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덤스미스의 국부론요약

현장 2009.04.02 11:18

 

 

Ⅰ. 국부론을 읽고서

 

  먼저 나 스스로가 경제학이라는 학문의 탐구와 양식을 쌓기 위해 경제학도로서 마땅히 읽었어야 할 고전임에도 불구하고 과제를 통해 읽게 된 것에 개탄스러울 따름이다. 말이 경제학도지 경제학에 관한 탐구심과 지식은 일반인과 다를 바 없는 수준이며, 수업을 통해서 배우는 것 뿐 자의에 의한 순수한 열의가 없는 학생에 불과하다. 이러한 부끄러운 학생에게 나타난 국부론의 저자인 애덤 스미스는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 국부론이라는 고전을 읽음으로써 내 가슴에 경제학도라는 열의를 갖게 해주었고, 비록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도 많았지만 이러한 경제학 원리를 설명한 것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기가 너무 힘이 들었다. 난해한 설명과 선뜻 이해할 수 없는 예들이 나올 때 마다 내 가슴과 머리 속을 답답하게 만들었고, 당장이라도 책을 덥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꾸준히 읽어내려 갔다. 그 당시의 경제현상의 세세적인 부분까지도 원리로 이끌어내고 그것을 하나의 이론으로 만들기까지... 애덤 스미스는 경제학의 아버지라고 불리기보다 경제학의 연금술사로 불려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과연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을 펴내 경제학의 초석을 마련하지 않았다면 우리 경제학의 진보는 한참 더뎌졌을 것이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을 통해서 개인의 이기심을 강조하고 있다. 국부론 내용을 살펴보면

 

  "우리가 저녁식사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정육업자, 양조업자, 제빵업자들의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개인이익추구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생산물의 가치가 극대화되는 방향으로 자신의 자원을 활용하려고 노력한다. 그는 공익을 증진하려고 의도하지 않으며 또 얼마나 증대시킬 수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는 단지 자신의 안전과 이익을 위하여 행동할 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행동하는 가운데 '보이지 않는 손'의 인도를 받아서 원래 의도하지 않았던 목표를 달성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열심히 추구하는 가운데서 사화나 국가전체의 이익을 증대시킨다."

 

  위와 같이 개인이 이기심을 추구하는 것이 곧 자신의 부의 증대를 가져오고 이것이 국가의 부의 증대를 가져온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와 같이 애덤 스미스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처지를 개선하려고 하는 자연스런 노력인 이기심에 따라 행동하면 이른바 '보이지 않는 손' 에 의하여 모든 경제활동이 조정된다고 했다. 그리고 그 유명한 '보이지 않는 손' 이 나오는데 이것은 시장가격의 자동조절기능을 말하는 것으로 이 기능에 의해 경쟁시장에서는 수요, 공급의 균형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장원리에 중점을 두고 정부의 규제와 정책에 대해서는 제한적이어야 한다고 보고 있다.

  결국 국가의 부를 증가시키기 위해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의 본성을 자유롭고 안전하게 발휘하도록 해주는 것이 국부론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정부는 국토를 방위하고 정의롭고 평등한 법질서를 유지하며 개인이 할 수 없는 공공사업을 수행하는 일에만 전념하고 그 나머지의 분야는 개인에게 맡겨두라는 것이다. 즉, 자유방임주의를 추구한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의문이 생겼다. 인간의 자연 본성인 이기심을 추구함에 있어 그것이 경제학적으로는 국부를 증진하는 결과를 가져올지 모르나 윤리적으로는 개인의 이익추구가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가져올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인간의 부에 대한 욕심은 끝이 없다. 부를 얻기 위한 개인의 이익추구가 치열한 경쟁을 낳고 이러한 경쟁속에서 경제가 발전하지만, 반면에 끝없는 부의 추구는 돈이 제일이라는 물질만능주의 풍조를 가져와 인간의 존엄성을 위협하고 많은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제대로 된 부의 분배가 이루어 지지않아 가진자와 가지지 못한 자와의 차이는 더욱 심화될 것이며 자유 경쟁 속에서 타인을 밟고 일어서려는 욕망으로 타인의 행복을 무너뜨릴 우려가 있다. 과연 애덤 스미스는 이러한 점을 간과한 것인가? 개인의 이기심과 ‘보이지 않는 손’ 의 원리가 경제의 균형을 가져오고 동시에 사회적 균형도 달성되리라고 보았던 것일까? 이와 관련하여 “국부론” 외에 “애덤 스미스 구하기” 를 읽어보았고, 그리고 “애덤 스미스와 자유주의” 라는 책도 함께 참조하였다.

