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와 그의 암 치료법
 
-배리 라인스-
 
1934년 여름, 캘리포니아 남가주 대학 후원하에 미국 최고의 박테리아 학자와 의사들이 최초로 암 치료에 성공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① 암의 원인은 미생물이다.
② 말기 암환자라도 원인 미생물을 통증 없이 죽일 수 있다.
③ 암은 완치될 수 있다.
 
이러한 암 이론은 1931년에 이미《사이언스》에 발표된 바 있었다. 그리고, 1934년에 임상실험이 성공하자, 그 후로 10여 년 간 이 치료법과 그 성공 사례가 여러 의학회의 토의 주제가 되었고, 많은 의료 저널에 발표되었다. 또한 신중하고 전문적인 기사를 통해 주요 일간지에 소개되었으며, 스미소니언 재단의 연례보고서는 그 기술적인 내용을 자세하게 다루었다.
하지만 이 치료법은 수많은 과학자와 내과의사, 그리고 그들의 금전적 이해관계를 위협했다. 은폐와 조작이 시작되었다. 새 치료법을 도입했던 의사들은 강제로 그것을 포기해야 했다. 스미소니언 재단의 연례보고서에 논문을 기고했던 저자는 쫓기다가, 자기가 운전하던 차안에서 저격을 당해 숨졌다. 다시는 그런 글을 쓰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 치료법과 관련된 모든 보고서는 주요 의학 저널을 통해 미국 의사 회장의 검열을 받았다. 정부 출연 연구소도 객관적인 평가를 할 수 없었다. 이 이론은 물론, 박테리아학 분야에서 새로운 원리를 지지했던 연구자들은 조롱과 멸시를 당했고, 면전에서 사기꾼이라는 비난을 들었다. 마침내 이 치료법은 수십 년 동안의 길고 어두운 침묵 속에 유폐 당했다. 그리고 때가 되자 ‘신화’라는 이름이 붙여져, 다시는 현실로 돌아오지 못했다. 하지만 남아 있는 기록은 그 같은 치료법이 실제로 존재했고 임상실험에도 성공했으며, 그 후로 몇 년간 암과 기타 다른 질병의 치료에 비밀리에 적용되었음을 보여준다.
 
박테리아와 바이러스
 
프랑스에서는 19세기에 두 사람의 거목이 서로 대립했다. 한 사람은 오늘날까지도 그 명성이 이어지고 있는 루이 파스퇴르, 그리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이제는 세상에서 완전히 잊혀진, 그리고 파스퇴르에 의해 많은 아이디어를 도용당했던 피에르 베샹이었다.
파스퇴르와 베샹이 서로 대립했던 여러 문제들 중에는 오늘날 다형태성론이라고 불리는 분야가 있었다. 단일한 생활사에서 형태론적으로 구분되는 하나 이상의 유기체가 존재할 수 있다는 이론이다. 베샹은 박테리아의 형태가 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예컨대, 막대 모양의 박테리아가 구() 모양으로 형태가 변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파스퇴르는 여기에 반대했다. 하지만 1914년 파스퇴르 연구소의 연구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빅토르 앙리 여사는 파스퇴르가 틀리고 베샹이 옳다는 것을 확인했다.
베샹은 자신의 다형태성론을 더욱 진전시켰다. 박테리아는 더 작고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의 유기체로 ‘퇴화’될 수 있으며, 그는 이것을 발효미생물이라고 명명했다. 다시 말새어 베샹은 생활사 연구를 토대로, 미생물은 자신이 기생하는 숙주 유기체의 건강 상태에 따라 모양뿐만 아니라 크기도 변화될 수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것은 모양뿐만 아니라 크기도 변화될 수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것은 거의 20세기를 일관하여 제도권 의학계가 공인했던 이론과 정면으로 대립하는 이론이었다. 하지만 최근의 실험실 조건에서의 연구들은 베샹 이론의 타당성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외관상 사소해 보이는 두 사람의 차이 속에는 순수 학문의 영역을 훨씬 뛰어넘는 중대한 의미가 담겨 있다. 20세기의 의학 연구와 암 치료는 다형태성론에 대한 부정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만약 20세기 초에 다형태성론을 인정했다면 수백만의 환자가 암으로 인해 겪어야 했던 고통과 죽음을 예방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1969년 뉴욕 과학회에 제출한 버지니아 리빙스턴과 엘리너 알렉산더-잭슨의 논문에 따르면, 암의 원인이 되는 미생물은 한 종밖에 없다고 한다. 다만 형태가 바뀌기 때문에 암 연구자들이 여태껏 이 미생물을 규명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이 미생물은 분류 불가능의 난제였다. 그 이유의 하나는 현저한 다형태성으로 인하여 다른 미생물로 오인되곤 했기 때문이다. 암 바이러스는 그 다형태성으로 인해 구균이나 바이러스, 디프테리아균, 간상균, 곰팡이 중의 하나로 나타날 수 있다.
