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감독들이 탐냈던 ‘일류참모’ 정해성
입력 2017.07.07 16:05
'의리' '뚝심의 사나이'로 불린 정해성의 축구인생 스토리
정해성(59)은 축구판에서 ‘의리의 남자’ 혹은 ‘뚝심의 사나이’로 통한다.
지난 4일 울리 슈틸리케(63ㆍ독일) 전 감독의 뒤를 이어 신태용(47) 감독이 대표팀 사령탑에 선임되자 정해성은 바로 다음날 대한축구협회를 찾아 수석코치에서 사퇴했다. 지난 4월 벼랑 끝에 몰린 슈틸리케호의 수석코치로 긴급 투입된 지 불과 석 달 만이었다. 그는 내년 러시아 월드컵 본선까지 계약이 보장돼 있었다. 미적미적 자리를 지켜 잔여 연봉 중 적지 않은 돈을 보상금조로 받고 나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제자 뻘인 신 감독이 편한 마음으로 코치를 물색할 수 있도록 미련 없이 물러났다.
정해성은 1984년부터 1989년까지 럭키금성 선수로 뛰었다. 1986년 후반기부터 주장도 맡았다. 그 때는 프로 6년 차가 되면 재계약금 3,000만 원을 주는 제도가 있었다. 아파트 한 채 값이 4,000만 원 안팎이던 시절이다. 1989년을 마치고 번듯한 집 한 채 사려던 그의 꿈은 “1년 더 뛰면 뭐하나. 은퇴하고 지도자를 해라”는 구단의 권유로 물거품이 됐다. 지금 같으면 재계약금을 안 주려는 ‘꼼수’로 난리가 날 법 했지만 정해성은 군말 없이 받아들였다. 못내 미안했던 구단은 이듬 해 말 그에게 격려금으로 2,000만원을 내밀었다. 정 감독은 “돈은 됐으니 공부 좀 하게 해외 좀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1992년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8개월 연수를 하고 돌아온 뒤 2군 코치로 선수들을 조련해, 1군 코치로 승격했다. 1993년 고재욱(66) 감독이 경질되자 구단은 정해성에게 “감독대행을 맡아라”고 했다. 스승 자리를 꿰차고 앉을 그가 아니었다. 사표를 던지고 나왔다.
이후 정해성은 박성화(62) 유공 감독 아래서 스카우트를 했다. 1군 코치까지 지낸 그에게 스카우트는 성에 차지 않는 자리일 수 있었지만 묵묵히 ‘보석’을 찾아 전국을 누볐다. 당시 프로축구 포항 사무국 직원이었던 안기헌 현 대한축구협회 전무이사는 “다른 스카우트와 달리 부지런하고 꼼꼼하게 메모하며 선수를 살피던 모습이 선하다”고 했다. 안기헌 전무는 2013년 정몽규(55) 축구협회장이 취임해 첫 집행부를 꾸릴 때 “다른 맘 안 품고 우직하게 일만 할 사람”이라며 정해성을 경기위원장, 심판위원장 등 요직에 연이어 천거했다.
정해성은 고재욱과 박성화 외에도 국가대표와 프로에서 박종환(79), 이회택(71), 허정무(62) 등 한국 축구를 주름 잡은 인물들을 코치로서 보좌했다. 하나 같이 개성 강하고 대가 센 감독들도 ‘코치 정해성’은 신뢰했다. 그가 평소 감독에게 깍듯하게 예의를 지키면서도 진짜 필요할 때는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 참모였기 때문이다. 또한 정해성은 선수들로부터 신망이 컸다. 선수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코치인 동시에 가장 믿고 따르는 선생님이었다. 2002년 한ㆍ일 월드컵 4강 신화를 쓴 거스 히딩크(71ㆍ네덜란드) 감독도 선수 관리는 정해성 코치에게 일임했다.
정해성은 모시고 있던 감독이 물러나 지휘봉을 물려받을 기회가 몇 번 더 있었지만 그 때마다 거절했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후 허정무 감독이 연임을 고사한 뒤 축구협회가 제안한 국가대표 사령탑 자리도 마다했다. 정해성이 ‘의리’를 지킬 때마다 가장 힘든 건 그의 아내였다. 그의 아내는 정해성이 구단에서 나와 ‘백수’일 때 보험영업을 하며 살림을 책임진 적도 있다.
정해성은 분명 ‘일류감독’은 아니었다. 프로축구 제주(2004~07)와 전남(2010~12)을 맡아 뚜렷한 성과를 내진 못했다. 하지만 ‘일류참모’가 누구냐고 물으면 축구인 열에 아홉은 그를 꼽을 정도다. 지도자의 길로 들어선 1990년부터 27년 동안 공백기를 다 합쳐도 2년 남짓이다. 정해성은 “운이 좋았다. 늘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몸을 낮추지만 그건 단순한 ‘우연’이나 ‘행운’이 아니다. 책임감과 의리, 헌신으로 무장한 그를 감독들이 탐내고 놔주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윤태석 기자sporti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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