이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장애인, 외국인 노동자, 탈북민(새터민), 다문화가정 자녀들, 일부 지방 사람들 역시 이러한 의미에서 내적 배제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인정 또는 내적 배제의 문제는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문제와 구별되는 또 다른 정의의 쟁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치적 행위의 주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정체성(identity)의 문제도 중요합니다. 특히 개인 혹은 집단의 대표성, 즉 영어로 리프리젠테이션(representation)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도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정의론적 관점에서 논한 분배와 인정의 문제는 누가 누구에게 분배할 것인지, 누가 누구를 인정할 것인지 등 당사자들의 범위가 지정돼 있습니다. 이처럼 이미 정해진 범위 내에서 불평등과 인정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그 범위 바깥에 놓인 이들에 대한 부정의의 문제를 간과하거나 배제할 위험이 있습니다. 정의의 문제를 설정하는 방식 자체가 또 다른 부정의의 원천이 될 수 있습니다. 풀어서 얘기하자만 이런 말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 사회에서 불평등의 문제가 제기되면 그것은 당연히 우리나라 국민에 관한 문제로 국한하기 쉽습니다. 외국인 노동자는 논외가 되기 십상이지요. 또 지난해 뜨겁게 전개된 미투 운동에서도 그 당사자들은 한국 여성들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있는 외국인 여성들 또는 이주 여성들이 한국 여성들에 비해 성적 폭력 및 차별과 무시에서 더 자유롭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언어 사용 능력이 뒤떨어지고 고용 안정성이 취약하며 사회적 자본이 부족한 외국인 여성이나 이주 여성들이 훨씬 더 많은 폭력과 차별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더 개연적입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정의의 몫’을 주장하는 자는 누구인가
▎지난 1월 서지현 검사가 인사보복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구속 된 안태근 전 검사장과 관련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 |
우리 사회에서 ‘정의의 몫’에 대한 주장은 늘 (합법적)자격이 있는 우리 국민에게 한정되어 있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세계는 지난 30여 년간 거센 세계화 물결을 거쳤습니다. 이 과정에서 근대 세계 정치 영역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였던 국민국가의 질서가 동요하고 그 정당성이 문제가 됨에 따라 어떤 집단에 대한 소속의 문제, 더 나아가서 어떤 집단 내부에서 정체성의 형성과 재생산 및 변형의 문제는 정의 문제의 중요한 요소로 떠올랐습니다. [지구화 시대의 정의]라는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의 저작은 바로 이런 문제에 천착해 정의의 문제에 강한 의문을 제기합니다.
이제 영어로 리프리젠테이션(representation), 정치학에서 대개 ‘대표’나 ‘대의 민주주의’로 번역돼 사용되고, 철학에서는 주로 ‘표상’으로, 미학에서는 ‘재현’으로 사용되는 이 개념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중요한 것은 리프리젠테이션 개념이 지닌 이러한 다양한 의미를 따로따로 분리해서 이해하는 게 아니라 그것들을 결합해서 이해하고 활용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현대 철학의 흐름, 특히 포스트구조주의의 논점을 이해하는 게 필요합니다. 자크 데리다의 ‘탈구축 이론’에 따르면, 재현이라는 작용에 선행해 현존하는 사물 그 자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현존하는 사물은 재현 작용에 의해 성립하며, 그러한 작용에 의존합니다.
그런데 재현 이전에 사물이 미리 현존한다는 생각, 따라서 기원이 존재한다는 생각은 서양 형이상학의 고유한 특성 중 하나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과거의 서양 형이상학은 ‘현존의 형이상학’(métaphysique de la presence)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존의 형이상학은 기원 그 자체, 현존 그 자체란 존재하지 않으며, 기원 및 현존은 재현 작용에 의거해 사후에 성립한다는 사실을 은폐하는 것을 자신의 기능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 의하면 재현으로서의 리프리젠테이션 이전에 그 자체로 성립하는, 따라서 자연적이거나 불변적인 계급적 본질이나 성적 본질 또는 인종적이거나 민족적·국민적 본질이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전형적인 현존의 형이상학이죠. 아울러 현존의 형이상학은 단순히 사실에 대한 그릇된 표상에 머물지 않고, 실천적인 장애로 기능합니다. 재현에 앞서 현존하는 사물의 본질, 계급적 본질이나 성적 본질(그것이 남성적 본질이든 여성적 본질이든 간에), 인종적이거나 민족적·국민적 정체성을 강조하는 것은, 그것이 본질적이면 본질적일수록 자기를 중심화하고 심지어 절대화하며 다른 본질이나 정체성을 하위의 것으로 포섭하고 종속시키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그것이 순수한 본질을 강조하는 만큼, 계급적 관계이든 성적 관계이든 또는 인종적이거나 국민적 관계이든 간에 그 내부에 있는 이질적인 요소들을 억압하거나 배제하려고 합니다. 따라서 이는 용어모순적이게도 배제적 민주주의를 진정한 민주주의로 간주하는 도착적인 결과를 낳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종의 본질적인 차이와 우열을 주장하는 인종주의나 민족들 간의 본질적인 차이를 강조하는 민족주의, 또는 남성과 여성의 본질적인 차이와 우열을 내세우는 성차별주의 등이 바로 현존의 형이상학의 실천적 결과들입니다.