 
미국 의사회의 의료행위 통제
 
미국 의사회는 1846년에 설립되어, 1901년에 조직 재정비를 한 후부터 미국의 모든 의사들의 의료행위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전국 의사회가 주 의사회의 연합조직으로 재편되고, 군 단위의 의료단체 회원들을 강제 가입시킴으로써, 회원수의 비약적 증가는 물론 대다수의 의사들이 회원으로 가입되었다. 의과대학을 설립하고, 이로써 의사 및 의료행위의 기준을 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순응하지 않는 의사들은 면허를 박탈당했다.
모리스 피쉬바인은 1920년대 중반부터 1949년 6월 6 애틀랜틱시티에서 열린 미국 의사회 총회에서 강제로 쫓겨날 때까지, 미국 의사회의 실질적인 독재자로 군림했다. 그리고 주 의사회 대표의 반란으로 자리에서 물러난 후에도 그가 회장이었던 당시에 입안했던 정책이 계속 집행되었다. 그는 1970년대 초반에 사망했다.
한편, 1934년의 임상실험과 관련하여, 실험에는 직접 참가하지 않았지만 자금을 제공했던 해머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몇 년 후, 남부 캘리포니아에 병원을 열고 암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이 치료법의 단순 아이디어에서부터 실제 치료에 적용될 수 있기까지 전 과정을 지켜 보았던 벤저민 쿨렌의 증언에 따르면, 피쉬바인이 이 치료법을 ‘사들이려고’ 했다고 한다. 제안이 거절당하자 미국 의사회를 동원하여 치료법을 공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쿨렌은 이렇게 그때를 회상했다.
해머 박사는 하루 평균 40건의 진료를 했어요. 치료사 두 사람을 더 구해야 했죠. 박사는 두 사람을 훈련시키며, 면밀히 주시했어요. 한편, 진료기록 카드는 빠른 속도로 쌓여 갔습니다. 그 가운데 시카고에서 온 문제의 노인이 끼어 있었어요. 종양이 얼굴 전체와 목까지 퍼져 있었죠. 완전히 응혈 덩어리였어요. 끔찍했죠. 붉은 응혈 덩어리 자체였으니까요. 종양은 온 얼굴에 퍼져 있었어요. 한쪽 눈꺼풀과 귓불, 심지어 뺨과 코, 턱까지 말입니다. 말이 아니었죠.
하지만 6개월쯤 지났을까, 얼굴 한 쪽에 작고 검은 점만 남고 응혈이 깨끗이 사라졌어요. 딱지가 막 떨어지기 시작했구요. 그 남자는 82세였습니다. 정말이지 그런 일은 난생 처음 봤어요. 피부가 다시 깨끗해진 것도 기쁠 텐데, 완전히 애들 피부 같았어요.
치료가 끝나자 노인은 시카고로 돌아갔어요. 당연히 여기저기 자랑을 했을 테고, 피쉬바인도 그 이야기를 듣게 되었죠. 그는 노인을 불러들였지만, 노인은 입을 다물고 말을 하려고 하지 않았죠. 피쉬바인은 노인을 어르고 달래, 마침내 그가 샌디에이고의 해머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아냈어요.
곧 로스앤젤레스에서 한 남자가 내려왔어요. 우리와 몇 차례 만났죠. 마침내 그는 저녁을 함께하자며 우릴 데리고 나가더니 치료법을 사겠다는 이야기를 꺼냈어요. 그럴 이유가 전혀 없었죠. 이미 널리 소문이 났던 터라, 광고도 안 하고 있었으니까요. 물론 그것은 전적으로 해머 박사의 치료사례들 덕분이었구요. 박사는 그 치료법이 이 시대의 가장 경이적인 발전이라고 했어요. 박사의 치료 경력은 훌륭함 그 자체였어요.
피쉬바인이 병원의 동업자 중 한 사람에게 뇌물을 먹였어요. 그 때문에 우리는 무면허 의료행위로 법정에 끌려갔죠. 1년 후에 해직당했구요.
해머는 1939년 지방 의사회의 압력으로 그 치료법을 포기했다. 그는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영웅들 가운데 한 사람은 아니었다.
1934년부터 1939년까지의 짧은 기간에 이 치료법은 그렇게 임상실험에 성공하고, 여러 의사들에 의해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질병에 대한 치료도 응용되었으며, 피쉬바인의 미국 의사회가 사들이는 데 실패함으로써 종말을 맞았다. 그가 죽인 것은 하나의 치료법에 불과했지만, 그처럼 한 사람의 비열한 행위가 수백만 암환자들에게 때이른 추한 죽음을 선고할 수 있었던 것은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이것은 미국 의사회 역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날들이었다.
