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기획 | 그랜드 CEO in KOREA(6)] M&A 너머 ‘글로벌 한화’ 꿈꾸는 김승연 회장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혁명적인 변화의 시기” 

29세에 기업 물려받아 사업 다각화 성장 전략 통해 재계 7위로 키워내
IMF 위기를 신용과 의리로 돌파… 그룹 후계구도 정리가 당면 과제


▎김승연 한화 회장(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이 지난해 12월 베트남 하노이 인근에 설립된 한화에어로스페이스 공장 준공식에 참석해 쯔엉 화 빙 수석부총리(앞줄 오른쪽)와 생산라인을 둘러보고 있다. / 사진 : 한화
김승연 한화 회장(67)은 2018년 12월 6일 베트남을 방문했다. 2011년 방문 이후 7년만이었다. 김 회장의 복심(腹心)으로 통하는 금춘수 부회장을 비롯해 신현우 한화 에어로스페이스 대표, 김 회장의 차남인 김동원 한화생명 상무가 동반했다. 베트남에서도 쯔엉 화빙 수석 부총리, 응우옌 반 빙 중앙경제위원회 위원장, 쭈 응옥 아잉 과학기술부 장관 등 300여 명의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항공기 엔진제조 계열사인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베트남 공장 준공식이 베트남 수도인 하노이 인근 화락 하이테크 단지에서 이날 열린 것이다. 김 회장은 “한화에어로스페이스 베트남 공장은 한화그룹이 글로벌 항공엔진 전문기업으로 도약하는데 핵심적 역할을 수행할 것”이라며 “이곳에서 실현될 첨단 제조기술이 베트남의 항공산업과 정밀기계 가공산업 발전에도 기여해 양국 간 깊은 신뢰와 동반성장의 밑거름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연설했다.

이날 행사는 4가지 관점에서 재계서열 7위 그룹인 한화의 미래 행보를 예측하는 단초가 된다. ▷김승연 회장의 경영 복귀 가능성 ▷한화의 글로벌 경영 ▷아시아나항공 인수 여부 ▷한화의 후계구도와 맞물린 지배구조 개편이 그것이다.

김승연 회장은 1952년 충남 천안에서 김종희 한화 창업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당시 한화의 명칭은 한국화약그룹이었다. 김 선대회장은 1981년 7월 돌연 타계했다. 당시 29살인 김승연 한국화약그룹 관리본부 본부장은 급작스럽게 회사의 운명을 짊어지게 됐다. 1981년 당시 한국화약그룹은 19개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매출액은 1조 1079억원, 총자산은 7548억원, 당기순이익 61억원이었다.

임직원 1만 1600여명의 회사를 물려받은 김 회장은 사업 다각화와 성장 위주 기업 경영전략을 통해 회사를 키워나갔다. 2015년 3월 [포브스]에 따르면 재계 2~3세의 승계 이후 자산 증가율에서 이건희 회장 재임기 삼성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37년 동안, 김 회장이 회사를 맡은 이래 2018년 말 기준 한화의 규모는 253배 확장됐다. 2019년 재계 서열에서는 GS를 제치고 7위까지 올라섰다. 이제 대한민국에서 한화보다 큰 기업은 삼성, 현대자동차, SK, LG, 롯데, 포스코뿐이다.

253배 성장의 역사


▎노태우 대통령 시절인 1991년 재계 총수들이 청와대에 모였다. 이들 중 현재까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이는 김승연 회장(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이 유일하다.
한화 성장 역사의 시작은 1982년 실행된 한양화학과 한국다우케미칼 인수전이었다. 당시 한양화학은 80억원, 한국다우케미칼은 430억원의 적자상태였다. 부실 위험이 큰 기업의 인수·합병(M&A) 추진에 대해 임원들은 강하게 반대했다. 게다가 석유화학 업종은 당시 세계적 불황에 빠진 상태였다. 일본마저도 석유화학의 미래 비전을 어둡게 보고 있었다.

그러나 김 회장은 이런 때일수록 알짜 석유화학 기업을 싸게 사들일 수 있는 기회라는 역발상으로 접근했다. 무엇보다 한양화학과 한국 다우케미칼이라는 회사 자체는 장기적으로 건실하다고 봤다. 특히 한국 다우케미칼은 미국 본사의 재무구조 조정 일환으로 처분이 이뤄지고 있었다. 단기실적에 따라 평가받는 전문경영인들은 당장의 430억원 적자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비해 오너 경영 체제인 한화는 중장기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김 회장은 석유화학의 장래가 어두운 것이 아니라 일시적 침체라고 판단하고 인수전에 뛰어들었다.