 

Ⅱ. 애덤 스미스의 또 다른 저서 『도덕감정론』

 

이와 관련하여 인터넷 검색과 도서관에서 몇 가지의 서적을 참고한 결과 애덤 스미스의 처녀작인 ‘도덕감정론’ 이라는 또 다른 고전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책을 통해 볼 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애덤 스미스는 부의 추구함에 있어서 생기는 문제들을 간과한 것이 아니라 ‘도덕감정론’ 을 통해서 올바른 인간의 기본 덕성을 먼저 제시하고 이러한 덕성의 배양에 관심을 기울여야지 그렇지 않고 이것을 무시하였기 때문에 자유시장과 사회에 커다란 문제점을 야기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 만이 아닌 ‘도덕감정론’ 이라는 또 다른 저서를 통해서 경제와 윤리의 두 가지 사상을 제시함으로서 오늘날의 경제문제와 사회문제의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을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주고 있다.

 

Ⅲ. 『애덤 스미스』가 던지는 메시지

 

  스코틀랜드의 작은 마을 커칼디에서 1723년 유복자로 태어난 애덤 스미스는 글래스고 대학과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한 후,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교육자와 저술가로 활동하였다. ‘도덕감정론’ 을 1759년 출간하여 유명해진 애덤 스미스는 귀족 자제의 개인교사가 되어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대륙을 여행하였으며 ― 국부론에서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풍부한 예가 어떻게 그렇게 체계적으로 제시되었는가 궁금해 했는데 여행을 통해 많은 연구를 했는가 보다. ― 여행에서 돌아온 후에는 평생을 독신으로 자신의 어머니와 사촌누이와 함께 고향에서 살았다. 그는 고향에서 수년간의 준비작업 끝에 1776년 ‘국부론’ 을 발간하였으며, 말년에는 세관장으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주요 저작인 ‘국부론’ 과 ‘도덕감정론’ 을 수차례 수정하는 작업을 하였다. 그는 1790년 자신의 생을 마감하였는데, 죽기 직전 ‘도덕감정론’ 의 6판을 위해 자신의 저작을 대대적으로 개작하였다. ― 나는 애덤 스미스를 ‘도덕감정론’ 보다는 ‘국부론’ 을 통해서만 잘 알고 있다. 정작 그는 죽기 직전 ‘도덕감정론’ 의 완성에 몰입하였으나 후세는 그것에 대해 까맣게 잊고 오로지 부의 증진을 위해서만 살아가고 있다. ―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애덤 스미스는 경제학자로, ‘국부론’ 을 통해 경제학을 사회과학의 하나로 자리 잡게 한 저술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회사상사에서 그리고 개인의 지성사에서 보면, 일찍이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 으로 보다는 ‘도덕감정론’ 으로 먼저 알려졌다. 애덤 스미스는 당시는 경제학이 학문으로 자리 잡기 전이었기 때문에, 경제학을 도덕철학자나 정치철학자들이 많이 가르쳤다. 애덤 스미스는 1740년대 말부터 에든버러에서, 그리고 1750년대 초부터는 글래스고에서 수사학, 논리학, 도덕철학 등을 가르쳤는데, 그의 강의 가운데에는 현재 경제학이라고 불릴 만한 내용들이 많이 들어 있었다. 애덤 스미스는 자신의 도덕철학 강의에 기초하여 1759년 ‘도덕감정론’ 이라는 책을 내었다.

  ‘도덕감정론’ 은 당시 도덕 철학자들의 이론을 체계화하는 동시에 새로운 관점에서 도덕철학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인간은 어떠한 능력 덕분에 도덕적 인간이 될 수 있는가, 도덕 가치란 어떤 것인가 혹은 도덕 덕목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애덤 스미스는 다루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애덤 스미스를 일약 세계적인, 당시로 말하자면 유럽에서 굉장히 유명한 도덕철학자로 만들었다. 이에 따라 ‘도덕감정론’ 은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스페인어로 번역이 되었다. 바로 이 ‘도덕감정론’ 이 애덤 스미스에게는 첫 번째 책, 다시 말해 공식적으로 애덤 스미스 자신의 의지에 따라 출판된 첫 책인 것이다.

  그 후 17년이 지나 애덤 스미스는 자신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저서인 ‘국부론’ 을 출간하였다. ‘국부론’ 은 ‘도덕감정론’ 보다 훨씬 더 세인들의 주목을 받았다. 사실 많은 사상가들 중에서 자신의 생애에 단 두 권의 책을 내고, 그 두 권의 책으로 세계적인 사상가가 된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런데 애덤 스미스는 자기 자신이 ‘국부론’ 의 저자가 아니라 ‘도덕감정론’ 의 저자로 남기를 원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자신의 의사와는 달리 애덤 스미스는 후대에 ‘국부론’ 의 저자로 알려졌으며, 경제학자로 알려져 있다. ― 나의 생각에 애덤 스미스는 ‘도덕감정론’ 을 통해 사람들이 덕성을 배양하는데 많은 노력을 하고 그러한 덕성이 개인에게 크게는 사회 전체적으로 완전해져야 ‘국부론’ 을 통한 경제 원리가 원활히 이뤄진다고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인간은 이기심에 의해 그러한 덕성을 간과하고 ‘국부론’ 이 경제학의 시초라며 중시하다 오늘날과 같은 많은 경제 문제를 야기하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역사적으로 자유방임주의, 수정자본주의 같이 경제 원리를 사회에 접목함에 있어서 야기되는 문제를 줄이려고 노력했음에는 틀림이 없다. 그렇지만 그 원리들을 이끌어내는 근간이 되는 개인의 본성이 바로 잡히지 않는 한 끊임없는 사회문제는 계속해서 나타날 것이고 이를 볼 때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 은 시사 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에서 자신의 경제행위와 자신의 도덕 감정 또는 도덕 판단이 갈등을 일으키거나 모순적 상황을 초래하는 경우에 종종 직면한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경제 원리와 도덕 원리는 끊임없이 충돌한다. 따라서 경제라는 사회현상을 다루는 것이 경제학이고, 윤리 혹은 도덕 덕목을 다루는 것이 윤리학 또는 도덕철학이라면, 경제학과 윤리학은 갈등이나 긴장의 관계를 보여줄 것이다.