한편, 1930~1950년 사이에 암 연구라는 미개척 분야에 대해 ‘권리주장’을 했던 또 하나의 주요 연구기관은 뉴욕의 슬로언-케터링 암센터였다. 미국 최초의 암병원으로 1884년에 설립된 슬로언-케터링은 1940년대부터 1950년대 중반까지 거대 제약회사들의 중요한 의약 임상실험소 역할을 담당했다.
1930년대에 록펠러 재단에서 근무했던 코닐리어스 로드는 1939년에 슬로언-케터링의 이사가 되어, 1959년 사망할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그는 1943년부터 1945년까지는 화학전 부대를 지휘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 최고의 화학요법 옹호자였다.
로드는 1950년대에 암 미생물 발견에 관한 아이어린 딜러의 뉴욕 과학회의 발표를 막았다. 그리고 1953년에 캐스프가 로마에서 같은 내용의 연구를 발표하자 그녀의 뉴저지 연구소에 대한 연구비 지원을 취소시켰다. 영향력 있는 익명의 뉴욕 암 전문가가 부추긴 국세청(IRS) 조사는 그녀의 불행에 소금을 끼얹었고, 그로 인해 연구소는 결국 문을 닫게 되었다.
암 연구 분야에서 탄압의 주연을 맡았던 집단은 의사와 사설 연구소, 제약회사, 미국 암학회였으며, 미국 정부 또한 국림암연구소(조직적인 연구를 담당)와 식품의약청(이단자들에 대한 습격과 법률적인 괴롭힘, 어마어마한 경비를 요하는 임상실험 절차)을 통해 여기에 개입했다.
 
암 치료법을 발견한 사람
 
1913, 기계와 과학에 매료된 한 남자가 뉴욕으로부터 미국을 횡단하여 샌디에이고에 도착했다. 네브래스카 주의 엘크혼 태생의 이 남자는 25세에 결혼했다. 결혼과 함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여, 그에게 미래를 보장해줄 보건과학 분야에 입문했던 것이었다. 그의 이름은 로얄 레이먼드 라이프였다. 그의 인간미와 후덕함을 사랑하고 천재성에 경탄했던 가까운 친구들은 그를 로이라고 불렀다.
라이프는 박테리아학과 현미경, 전자공학에 특히 관심이 많았다. 1차 세계대전중에 해군에 입대하여 미국 정부를 위해 해외의 연구소들을 조사할 목적으로 유럽을 여행했다. 그는 이 기간을 포함하여 7년간 과학의 여러 분야에 대한 사색과 실험을 했으며, 세계가 꿈도 꾸지 못했던 실험용 장비를 제작하는 기계 기술을 습득했다.
1920년대 말이 되어 첫 성과물이 완성되었다. 기존의 광학 원리를 무너뜨리는 현미경과 함께 질병을 일으키는 특정 미생물을 전자적인 방식으로 파괴하는 기기를 발명해 냈던 것이다.
하지만 미생물이 너무 작아 산이나 아닐린 계통의 색소를 사용하는 기존의 방법으로는 시료의 염색이 불가능했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종종 그랬던 것처럼, 그도 길을 걷다가 위대한 과학적 발견으로 이어질 영감을 얻었다. 시료 중의 특정한 입자나 미생물의 화학적 성분과 동조될 수 있는 진동수의 빛을 발생시킬 수 있는 현미경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 현미경은 1929년에 완성되었다. 1931년 12월 27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매거진》은 그의 광염색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천문학자들이 망원경을 통해 달이나 태양, 별에서 나오는 빛을 관찰하듯이, 세균도 그 같은 방법으로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더욱이 이 방법으로 관찰되는 세균은 착색 과정에 서도 죽지 않고 살아있는 상태로 관찰된다.
연구를 진행하는 동안 라이프는 암을 유발하는 미생물을 찾아 파괴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투자했다. 그의 암 연구는 이미 1922년에 시작되었다. 하지만 1932년에 이르러서야, 그가 나중에 ‘BX 바이러스’라고 명명했던 암 바이러스를 분리해낼 수 있었다.
 
라이프가 만든 꿈의 현미경
 
1931, 라이프는 그에게 많은 과학적 도움을 주었던 두 사람을 만났다. 아서 켄들은 노스웨스턴 대학 의대 부설 의학연구소의 소장이었고, 빌뱅크 존슨은 캘리포니아 파사데나 병원의 이사이자 로스앤젤레스 의료 단체의 실력자였다.
