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월 중순경 언론기사는 퇴근길에 석궁으로 쏜 화살을 복부에 맞은 모 판사 얘기로 도배질되었다. 재임용에 탈락했다가 교수지위확인소송을 제기한 김명호 전직교수가 패소하자 담당재판장이던 박홍우 당시 고등법원 부장판사를 찾아가 이른바 ‘석궁테러’를 가했다는 얘기였다. 전국의 법원장들은 이를 ‘사법테러’라 규정하고 강력대응을 선포하였지만, 위치로나 직업으로나 가까이 있던 나로서도 사건의 실상은 좀체 알기 어려웠다. 그리고 점차 시간이 주는 망각의 틀에 이 사건은 내 기억에서 서서히 벗어났다.
5년이 지난 지금 이 사건은 정지영 감독의 <부러진 화살>로 나를 다시 찾아왔다. 중상을 당했다는 그 고법 부장판사는 서울 근교의 법원장으로 승진했고, 징역 4년의 실형을 선고받은 김 교수도 지난해 1월에 만기출소를 하였으니, 겉으로 드러난 상처는 호들갑 떨던 언론기사만큼이나 사라진 것일까?
수학과 교수 김경호(안성기)는 대입 문제의 오류를 지적했다가 학교와 동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다 교수재임용 심사에서 탈락한다. 미국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던 김 교수는 재임용탈락의 근거가 된 종전 사립학교법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자 귀국하여 교수지위확인소송을 제기한다. 결과는 조작된 증거와 부실한 증거조사 끝에 내려진 패소판결. 김 교수는 재판을 담당한 박봉주(김응수) 부장판사를 찾아가 위해를 가하려 하고 뒤엉켜 싸우던 과정에서 석궁으로 쏜 화살에 맞아 부상을 당했다는 이유로 김 교수는 구속기소되어 형사법정에 서게 된다.
석궁으로 위협하기는 했지만 화살을 쏜 적이 없다며 항변하며, 벽에 맞아 부러진 화살은 어디 있는지, 혈흔이 박 판사의 것이 맞는지, 속옷과 겉옷에는 피가 묻었지만 중간에 껴입은 옷에는 왜 피가 묻지 않았는지, 사람 몸에 쏜 석궁이 깊이 15cm까지 들어가지만, 박 판사의 상처 깊이는 왜 1cm도 안되는지 되물으며 증거조사를 신청하지만, 1심 재판부도, 항소심 재판부도 이를 외면한다.
적당하게 변론하려는 변호사를 즉석에서 해임하고 독학으로 ‘나홀로 소송’을 전개하지만, 역부족이다. 그런 그에게 스스로를 ‘노동자 피 빨아 먹는 변호사’라고 말하는 박준(박원상) 변호사가 합류한다. 그렇다고 재판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보수꼴통 판사로 등장하는 신재열 판사는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김 교수와 박 변호사의 각종 노력을 번번이 가로막는다. ‘이미 검찰에서 조사 다 했잖아요’라며. 그렇게 김 교수의 재판은 맥없이 끝난다. ‘항소를 기각한다’는 짧은 결론만 남기고.
석궁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금방 눈치 채듯 이 영화는 영화라기보다는 다큐멘터리에 가깝다. 영화 속 김경호 교수는 실제 사건 주인공인 김명호 교수이고, 박준 변호사는 창원지역에서 노동전문 변호사로 잘 알려진 박훈 변호사이며, 테러를 당했다는 피해자 박봉주 판사는 당시 박홍우 고법 부장판사이다. 이 정도면 이미 감독은 상상이 아니라 사실에, 허구가 아니라 진실에 의중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항소심 재판부 신재열(문성근 분) 부장판사의 이름도 실제 인물 이름에 가까운 것이라면 더할 나위가 없다.
현실의 김 교수가 영화에서처럼 말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영화 속 김 교수는 구치소로 접견하러 온 박 변호사에게 “법은 아름답다. 하지만 법률가의 지배는 아름답지 않다”고 말한다. 심지어 김 교수는 “법엔 빈틈이 없다. 법은 수학처럼 딱 딱 들어맞는 예술이다.”고 말한다. 이 영화 속 김 교수의 다른 모든 대사에 공감하면서도 나는 정작 이 대사에는 공감할 수 없었다.
법률가의 지배는 그렇다 치더라도 법도 아름답다고? 법에 빈틈이 없다고? 그렇지 않다. 법은 이 사회 탐욕과 오욕과 피와 눈물과 힘겨루기가 빚어낸 짬뽕 아닌가. ‘정의’라는 이름을 걸고, ‘공평’이라는 분을 바르고. 그래서 법률가의 지배는 추하되 법은 아름답다는 얘기는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처럼 곤혹스럽다. 더구나 법은 엉성하기 짝이 없는 허술한 그물망과 같다. 숭숭 구멍이 뚫려있지 않다면 론스타가 어떻게 몇 조를 챙겨 ‘먹튀’를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이 영화가 법을 얘기하는 영화는 아니다. 법을 다루는 법률가, 더 구체적으로는 법을 해석하고 집행하는 사법부를 다룬 영화다. 그 사법부의 오만과 편견과 아집과 집착을 다룬 영화다. 석궁 사건이 발생한 순간 재판의 결론은 정해졌으며, 남은 것은 어떻게 해서든 별 탈(?) 없이 재판절차를 마무리하는 것이다.
