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덕 칼럼] 가속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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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2017.01.03 오후 5:42
최종수정2017.01.03 오후 7:15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린 해 신문사에 들어온 나는 처음에 꼬마 원고지에 기사를 썼다. 열네 자씩 넉 줄을 쓰는 원고지였다. 활자를 뽑고 판을 짜는 시간을 줄이는 데는 그게 200자 원고지보다 유리했다. 개인용 컴퓨터를 처음 받은 건 1993년으로 기억한다. 삼보컴퓨터가 만든 386 노트북이었다. 당시에는 컴퓨터에 쓴 기사를 바로 전송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내 글을 맘대로 편집하고 저장할 수 있었다. 그것만 해도 놀라운 경험이었다.

지금 내 노트북은 그때 것보다 훨씬 가볍고 맵시도 좋다. 값은 더 싸면 쌌지 비싸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정보처리 속도는 약 500배, 저장 용량은 1만배 이상 뛰어나다. 인터넷 덕분에 이 작은 도우미 하나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거의 무한히 늘어났다. 이제 나는 컴퓨터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일을 휴대폰으로도 할 수 있다. 인텔의 6세대 코어 프로세서 성능은 1971년에 나온 첫 마이크로칩보다 3500배 뛰어나다. 그걸 만드는 비용은 6만분의 1로 줄었다.

우리는 말 그대로 가속의 시대에 살고 있다. '가속'이라는 건 무서운 말이다. 체스 판의 첫 칸에 쌀 한 톨을 놓고 한 칸씩 나아갈 때마다 두 배로 늘려가보자. 절반쯤 가면 쌀은 넓은 논 하나에서 나오는 양과 맞먹는다. 마지막 64번째 칸에 이르면 쌀로 에베레스트산을 쌓고도 남게 된다. 정보기술 발전 속도는 체스 판의 쌀이 불어나는 것과 같다. 디지털 기술은 이제 그 후반부에 접어들었다. 공상과학에나 나올 법한 기술이 '서서히 그러다 갑자기' 현실이 될 것이다.

7년 전 구글은 운전자 없이 달리는 차를 내놓았다. 머지않아 수십 년 경력자보다 더 안전하게 트럭을 모는 로봇 기사들이 도로를 누빌 것이다. 아프지도 않고 파업도 하지 않는 그들을 마다할 운송업체는 없을 것이다. 작년에 우리는 바둑의 최고 경지에 오른 이세돌이 인공지능 알파고에 불계패하는 모습을 속절없이 지켜봤다. 꼬마 원고지에 기사를 쓰던 나는 이제 디지털 혁명의 속도에 적응하느라 숨이 가쁘다. 이미 초년 시절의 나보다 훨씬 더 빠르고 정확한 글을 쓸 수 있는 로봇 저널리스트들이 나왔다. 나는 앞으로 그들과 어떻게 경쟁해야 할까.

가속의 시대에는 누구나 낙오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안고 산다. 나보다 더 강하고 똑똑한 로봇에 밀려날 거라는 공포, 나보다 더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사람들에게 뒤처질 거라는 불안을 떨쳐버릴 수 없다. 가속의 시대는 슈퍼스타와 승자독식의 시대다. 14만명의 직원을 거느린 132년 전통의 코닥은 사진 공유 앱을 만드는 인스타그램을 못 이겨 무너졌다. 페이스북이 인스타그램을 10억달러에 사들일 때 이 회사 직원은 고작 열다섯 명이었다.

한국에서는 이러한 불안과 공포가 극대화된다. 지난 반세기 동안 빠른 추격자였던 한국 기업들은 다시 한번 퀀텀 점프하는 글로벌 최강자들의 혁신 능력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한국의 정치와 사회 체제는 창조적 파괴와 혁신을 북돋워주지 못하고 있다. 교육 체제는 아직도 산업화 시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규격화된 인재들만 찍어내고 있다. 386세대인 나는 있는 일자리를 찾기만 하면 됐다. 하지만 우리의 아들딸 세대는 없는 일자리를 스스로 만들어내야 한다. 저성장의 늪에 빠진 우리는 가속의 시대에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속도도 내지 못하고 있다.

작년에 타계한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의 통찰을 기억하자. 그는 사회 각 기관들 간 속도의 충돌을 갈파했다. 정글 같은 시장에서 경쟁하는 기업들은 시속 100마일로 달린다. 그에 못지않게 재빨리 변화의 흐름에 올라타야 하는 시민사회단체들은 90마일로 달린다. 하지만 정부 관료와 규제 기관들은 시속 25마일로 한참 뒤처져 움직인다. 교육체제는 10마일로 거북이 걸음이다.

그렇다면 정치권은 어떤가. 고작 시속 3마일로 굼벵이처럼 움직인다. 법조계는 그보다도 느리다. 시속 1마일이다. 봉건시대로 돌아간 듯한 퇴행적 리더십으로 헌정 위기까지 초래한 한국의 정치, 새로운 시대정신을 수용하지 못하고 낡은 질서를 부여잡고 있으려는 법조계에는 그마저도 과분한 평가일 것이다. 토플러의 통찰에 따르면 가속의 시대에 가장 근본적인 혁신이 필요한 곳은 법과 정치다. 올해 우리는 그 혁신을 주도할 지도자를 뽑아야 한다.

[장경덕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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