켄들은 박테리아 중의 ‘여과성 병원균’을 분리하여 계속 재생산할 수 있는 단백질 배지(그는 이것을 자신의 이름을 따서 K-배지라고 명명했다)를 발명했다. 이 같은 아이디어는, 1926년에 바이러스가 재생산되려면 살아 있는 조직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했던 록펠러 재단 소속 토머스 리버스 박사의 이론적 권위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켄들과 몇몇 연구자들은 1년도 안 되어 인공적인 배양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한편, 무지와 고집에 사로잡힌 리버스는 더 없이 위대한 의학적 진보를 탄압했던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켄들이 캘리포니아에 온 것은 1931 11월 중순경이었고, 그를 라이프에게 소개한 사람이 바로 존슨이었다. 켄들은 라이프에게 ‘K-배지’를 가져왔고, 라이프는 켄들에게 자신의 현미경을 제공했다.
그들은 당시에 가장 정밀한 필터로 삼중 여과한 장티푸스 유전자를 ‘K-배지’에 이식하고, 라이프의 현미경을 통해 그 결과를 관찰했다. 청록색 빛으로 착색된 특유의 작은 유기체가 관찰되었다. 켄들의 입장에서는 ‘K-배지’를 통해 실제로 세균을 배양하는 데 성공했으며, 그것을 눈으로 관찰했다. 반대로 라이프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실제로 바이러스가 ‘광염색’되어, 세상에 유일무이한 라이프 현미경을 통해 각자의 고유한 발색에 의해 이들 바이러스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나중에 발간된 스미소니언 연례보고서는 인간이 바이러스 수준의 살아 있는 미생물을 직접 관찰할 수 있는 세계 최초의 독창적인 이 현미경에 대한 약간의 기술적인 단서를 보여준다.
그들은 라이프의 현미경을 통해 여과성 병원균 형태의 장티푸스균을 관찰했다. +4.8도 로 엇갈린 편광면에 의해, 푸른 스펙트럼색을 띠고 있었다. 편광 프리즘을 -4.8도로 조정 하여 굴절 대각을 만들고 배양균에 장티푸스균의 화학적 조성에 맞는 단색광을 조사하자 5000배율에서 활발한 운동성을 가진 작은 타원형의 밝은 청록색 물체가 관찰되었고, 운 동성이 없는 배지의 파편과는 확연하게 구별되었다. 이 실험은 결과를 검증하기 위해 열 여덟 차례나 반복되었다.
실험이 성공하자, 존슨은 곧 두 사람을 축하하고 그들의 발견이 발표 및 토론될 수 있도록 만찬 행사를 준비했다. 1931년 11월 20, 로스앤젤레스의 의학계와 병리학계, 박테리아학계에서 30명이 넘는 최고 권위자들이 이 역사적인 행사에 참가했다. 그로부터 20년 후 라이프의 발견에 관해 아는 바가 없다고 잡아뗐던 앨빈 푸어드도 당시 그 자리에 있었다. 또한 반대파로 개종하여, 임상의학에 관한 연구를 감독하던 남가주 대학 부설 특별연구위원회로부터 쫓겨났던 조지 도크도 그 자리에 있었다.
1931 11 22일자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만찬과 그 과학적 중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금요일 저녁, 존슨 박사가 주최한 라이프와 켄들 박사 축하 만찬에서 의료계와 박테리 아학계, 병리학계의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샌디에이고 출신의 라이프 박사가 14년에 걸친 노력 끝에 최근에 완성한 세계 최고의 고성능 현미경과 더불어, 매우 중요한 과학적 발견들에 관한 토론이 있었다.
이 유명 인사들 앞에서, 켄들 박사는 새로 개발한 ‘K-배지’를 이용하여 디프테이아균을 배양하는 문제에 대한 연구를 발표했다. 흔히 디프테이아균은 여과성이 아니며 일반 현미 경으로도 쉽게 관찰될 만큼 크기가 충분히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켄들 박사는 ‘K-배지’ 에서 배양한 디프테이아균은 크기가 작아져 극히 미세한 여과성 병원균으로 변하므로 보 통 현미경으로는 관찰할 수 없다고 했다.
통상의 현미경이 2000배까지 확대 가능하지만 라이프 박사의 현미경은 배율이 최고 1 7000배에 이르며, 켄들 박사는 그 현미경을 사용함으로써 여과성 혹은 그 이전의 무 형 단계의 장티푸스균을 눈으로 관찰할 수 있었다고 한다. 미소한 여과성 병원균(바이러 스)을 육안으로 관찰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보인다.