계급적·성적·인종적 ‘본질’이란 없어
▎지난해 서울 종로구 보신각에서 열린 메이데이(근로자의 날) 결의대회에 참석한 외국인 노동자. / 사진:연합뉴스 | |
이런 점에서 우리는 자크 데리다 류(類)의 사고의 방식, 즉 재현 작용 이전에 선행하는 순수한 본질은 존재하지 않으며, 재현 작용 또는 재-현 내지 재-현시화(re-presentation) 작용이야말로 실재와 정체성을 생산하고 재생산하고 변용하는 틀 짜기의 작용이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정치적 용어인 대표로서의 리프리젠테이션의 문제도 재고찰해 볼 수 있습니다. 지난 20여 년간 특히 영미 정치학계를 중심으로 대표의 문제에 관한 새로운 탐구가 진행돼 왔습니다. 논자에 따라 ‘대표론적 전회’(representative turn)라고 하거나 ‘구성주의적 전회’(constructivist turn)라고 하는, 이러한 재해석 작업의 요점은 정치적 대표에 관한 표준적 설명을 해체하는 데 있습니다.
이들에 따르면 대표 내지 대의라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통상적인 생각이 가정하듯(또한 demokratia라는 민주주의의 어원이 말해주듯) 인민 내지 국민이 직접 참여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이므로, 민주주의를 원래의 민주주의와 다른 것으로 변질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대표로서의 리프리젠테이션은 인민 내지 국민이 직접 참여하는 대신 그 대표자들이 간접적으로 수행하는 민주주의로, 따라서 순도가 덜할뿐더러 때로는 민의를 왜곡하거나 변질하고 소수의 권력자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대표는 ‘민주주의 본질’로 간주돼야 하는 어떤 것입니다.
이는 우선 대표라는 것이, (1) 이미 그 자체로 존재하는 국민 내지 유권자가 (2) 역시 그 자체가 이미 보유하고 있는 공통의 이해관계 내지 의지를 (3) 그 대행자로서의 대표자가 말 그대로 대표/재현하는 것, 곧 가능한 한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대표 이전에는 광범위하게 흩어져 있는 개인들과 집단들이 ‘자신들의 공통의 의지를 거의 주장하지 못하기’ 때문에, 따라서 실제로는 정치적 주체 내지 행위자들로 성립할 수 없기 때문에, 이들이 자신들의 공통의 의지를 갖고 행위하기 위해서는 ‘대표 제도와 권위 부여 절차’가 필수적이라고 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 대표는 유권자 내지 국민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가로막거나 제한하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그러한 참여의 필수적인 조건이 됩니다. “대표의 반대말은 참여가 아니라 배제”라는 데이비드 플롯케(David Plotke)의 말은 적절한 표현입니다. 가령 20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은 대표될 수 없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는 부재하는 존재자였으며, 자기 자신을 독립적인 존재로 재현할 수도 없었고 자신들의 이익을 주장할 수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는 없는 존재들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소수자·약소자의 정치적 권위 부여 절차 필요오늘날 한국에서 19세 미만의 시민들은 정치적으로 보면 그냥 부재하는 존재자들일 뿐입니다. 이는 그들이 자신을 대표할 수 있는, 따라서 자신들을 정치적 주체로 재-현할 수 있는 정치적 수단을 배제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어떤 개인들이나 집단들이 자신을 대표하지 못하고 재현하지 못할 때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갖지 못하게 됩니다. 이것은 비단 19세 미만의 시민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주노동자들이 그렇고 성적 소수자들이 그렇고 각종 약소자들, 곧 우리가 을이라고 부르는 이들이 바로 자신들을 제대로 대표하지도 재현하지 못하는 존재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자신들을 대표하지도 재현하지도 못할 때, 이들은 정의의 주체가 될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리프리젠테이션의 문제는 단순히 이미 주어져 있는 정치적 틀 안에서 누구를 자신의 지지자로 포섭할 것인가, 어떻게 적대적 정파 및 세력을 약화시키고 우리의 세력을 강화할 것인가, 따라서 결국 어떻게 집권당이 되고 대통령이 될 것인가의 문제로 국한돼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누가 과연 대표될 만한 존재자인가, 누가 대표 가능한 이들의 범주에 속하고 대표 불가능한, 또는 대표되지 않아도 무방한 이들의 범주에 속하는가, 그러한 분할은 어떤 기준에 따라 작동하며 그것은 계급적 관계 내지 젠더 관계 또는 인종적이거나 국민적 관계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또한 그것을 어떻게 전환할 수 있는가의 문제와 관련돼 있습니다.
