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미, 내년이면 데뷔 30년차] 치매 앓는 어머니와 목욕탕 가는 게 소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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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권 관객과 표 사서 온 관객 박수는 바로 구분해요. 그럼요. 무대에 선 지 30년인데. 제가 누굽니까.”

“시계를 빼는 게 나을까요? 꽃병을 옮길까요?” 수시로 사진 기자의 의견을 묻던 조수미는 아예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인터뷰 대상이 이처럼 열성적인 경우는 흔치 않다. “저의 관객은 최고를 보고 들을 권리가 있고, 제겐 최고를 보여 드리기 위해 노력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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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미의 우상(偶像)은 마리아 칼라스다. 무대에서 보여주는 카리스마와 완벽한 준비 자세에 끌렸다고 했다. 2017년 칼라스 서거 40주기를 맞아 그녀를 기리는 공연을 준비하고 있는 조수미. (이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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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요앨범 내고 첫 콘서트… “어머니에 대한 연민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첫 가요 앨범이다. 오페라 가수로서 전성기가 지난 것 아니냐는 시선도 있는데.
“(높은 파음까지 올라가는 최고 난이도의 아리아인) 모차르트의 ‘밤의 여왕’ 아리아만 하면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편안하게 살 수 있다. 할 수 있는 성악가가 몇 명 안 되니까 출연료도 많다. 하지만 도전하지 않으면 예술가가 아니다. ‘내 목소리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보겠다’는 것이 데뷔 초기부터 목표였다.”

-데뷔 무렵에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으로부터 ‘신이 내린 목소리’라는 상찬까지 받았는데. 신이 내린 목소리가 도전하기에 가요는 너무 쉬운 선택이 아닌가.
“데뷔하고 얼마 안 돼 팝송 앨범을 냈다. 그때는 ‘내가 그 어려운 공부를 했는데, 마이크 잡고 쉬운 노래나 하고 있나’ 하는 생각에 자존심이 상했다. 나만이 보여줄 수 있는 예술 세계를 못 보여주는 것 같아 싫었다. 파리 샤틀레극장에서 7개 국어로 예술가곡을 불러 기립박수를 받았던 내가…. 하지만 대중과 눈높이를 맞추며 받는 진심 어린 박수도 고난도 기교로 받는 박수 못지않게 기쁘다는 것을 서서히 알게 됐다. 두 가지를 다 잡고 싶다.”

조수미는 “이번 가요 콘서트의 첫 무대였던 30일 수원 공연 때 관객 90%가 제 공연을 처음 보신 분들”이라며 “클래식 공연으로 가는 징검다리를 놓는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30년째 ‘신이 내린 목소리’로 소개된다. 부담스럽지 않나.
“엄청난 압박이다. 그 압박이 내게 48개라는 엄청난 수의 앨범을 내게 했고, 죽도록 연습하게 하고, 복막염에 걸리고 수술을 받고, 다리가 부러져도 무대에 서게 한다.”

-징크스는 없나?
“어느 가수에게나 있는 징크스가 내게도 있었다. 분장실 4번이나 13번에는 안 들어가고, 공연 당일에는 손톱이나 머리를 안 잘랐다. 이탈리아에서는 보라색, 프랑스에서는 초록색이 불운을 부른다고 해서 기피 색이다. 15년쯤 전에 갑자기 그런 선입견에 매인 나 자신이 우습게 느껴졌다. 난 보라색이 어울리는데. 징크스 따윈 나의 에너지로 눌러버리겠다고 각오하고 보랏빛 드레스를 입고 나갔다. 청중에게서 싸늘함이 느껴졌다. 첫 노래로 사로잡아버렸다. 징크스도 끝났다.”

-명성을 유지해온 비결이 있다면.
“혼자서는 절대로 스타가 될 수 없다. 나의 재능을 믿어주는 사람들을 내가 먼저 사랑하고, 그들에게 사랑받아야 한다.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

조수미는 “음악은 모든 것을 버리고 얻은 유일한 기쁨”이라고 했다. 1983년 3월 서울대 음대 2학년 때 이탈리아로 떠나 1986년 10월 이탈리아 트리스테의 베르디극장에서 리골레토 질다 역으로 국제무대에 데뷔했다. 조수미는 “이 길이 정확하게 어머니가 가고 싶었던 길”이라며 “어머니에 대한 연민 때문에, 어머니의 꿈을 이루려고 이를 악물고 살아온 것이 오늘의 조수미를 만들었다”고 했다.

조수미의 어머니 김말순(79)씨는 경남 창원에서 태어나 마산여고를 졸업하고 상경해 신문사 오퍼레이터로 일했다. 피아노 한 번 쳐보는 것이 소원이던 김씨는 장녀 수미에게 모든 꿈을 실었다. 피아노 연습 8시간을 채우지 않으면 방 밖으로 못 나오게 자물쇠를 걸었다. 못 견디던 조수미는 가출을 세 번쯤 했다.