현재 사용되는 가장 강력한 현미경은 보통 2000배에서 2500배율이다. 라이프 박사는 완전히 새로운 광학 원리를 적용한 독창적인 렌즈 배열과 두 개의 석영 프리즘 및 강한 광원을 도입함으로써, 최저 배율 5000, 그리고 신뢰할 수 있는 최대 배율이 1 7000 배에 이르는 현미경을 개발했다.
과학자들은 조만간 그의 새로운 현미경이 가진 중요성이 입증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한 편, 존슨 박사의 손님들은 기존 광학의 한계를 초월한 이 현미경의 완성도에 대해 솔직히 의구심을 표명했지만, 육안을 통한 시연에 저절로 기쁨을 감추지 못했으며, 라이프 박사 와 켄들 박사를 세계 최고 과학자들의 반열에 올리는 데 진심으로 동의했다.
그로부터 닷새 후,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현미경과 함께 라이프와 켄들의 사진을 실었다. 이는 초고성능 현미경을 최초로 일반인들에게 공개한 것이었다. 제목은 ‘세계 최고의 현미경’이었다.
라이프와 켄들은 캘리포니아, 네바다, 유타 주 의사회의 공식 저널인《캘리포니아와 서부지역 의학 저널》 1931 12월호에 논문을 발표했다. <여과상 장티푸스균에 관한 고찰>이라는 제목의 이 논문은 라이프와 켄들의 실험과 관찰 내용이 상세히 실려 있다.
마침내 권위 있는 《사이언스》도 미국의 전 과학계를 긴장시켰던 기사를 실었다. 1931년 12월 11 《사이언스》 보충호에 실린 <라이프 현미경을 통해 관찰한 여과성 병원체>는 켄들의 여과성 배지와 장티푸스균의 여과성 병원체인 청록색 세균체, 그리고 라이프의 현미경에 대해서 다루었다.
라이프 박사의 현미경은 결정체를 통과시켜 다른 방향의 빛을 걸러내고 하나의 평면 위 에서만 진동하는 빛, 즉 편광을 사용하였다. 이 중 굴절 프리즘에 의해 진동 평면의 방향 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이 평면상에 위치한 미소한 물체를 향해 조명의 방향을 정확히 조절할 수 있다.
1931 12 27일자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라이프가 250명의 과학자들 앞에서 현미경을 시험했다고 보고했다.
이것은 완전히 새로운 현미경, 현미경을 지배하는 물리학의 법칙이 더 이상 통하지 않 는 현미경이다. ……라이프 박사는 실험 방식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켜, 켄들 박사 같은 박 테리아 학자들이 지금까지 원인이 알려지지 않았던 50여 가지 질병의 원인이 되는 세균 의 유전자를 식별해낼 수 있게끔 했다.
켄들은 곧 미국 내과의사회의 초청을 받았다. 설명회는 1932년 3월 3부터 4일까지 볼티모어의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열렸다. 그 자리에는 공교롭게도 리버스와 한스 진서가 참석해 있었고, 그로 인해 모든 과학적 인정 절차가 끝나 버렸다. 두 사람의 반대는 라이프의 발견과 관련된 연구개발이 둔화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박테리아 전문가들은 심지어 라이프와 켄들이 과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을지 모른다는 가능성조차도 섣불리 인정하지 못했다. 최악의 탄압이었다. 록펠러 재단은 과학 분야에 있어 연구비 조달의 자금원이었을 뿐만 아니라 전문적 인정 절차와 관련하여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리버스와 진서의 일관성 없고 무자비하고 비과학적인 행동 때문에 엄청난 범죄 행위를 낳을 수 있었다.
라이프의 발견은 그에 따른 연쇄적인 연구와 임상 실험, 보건체계의 ‘새로운 장을 열’ 바로 그 시점에서 관성을 잃고 말았다. 1932년이 끝날 무렵, 사실 라이프는 시험관과 동물 실험을 통해 디프테리아균과 폴리오 바이러스(소아마비 바이러스), 헤르페스 바이러스(포진 바이러스), 암 바이러스 및 기타 바이러스의 파괴에 성공했고, 마지막으로 인간에 대한 실험만 남겨두고 있었다.
리버스와 진서의 반대는 20세기 의학의 역사에 심각한 폐해를 끼쳤다(진서의 《박테리아학》은 그 개정판이 아직도 교과서로 사용되고 있다). 불행한 일이지만, 당대의 이름 있는 박테리아 학자들 가운데 리버스의 위세에 반발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렇지만 소심과 비겁이 만연한 속에서도 두 사람의 예외가 있었다. 크리스토퍼 버드는 《뉴에이지 저널》 1976 3월호에 “라이프의 현미경은 어떻게 되었는가”라는 기사를 기고했다.
