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국굴기(大國崛起)’에서 얻는 교훈
권영일의 사이언스 프리즘
최근 EBS에서 ‘대국굴기(大國崛起)’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중국 CCTV가 무려 3년에 걸쳐 제작해 지난해 방영한 12부작 역사 다큐멘터리다. 15세기 이후 세계를 호령했던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러시아(소련) 미국 등 9개 제국이 어떻게 세계의 강대국으로 우뚝 설 수 있었는지를 들여다보는 내용이다.
대국굴기란 ‘대국이 일어나는 이야기’란 뜻으로 이 프로그램은 중국의 팽창하는 야심처럼 스케일이 크다. 다큐멘터리가 방영되는 동안 13억 중국인은 모두 일손을 놓고 ‘역사와의 대화’에 빠져들었고, ‘2006년 최고의 TV 프로그램’이라고 칭찬을 했다고 한다. 방송 이후 출시된 DVD는 대도시 서점에서 판매를 시작한 지 3일 만에 매진됐고 같은 내용을 정리해 출시한 8권의 책도 순식간에 1만 질이 팔려나갔다.
필자도 관심이 있어 졸린 눈을 비벼가며 시청했다. 무엇이 강대국이 되도록 만들었는가. 그리고 왜 영원할 것 같았던 대제국이 망할 수밖에 없었는가. 제작진은 9개국의 역사현장과 박물관 등을 찾아갔으며 중국 안팎의 각 분야의 학자와 전문가 100여 명을 찾아 조언을 구했다. 그 결과, “사상·문화의 영향력과 정치·제도의 개혁이 대국의 흥망을 결정한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내용은 보는 사람에 따라 다소 지루할 수도 있다. 도대체 무엇이 13억 중국인들을 사로잡고 격렬한 논쟁을 야기한 것일까. 먼저 종전과는 다른 역사관이다. 홍콩 시사지 아주주간(亞洲週刊)은 2006년 12월 10일호에서 “‘대국굴기’는 마르크스주의로 역사를 해석하는 전통적 시각에서 탈피해 식민지 지배와 경제적 수탈을 자본주의 국가의 경쟁력으로 재해석하는 시각을 선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제국주의 국가 내부의 권력 간 균형과 우수한 사회구조, 법치사상 등을 높이 평가함으로써 “제국주의에 대해 일종의 ‘복권(平反)’을 해주었다”는 것이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된다’는 등소평(鄧小平) 이후 실리주의가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특히 강대국들의 흥망의 공통 원인을 분석한 12부는 시사하는 바가 많다. 강대국 발전과정에서 대국 성장 동력이 된 공통 요소는 과학과 교육의 중시, 자국 국정에 맞는 정치 경제 제도 수립, 자국의 상황에 맞는 정책 도입, 국가 주도로 가속화된 현대화 등 이다.
이밖에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각국이 이성적으로 대국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한 점도 흥미롭다. 일본은 다국적 기업을 통해 경제 발전을 실현했으며, 미국은 정보 혁명과 하이테크기술 영역에서 지속적인 국가 발전을 이뤘다. 글로벌 시장이 세계를 긴밀하게 연결시켰으며 국가 간 상호 호응, 협력, 의존 관계가 강화되기 시작했다. 경제 글로벌화와 지역 블록화가 한창 진행되면서 프랑스와 독일이 주도하는 유럽의 새로운 질서도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여러 가지 논란에도 불구하고 가장 인상적인 견해는, 겉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말하고 싶은 것[言外之意]은 바로 ‘9개 강대국 다음으로 세계를 호령할 나라가 곧 중국이다’라는 메시지가 이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는 평이다.
최근 한국을 방문한 이 다큐멘터리의 총지휘자 왕지쓰 베이징대 국제관계학원 원장은 국내 모 일간지와 인터뷰에서 ‘대국굴기’ 프로그램을 통해 얻은 역사의 교훈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교훈은 각국이 모두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장점을 잘 살려 강대국으로 발전했다는 점이다.”
왕지쓰의 한 마디에는 중국 역시 자신의 상황에서 장점을 살려 얼마든지 강대국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기대가 묻어 있다. “언젠가 미국을 제치고 중국이 세계 1위 대국이 될 것”이라는….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이 지난 2003년 11월부터 15세기 이래 세계 주요 9개국 발전사를 주제로 집단학습을 해왔다는 점에서 이 다큐멘터리는 제작 의도부터 중국 지도부의 의중이 실려 있다. 대국 굴기의 방영은 중국 국민에 대한 일종의 집체학습인 셈이었다.