사실 오늘날 정의론을 둘러싼 논란은 대부분의 전자의 두 가지 쟁점의 과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누가 정의 실현의 대상에 포함되느냐의 문제인 리프리젠테이션도 또 다른 정의의 쟁점으로 반드시 고찰돼야 합니다.
[박스기사] 분배·인정·정의 구현의 장애물들 - 계급 문제보다 갑을 관계 해소가 더 어려워최근 우리 사회에 광범위한 유사-사회구조적 문제로 떠오른 ‘갑을문화’의 비민주성에 대한 성찰로 출발하여 현대철학의 관점을 빌어 이를 극복하기 위한 해법으로 제시된 분배·인정·리프리젠테이션 등의 대안은 ‘우리사회정의(우사정)’ 멤버 모두의 큰 공감을 받았다. 여기에 우사정은 우리 사회에서 이 세 가지 정의를 구현하는 데 방해가 되는 요소들, 혹은 이를 구현하기 위해 더 고려해야 할 사안들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견들을 첨언했다.
- 분배의 정의는 쉽게 말할 수 있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서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지 생각해야 한다. 우리 사회는 왜 분배의 정의에서 퇴보했는가. 분배는 경기가 순행할 때, 성장 중일 때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분배를 통해 얻을 이익이 많을 때나 가능한 구조라는 건 이미 드러난 진실이다. 불경기가 계속되고 불안감이 증폭되는 상황에선 누구나 나누거나 베풀기보다 더 가지려고 한다. 부자 혹은 권력자들은 더 가지려고 하면 더 가질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이들에게 쏠리는 것이다. 불경기 시대의 분배문제는 가진 자의 선의에 기대해서는 안 된다. 이젠 분배가 아니라 ‘의무’에 대해 말해야 할 때가 아닐까.
- 단일민족에 대한 자부심은 나와 다른 이들에 대한 혐오감과 다양성에 대한 거부를 정당화하는 기제로 작동하는 측면이 있다. 우리 사회는 통념적으로 정상으로 규정된, 즉 기득권자의 범위 안에 들지 않는 사람들의 다름을 거부하고 비난하는 데 익숙하다. 다양성 자체를 을로 규정한다는 것이다. 다원성과 차이를 포용하는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 우리들 대부분은 을의 지위에 있다. 그런데도 모두 갑의 관점에서 세상을 재단하는 모순이 일어난다. 왜 공동체는 이런 부조리와 모순을 타파하지 못하는 것일까. 이는 욕망과 현실의 괴리 때문일 것이다. 이미 갑이 더 많이 갖는다는 오래된 학습 경험을 통해서 스스로 을의 지위에서 을의 몫을 주장하기보다 갑이 되고자 하는 무한경쟁이 벌어지며 갑을 구조의 복잡성을 만드는 것이다. 갑과 을은 계급처럼 독립적 주체로 인식하기도 힘들고 상황적이고 가변적인 것이다 보니 을들 사이에서도 갑을을 형성하고, 이에 따라 이해관계에 얽힌 을끼리의 충돌과 갈등으로 달려가는 경우도 많다. 전체 구도에선 모두 똑같은 차별과 무시의 당사자이면서도 자신들 내부적으로 첨예하게 갑을 구조를 만들어 서로 균열과 갈등을 일으키기에 동질화되기도 어렵고 공동체 형성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계급 문제보다 갑을 관계를 해결하기 어려운 건 이런 구조 때문인 것 같다.
※ 양선희 대기자/중앙콘텐트랩 - 중앙일보 온라인편집국장과 논설위원을 역임했으며, 사회적·경제적 소외와 불평등 문제를 직설화법으로 다루는 칼럼으로 유명하다. 문예지를 통해 등단한 소설가이며, 해박한 중국 역사와 고전 지식을 바탕으로 [여류(余流)삼국지(메디치미디어)][적우(敵友):한비자와 진시황(나남)]등 중국 역사소설을 썼다. 서울대에서 경제교육학 전공으로 교육학박사학위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