비방과 독설의 와중에서 켄들의 지원군이 되었던 유일한 우군은 박테리아 학계의 거장 이자 미국 최초로 박테리아학 강의를 개설했던 ‘멋쟁이 소녀’ 윌리엄 웰치였으며, 그는 켄 들의 업적에 관하여 특별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웰치는 존스홉킨스 대학 도서관의 명칭에 그의 이름을 붙일 정도로 당대의 미국 병리학 분야의 최고 권위자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켄들의 발견은 의학 발전의 획을 그었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그의 지지는 별 도움을 주지 못했다. 당시에는 리버스와 진서가 박테리아학 분야의 권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라이프과 켄들을 옹호했던 또 다른 지원군은 메이요 병원 부설 실험박테리아학과의 에드워드 로센나우였다. 메이요 병원은 당시는 물론 오늘날까지도 연구 및 치료의학 분야에서 세계 제일의 병원 중 하나다. 그는 켄들에 대한 공개적인 마녀사냥이 있은 지 아직 두 달 밖에 지나지 않은 1932년 7월 5부터 7일까지 시카고의 노스웨스턴 대학 의학과에 있는 켄들의 실험실에서 라이프와 켄들을 만났다.
1932 7 13, 로센나우는 미네소타 로체스터에서 열린 메이요 병원의 스텝 회의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운동성 있는 타원형의 청록색 바이러스의 존재에는 더 이상 의문의 여지가 없으며, 육안을 통해 관찰되었다. 1932년 8월 26 《사이언스》는 “라이프 현미경을 통한 미생물의 여과성 형태의 고찰”이라는 제목으로 로센나우의 보고서를 실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로센나우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청록색 여과성 물체에 관한 켄들의 주장은 아무런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 물체는 보통 의 확대 또는 조사 방식으로는 관찰되지 않는다. ……일반 현미경으로 관찰할 수 있는 물 체를 시료에 포함시켜 라이프 현미경으로 시료를 관찰했을 때, 렌즈를 통해 얻은 영상이 현미경의 초고배율(대략 8000)에 의한 직접적 관찰의 산물임을, 시료에 포함된 물체 혹 은 미립자의 확대 영상임을 믿지 못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기 때문인다.
시카고에서 라이프와 헤어진 지 사흘 뒤, 로센나우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당신이 만든 꿈의 현미경이 가진 가능성을 보며, 나는 켄들 박사의 실험실에서 보낸 사 흘 동안, 그 열정에 찬 소중한 시간 동안 당신의 현미경을 통해 보았던 것들의 중요성에 관해 곰곰이 생각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내가 얻은 결론은 우선 충분히 시간을 할애하 여, 물리학에서 여태껏 불가능했던 일이 당신의 손에서 어떻게 가능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생각건대, 배율도 배율이지만 강한 단색광을 조사한다는 현미경의 방식이 훨씬 큰 중요성을 갖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로센나우의 말이 옳았다. 빛의 ‘고유 진동수에서 비롯된 색깔’로 시료를 염색하는 방법은 획기적인 발견이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TV가 발명되고 나자 그에 관하여 라이프는 병상에서 이렇게 말했다. “바이러스는 TV에서 색깔이 나오는 것과 마찬가지의 원리로 일정한 진동수의 빛에 의해 채색되는 것이다.” 기술적인 용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이 얼마나 훌륭한 설명인가.
 
암 바이러스, BX
 
라이프는 켄들의 ‘K-배지’를 이용하여, 1931년부터 암 바이러스를 찾아내는 실험에 착수했다. 1932, 그는 캘리포니아 내셔널시티의 파라다이스 밸리 요양소에서 악성 종양으로 진단된 가슴 조직을 입수했다. 하지만 최초의 암 세포 배양에서는 그가 원하는 바이러스를 찾아내지 못했다.
그러다가 뜻밖의 일이 생겼다. 나중에 샌디에이고의 1938년 5월 11자《이브닝 트리뷴》은 그 사건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라이프는 배지나 현미경만으로는 암 세포 중의 여과성 병원균을 찾아내지 못했을 것이 라고 술회했다. 정말 우연히 발견된 시료 처리법 덕분이었다. 감염된 유기체에 전자를 쏘 이기 위해 흔히 사용했던 방법, 즉 파이프형 고리 안에 전류로 활성화시킨 아르곤 가스을 채워 넣고, 그 안에 암 배양균이 든 시험관을 넣어두었다. 그리고 관 안에서 24시간 동안 배양균을 방치했다. 그러고 나서 현미경을 통해 관찰한 결과 세포의 모양이 변했다. 그는 반복적인 연구 실험을 통하여, 배지 안에 적자주색 과립들이 형성되는 것을 발견하게 되 었다.
