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인희의 가족 이야기]
‘건강한 가족 = 건강한 조직’
기사입력 2015.12.15 12:14

일전에 벤처 창업가들 모임에 초대 받아 간 자리에서 가족을 주제로 특강을 한 적이 있다. 강의에 앞서 “가족! 하면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르나요?” 참석자들에게 물었다. 대부분의 참석자들은 “엄마가 떠오른다”고 답했고 일부는 화목한 이미지가 연상된다고 했다. 벤처 창업가라면 진취적이고 자유로운 생각의 소유자들일 텐데, 가족에 관한 한은 별다른 생각 없이 통념에 머물러 있음을 다시금 확인했던 기억이 난다.

가족은 흔히들 자연스런 제도요 누구나 경험하는 필연적 제도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늘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고 누군가의 죽음을 맞이하는 곳이 가족이기에 가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결혼은 선택’이란 구호가 이젠 익숙해졌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결혼은 개인의 생애주기에서 필수적인 사건이었기에, 가족을 필연적이라 보는 것 또한 무리는 아닐 것이다.

덕분에 우리가 굳이 시간과 정성을 들여 가꾸지 않더라도 화목하고 평화로운 스위트 홈(가족)을 이룰 수 있으리라 생각해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건강한 가족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건강한 가족이 보여주는 특징이야말로 건강한 조직(healthy organization)에 내재화된 특징과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결국 가족의 건강은 모두가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때만 유지할 수 있음이 확인된 셈이다.

건강한 가족의 첫 번째 특징은 ‘소통(communi cation)’ 능력에 있다. 소통이란 짧은 시간 안에 습득 가능한 스킬이 아니라 오랜 시간을 두고 우리 삶 속에 뿌리내려야 하는 문화인 만큼, 부부든 부모자녀든 너나없이 개방적이고 유연한 의사소통을 연습하고 훈련하는 것이 우리네 일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두 번째 특징은 서로를 향한 배려와 약자를 위한 ‘돌봄’ 기능이 원활하게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서구에서 ‘부부중심가족’이 대세로 떠오르면서 나타난 의도치 않은 결과는 가족 안의 약자(powerless)인 어린이와 노인이 소외되기 시작한 것이다. 어린이와 노인에 대한 배려와 돌봄은 가족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거니와, 건강한 가족일수록 어린이는 행복하게 뛰놀고 노인은 정성스런 보살핌을 받게 마련이다. 자녀양육의 기쁨을 누구와 함께 나눌 것인지, 더불어 누구의 손을 잡고 죽음을 맞이할 것인지는 우리네 삶의 가장 의미심장한 질문으로 떠올랐다.

건강한 가족의 세 번째 특징은 부부 사이에 신뢰를 구축하는 것이다. 조(組)이혼율 50%를 넘나드는 미국에서 ‘이혼의 규범화’에 주목한 학자들이 이혼하지 않고 백년해로하는 부부를 대상으로 ‘이혼하지 않는 이유’를 탐색하는 연구를 진행했다. 그 결과 이혼이 주류인 사회에서 부부관계를 지속하게 하는 일등 공신은 낭만적 사랑이나 뜨거운 열정이 아니라 성숙하고 이타적인 사랑이요 부부 사이의 두터운 신뢰라는 것이 밝혀졌다. 신뢰라 함은 상대에 대한 믿음과 존경을 수반하는 가치로, 상처에 쉽게 노출되는 사랑의 불안정성을 훌륭하게 보완해주는 장치란 사실을 금과옥조로 삼을 일이다.

건강한 가족의 네 번째 특징은 문제해결 능력이다. 건강한 조직일수록 문제를 회피하기보다 정면 도전하면서 실패로부터 살아있는 교훈을 도출해내듯, 건강한 가족 또한 갈등을 덮어버리거나 애써 평화를 가장하기보다 솔직히 문제를 드러내고 현명하게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 연구 결과는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무늬만 그럴듯한 가족을 유지한 채 세상을 향해 높은 벽을 쌓고 있는 ‘요새 가족’이나 가족의 기능을 전혀 수행하지 못하는 ‘빈 조개껍데기 가족’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분노와 미움, 긴장과 갈등이야말로 가족의 자연스런 일상임을 인정하는 용기와 더불어 어떠한 문제든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

가족이 구현해온 가치를 잃어버린 사회는 미래가 없다
마지막 건강한 가족의 특징은 이웃을 향해 열려 있다는 사실이다. 건강한 조직일수록 풍부한 사회 자본과 개방적 네트워크를 구축하듯, 가족 또한 폐쇄적 이기주의에 갇혀있기보다 문제에 봉착했을 경우 실질적 도움과 정서적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이웃 및 친족 네트워크를 구축해야 한다. 이제 부계 혈연중심의 가족으로부터 양계제(부계·모계 균형 잡힌 친족제도)를 기반으로 한 공동체적 가치를 지향해가는 상황에서, 친정(처가)과 시댁(본가)의 구분을 넘어서서 이웃을 포함한 비혈연 공동체를 확대해간다면 모두를 위해 금상첨화일 것이다.

가족 공동체가 건강하게 유지되기 위해서는 가족 성원 누군가의 희생과 양보가 필히 요구된다. 지금까지는 누나와 엄마 그리고 할머니들이 헌신적으로 그 역할을 담당해왔다. 하지만 친밀한 관계일수록 어느 한 편의 희생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음은 자명하다. 감정의 밀도가 높은 관계일수록 주고받는 호혜성(reciprocity)과 치우치지 않는 공평성(fairness)을 확보하는 것이 관계를 건강하게 유지해갈 수 있는 관건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가족이 대변하는 가치, 곧 이타적 배려와 양보, 희생과 헌신은 절대로 상품화되어선 안 될 가치요 대체불가능한 귀중한 자산이다. “가족이 구현해온 가치를 잃어버린 사회는 미래가 없다”는 독일의 저널리스트 쉬르마허의 주장은 일견 보수적이란 비판을 받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론 숙고해야 할 화두일 것이다.

가족이란 아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굴러가는 제도가 아니라 최선의 노력을 경주(傾注)할 때만이 ‘스위트 홈’을 구현할 수 있음을 가슴에 새기고, 건강한 가족을 만들어가는 길에 정답은 하나가 아니라 무수히 다양할 수 있음을 깨닫는 일이 우리 앞에 놓인 과제이리란 생각이다.

※ 함인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이화여대 사회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고, 미국 에모리대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가족과 생애주기 그리고 세대 공존을 주제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일상과 예술 속의 커뮤니케이션>(공저) <다양한 가족제도와 미완의 양성평등>(공저) <현대 한국인의 세대 경험과 문화>(공저) <60세 정년연장 의무화법에 대한 근로자 인식과 정책 니즈> <한국 가족연구 50년의 평가와 전망> 등 다수의 논저가 있다.

기사: 함인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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