이렇게 한화는 석유화학 부문에 진출했다. 한양화학과 한국 다우케미칼을 합쳐 지금의 한화케미칼이 됐다. 1983년에는 경인에너지 지분을 인수했다. 이 회사는 한화에너지의 모체가 됐다. 김 회장의 첫 영역확장 시도는 적중했다. 1984년 그룹 매출은 2조 1500억원으로 증가했다. 당시 한양화학과 경인에너지가 매출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했다. 인수 시점에 매출 1620억원대였던 한양화학과 한국 다우케미칼은 한화케미칼로 바뀐 뛰 그룹의 주력사가 됐다. 2018년 시점에 연 매출 10조원 가까운 실적을 올리고 있다.

그룹은 생명체와 흡사하다. 성장하지 않는 한, 쇠퇴한다. 그렇다고 무한정 성장을 추구하다간 비대해진 몸집을 견뎌내질 못한다. 조직이 감당할 수 있는 최적의 성장점을 찾아내는 것이야말로 최고 경영자의 근본적 존재이유다.

그런 맥락에서 김승연 회장이 찾은 활로는 M&A였다. 바깥에서 일시적으로 저평가된 회사를 사들여서 기존 한화그룹 속에서 시너지를 내도록 자극을 가하는 방편이었다. 충청 지역 방산기업으로 출발한 한화는 1980년대 초 한화케미칼과 한화에너지를 통해 석유화학 부문으로 영역을 넓혔다.

이어 김 회장은 2002년 대한생명(현 한화생명) 인수라는 사운을 건 또 한 번의 모험을 감행했다. 당시 대한생명은 누적 적자가 2조3000억원에 달하던 회사였다. IMF 외환위기 여파로 공적자금을 받던 처지였다. 김 회장은 “대한생명 경영이 정상화될 때까지 무보수 근무”를 선언하며 배수진을 쳤다. 내부 동요를 차단하기 위해 직원 고용보장과 급여 및 복리후생을 유지시켰다. 한화생명은 한화의 품에 안긴지 6년만에 흑자 전환됐다. 총 자산이 100조원을 돌파했고, 2018년 영업이익은 6501억원에 달했다.

M&A가 부린 마법


▎김승연 한화 회장(오른쪽 둘째)은 1999년 금융감독위원회를 직접 방문해 대한생명 입찰제안서를 제출했다.
이후 김 회장의 눈은 전혀 다른 곳을 향했다. 2012년 독일 태양광업체인 큐셀을 인수한 것이다. 한화큐셀은 그룹의 미래 동력으로 주목받고 있다. 김 회장의 장남인 김동관 씨가 전무로 일하고 있다. 한화큐셀은 2015년 한화솔라원을 통합시켜 세계 1위 태양광 기업이 됐다. 한화는 2022년까지 22조원을 투자할 계획인데 이 중 9조원을 태양광 사업에 집중시킬 정도다.

그리고 2015년 김 회장은 인생의 ‘빅딜’을 단행했다. 대략 1조 9000억원을 투입해 삼성의 방산·화학 부문을 사들인 것이다. 그 결과, 삼성종합화학(현 한화종합화학), 삼성토탈(현 한화토탈), 삼성테크윈(현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삼성탈레스(현 한화시스템)가 하루아침에 한화로 이름이 바뀌었다. 상대적으로 삼성에서 홀대받던 이 회사들은 일약 한화에서 주력사로 떠올랐다. 실제 이 회사들의 자산가치가 상승한 덕분에 한화의 재계 순위는 7위(공정거래위원회가 발표한 자산총액 65조6000억원)까지 상승할 수 있었다. 이 빅딜 전 한화의 순위는 10위(2017년 기준 37조9000억원)였다.

한화토탈은 2017년 영업이익 1조5162억원을 기록했다. 지주자를 제외하면 사실상 영업이익 1조원 이상을 내는 유일한 계열사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최근 미국 항공기부품제조업체인 P&W와 1조9000억원 규모의 부품 공급계약을 따냈다. 그룹 지배구조에서도 한화 방산사업의 실질적 지주회사 역할을 맡고 있다.

M&A는 잘 되면 그룹의 덩치를 한방에 키우지만 잘못되면 회사 전체를 부실의 구렁텅이로 몰아갈 수 있다. 소위 말하는 ‘승자의 저주’다. 한화와 김 회장의 ‘천운’은 2008년 대우조선해양 인수전에서 발휘됐다. 당시 한화는 인수 가격으로 6조3000억원을 베팅했다. 당시는 조선업이 호황을 누리던 시절이었다. 한화는 인수 자금 마련을 위해 한화생명 지분을 팔 의향까지 내비칠 정도로 공세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게 우선협상 대상자로 선정됐고, 이행보증금 3150억원을 지불했다.