BX 바이러스는 독특한 적자주색을 띠었다. 라이프는 암종의 여과성 바이러스를 분리해 내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1932 11 20일자 라이프의 실험 노트에는 암 바이러스의 특징에 관한 최초의 설명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그 가운데에는 라이프 현미경을 이용한 두 가지 독특한 분류 방법이 눈길을 끈다. ‘굴절각 123, 화학적 굴절에 의한 색깔 적자주색.
암 바이러스의 크기는 매우 작다. 길이는 1/15미크론, 너비는 1/20미크론이다. 1980년대까지도 일반 현미경으로는 암 바이러스를 관찰할 수 없었다.
라이프와 그의 실험 조수 프리는 그의 발견에 대한 확인 작업을 계속했다. 그들은 같은 방법의 실험을 연속적으로 104회 실시하여 동일한 결과를 얻었다.
머지않아 라이프는 암과 관련된 미생물이 네 가지의 형태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었다.
BX(암종) BY(육종 : BX보다 크다)③ 단구균 형태 : 암환자 90퍼센트의 혈액 단구에서 발견된다. 적절하게 염색하면 이와 같은 형태의 암세포는 보통의 현미경으로도 관찰할 수 있다.④ 크리토마이시스 다형태성 곰팡이 : 형태학적으로 난초나 버섯의 곰팡이와 동일하다.
라이프는 1953년에 발간된 자신의 책에서 이렇게 썼다. (상기의) 암 바이러스들은 36시간 내에 ‘BX’형으로 형태가 변화될 수 있다. 동물 실험에서 이들 바이러스는 실제 종양 조직의 모든 병리적 특징을 가진 전형적인 종양을 발생시켰고, 우리는 이것을 다시 ‘BX’ 미생물로 환원시킬 수 있었다. 우리는 300회 이상의 실험을 통해 동일한 결과가 반복됨을 확인했다.
라이프는 다형태성론을 증명했다. 환경 변화에 따라 암 바이러스의 형태가 어떻게 변하는지 보여주었다. 그것은 베샹과 켄들, 로센나우, 웰치, 그리고 라이프를 옹호하면서 리버스와 그 추종 집단의 잘못된 정통 이론에 맞서 전투를 치러야 했던 일단의 다형태성론 박테리아 학자들의 업적을 증명해준 것이었다. 그의 책은 이렇게 이어진다.
“실제로 병을 일으키는 것은 박테리아 자체가 아니라 인체의 불균형적인 세포 대사를 토대로 작용하는 이들 미생물의 화학적 성분이다. 따라서 인체의 대사가 완벽하게 균형이 잡혀 평형을 이룬다면 어떠한 질병도 걸리지 않을 수 있다.
그는 이론적인 논쟁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그러한 임무는 다른 이들의 몫으로 남겨두자고 했던 것이다. 암 바이러스를 분리하고 나서, 다음 단계의 연구는 그것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위해 그는 주파발생기를 사용했고, 바이러스 파괴에 거듭 성공했다. 그런 후에 동물 실험을 실시했다. 바이러스를 실험용 동물에 접종하고 종양이 성장하는 것을 관찰한 다음, BX’ 바이러스를 죽일 때와 똑같은 주파발생기와 주파수를 이용하여 체내의 바이러스를 죽였던 것이다.
1953, 마침내 라이프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이 실험은 실험용 동물을 대상으로 400회 이상 성공적으로 실시되었으며, 비로소 이제 는 인간의 암종과 육종에 대하여 특정 주파수를 이용한 어떠한 실험도 가능하게 되었다.
1934년 여름, 그는 열여섯 명의 암 말기 및 기타 환자들을 스크립스 목장으로 데려왔다. 그곳에서 라이프와 의사들은 처음으로 인간에 대한 연구를 실시하여 많은 것을 알아냈다. 자신의 책에 대하여 저작권을 인정받았던 1953, 라이프는 1934년에 있었던 실험에 관한 진짜 보고서를 작성했다.
