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제27030호> 신비한 침의효과 현대과학으로 풀리나
  작성자 :      작성일 : 07-11-21 00:00   조회 : 1777  

미국 국립보건원(NIH)은 10년 전인 1997년 한의학의 침(鍼)에 대해 ‘수술 후 화학요법에 따른 구역, 구토, 수술 후 통증 등을 억제하는 데 효능이 있다. 또 약물중독, 뇌졸중 재활, 두통, 월경 시 경련, 섬유근육통, 관절염, 요통, 천식, 불안·공포, 불면증의 대체 치료법으로 유용하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세계 최고 권위의 기관이 침의 효능을 최초로 공식 인정한 것이었다. 그로부터 10년 동안 침의 과학적 효과를 입증하기 위한 수많은 연구들이 전 세계에서 진행돼왔다.

지난 8~11일 미국 볼티모어 메릴랜드대학에서 열린 미국침연구학회 학술 대회에서는 ‘지난 10년간 NIH가 중심이 된 침 연구 성과’를 비롯해 ‘두통에 대한 침의 과학적 효과’ ‘독일의 침 연구과제’ 등 논문 30여 편이 발표됐다. 침은 더 이상 동양의 ‘신비한 의술’이 아니라, 전 세계 의료계가 질병의 직접적인 치료 또는 보완대체 치료의 중요한 분야로 자리잡고 있다. 아울러 침의 효과를 과학적인 연구를 통해 밝히려는 노력도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침의 효과, 과학적으로 증명하라”

동양에서 침이 질병 치료에 이용된 시기는 기원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 고서(古書)인 ‘황제내경(黃帝內經)’에 12경락과 침에 대해 소개돼 있다. 이처럼 침은 2000년 이상 중국과 한국 등 동양에서 중요한 치료법으로 이용돼 왔지만, 기본 원리인 ‘경락(經絡)’과 ‘기(氣)’ 등이 해부학, 생물학, 생리학 등으로 설명되지 않아 효과를 과학적으로 입증하는데 애를 먹어 왔다. 침의 치료 효과를 경험하면서도 막상 “왜 그런 효과가 있는가”라고 물으면 애매한 ‘경락’과 ‘기’의 개념을 들고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현대 과학이 푼 침의 효과는?

침의 효과에 대한 과학적 연구는 첫째, ‘경락’이나 ‘기’가 인체에 실제로 존재하는가 둘째, 침으로 어떤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가 등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진행됐다.

경락이나 기의 실체를 밝히기 위한 연구에는 해부학, 생물학, 신경학, 세포학 등 현대 의학의 모든 지식이 총 동원됐다. 서울대 의대를 나와 북한 평양의대 생리학 교수를 지낸 김봉한 박사의 ‘봉한학설’도 그 중 하나다. 인체에는 신경계, 혈관계, 림프계와 다른 제3의 순환계가 있는데, 경락을 잇는 관(봉한관)을 따라 액체(봉한액)가 흐르며, 그 속에 세포를 재생하는 ‘산알’이란 일종의 DNA 알갱이가 있다는 주장이다. 이 학설은 국내외의 관심을 모았으나, 후속 연구가 나오지 않고 있다.

경락을 신경계로 설명하는 ‘신경학설’도 있다. 대표적인 사람이 중국의 저명한 침 연구학자인 북경대 신경과학연구소 한제생(韓濟生) 교수. 합곡혈(엄지와 검지 사이)에 침을 놓으면 안면신경에 변화가 생기는 반면, 이곳을 마취한 뒤 침을 놓으면 안면신경에 변화가 없다는 실험을 통해 침의 효과가 신경으로 전달된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호르몬 등의 변화를 설명하는 ‘내분비학설’도 있다. 캐나다의 포머란츠 박사는 개 실험에서 인중혈(코와 입 사이)에 침을 꽂으면 혈압, 맥박수, 혈중 산소량 등이 증가하는데, 다른 곳에 침을 놓으면 이런 변화가 없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침을 놓으면 엔돌핀과 같은 호르몬이 분비되는데 그 양이 침을 놓은 뒤 20분 후 최고점에 도달한다고 한다.

그밖에 ‘경혈’의 피부는 다른 피부보다 약해 말초신경에서 가한 통증 자극 반응이 침을 놓은 뒤에는 나타나지 않아 통증이 억제된다는 ‘전기 자장학적 연구’도 시도됐다. 이 주장에 따르면 ‘경혈(經穴)이란 전기적 저항성이 낮고 전도성은 가장 높은 점’이다.

이 같은 연구에도 불구하고 아직 ‘경락’ ‘경혈’ ‘기’를 완벽하게 설명해주는 과학 모델은 나오지 않고 있다. 이에 따라 최근에는 경락이나 기의 실체를 밝히는 연구보다 침을 질병 치료에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 하는 임상 연구에 더 많은 관심이 쏠리고 있다. ‘경락’이든 ‘신경’이든 침으로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지를 규명하는 것이 현실적이란 입장이다.

◆침의 질병 치료 효과, 연구 더 필요해

침의 치료 효과를 입증하는 국내외 연구는 많다. 미국의 저명한 침 연구자인 메릴랜드대 통합의학센터 버먼 교수는 관절염 환자 570명을 대상으로 침 치료를 한 결과 침 시술을 받은 환자가 그렇지 않은 환자보다 통증은 40% 감소한 반면, 관절 기능은 40% 개선됐다고 보고했다.

미국 듀크대 메디컬센터 연구진은 수술 직전 침을 놓았더니 수술 뒤 마취에서 깨어났을 때 통증을 덜 느꼈으며, 수술 뒤 투여한 진통제 양도 훨씬 적었다고 보고했다.

영국서 발간되는 권위 있는 학술지 ‘신경학연구’는 지난 2월호에 ‘침의 과학’에 대한 특집호를 발간했다. 여기에는 뇌졸중, 파킨슨병, 우울증 등에 대한 침 치료효과를 규명하는 우리나라 전문가 논문 19편이 실렸다. 영국의 과학전문지 ‘네이처’도 ‘침이 파킨슨병을 개선하는 효과가 있을 수 있다’며 침의 효능을 일정 부분 인정했다.

한편 뇌과학 연구의 세계적 석학인 가천의대 뇌과학연구소 조장희 박사는 1998년 미국 국립과학원회보(PNAS)에 눈에 관련된 경혈에 침을 놓으면 뇌의 시각 피질 부위가 활성화된다는 논문을 발표,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조 박사는 그러나 지난해 경혈이 아닌 곳에 침을 놓아도 뇌가 똑같이 활성화된다는 것을 확인하고 98년 연구를 자진 철회한 바 있다. 이 사건은 침의 과학적 연구가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임형균 헬스조선 기자 hyim@chosun.com
/정시욱 헬스조선 기자 sujung@chosun.com
/ 도움말=전세일 포천중문의대 대체의학대학원 교수, 이혜정·박히준 경희대 침구경락과학연구센터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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