그게 사법부의 수장들이 내심 합의한 약속일 것이다. 항소심 재판장이던 이태우(이경영 분) 판사는 고뇌하다 사직하는 사람이지만, 신재열 판사는 이를 꿋꿋하게 수행하는 우리 시대 끝장 판사의 전형이다. 그런 사법부 아래서 깐깐하고 원칙에 충실한 자칭 ‘합리적 보수’의 김 교수가 설 자리는 없다. 명색이 명문 사립대의 교수였던 사람조차 이럴진대, 자신의 생각을 조리 있게 설명할 능력이나 재주가 없는 사람이나, 제대로 된 변호사의 도움을 받을 만큼 재력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저 요행과 은전을 바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직업으로 법정을 들락거리면서 나 스스로도 적법절차와 진실발견이라는 대명제를 무디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어느 샌가 영화의 흐름과 앞으로 나올 일들이 이미 눈에 보이기 시작했고, 분노와 절망의 공감은 서서히 떨어졌다. 그 대신 한 때 잘 나가던 김 교수가 이런 운명에 빠지게 된 배경이 더 눈에 들어왔다. 사실 이 영화에서 다루진 않았지만, 김 교수의 운명은 교수들을 마음대로 통제하고자 하는 사립대학의 지배욕과 이를 편들어왔던 사법부의 판결들에 의해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전두환 군사정부의 목숨이 간당간당하던 1987년 6·10 민주대항쟁을 하루 앞둔 날, 대법원은 20여 년간 전국 400여 명의 교수를 해직으로 이끈 악명 높은 판결을 내린다. 대구 계명기독대학의 한 교수가 임용기간 만료 후 재임용을 거부당하자 소송을 거는데, 대법원은 교원의 재임용은 재단의 자유재량행위이고, 사립학교법상 임용기간이 만료되면 특별한 절차를 거치지 않더라도 당연퇴직된다고 판결을 내린다. 그 이후 이 판결은 모든 사립대학 교수들을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하는 사슬이 되고, 때로는 수백 명의 목을 자르는 망나니의 칼이 되었다.
그런데 2003년 헌법재판소는 재임용과 관련하여 객관적인 기준의 재임용 거부 사유, 교원의 진술 기회, 재임용 거부 사전 통지, 불복절차 등에 관한 보완규정을 두지 않은 것 사립학교법이 헌법 제31조 제6항을 위반하였다며 헌법불합치결정을 선고하였고, 국회는 헌재의 결정취지를 반영하여 사립학교법을 개정한다. 영화 속 김 교수가 뉴저지에서 머물다 재임용의 희망을 안고 귀국하기로 한 것도 중간에 이런 법 개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법률이 개정되자 해직되었던 교수 한 명이 군산기독학원을 상대로 교원재임용에서 자신을 제외한 결정이 무효라며 소송을 걸지만, 2006년 3월 9일 대법원은 사립학교법의 개정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사정이 없는 이상 임용기간이 만료된 사립학교 교원은 임용기간 만료로 대학교원 신분을 상실한다”고 판결한다. 이 대법원 판결은 김 교수가 제기한 교수지위확인소송의 판결에 그대로 투영된다. 영화 속 박봉주 판사를 통해. 그 대법원 판결의 주심 대법관은 지금 대법원장이 되었고, 현실 속 박홍우 판사는 서울 근교의 법원장이 되어 있다. 물론 지난 연말 대법원이 선고한 정봉주 전 의원의 공직선거법 위반사건 판결의 항소심 재판장도 박홍우 판사였다. 세상 좁지 않은가? 그리고 세상은 이렇게 운명 지어지지 않는가?
오늘도 서초동 법원 앞에는 법원의 판결을 비판하는 문구를 적은 팻말을 목에 걸친 1인 시위자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제는 ‘그 판사’가 문제가 아님을 알 때다. 법원을 신성의 영역에 두고 있을 이유도 없다. 법원 역시 시민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시민들이 통제하고, 시민들이 선임하고, 시민들이 감시하며, 시민들이 법원의 큰 구조를 짤 때다. 민주사회에서 민주적 통제를 받지 않는 예외는 있을 수 없다.
대법원장은 2일 시무식에서 법원에 대한 원색적 비난에 단호히 대처해야 한다고 밝혔다 한다. 김명호 교수의 소위 석궁 사건이 벌어지자 판결을 앞두고 법치주의에 대한 도전이자 테러라며 엄벌하겠다던 전국 법원장회의의 공표가 오버랩되는 것은 내가 신경과민인가, 아니면 역사의 반복인가? 이든 저든 시민들도 이제는 단호히 대처해야 할 것 같다. 또 다른 사법피해자가 내가 안 되리라는 보장이 없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선출되지 않은 소수의 엘리트 사법부가 결정하는 나의 운명에서 벗어날 때다. 운명을 바꿀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