주파발생기를 이용한 치료에서 조직은 전혀 손상을 입지 않았고, 통증도 없었으며, 소 음도 없었고, 감각도 없었다. 전구에 불이 들어오고 3분이 지나자 치료가 모두 끝났다. 바 이러스 혹은 박테리아가 파괴되고 나자, 몸이 그 독성 작용으로부터 저절로 치료되었다. 몇 가지 종류의 질병은 이런 방식에 의해 자연적으로 치료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암환자에 대한 최초의 임상실험은 존슨 박사가 담당했고, 남가주 대학 의학 특별연구위 원회가 주관했다. 이 실험에서는 여러 가지 유형의 종양을 가진 16명의 환자가 지원했다. 그로부터 3개월 후, 소위 사형선고를 받았던 이들 환자들 가운데 14명이 5명의 의료진과 병리학자 푸어드로 구성된 검사단으로부터 임상적인 완치 판정을 받았다. 이 실험은 사흘 간격으로 3분씩, BX’ 또는 암 바이러스에 치명적인 진동수를 발생시키도록 설정된 주파 발생기를 이용했다. 실험을 통해, 날마다 치료하는 것보다는 일정한 간격을 두는 것이 좀 더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간 간격은 림프계로 하여금 활동성이 정지되어 사멸한 ‘BX’ 바이러스의 찌꺼기들을 흡수하여 배설시킬 시간을 준다. 이들 환자들에게 주파수 치료를 하는 동안 혹은 치료 후에 정상 이상의 체온 상승 은 전혀 관찰되지 않았다. 식단에 대한 통제는 전혀 없었지만, 각자 개인에 맞춰 짜여진 적당한 식단은 환자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1953 12 1
실험에 참가했던 사람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산타페 철도병원의 외과과장 웨일런 모리슨, 국제적으로 권위 있는 조지 도크, 뉴욕 어린이전문병원의 조지 피셔, 아서 켄들, 시카고 대학 병리학 교수 차이트 박사, 남가주 대학 총장 루퍼스 폰 클라인 슈미트, 샌프란시스코 후퍼 재단 박테리아 연구소의 제임스 쿠치 박사와 칼 메이어 박사.
라졸라 메타볼릭 병원의 콥스 박사도 14종의 보고서 전부에 서명 했으며, 개인적인 참관을 통해 실험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1956, 쿠치는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나는 라이프 박사의 주파발생기의 효과, 그 놀라운 과학적 경이에 관한 역사적인 기록 을 남기고 싶다.……
지금으로부터 약 22년 전, 나는 스크립스 재단 별관 근처의 엘린 스크립스의 집에서 처 음 라이프 박사와 주파발생기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직접 밖으로 나가 눈으로 보자, 그가 이곳에서 실시했던 임상 사례들에 대해 매우 흥미를 갖게 되었다. 무엇보다 내가 거 기에 매료되었던 것은 위암을 앓고 있는 어떤 남자의 임상 사례 때문이었다. 당시 라이프 는 밀뱅크 존슨과 함께 이 실험을 진행했다. 존슨은 로스앤젤레스 의사회의 회장으로, 매 우 돈이 많고, 의료계의 대단한 거물로, 특히 로스앤젤레스 의료계의 대부로 통했다. 그런 그가 이 실험을 위하여 그 해 여름 동안 이 별관을 임대해 주었다.
실험 과정을 통해 나는 많은 것을 직접 목격했다. 앞서 말했듯이 그 가운데 가장 인상 적이었던 사례는 암 말기의 어떤 남자였다. 그는 비틀거리며 치료대 위로 올라갔다. 완전 히 뼈만 남아 있었다. 그가 치료대 위에 눕자 라이프와 존슨은 내게 “저 사람의 위장을 만져 보시오”라고 말했다. 위장이 있어야 할 위치의, 구멍처럼 움푹 꺼진 곳으로 내 손을 가져갔다. 환자는 척추와 배꼽이 맞닿을 정도로 심하게 여위어 있던 터라 그것은 구멍이 나 다름없어 보였다.
위장이 마치 딱딱한 덩어리 같았다. 그곳을 만지자 그럭저럭 하트 모양의 뭔가가 손에 잡혔다. 돌처럼 딱딱했다. 혼자 생각에 어떻게 손을 써도 가망이 없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를 라이프의 주파발생기로 치료를 했고, 6주에서 2달쯤 치료를 받자 놀랍게 도 그는 완전히 완치되었다. 너무나 상태가 좋아, 자기의 농장이 있는 엘 센트로에 갈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조를 지경이었다. 가축을 둘러보고 와야겠다는 것이었다. 라이프 박사의 대답은 이랬다. “지금은 엘 센트로까지 차를 몰고 갈 만큼 체력이 회복되지는 않 았어요.
“알아요.” 그가 대답했다. “물론 그렇긴 합니다만, 저를 그곳에 데려다 줄 사람이 있거든 요.” 실은 그 환자는 혼자서 차를 몰고 엘 센트로에 갔고, 자기 소 한 마리가 병에 걸린 것을 알고는 밤새 그 소를 돌봤다. 그러고는 다음날 쉬지도 않고 차를 몰고 돌아왔다. 이 정도면 그가 얼마만큼 회복되었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그 외에도 나는 매우 흥미로운 다른 사례들을 목격했다. 나도 그런 주파발생기를 도입 하고 싶은 바람이 생겼다. 결국 나는 그 주파발생기 가운데 한 개를 구입하여 내 병원에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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