  애덤 스미스는 두 개의 사상체계를 모두 제시하였다. 그의 평생의 수작인 유일한 두 권의 책에서 말이다. 이제 여기에서 내가 의문을 가진 부분이 문제화되고 있다. 과연 애덤 스미스가 제시한 경제학과 윤리학이 일관성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애덤 스미스가 제시한 근대사회에서 일어나는 경제행위가 과연 그가 ‘도덕감정론’에서 제시한 것처럼 도덕적일 수 있는지의 문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개인 차원에서 도덕과 이익의 조화 문제, 사회 차원에서 도덕적 질서와 경제적 효율성의 조화 문제, 바로 이러한 문제를 경제학자이자 도덕철학자인 애덤 스미스가 나에게 안겨 주었다.

 

  사회과학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근대사회라는 개념은 대체적으로 상업의 발달에 따라 형성된 시민사회를 의미한다. 애덤 스미스는 이를 ‘국부론’에서 매우 간결하게 정리해 두고 있다. “노동 분업이 일단 완전히 정착되면, 한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 중 매우 작은 부분만이 그 자신의 노동생산물로 공급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 중 훨씬 많은 부분에 대해서는, 자신의 노동생산물 중 자기 소비부분을 초과하는 잉여부분을 타인의 노동생산물 중 자신이 필요로 하는 부분과 교환함으로써 조달한다. 모든 사람은 이처럼 교환으로 살아가며 어느 정도는 상인이 된다. 그리고 사회 자체는 정확히 상업사회로 성장한다.”(『국부론』1편 4장). 우리는 근대사회에 대한 애덤 스미스의 이러한 개념적 정의를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다. 실제로 우리는 근대사회를 시장에서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들로 이루어진,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회질서를 위한 새로운 정치질서가 형성되는 사회로 이해한다.

  그런데 근대사회를 상업사회라고 규정하고 나면, 이 상업사회에 대해서 이러한 질문을 가지게 된다. 과연 개인들간의 관계가 상업 활동 속에서 교환관계만을 통해 형성된다면, 그러한 개인들은 도덕적일 수 있을까? 그러한 개인들은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에 급급해서 도덕적 의무나 사회적 책임을 소홀히 하지 않겠는가?

  근대사회 혹은 상업사회가 안고 있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이론 또는 해석으로 어떠한 것이 있는가를 살펴보면, 두 가지 형태의 사고를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도덕적 이상주의라고 불리는 다소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사상이고, 다른 하나는 경제주의라고 불리는 16 ~ 17세기경에 나타난 매우 근대적인 사상이다.

  플라톤의 정치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는 도덕적 이상주의는 상업의 발달에 따른 부의 축적으로 사회구성원들 간의 관계와 정치질서가 타락한다고 보는 관점이다. 경제라고 불리는 것은 사실 천박한 것이고, 중요한 것은 영혼의 덕성이나 이데아의 절대적 가치이다. 이러한 도덕적 이상주의는 자연히 상업사회를 비도덕적 사회로 파악한다.

