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읽기] 병원 없는 병원 / 김현정

등록 :2014-06-18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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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정 서울시립동부병원 정형외과전문의
김현정 서울시립동부병원 정형외과전문의
사하라사막 남쪽 아프리카 국가들은 병원도 의사도 부족하고 의료체계도 턱없이 부실하다. 한데 아이러니하게도 첨단 디지털기술이나 탈고정관념의 새로운 의료모델이 가장 먼저 시도되어온 곳도 바로 이곳이다. 당장에 마실 깨끗한 물도 없는데 무슨 첨단 타령이냐고? 대안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목마른 자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마른 땅에 우물을 판다.

가까운 병원도 반나절 이상 걸어가야 도달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몇 번씩 생계를 팽개치고 매번 병원에 와서 진찰받아라 검사받아라 하는 전통적 의료모델은 잘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두 가지 색다른 시도가 있었다. 첫째는 모바일기술이다. 병원을 더 짓고 의사를 더 배치하는 것보다 핸드폰을 뿌리는 게 더 빨랐다. 원조 단체들은 현지 언어로 된 문자메시지를 보낸다. 예를 들어 에이즈 증세를 간단히 설명해주고, 이런 증세가 나타나면 어디어디로 전화하라는 핫라인을 알려주거나 결핵치료 중인 환자들에게는 매일 약 먹을 시간에 딩동 알림 문자를 보내준다. 이런 접근이 만연한 난치병의 진단율과 치료율을 끌어올리는 데에 뜻밖의 성과를 내고 있다. 둘째는 준의료인의 활약이다. 정식 의료인들은 양성하는 데에 시간이 오래 걸릴 뿐 아니라 막상 양성을 마치면 오지로 가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아쉬운 대로 마을 사람 중 일부에게 실무 위주의 아주 기초적인 위생과 간단한 의료훈련을 받게 하였다. 이들은 마을에 거주하며 지속적으로 이웃을 돕고 의료기관으로 연결하는 긴요한 역할을 한다.

아프리카를 들여다보면 우리의 미래 모습이 거꾸로 읽힌다. 다가올 의료는 어떤 모습일까? 아마도 첨단기술은 계속해서 새로운 기기를 쏟아낼 것이다. 마치 공상과학영화에서 보듯이 아침에 일어나 소변을 보면 변기에 장착된 진단칩에서 현재 건강상태를 실시간으로 알려주며 오늘의 식단을 권고해준다든지, 리트머스종이처럼 생긴 작은 키트에 피 한 방울 똑 떨어뜨리면(마치 당뇨병 환자들이 집에서 혼자서도 수시로 혈당 체크 하듯이) 수많은 질병이 자동으로 분석되어 나온다든지 하여 병원에 갈 일이 대폭 줄어들 것이다. 병상 수를 키워온 대형병원 병실은 결국 호텔이나 요양원 실버타운으로 변신해야 할 것이고, 잉여 배출된 의사들은 경쟁을 뚫고 긴긴 수련 끝에 좁고 깊은 소수의 스페셜리스트로 생존할지, 아니면 아예 애초부터 준의료인 역할까지 커버할 각오로 두루 넓은 제너럴리스트가 될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사실 편리함이 꼭 좋은 것은 아니다. 환자가 진료실로 걸어 들어와 맞은편 의자에 앉을 때까지 의사는 벌써 많은 정보를 수집분석하고 있다. 걸음걸이와 자세와 안색을 본다. 눈을 뒤집어 보고 청진해보고 배를 눌러보고 다리를 두드려본다. 숙련된 의사들은 붕대를 풀며 상처에서 나는 냄새만 맡고도 배양검사 없이도 병균의 정체를 짐작한다. 오감에다 육감까지 총동원하여 밀도 높은 진료를 하고 있다. 이런 친밀하고 아날로그적인 진료풍경은 극소수 슈퍼부자들의 전유물로 전락하거나 훗날 인터넷 고분벽화에나 등장할 진귀한 풍경으로 남게 될지도 모른다.

병원에서 종이차트와 엑스레이필름이 사라진 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산업혁명에 맞먹는 도도한 디지털혁명의 파고는 단순히 정보통신 분야뿐 아니라 우리 삶의 영역 곳곳의 지형을 바꿔놓았다. ‘종이 없는 출판’, 점포 없이도 영업할 수 있는 ‘은행 없는 은행’, 재택근무자를 늘려가는 ‘회사 없는 회사’, 원거리 수강생을 위한 ‘학교 없는 학교’가 번성하고 있다. 의료가 최후의 보루처럼 버티고 있지만 언제까지 예외일 수는 없을 것이다. 병원 없는 병원은 먼 미래가 아니라 임박한 미래다.

김현정 서울시립동부병원 정형외과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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