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난도 교수의 '트렌드 노트'] 이젠 페미닌테크<여성 지향적 기술>의 시대 산업계 패러다임을 바꿔라

  •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생활과학연구소 소비트렌드분석센터장

입력 : 2009.06.06 03:30

사회·문화계 전반에 온통 '엄마 신드롬'여성시장 마케팅 강화라는 대증적 대응 넘어

인기 드라마 '꽃보다 남자'에서 대재벌 '신화 그룹'을 이끌고 간 것은 아빠가 아니라 엄마였다. 지금 시청률 1위를 달리는 아침 드라마 '하얀 거짓말'에서도 '드림인 백화점'의 회장님은 엄마다. '엄마는 뿔났다'나 '내조의 여왕'처럼 화제를 불러일으킨 드라마들도 하나같이 엄마의 활약을 그린 것이었다. 심지어는 전통적으로 남성적인 장르였던 사극조차 '천추태후'나 '선덕여왕' 같은 여걸들을 주인공으로 모시고 있다. 그렇다. 지금 엄마는 확실한 대세다.

불황의 늪에 빠진 출판계를 구한 것도 엄마였다. 신경숙 작가의 〈엄마를 부탁해〉가 80만을 넘어 100만부의 고지를 향해 약진하는 가운데 〈사랑하는 나의 엄마에게〉와 〈어머니 그리고 엄마〉 등이 엄마 열풍에 불을 지피고 있다. 연극계도 예외가 아니다. 손숙의 오랜 히트작인 '어머니'가 다시 무대에 오르고, '친정엄마와 2박3일', '잘 자요 엄마',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 등이 성황리에 공연됐다.

화룡점정(畵龍點睛)은 봉준호 감독이 찍은 것 같다. 영화 '마더'는 개봉 첫날에만 22만명을 동원했다. 올해 최고의 오프닝 흥행 기록이다.

발 빠른 마케터들이 이런 트렌드를 놓칠 리 없다. 엄마를 내세운 브랜드와 신상품이 대거 출시되고, 엄마를 주인공으로 한 광고가 지천이다. 불경기에 가족을 강조하는 것은 자주 볼 수 있는 현상이지만, 10여년 전 IMF 경제위기 때 불었던 '아버지 열풍'과 비교하면 무척 흥미로운 변화다.

'엄마 신드롬'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지속되는 불황 속에서 모성(母性)으로 회귀해 안정을 찾으려는 대중의 열망을 반영했다는 설명이 일반적이다. 보다 전문적인 분석으로는 전방위적으로 가족 해체와 탈가족화가 가속화되는 가운데 사회·경제적 위기를 다시 엄마로 상징되는 가족에 의존해 해결하려는 것이라는 견해(서울대 사회학과 장경섭 교수)나 가계의 경제권과 소비 의사 결정의 무게중심이 엄마 쪽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제일기획 커뮤니케이션연구소 박재항 소장)도 설득력 있다. 여기에서는 소비 트렌드의 측면에서 엄마 신드롬이 갖는 의미에 대해 살펴보도록 한다.
필자가 운영하는 서울대학교 생활과학연구소 소비트렌드분석센터는 작년 말 출간된 〈트렌드 코리아 2009〉라는 책에서 'Alpha-Mom, Beta-Dad(엄마는 강해지고 아빠는 약해진다는 의미)'라는 키워드로 엄마 신드롬을 예측한 바 있다. 엄마의 역할은 지속적으로 커지고 아빠의 역할은 상대적으로 위축되는 가운데 가정 내 부부 파트너십과 역할 구분이 점차 유연해질 것이라는 예상이었다.

하나의 트렌드 키워드를 예측하기 위해서는 ▲사회·경제·인구학적 토대의 변화 추이 ▲공동체 구성원들의 가치관 변화 추이 ▲문화적 징후들(symptoms)의 확산이라는 세 가지 요소를 우선적으로 검토한다. 엄마 신드롬의 경우도 이 세 요소가 고루 작용한 결과다.

먼저 여성의 가처분소득이 증가하고 가정 내 의사 결정 권한이 커지는 방향으로 사회·경제·인구학적 토대가 모두 변했다. 특히 여성의 가구주 비율, 경제 참여율, 교육 수준, 초혼 연령, 출산 연령의 변화가 두드러졌다.

이러한 변화는 가치관도 바꾼다. 개인으로서의 주체적 자아실현을 우선시하는 여성의 의식 변화가 두드러지는 가운데 알파걸(alpha girl·학업과 운동, 리더십 등 다방면에서 남성을 능가하는 유능한 여성), 골드미스(gold Miss·결혼에 연연하지 않는 고소득 전문직의 당당한 미혼여성), CEO 맘(CEO처럼 가정을 이끌고 가는 능력 있는 고학력의 전업주부) 등 각 분야에서 여성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이러한 변화는 다양한 문화적 징후로 나타난다. 줌마렐라(아줌마와 신데렐라를 결합한 용어)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질 정도로 경제적인 능력을 갖추고 적극적으로 사회활동에 참여하며 자기 자신을 위한 투자를 아끼지 않는 기혼여성이 조명받았다. 지상파와 케이블을 가리지 않고 TV에서는 가상 결혼·육아·동거·스와핑(배우자 교환) 등 실험적 가족관계를 소재로 한 리얼리티 쇼가 넘쳐나면서 전통적인 성 역할과 가족관계에 대한 고정관념이 급속히 무너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반면 아버지는 설 자리를 잃었다. 퇴조하는 남성적 가치는 집안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던 것이다. 터프한 마초남들이 꽃미남에 밀려 퇴장한 지 오래다. 이제는 부드러운 순정남과 연약한 연하남이 각광받는다. 그 극단에 '초식남(草食男)'이 있다. 초식남은 일본에서 주목받는다는 새 종족(種族)이다. 연애나 섹스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쇼핑이나 방 꾸미기에만 몰두하는, 육식동물의 특성인 적극성·공격성이 거세된 채 '풀만 뜯어 먹는' 남자들을 일컫는다.

결국 트렌드로서의 엄마 신드롬은 주류화하고 있는 여성적 가치의 원형(元型)이라고 할 수 있는 '엄마'에 대한 문화상품의 소비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결과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가 산업계에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엄마의 귀환을 불황에 따른 일시적 현상으로 보아 넘겨서는 안 된다. 여성 시장이 확대됐으니 관련 마케팅을 강화하자는 대증적인 대응을 넘어서야 한다. 패러다임의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여성적 가치에 대한 본원적인 이해에 바탕을 둔 페미닌테크(feminine-tech·여성 지향적 기술)와 패밀리테크(family-tech·가족 지향적인 기술)의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 문제를 해결하고 기능을 제공하는 남성형의 상품이 아니라 교감하고 위로하고 신뢰할 수 있는 여성형의 상품이 살아남을 수 있다.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 갈 여성적 소비 가치를 재인식해야 한다. 오래전 괴테조차 일갈하지 않았던가?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끌어 올린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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