  반면 경제주의에 다르면, 상업행위에 기초한 사회질서는 도덕에 기초한 사회질서 못지않게 효율적이며, 인간의 도덕적 성숙과 완성에 도움이 된다. 상업은 인간의 생활에 굉장히 유익할 뿐만 아니라, 사회구성원간의 관계는 상업행위에 필수적인 거래와 협상을 통해 갈등과 파괴의 질서가 아니라 평화로운 질서로 발전한다. 각각의 개인들이 도덕적으로 반드시 정당해야만 사회가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정당한 가격 그리고 정당한 상품을 서로 주고받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서로 관계를 맺고 따라서 사회는 질서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사실 경제주의는 우리가 현실에서 가지고 있는 관념, 시장의 경쟁을 통해 효율적인 사회질서가 형성될 것이라는 사고를 보여주고 있다. 도덕적 이상주의가 상업을 비도덕적이라고 바라본다면, 경제주의는 상업을 인간의 감정을 순화시키는 개인들 간의 소통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두 사상은 현재에도 우리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예를 들면 경제주의의 색채를 강하게 띤 주장이 있다. 개인들이 자유롭게 상업활동을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자유가 보장되고, 민주주의가 보장된다. 따라서 상업행위나 교환행위 혹은 시장에서의 경제행위는 절대적으로 자유롭게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주장에 맞선 도덕주의도 있다. 비도덕적인 혹은 인륜을 위반하는 사건들이 일어나면, 우리는 인간의 도덕적 타락이 물질만능주의 때문에 일어나고 물질만능주의 밑에는 경제성장과 상업발달이 놓여 있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우리 의식에 공존하고 있는 인간의 감정을 순화시키는 상업과 비도덕적 상업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경제에 대해 혹은 근대사회에 대해 가지고 있는 모순적이지만 기본적인 관념이다. 근대사회에 대해 어떤 사상가들은 개인들간의 관계를 부드럽게 해주는 경제질서가 형성되어 있으므로 사회가 무궁무진하게 발전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사회주의자나 도덕론자들은 상업사회에서는 착취가 지배하거나 도덕적 타락이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애덤 스미스에게는 두 가지 사상이 공존하고 있다. 『국부론』에서는 경제주의적 사고가 지배적이고, 『도덕감정론』에서는 도덕적 이상주의가 지배적이다. 이를 단순하게 설명하면, 애덤 스미스의 초기 저작인 『도덕감정론』은 당대 스코틀랜드 도덕철학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도덕적 이상주의의 태도를 위하고 있으며, 후기 저작인 『국부론』은 점점 영향력을 확대해가던 프랑스의 경제학자들과 스코틀랜드의 계몽 사상가들의 관점을 반영함으로써 경제주의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매우 유명하다. 나는 고등학교 경제시간에 처음 접했던 것 같은데 “국부론”을 읽으면서 단 한번 나온 것에 무척 놀라웠다. 이 ‘보이지 않는 손’ 이라는 표현을 900여 쪽이 넘는 “국부론”에서 단 한번, 400여 쪽에 달하는 “도덕감정론”에서도 단 한 번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표현을 애덤 스미스는 한편으로는 경제주의를 강조하기 위해, 다른 한편으로는 도덕적 이상주의를 강조하기 위해 썼다. 우리는 많은 경우 자신의 주장을 강조하기 위해 또는 남을 더 잘 설득하기 위해 비유나 은유를 사용한다. 그런데 스미스와 같은 대사상가조차 동일한 은유로 서로 다른 두 사상을 담아낸다면, 우리는 누군가가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방법이 아니라 은유나 비유로 자신의 주장을 드러낼 때 조심스럽게 내용을 검토하여야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이지 않는 손’ 이 가지는 의미는 면밀하고 비판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Ⅳ. 『국부론』

 

“국부론”의 서두에서 애덤 스미스는 “인간은 본성적으로 교환자이다”라고 주장한다. “국부론”의 1편 1장에 다르면, 노동생산력의 향상, 곧 노동과정에서 발휘되는 숙련 ․ 기교 ․ 판단의 향상의 대부분은 분업의 결과였다. 그런데 수많은 이익을 가져오는 분업은 그것이 낳을 일반적 풍족을 예상하여 인간이 자신의 지혜로 사회에 도입한 것은 아니다. 분업은 인간성의 어떤 성향으로부터 매우 천천히 나타나게 된, 점진적이긴 하지만 필연적으로 발생한 결과이다. 그 성향이란 하나의 물건을 다른 물건과 교환하고 거래하는 성향이다(「국부론」1편 2장). 물론 애덤 스미스는 이 성향이 더 이상 설명할 수 없는 인간 본능 중의 하나인지 또는 이성과 언어의 속성에서 나오는 필연적인 결과인지 하는 문제는 “국부론”에서 다룰 주제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인간은 교환하려 하지만 동물들은 교환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애덤 스미스는 인간이 인간인 것은 교환하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교환자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교환자일 때에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이다. 이는 앞에서 언급된 경제주의적 인간관과 동일하다. 경제주의에 따르면, 경제행위 혹은 상업행위는 인간이 자신의 사회적 혹은 합리적 본성을 삶 속에서 드러내 보여주는 하나의 고유한 표현양식이다. 결국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근본적으로 경제주의적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된 애덤 스미스의 주장은 ‘사회구성원 개개인이 상인으로서 행하는 사적인 경제활동은 보이지 않는 손의 인도를 받아 상업사회 전체의 이익을 증대시킨다.’ 라는 명제로 이어진다. 애덤 스미스의 주장은 “국부론” 4편 2장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모든 개인이 …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자신의 자본을 국내산업의 부양에 사용하고, 따라서 국내산업의 생산물이 최대의 가치를 갖도록 국내 산업을 이끌려고 노력할 때, 그들은 필연적으로 사회의 연간소득을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만들려고 일하는 것이 된다. 그는 사실상 일반적으로 공공이익을 증가시킬 의도가 전혀 없으며, 자신이 얼마나 그렇게 하고 있는지도 전혀 모른다. … 그는 단지 자신의 안전만을 추구할 뿐이고 … 단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할 뿐이다. 그리고 이 경우에도 그는 다른 많은 경우에서처럼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전혀 자신의 의도에 들어 있지 않은 목표를 추구하게 된다. … 개인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실제로 사회의 이익을 증가시키려고 의도했을 때보다 훨씬 효과적으로 사회의 이익을 증진시킨다.”

