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방수·발열·투습.. 옷에 '앱'을 까는 '의학박사'
전현석 기자 입력 2017.12.30. 03:04 수정 2017.12.30. 03:45
섬유공학도, 특허만 86개
"원단은 앱 없는 스마트폰 같아 표면 특수처리따라 무한 활용"
'제2의 피부' 깊이 공부하려 대학원 의학과 가 박사학위 따
간절히 몰입하면 불가능은 없어
'1초만에 땀 마르는 섬유' 개발땐 매일 시제품 입고 한강변 달려
테스트 만족스럽지 못해 고심.. 배수구 물빠지는 것 보고 유레카!
대학시절 장돌뱅이로 고생
군대 간뒤 아버지 귤 농사 '폭삭' 등록금 벌기위해 전국 돌며 행상
양말·김·배추.. 별 재미 못봤죠.. 수돗물로 배 채우다 장티푸스도
섬유가 사양산업?
고어텍스 같은 첨단 소재 개발.. 나이키 등 유명 브랜드에 수출
軍 전투화 내피로도 납품 "레드오션에도 길은 있어요"
그는 약장수처럼 보였다. 섬유 제조업체 벤텍스 고경찬(57) 대표는 "우리 회사 제품을 홍보하는 데 1초면 된다"고 했다. 손바닥만 한 천에 분무기로 물을 뿌렸다. "보세요. 1초 만에 말랐죠? 저희가 개발한 1초 만에 건조되는 섬유입니다."
―많이 설명해 본 솜씨네요.
"제품 팔 때도 제가 직접 시연해 보입니다. 장돌뱅이 때부터 그랬어요."
―장돌뱅이요?
"대학 다닐 때 학비 벌려고 물건 떼어다 시장, 아파트 돌아다니며 팔았거든요. 양말 팔 때는 신어 보게 하고, 샤워기 팔 때는 집 수도꼭지에 끼워 보이고요."
이 회사는 지난달 30일 기술 혁신에 앞장선 업체와 연구소에 수여하는 'IR52장영실상(주관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을 받았다. 이번이 네 번째. 국내 단일 연구소로는 최다 수상이다. 장영실은 물시계·자격루를 만든 조선 세종 시대 최고의 과학자다.
국내 스포츠·아웃도어 회사는 물론 나이키·아디다스 등 해외 유명 브랜드에 원단을 수출하고 있다. 지난해 브라질 리우올림픽 때 나이키에서 만든 각국 국가대표팀 옷에도 이 회사 원단이 사용됐다. 고어텍스처럼 방수(防水)와 투습(透濕)에 강한 소재도 개발해 군 전투화 내피로 납품하고 있다. 샤워기 팔던 고학생이 어떻게 이런 회사 대표가 됐을까. 그는 "실패를 엄청나게 많이 했고, 지금도 하고 있으니까요"라고 했다.
장돌뱅이, 섬유 업체 대표되다
서울 잠실에 있는 벤텍스 연구소 한쪽 벽에는 특허증 수십개가 빼곡했다. 이 회사는 전 직원 40명, 연매출 280억원 규모의 중소기업이지만 따낸 특허만 86개에 이른다. 현재 43개가 특허출원 중이다. 직원 20%가 연구원이고, 고 대표도 직접 연구·개발에 참여하고 있다. 그는 "저희 회사는 옷에 앱(애플리케이션)을 설치하는 기업"이라고 했다.
―옷에 앱이라뇨?
"저는 기존 원단을 반(半)제품이라고 생각해요. 앱 없는 스마트폰인 셈이죠. 저희 회사는 이 원단 표면에 특수 처리를 합니다. 이를 통해 1초 만에 땀이 마르게 하거나 땀이 냉매 역할을 해서 시원하게 만들고, 태양광을 받았을 때 1분 만에 10도 이상 온도를 높일 수도 있죠."
―2015년 중앙대 대학원 의학과에서 박사 학위도 받았네요.
"섬유를 제2의 피부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피부의학에 대해 공부했어요. 약물이 섬유를 통해 어떻게 신체에 전달되는지에 대한 논문을 썼죠. 3년 동안 결석 한 번 안 하고 공부했지만 너무 어렵더라고요. 교수한테 양해 구하고 강의 전체를 녹음해서 계속 듣고 다녔어요."
―섬유에 미쳤다는 얘기도 듣겠습니다.
"섬유 회사 대표니까요."
―어떻게 하면 특허를 많이 받을 수 있나요?