그러다 2009년 1월 대우조선해양 인수 포기로 선회했다. 2008년 세계를 덮친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한화의 자금 조달이 어려워진 것이었다. 대우조선해양 노조의 반발과 조선업의 침체 전환도 작용했다. 그러나 이행보증금의 반납 여부가 남았고, 대우조선해양의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과의 10년간의 법정 다툼 끝에 1260억원과 이자를 돌려받는 선에서 재판은 종결됐다. 결과적으로 이후 전개된 조선 업황과 대우조선해양의 상황을 고려해보면 M&A 불발은 한화에 전화위복이라 할만 했다. 비근한 예로 금호그룹은 대우건설 인수를 감당하지 못하고, 주력사인 아시아나항공마저 잃었다. 이런 현실을 감안할 때 M&A로 흥한 한화가 M&A 탓에 자칫 위태로워질 뻔했던 위기를 넘긴 셈이다.

성장 지향으로 그룹의 좌표를 설정한 한화의 최대 고비는 1997년 IMF 위기 때였다. ‘빚도 재산, 빚이 많을수록 기업은 죽지 않는다’는 한국적 기업경영의 통념이 무너진 시대였다. M&A를 통한 외형확장에 주력한 한화에는 직격탄이었다. 김 회장은 1998년 4월호 그룹 사보를 통해 메시지를 남겼다.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다 해보자고 호소합니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도 하면서 이 위기를 극복해 나갑시다. 죽을 각오를 하면 살아남고, 어설프게 살려고 하면 죽는다는 점을 진리로 받아들여 가슴에 새겨 나갑시다.”

“구조조정은 폐를 잘라내는 기분”


▎김승연 한화 회장(가운데)은 2012년 이라크 신도시 건설 현장을 방문해 현지 직원들을 격려했다. / 사진 : 한화
한화는 구조조정을 통한 내실화 추구로 국면 돌파를 시도했다. 경향신문을 계열 분리시켰고, 합작법인의 지분과 비주력 사업을 매각했다. 한화바스프우레탄, 한화NSK정밀, 한화GKN, SKF한화, 한화자동차부품, 한화기계의 베어링 부문 등이 이 시기에 팔렸다. 이를 통해 총 4500억원 이상을 조달했다. 이밖에 화학분야 비주력 사업부문을 해외에 매각해 3800억원 이상을 확보했다. 계열사가 보유한 토지와 상가 등, 부동산을 팔았다. 이때 확보한 1800억원의 자금으로 차입금을 상환했다. 정유 부문 등, 주력기업까지 넘겼다. 한화그룹 매출액의 35%를 차지했던 한화에너지와 에너지 프라자가 이때 넘어갔다. 그 대가로 2000억원을 받았다. 일부 계열사의 경영권을 포기했고, 일부 회사는 분할되기도 했다. 김 회장은 1998년 2월 은행권에 협조 융자를 신청하면서 자기 소유의 계열사 주식과 금융자산, 집까지 담보로 내놓았다. 1년 사이에 한화그룹 부채비율은 960%나 줄었다. 그룹 인력의 25%가 명예퇴직 형식으로 회사를 떠나야 했다. 6000명 이상의 숫자였다.

그렇게 경각의 고비를 넘긴 뒤, 김 회장은 1999년 5월 “뼈를 깎는 것이 아니라 마취도 하지 않은 채 갈비를 드러내고 폐를 잘라내는 기분이었다”고 당시의 고통스러운 심경을 떠올렸다. 그 1년 동안 김 회장의 체중은 8㎏이 줄었다.

흔히 ‘실업은 사회적 사형’이라고 규정한다. 그런데 한화에서는 다수의 명예퇴직자가 발생했음에도 분쟁이 없었다. 단 한 번의 파업도 없었다. 한화는 명예퇴직을 실시할 때, 오래 근무한 직원들 위주로 진행했다. 비교적 기준이 공정했기에 반발이나 동요가 적었다. 한화는 “구조조정을 반드시 성공시켜야 한다는 전 임직원들의 공감대와 헌신적 희생을 바탕으로 성공을 이뤄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당시 한화 직원들은 ‘회장사퇴 불가’라는 연판장을 돌릴 정도로 김 회장에게 힘을 실어줬다.