  경제주의에서 시작하여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은유로 종결되는 “국부론”의 핵심사상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상업사회에서 모든 개개인은 상인이고, 개개인이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는 단지 자기 자신에게만 이익을 가져다줄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이익을 증대시킨다. 이처럼 매우 환상적인 명제를, 이렇게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세상이 이루어질 것이 틀림없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하는 명제를 스미스는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경제주의는 매우 극단적인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주의에 따르면, 인간은 경제행위를 하는 존재인데, 이러한 개개인의 경제행위는 조화로운 질서, 사회의 이익을 증대시키는 질서를 낳는다.

  결국 보이지 않는 손이라 불리는 신적 존재는 개인의 경제행위가 사회전체의 경제적 효율성과 안정성을 가져오도록 보장함으로써, 상업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개개인의 도덕적 부담이나 책임을 감면 해주기에 이른다. 상업사회에 살고 있는 개인은 자신의 경제행위에 대하 도덕적 고민을 할 필요가 전혀 없다. 상인은 도덕적 고민을 하지 않고 자신의 사익만을 추구하더라도 결국에는 사회 전체의 이익을 증대하는 데 기여하기 때문에, 결과론적으로 도덕적으로 정당한 행위를 하는 개인으로 인정받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를 가져오는 힘은 다름 아닌 보이지 않는 손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전통적 의미의 도덕 개념은 사회적 이익의 개념으로 대체되고 만다는, 낡은 도덕 개념은 사라지고 새로운 도덕 개념이 등장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도덕 개념은 사익을 추구하는 개인에게 보이지 않는 손의 자비를 베풂으로써 도덕적 자유를 준다. 우리는 이를 '경제적 자유주의‘ 라 부를 것이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 나타난 이러한 ’경제적 자유주의‘의 경향에서 세 가지 핵심적인 명제를 도출할 수 있다.

  애덤 스미스에 따르면(「국부론」3편), 필요가 일반적으로 만들어내는 사물의 질서는 어느 나라에서나 인간의 자연적 성향에 의해 촉진된다. 인간이 만든 제도가 이러한 자연적 성향을 방해하지 않았다면, 어디에서나 도시는 주변 지역의 개량 ․ 경작이 유지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는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인간의 자연적 성향이란 합리적인 경제행위를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인류 역사의 발전단계를 보면 개인의 처지에서 우선적으로 가장 합리적인 행위는 농어에 투자하는 것이고, 다음에는 국내 상업에 투자하는 것이고, 마지막에는 해외 무역에 투자하는 것이다. 개인의 이러한 행위유형의 변화에 따라 인류 사회는 농경사회로부터 상공업사회로, 최종적으로는 국제무역사회로 발전한다. 스미스의 경제주의는 인류 사회의 역사발전이론으로 이론화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애덤 스미스 이론의 방법론적 특성, 한편으로는 개인 행위로부터 사회질서와 구조를 유추하는 태도,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적 관점과 초역사적 관점을 결합시키는 태도, 이 두 가지 방법론적 특성을 확인하는 동시에 이 방법론의 한계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자유로운 개인들의 경제행위로부터 사회질서가 형성된다는 주장은 사회질서가 개인의 자유를 완전히 보장하지 않는 상태에도 적용되기 때문에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모든 개인이 자신의 상태를 개선하려고 하는 자연스러운 노력은 자유롭고 안전하게 개인이 쏟을 수 있게 허용되면, 너무나 강력한 원동력이기 때문에 다른 아무런 도움 없이 그것만으로도, 사회에 부와 번영을 가져다줄 수 있다. 더욱이 인간이 만든 어리석은 법이 이러한 개인의 자연스런 노력을 방해하는 수많은 장애물을 만들고, 인간이 만든 이런 장애물들이 개인들의 자유를 항상 침해하거나 개인들이 꾸준하고 안정적으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을 방해하더라도, 개인의 자연스러운 노력은 이런 모든 방해와 장애를 극복할 수 있다. 경제적 자유주의는 이제 사회질서 전체에 대한 경제주의,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로 확대되었다. 경제적 자유주의는 한 사회의 정부나 입법가가 개인의 경제행위를 방해할 필요가 없으며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하는 것에 멈추지 않고, 그러한 방해조차도 자신의 상태를 개선하려는 개인의 자연스런 노력인 경제활동을 통해 극복될 것이라는 주장을 한다. 단순화하면, 개인의 경제활동, 사익을 추구하는 합리적 사회활동이 잘못된 법과 제도를 고쳐나갈 것이다.