"몰입하면 되는 것 같아요. 저희가 한 건 발명이 아니라 발견이라고 봐요. 간절하게 몰입하면 사람에게 안테나가 생기고 전에 안 보이던 게 보일 수 있죠. 1초 만에 땀이 마르는 섬유를 개발할 때였어요. 제가 직접 시제품 입고 매일 한강 고수부지를 달렸어요. 썩 만족스럽지가 않아요. 어느 날 비 많이 왔을 때 한강 배수구를 통해 물이 쫙 빠지는 모습을 봤어요. '저거다! 섬유에 배수구를 만들자' 생각했고, 결국 수분을 한 방향으로만 배출하는 표면 처리 기술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그는 이어 잠시 생각하더니 "또 다른 요인은 실패를 많이 해서 그런 것 같아요"라고 했다.
―많이 실패하면 좌절하기 일쑤인데요.
"신제품 개발을 위해 100번 실험하면 한 번 성공할까 말까죠. 99개 절망과 1개 희망이 있는데, 저는 99번의 절망 때문에 에너지 낭비하고 자포자기하는 대신 1개의 희망을 바라보며 달려온 것 같아요. 실패는 씨앗을 뿌리는 것일 수 있어요. 많이 뿌려야 꽃이 더 피고, 열매도 더 많이 수확할 수 있잖아요."
실패는 '성공의 씨앗' 뿌리는 것
고 대표 인생에도 성공보다 실패가 잦았다. 그는 제주도 출신으로 성균관대 섬유공학과 80학번이다. "1학년 마치고 군대 갔을 때 아버지 귤 농사가 폭삭 망했다"고 했다. 제대 이튿날부터 전국을 돌며 행상을 했다. 3켤레 1000원짜리 양말부터 배추·밤·김·핸드백·선풍기 커버까지 팔았지만 벌이가 신통치 않았다. 고 대표는 "나를 살린 건 샤워기였다"고 했다. "80년대에는 샤워기 있는 집이 별로 없었어요. 수도꼭지 호스에 꽂아 쓸 수 있는 샤워기를 어깨에 100개 둘러메면 60㎏이 넘는데, 그런 채로 돌아다니면서 '시원한 샤워기가 왔어요' 외쳤지요. 개당 500원에 사서 1000원에 팔았는데 하루에 10만원 번 적도 있어요. 당시 한 학기 등록금이 40만원이었으니까 많이 판 셈이죠."
―비결이 뭐였나요?
"우선 수도꼭지에 샤워기 꽂고 시범부터 보였어요. 말로 설명하면 흥미가 떨어질 것 같아서 그랬죠."
―돈 좀 벌었으니 더 이상 길거리에서 물건 안 팔아도 됐겠군요.
"아니요. 점심 사 먹을 돈이 아까워서 수돗물로 끼니를 자주 때웠는데 그 때문인지 장티푸스에 걸렸어요. 모은 돈 병원비로 다 날렸죠. 이후에도 방학 때 행상하고 학기 중에는 도서관에서 일했어요. 전공 책 살 돈이 없었는데 도서관에서 일하면 책 빌리기가 쉬웠거든요."
대학 졸업 후 코오롱에 들어갔다. 입사하자마자 정전기 방지 소재를 맡았다고 한다. "상품 기획부터 생산·판매까지 전부 혼자 하라고 시키더군요."
―실력을 인정받은 건가요?
"전혀요. 회사에서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소재였어요. 브랜드 이름조차 없었죠. 구미연구소에서 개발 마친 천 쪼가리를 하나 주더니 사업계획서부터 써보라고 해요."
―신입사원에 대한 일종의 테스트였군요.
"저한테는 '회사 나가라'는 얘기처럼 들렸어요."
―그래서 회사 그만뒀나요?
"아니요, 죽기살기로 팔았죠(웃음). 우선 사과 상자만 한 시험 기구를 직접 만들었어요. 벤젠, 프로판가스 등 유해 가연성 가스가 몇 볼트 정전기에 폭발하는지 보여주는 장치였죠. 이걸 등에 메고 정전기 방지 섬유 샘플을 양손에 드니까 전체 무게가 50㎏이 넘어요. 그런 채로 고속버스 타고 강원도 탄광촌부터 울산·전남 석유화학단지 등 전국 공장을 돌아다녔죠. 실제 폭발하는 장면을 보여주니까 바로 계약하자고 하더군요. 3년 만에 정전기 방지 작업복 시장의 90%를 차지했어요."