한화는 계열사 매각 및 양도 협상 시에도 종업원 고용승계 보장을 우선 협상과제로 뒀다. 회사는 고용안정에 주력했고, 직원들은 임금반납으로 고통분담에 동참했다. 이런 한화의 부채비율 축소 총력전의 결과, 97년 말 1200%에 달했던 부채비율은 99년 197%, 2000년 130%대로 낮아졌다. 결과적으로 내실경영을 할 수 있는 토대가 이때 마련됐다.

원래 한국화약이었던 한화는 1992년 10월 사명을 변경했다. 한화의 사훈은 소위 한화정신으로 통하는 ‘신용과 의리’였다. 현재의 사훈인 ‘도전, 헌신, 정도’도 신용과 의리의 재해석에 해당한다. 김 회장의 경영 철학 중 하나는 고객과의 의리다.

실제 한화는 계열사를 매각할 때, 직원들의 고용보장과 근로조건 및 복리후생의 승계를 협상조건으로 담는다. IMF 구조조정 당시 한화에너지가 현대정유에 팔렸을 때에도 이 조건을 관철시켰다. 2010년에 서울 프라자호텔이 리모델링에 들어가 문을 닫게 된 기간, 모든 직원들에게 유급휴가를 줬다. 2014년 한화건설 이라크 공사현장을 방문할 당시, ‘회를 먹고 싶다’는 현지 직원들의 바람을 듣자 광어회 600인분을 비행기로 공수시켰다.

미국 해군정보국 정보분석가로 일하다 국가기밀 유출 혐의로 미국 감옥에 수감된 로버트 김을 개인적으로 도운 일화도 뒤늦게 알려졌다. 2011년에는 천안함 승조원 유가족 일부를 한화그룹에 우선 채용했다. 2018년 10월, 한화 이글스야구단이 11년 만에 플레이오프를 치르게 되자 대전구장을 가득 메운 팬들을 위해 1만3000송이의 장미와 카드를 선물했다. 카드엔 “11년 동안 부진했던 성적에도 승패를 넘어 불 꽃응원을 보내준 이글스 팬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앞으로의 10년은 우리가 겪어온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더 혁명적인 변화의 시기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10년이 ‘무한기업’ 한화의 성패를 좌우할 수 있다는 절박함으로 ‘지금이 순간’을 임해야 합니다.” 김승연 회장은 2019년 신년사를 통해, 글로벌 사업 확대, 특급 인재확보, 준법 경영을 강조했다. 그룹의 영속성을 위해선 세계로 확장하는 것만이 유일한 활로라는 생각이다.

한화큐셀은 2018년 독일과 영국, 미국, 일본, 터키, 호주 등에서 태양광 모듈 시장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다. 한화큐셀의 강점은 기술력인데 세계적 인증기관인 DNV GL과 PVL이 공동 실시한 신뢰성 평가에서 4년 연속 ‘최우수 기업’으로 선정됐다. 유럽의 태양광 전문 리서치기관인 EuPD가 선정한 ‘유럽 최고 브랜드 모듈’로도 6년 연속 뽑혔다. 한화큐셀은 지난 2월부터 미국 조지아주에 태양광 모듈 공장의 상업 생산을 개시했다. 한화 이글 출신 류현진이 뛰고 있는 메이저리그 LA 다저스와의 공식 파트너 계약을 통해 마케팅 효과를 노리고 있다. 이를 통해 미국 주택용 태양광 수요 1위 지역인 캘리포니아 지역에서의 점유율 확대를 기대하고 있다.

“향후 10년 안에 한화 성패 결정 난다”


▎김승연 회장(왼쪽)은 2018년 10월 19일 가족들과 함께 한화가 11년 만에 가을야구를 치른 대전구장을 찾았다. 부인 서영민씨와 장남 김동관 한화큐셀 전무가 동반했다. / 사진:연합뉴스
수출형 기업인 한화토탈은 한화그룹 외화 획득의 1등 기업이다. 한화케미칼은 국내 최초로 PVC를 생산해 플라스틱 시대를 연 회사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항공엔진 부품업체 EDAC를 인수했다. 이를 통해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P&W, GE 등 글로벌 항공엔진 제조사들을 대상으로 수주를 확대하고, 제품 포트폴리오도 확장하게 됐다. 2018년 말부터 베트남에서 공장이 가동되고 있다.