  마지막 명제는 경제주의의 전형적 주장을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상업과 제조업은 이전에는 인근 주민들과 끊임없는 전쟁상태에 있었으며 또한 영주들에 대하여 노예적 종속 상태에 살았던 시골 주민들 사이에 질서와 훌륭한 정부뿐만 아니라 개인의 자유와 안전을 점차로 도입한다. 애덤 스미스는 이 사실이 거의 관찰되지 않았지만 상업과 제조업의 역사적 귀결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이 명제는 사회의 질서와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다른 어떤 것보다 상업과 제조업의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개인의 경제행위에 대해 자유를 보장하기만 하면, 인간 사회를 조화롭고 평화롭게 할 법과 정부 그리고 다른 여러 가지 사회제도가 저절로 생겨난다. ‘경제발전이 민주질서를 낳는다’ 는 명제가 이 주장의 현대적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은 단순히 경제주의하고 하는 주장을 벗어나서, 인간의 역사발전에 대한 이론 그리고 미래에 대한 이론으로까지 발전한다고 하는 측면에서 경제학이 역사과학으로 발전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든다. “국부론”은 단순히 경제주의에 머무르지 않고 인간사회에 대한 정치경제학으로 자리 잡는다.

 

Ⅴ.『도덕감정론』과 ‘애덤 스미스 문제’

 

  “도덕감정론”에서 애덤 스미스는 도덕철학의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어떻게 인간이 도덕적으로 될 수 있는가? 무엇이 도덕 덕목인가? 이 두 가지 질문에 답하는 것이 도덕철학이다. 애덤 스미스에 따르면, 인간이 도덕적으로 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도덕적 감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이 모든 도덕적 감정의 근원에 놓여 있는 감정은 ‘동감’ 이라 불리는 감정이다.

  동감이란 모든 사람들이 동인한 존재(인류)로서 어떤 상황이나 조건에 대해 비슷한 감정을 갖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에서 나타나는 심리상태의 변화를 의미한다. 사람은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면서 비록 정도는 약하지만 비슷한 고통을 느낀다. 도덕 판단의 원리로서 동감의 원리를 간단히 설명하면, 사람들은 타인의 행동과 동기를 자신의 동감에 근거해서 적절하다고 혹은 칭찬 받을 만하다고 판단한다. 자신의 행위에 대한 도덕 판단에서도 동일한 동감의 원리가 작동한다. 이 경우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과 동기에 대해 공정하게 판단 내릴 수 있는 불편부당한 존재를 상정한다. 애덤 스미스는 이 존재를 불편부당한 관객 혹은 마음속의 사람이라고 부른다. 이는 다름 아니라 인간의 도덕적 양심이다.

  동감의 원리에 기초하여 세워진 스미스의 도덕철학은 분명 타인을 많이 생각하는 이론이며, 따라서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타적 이론이 될 가능성이 높다. 비교해보면, “국부론”은 개인의 경제적 합리성을 강조하고 사익을 추구하는 교환행위에서 출발하며 사회이론의 체계를 세우고 있는 반면, “도덕감정론”은 타인을 고려하는, 역지사지하는 동감의 원리에 기초하여 도덕철학 체계를 세우고 있다. “국부론” 세계가 이기심의 세계라면, “도덕감정론”의 세계는 이타심의 세계이다. 이처럼 “국부론”과 “도덕감정론”에서 나타나고 있는 대립하는 두 세계를 “도덕감정론”의 보이지 않는 손을 검토함으로써 확인해 보자.

  일곱 개의 부로 나누어져 있는 “도덕감정론”의 4부에서 스미스는 효용이 도덕판단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고, 그 과정에서 보이지 않는 손을 도입한다. 스미스에 따르면, 자연은 인간을 기만한다. 인간은 막상 죽을 때가 되면 자신이 고생을 겪으면서 추구하였던 경제적 부나 사회적 지위가 허망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만, 살아 있는 동안에는 자연이 자신의 심리에 강제하는 원리에 따라 허망한 가치를 좇는다. 하지만 인간이 자연의 기만에 따라 부나 명예를 좇는 것이 인류 전체의 역사에서 볼 때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이러한 기만 때문에 인간은 근면하게 일하며 자신이 살아가는 환경을 개척한다. 그러나 도덕철학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어디까지나 기만이다.

  외딴 섬에서 혼자 살아가는 사람은 큰 저택을 짓고 사는 것과 조그마한 동굴에 들어가 사는 것 중 어떤 것이 좋고 나쁜 것인가를 쉽게 판단하지 못한다. 그러나 일단 모여 살게 된다면, 부나 권세를 가짐으로 해서 타인의 찬양을 받고 타인의 부러움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부와 권세를 추구하게 된다. 이처럼 사람들이 타인들의 찬양 때문에 부와 권세를 추구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것, 바로 이것이 신이 인간에게 행하는 도덕적 속임수이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참된 행복이나 평온을 위해 물질적 부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자신을 부러워할 것이기 때문에 물질적 부를 추구한다.