―샤워기 팔던 생각이 났겠네요.
"맞아요. 더 그랬던 게 울산에 있던 유공(현재 SK그룹) 정유 공장에 갔을 때였어요. 수위 아저씨가 공장 방문 손님이라고 거수경례를 하더군요. 자세히 보니 공장 앞에서 샤워기 팔면 안 된다고 뺨을 때렸던 분이었어요. 물론 수위 아저씨는 저를 못 알아봤겠지만요(웃음)."
레드 오션에도 길이 있다
고 대표는 1999년 창업 이후에도 시련이 많았다. 2004년 일본 미쓰비시상사에 수출한 원단에서 세탁 후 색이 변하고 크기가 줄어드는 물빠짐 현상이 발생했고 5억원어치를 전량 폐기 처분해야 했다. 그는 "당시 회사 투자 파트너였던 미쓰비시에서 피해액 절반을 부담해주겠다고 했지만 거절했다"며 "작은 회사지만 책임 있는 자세를 보이고 싶었다"고 했다. 미쓰비시는 이 사건 이후에도 5년간 계속 거래를 했고, 연간 약 40억원어치를 사갔다.
2013년 미국 아웃도어 회사 컬럼비아에서 겨울용 발열 소재와 관련해 특허 침해 소송을 걸었는데, 고 대표는 대법원까지 가는 판결 끝에 승소했다. "결과적으로 이 소송이 저희 기술을 세계적으로 인정해주는 계기가 됐다"며 "나이키 계약으로 연결됐다"고 했다.
―정말 새옹지마로군요.
"섬유 산업도 마찬가지라고 봐요. 경쟁만 치열하고 이익을 얻지 못하는 레드 오션이라고 하죠. 대규모 시설을 지어야 하고 인건비도 많이 들기 때문에 중국에 있던 공장도 베트남이나 캄보디아·미얀마로 이전하고 있어요. 이제 섬유 대신 블루 오션 산업을 육성해야 한다고 하죠. 하지만 블루오션은 끝이 보이지 않는 무지개와 같아요. 거기에 뭐가 있는지 모르고, 힘들게 도착해 보니 여기보다 더 거대한 괴물이 모든 걸 차지하고 있을 수 있어요. 레드 오션 산업이라고 해도 어떤 철학과 가치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충분히 승부를 볼 수 있다고 봅니다."
―어떻게요?
"겨울에 입는 오리털 패딩 한 벌을 만들려면 살아 있는 오리 35마리에서 가슴털을 뽑아야 합니다. 정말 끔찍하죠. 저희가 개발한 충전재는 오리털에 비해 6도 이상 따뜻하고 가격은 6분의 1 수준입니다. 동물 보호도 되는 셈이죠. 내년에는 수익 중 일부를 세계동물보호협회에 기부할 생각입니다."
그는 해당 충전재를 가지고 와서 만져 보게 하더니 "정말 따뜻하죠?" 물었다. 더 이상 그가 약장수처럼 보이지 않았다.
'CEO& 리더십' 카테고리의 다른 글
리더십도 정밀하게 수치화해서 측정해야 한다 (0) | 2018.03.18 |
---|---|
[CEO 열전: 커넬 샌더스] 실패를 거듭하던 치킨의 아버지...62살에 세운 회사가 KFC?│인터비즈 (0) | 2018.03.18 |
[장경덕 칼럼] 제프 베이조스의 제국 (0) | 2018.03.15 |
멋남, 임블리(부건FNC) 대표 박준성 / 대한민국 쇼핑몰 1세대가 정상에 오르기까지 (0) | 2018.03.12 |
[SK그룹] “대기업도 망한다” 근본적 변화 추진 (0) | 2018.03.03 |
[나의 삶 나의 길] 끝없는 망망대해.. 외로움의 끝자락에 인간이 보였다 (0) | 2018.03.03 |
빌 게이츠 넘은 베조스, 헤지펀더서 아마존 제왕 되기까지 (0) | 2018.03.03 |
[김지수의 인터스텔라] "대학은 중퇴, 문화부장관은 거절" 송승환의 '동시다발' 역전 인생 (0) | 2018.03.03 |
맨몸으로 '갑부' 반열에 오른 부자들이 꼭 지키는 '사소한 습관' (0) | 2018.02.17 |
아마존 시총, MS 눌렀다…베조스 '세계최고 갑부' 등극 (0) | 2018.02.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