딸이 세계적 성악가가 된 후에도 김씨의 일념은 확고했다. 심혈관 다섯 군데가 막혀 대수술을 받을 때도 “너는 예정된 공연을 하라”며 오지 못하게 했고, 조수미의 부친 조언호씨가 별세했을 때도 “내 남편의 장례식에 오지 말고, 약속한 무대에 서라”고 귀국을 막았다. 조수미는 “밤마다 내 손을 잡고 ‘너는 나 같이 살면 안 되고, 세계를 돌아다니며 노래하는 사람이 돼라’던 어머니의 말을 지겹게 듣고 자랐다”며 “어느샌가 ‘저 여자의 꿈을 풀어줘야 한다’는 생각, 나도 모르는 연민이 나의 직분으로 각인됐다”고 말했다.

조수미는 어머니 김씨를 ‘집념의 여인’이라고 했다. 그 ‘집념의 여인’은 지금 자신의 집념을 기억하지 못한다. 수년 전 발병한 알츠하이머(치매의 일종인 퇴행성 뇌질환)가 말기에 이르렀다. 조수미는 “하루에 두 번씩 전화를 걸어 어머니가 좋아하는 노래를 들려 드린다”며 “병이 진행됐는데도 아직 릴케의 시를 외운다”고 말했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가 어머니의 애창곡이라고 말하던 조수미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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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미는 “오늘의 나를 만든 것은 어머니에 대한 연민”이라고 했다. 사진은 2005년 광복 60주년 특별 기획전으로 서울 용산전쟁기념관에서 열린 ‘아, 어머니’ 전시회를 관람 중인 어머니 김말순(오른쪽)씨와 조수미씨. (이진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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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칼라스 서거 40주기를 맞아 그녀를 기리는 공연을 준비하고 있는 조수미. (이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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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꿈이 아니라 어머니의 꿈을 이루고 산다면 행복한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내 안의 충돌도 많았다. 더 힘든 건 엄마를 무시하게 되는 거였다. 왜 저렇게 살까. 나한테 모든 걸 걸고. 한심하고 안타깝고 불쌍했다. 로마로 유학 가서 전 세계에서 온 쟁쟁한 인재의 바다에 떨어졌을 때 오기가 발동했다. 엄마의 꿈을 이뤄주겠다고.”

-딸로서는 행복했을지 모르나 여자로서도 만족하나.
“한때 많이 힘들었다. 특히 아기를 정말 갖고 싶었다. 갈수록 더했다. 나의 사랑을 줄 수 있는 절대적인 존재를 원했는데, 운명이 내게 주지 않았다. 인생에 큰 시련이자 가르침이 됐다. 대신 공연을 통해서 주니까. 공연은 나누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주는 거더라. 자기 예술 세계를 키워서 무조건 주고 또 줘야 진짜 예술가다.”

내 소원은… 목욕탕 가서 엄마 때 밀어주고 싶어

조수미는 대표적인 국제 행사 때마다 독창 가수로 선다. 1988년 서울올림픽, 2000년 시드니올림픽, 2008년 베이징올림픽,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 1998년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 2013년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 때도 그가 노래를 불렀다.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는 “광복 55주년 때 북한의 ‘높은소리 가수’와 함께 섰던 무대”라고 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앙코르로 부르자고 하니 ‘당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허가받아야 가능한 예술이라니 거리감이 느껴졌다. 그런데 끝나고 나서 ‘조수미 동무, 우리 언제 다시 볼까요, 시집가지 말라우’라며 얼싸안는 모습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조수미는 공연 때마다 4~5벌의 드레스를 갈아입는다. 디자이너 앙드레김이 작고하기 전까지 20년간 드레스를 만들어줬다. 지금은 디자이너 서승연씨가 맡았다. 이제까지 입었던 드레스가 300벌이 넘는다.

-가수에게 옷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관객은 무대에 선 프리마돈나를 보며 환상을 꿈꾼다. 부르는 노래의 상당수가 사랑 노래 아닌가. 아름다운 여성이 불러야 들으면서 꿈을 꿀 수 있다. 그래서 늘 다이어트를 하고, 아름답게 보이려고 노력한다. 당연히 의상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오페라 가수는 55세 이후 목소리가 시든다던데 은퇴를 생각해본 적이 있나.
“나의 55세는 다를 것이다. 70대까지 노래할 것이다. 반드시, 절대적으로. 그러기 위해서 죽도록 노력하고, 연습한다.”

가수가 아닌 ‘인간 조수미’로서 이루고 싶은 꿈을 물었다. 다시 ‘엄마’ 얘기를 했다. “우리 엄마, 다섯 살 때 바닷가에 놀러 갔다가 일곱 살 언니가 빠져 죽는 현장을 봤어요. 평생을 벌벌 떨면서 샤워할 정도로 물을 무서워했어요. 엄마가 평생 못 이긴 두려움을 떨치고, 둘이 같이 목욕탕에 가고 싶어요. 가서 엄마 등 때 밀어주고 싶은 게 소원이에요. 그런 날이 올까요.” 다시 그의 눈이 붉어졌다.

[취재=신정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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