  다시 애덤 스미스의 이론으로 돌아가면, 자연이 이런 식으로 우리를 기만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인류의 근면성을 일깨워주고, 계속해서 일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속임수이다. 맨 처음에 인류를 고무시켜 땅을 경작하게 하고, 집을 짓게 하고, 도시와 국가를 건설하게 하고, 과학과 기술을 발명하게 한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이러한 속임수 때문에 인간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쓸모없는 대륙과 대양을 개척하여 생존을 위한 식량의 새로운 보고로 만든다. 이러한 인류의 노동으로 토지의 비옥도는 증가하였고, 토지는 훨씬 더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거만하고 무정한 지주가 자신의 넓은 들을 바라보면서 그의 형제들의 궁핍에 대해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그곳에서 자란 수확물 전부를 자기 혼자서 소비하겠다고 상상하는 것은 전혀 쓸데없는 일이다. ‘눈은 배보다 크다’는 소박하고 평범한 속담이 이 지주의 경우에 잘 들어맞는다. 사람의 눈은 들판을 모두 쳐다볼 수 있지만 인간의 위는 들판에서 생산되는 모든 것을 다 먹지 못한다. 인간의 욕심은 무한하지만, 인간이 실질적으로 채울 수 있는 충족능력은 제한되어 있다. 인간 욕망의 허황됨과 지나침에 대하여 이 격언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지주들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인도되어, 토지가 모든 주민들에게 평등한 몫으로 분할되었을 경우 일어났을 것과 거의 같은 수준의 생활필수품을 모든 사람들에게 분배하게 된다. 지주들은 구체적으로 의도하거나 알지 못하면서도, 이렇게 자신의 욕심만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사회의 이익을 증진시키고, 인류라는 종족의 번영을 촉진하는 수단을 제공하게 된다.

  일견 스미스의 “국부론”에서 나왔던 주장이 “도덕감정론”에서 되풀이되는 것 같다. “국부론”에 따르면, 개인은 자기 자신이 의도하지 않으면서도 사회의 부를 증진시킨다. “도덕감정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지주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사람들은 인간 세계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존재의 의도를 알지도 못하면서도, 사회의 이익을 증진시키고 종족이 번영하는 데에 필수적인 수단을 제공한다. 이렇게 보았을 때, “국부론”의 ‘보이지 않는 손’이라 고하는 은유와 “도덕감정론”의 ‘보이지 않는 손’ 이라고 하는 은유, 각각 단 한 번씩 사용되었던 은유가 동일한 내용을 지닌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도덕감정론”에서 이어지는 글을 읽어보면, 의심을 가지게 된다. 신의 섭리가 대지를 소수의 귀족과 지주들에게 분할하였을 때, 신의 섭리는 이 분배에서 제외된 사람들을 망각하지 않았다. 가난한 사람들도 대지가 산출하는 것에 대한 그들의 몫을 향유한다. 더욱이 인간 생활의 참된 행복을 구성하는 것에 관한 한, 그들은 지주나 영주들보다 결코 열등하지 않다. 더구나 대로변에서 햇볕을 쬐고 있는 거지조차도 부자들이 그토록 노력해서 얻으려고 하는 안전을 이미 누리고 있다. 따라서 인간이 실질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은 국왕이나 부자가 추구하는 권력, 명예, 물질적 풍요와 같은 것들이 아니라 좀 더 단순하고 참된 것, 영원하고 실질적인 행복이다.

  여기에서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의 차이는 분명히 드러난다. “도덕감정론”은 보이지 않는 손이 부의 평등한 분배 혹은 최소한의 물질적 생존조건을 모든 사람들에게 보장해줄 것이므로,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참되다고 하는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사익을 추구하면서도 도덕적 부담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상인에게 위안을 주는 “국부론”의 기본 주장과 완전히 다르다. 참된 행복이나 도덕적 옳고 그름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이기적 동기에 따라 행위를 해나가면 모든 경제인은 보이지 않는 손의 인도로 사회에 기여하게 될 것이며 따라서 도덕적으로 회피하게 해주지만, “도덕감정론”은 개인들에게 경제적 욕구를 추구하는 것을 포기하고 도덕적 책임감을 갖도록 권유하고 있다.

  자연의 기만이 사회적 권위와 부에 대한 사라들의 환상을 낳고 사람들이 이 환상을 쫓아 경제활동을 할 때, “도덕감정론”은 궁극적으로 사람들에게 이 환상으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행복을 발견하는 도덕적 삶을 누리라고 권유한다. 그러나 “국부론”은 사람들이 경제행위를 하는 기본 동기를 개인의 사적 안정과 이득을 추구하는 합리성이라고 규정하고, 개인의 경제행위가 의도되지 않은 사회적 이익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규범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고 경제인들을 안심시킨다. 한편에는 타인을 고려하고 참된 행복을 추구하는 도덕적 인간과 그들의 세계가 존재하고, 다른 한편에는 교환본성을 지니고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경제인과 그들의 세계가 존재한다. “도덕감정론”의 세계에서는 비록 권력과 부의 불평등이 존재하더라도 사람들은 그러한 불평등에 개의치 않고 신의 섭리가 보장하는 기본적인 물질적 삶에 만족하면서 도덕적 덕목과 행복을 좇는다. “국부론”의 세계에서는 상업경제의 효율성에 기초하여 사회의 경제가 발전하고, 부의 증대가 부의 불평등을 낳는 문제를 포함한 모든 사회의 질서 문제를 해결해 준다.