한화는 베트남에 금융, 투자사업, 제조, 태양광, 항공사업까지 진출해 있다. 최근 미중 무역 갈등에 따른 불확실성이 증가하고, 보호주의 색채가 강화되는 환경에서 한국의 3위 수출국인 베트남의 가치가 더 올라가고 있다. 김 회장은 2018년 12월 베트남 시가총액 1위 기업인 빈글부의 팜 느엇브엉 회장을 만나 제조, 금융 분야에서의 협업관계 구축에 대해 논의했다. 지난 8월 한화자산운용은 빈 그룹에 4억 달러를 투자했다.

한화생명은 2009년 4월 국내 생명보험사 중 최초로 베트남으로 갔다. 10년이 흐른 현재 안정적인 조직 확보와 실적으로 연착륙에 성공했다. 한화생명은 법인장과 스태프 2명을 제외한 270명 관리자 전원을 베트남 현지 인력으로 채용했다. 그 결과 2009년 410억동에서 출발해 2018년 3794억 동(한화 180억원)으로 성장하고 있다. 점포 숫자도 2009년 5개에서 현재 107개로 늘었다. 직원은 276명, 설계사는 1만2275명에 달한다.

김승연 이후의 한화 후계구도는?

한화그룹은 지배구조가 복잡한 편이다. 금융사를 거느리고 있어서 금산분리 원칙에 걸려 지주사 전환도 쉽지 않다. 김승연 회장은 2014년 배임 혐의로 수사를 받았다. 그 여파로 한화그룹 7개 계열사의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났다. 회장직만 유지하고 있는 상태에서 2019년 2월 집행유예 기간이 만료됐지만 아직 경영일선에 복귀하지 않고 있다.

재계에서는 김 회장의 건강이 완전치 않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그렇기에 경영권 승계를 염두에 둔 지배구조 개편은 한화의 중대 이슈다. 김 회장의 장남인 김동관 한화큐셀 전무가 태양광·방산·화학 부문을 맡고, 차남 김동원 한화생명 상무가 금융계열사를 담당하는 시나리오다.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던 막내 김동선 씨는 2017년 이후 회사를 떠난 상태다. 해외에서 요식업 관련 창업을 준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동선 씨는 한화건설 팀장을 맡은 바 있다. 향후 건설·유통·호텔 쪽 계열사를 승계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부문의 상황은 썩 우호적이지 못하다. 한화가 적자를 면치 못하다 면세점 사업에서 철수했고, 해외 리조트 부문 매각설도 흘러나오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구체적으로 확정된 단계는 아니다.

이런 흐름에서 한화가 다시 M&A에 뛰어들 것인지가 2019년 들어서 끊임없이 회자되고 있다. 첫 번째 이슈는 롯데카드 인수전이었다. 차남 김동원 상무가 관여한 것으로 세간에 알려졌는데 지난 4월 최종적으로 입찰 불참으로 선회했다. 한화그룹은 확대해석을 경계했지만 시장에선 ‘한화가 롯데카드보다 아시아나항공 인수에 관심을 두고 실탄을 비축한 것 아닌가’라는 추측을 낳았다.

한화의 주력 계열사 중 하나인 방산업이 항공업과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업종인지라 이런 개연성이 나오는 것이다. 항공기 엔진 부품을 만드는 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있고, 호텔과 리조트 사업과 항공업을 연계할 여지도 있다.

이에 관해서도 한화그룹은 공식적으로는 인수 의향이 없음을 내비치고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지난 5월 말 “우리가 하고 있는 항공 제조업과 (항공업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시너지 효과가 크지 않을 것으로 판단돼 인수 계획이 전혀 없다”는 신현우 한화에어로스페이스 대표의 말을 전했다. 그러나 M&A의 속성상, 한화가 굳이 ‘관심있다’는 표시를 먼저 해서 아시아나항공의 가격을 올릴 필요는 전략적으로 없다는 해석도 나온다. 아시아나항공 인수에는 대략 2조원이 들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다. 한화는 이를 감당할 자금력이 있다.

그러나 항공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과연 아시아나항공이 그럴만한 가치가 있느냐’는 회의론도 나온다. “아시아나항공의 부실은 드러난 것 이상으로 깊다는 말이 있다”, “항공업은 부가가치가 생각보다 높지 않다”는 얘기들이다.

김승연 회장 체제 38년 동안 한화의 매출액은 54배, 당기 순이익은 514배 커졌다. 향후 한화는 2023년까지 22조원을 투자해 일자리 3만5000개를 만들 계획이다. 이 중 9조원을 태양광, 5조원을 화학, 4조원이 방산에 투입된다. 가장 잘하는 분야로 세계시장에서 겨루겠다는 의지다. M&A 여부와 지배구조 개편도 한화의 지속적 성장을 가를 요인이다.

- 김영준 월간중앙 기자 kim.youngjoon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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