중국 지도부가 3년 전부터 ‘대국의 흥망사’를 공부하고, 지금 모든 중국인이 그것을 학습하는 현상은 ‘초강대국으로 부상하기 위한 정신적·제도적·학문적 준비’를 착실히 진행하고자 하는 공산당 지도부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준다. 중국 대륙과 이어진 한반도 사람이 이 현상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중국인이 꿈꾸는 ‘대국’은 미국이나 러시아 다음 가는 ‘2등국’이 아니라 이 모든 나라를 누르는 ‘1등국’이기 때문이다.
중국이 세계 1등국을 지향하는 조짐은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경제에선 이미 미국, 일본에 이어 세계 3대 강국으로 성장했다. 과학분야도 예외는 아니다. 곳곳에서 세계 초강대국인 미국에 도전장을 내고 있다. 실제 중국은 최근 우주공간과 해저 탐사에서 미국과 본격적인 경쟁을 선언했다.
2003년 첫 유인우주선 발사에 성공한 중국이 이번에는 세계 최초로 수심 7천m까지 탐사할 수 있는 유인 심해잠수정 개발에 성공해 올 하반기에 시험탐사를 할 예정이다.
자위(賈宇) 중국 국가해양국 해양발전전략연구소 연구원은 “이 잠수정을 이용하면 세계 해저의 99.8%를 탐사할 수 있다”고 밝혔다.
세계 각국은 자원의 보고인 바다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해양탐사에 열을 올리고 있다. 특히 심해잠수정의 개발은 해양기술 및 국가의 종합기술 역량을 엿볼 수 있는 가늠자로 작용한다. 중국은 이에 따라 에너지 자원의 안정적인 확보를 위해 ‘해양대국’을 국가발전목표로 설정하고 ‘심해기지 건설’에 박차를 가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세계의 유인 심해잠수정은 모두 5대뿐이다. 미국과 일본 프랑스가 각각 1대씩, 러시아가 2대를 보유하고 있다. 이들 국가의 잠수정은 해저 6천500m까지 내려갈 수 있다.
우리나라는 지난해 해저 6천m까지 내려갈 수 있는 무인 심해잠수정 ‘해미래’를 개발했다. 김웅서 한국해양연구원 해양자원연구본부장은 “수심 7천m까지 내려가면 손톱 크기인 1cm²에 700kg의 압력이 가해지기 때문에 유인잠수정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기술력이 필요하다”며 “중국의 해양기술이 세계적 수준임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범용시장에서 앞섰다고 우쭐되던 우리로서는 잠시 방심하는 사이에 추월당한 셈이다. 아니 어쩌면 애초부터 닭 쫓던 개가 아니었는지.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역사와의 대화를 통해 21세기 대국의 길을 찾아가려는 중국의 메시지를 우리의 시각으로 새롭게 해석해 한국의 미래를 그려나가 봐야 할 것이다.
우리도 그동안 고속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밑바탕에는 국가지도자들의 과학기술 중시정책이 있었다. 그 이후 민주화에 밀려 과학기술은 잠시 잊혀졌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과학기술이 정책의 2선으로 물러나자 우리 경제는 어려움을 겪었다. 흥미롭게도 ‘헌정사상 가장 무능한 정부’라고 욕을 먹고 있는 참여정부에서 과학기술 우대정책은 다시 부활됐고 국가 R&D 투자가 획기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10년 후 먹을거리를 마련하기 위한 길게 보는 정책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모든 분야에서 무조건 투자하라고 정부에 요구할 수도 없다. 가용재원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대내외 여건상 모든 분야에서 금메달을 골고루 따기는 힘들다. 그래서 양궁, 태권도, 쇼트트랙 등 전략종목이 필요하다.
이들 종목에서만 1등을 한다 해도 종합적으로 세계 5대 강국에는 충분히 들 수 있다. 올림픽 성적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는 과학기술분야에도 적용될 수 있을 듯하다. 그렇다면 선택과 집중인데, 과연 우리가 앞서 갈 수 있는 분야는 어떤 것일까. 더욱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것 같다.
- 권영일 논설위원다른 기사 보기sirius001@paran.com
- 저작권자 2007.02.13 ⓒ Science 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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