  “국부론”과 “도덕감정론”이 제시하는 두 유형의 인간, 두 개의 세계는 현상적인 일관성에도 불구하고 본질에서는 엄청난 괴리와 갈등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괴리와 갈등을 “애덤 스미스 문제” 라 지칭하며, 과연 경제활동의 주체인 개인은 애덤 스미스 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행동해야 할 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Ⅵ. 문제의 해결...하지만

 

  애덤 스미스가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은유를 통해 자신의 두 저작에서 표현한 두 가지 사상, “도덕감정론”의 도덕적 이상주의와 “국부론”의 경제주의 사이의 괴리와 갈등은 과연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스미스와 같이 위대한 사회사상가가 나와 같이 평범한 사람들이 보아도 드러나는 두 저작 간의 모순을 파악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에 대해 몇 가지 추측을 해볼 수 있다.

  우선 스미스가 자신이 사용한 보이자 않는 손이라는 은유의 수사학적 힘 때문에 자기 자신의 사상에 내재한 모순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추측을 해볼 수 있다. 사실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보이지 않는 손으로 요약되는 “국부론”과 “도덕감정론”의 주장은 면밀한 검토를 거치기 전에는 분명 동일한 내용, 개인들의 행위가 사회적 이익을 가져다준다는 근대사회의 조화로운 존립을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의미에서, 비유가 가지고 있는 동일한 구조 형태와 유사성 때문에 스미스 자신도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의 차별성을 이해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대부분의 스미스 해석자들도 이런 이유로 오해에 빠졌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다음으로, 자유주의적인 사고, 개인의 행위가 보이지 않는 손의 작동으로 조화로운 사회직서를 가져올 것이라고 하는 자유주의적인 사고가 장하게 작동함으로써 스미스 자신도 보이지 않는 손을 받아들이고, 따라서 보이지 않는 손이 가지고 있는 실질적인 의미, 특히 “도덕감정론”에서 나타나고 있는 실질적인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이러한 추측과 함께 좀 더 강한 해석을 내세우고 싶다. 간단히 말해, 스미스는 이 두 주장 사이에 모순이 존재하지 않을 수 있는, 어떤 새로운 사상을 제시하고 있으며, 이는 개인들의 행위가 자유롭게만 추진된다면, 도덕적 이상주의에서 원하는 참된 행복도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주장이다.

  이를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의 서문에서 정치경제학의 원리로 제시하고 있다. 한 사회의 풍족 또는 결핍은 혹은 사회의 노동생산력에, 혹은 사회 내의 자원 배분과 생산물 분배에 따라 결정된다. 그런데 인류 사회의 역사를 보면 좀 더 결정적인 요인은 사회의 노동생산력이다. 노동생산력이 굉장히 발달된 사회에서는 10배, 100배의 생산물을 소비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분배의 불평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조차도 야만인들보다는 훨씬 큰 물질적 풍요를 누릴 수 있으며 도덕적 생활을 할 수 있는 물질적 기반을 갖는다. 그러므로 “국부론”의 정치경제학 이론은 노동생산력을 증대시킬 수 있는 이론을 제시하고, 이를 통해 “도덕감정론”이 추구하려고 하는 도덕적 이상을 달성하도록 해 준다. 경제주의와 도덕적 이상주의가 일견 극단적으로 차이가 나는 것 같지만, 정치경제학이라는 하나의 과학적 이론을 통해서 근대사회의 구성원들이 합리적 활동을 하면서 노동생산력을 증진 시킬 수 있는 방법을 이해한다면, 그들은 도덕적 이상도 쉽게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에 대한 과학적 이해와 그에 기초한 합리적 행위가 도덕적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다.

 

  지금 내가 배우고 있는 경제정책이라는 과목도 이 정치경제학의 한 부분이 아닌가 생각된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는 수많은 경제문제들과 비합리적이고 비도덕적인 경제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애덤 스미스가 표방한 두 마리 토끼! 즉, “국부론”에서의 경제주의와 “도덕감정론”에서의 도덕적 이상주의를 동시에 다 잡기위해서는 경제정책이라는 도구를 적절히 잘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정책을 만들고 다루는 존재는 사람이다. 경제정책을 무조건 믿고 거기에만 의지할 것이 아니라 좀 더 근본적이 두 문제. 경제와 도덕이라는 경제주의와 도덕적 이상주의에 대해 거듭 고민하여 불완전한 시장체제에서 불완전한 인간이 누리는 경제를 거듭 연구해야 할 것이다. 나 또한 경제학도이자 경제 주체로써 애덤 스미스와 같은 고민에 빠져보고 학문에 매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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