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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사 오는 길을 알지 못하고 그 떠나는 길을 알지 못한다 해도
            그 때문에 괴로워하고 슬퍼하지 말라.
            그것이 바로 인생의 과정이니라.
            걸림 없이 살 줄 알라                        
                  
            유리하다고 교만하지 말고
            불리하다고 비굴하지 말라.
            무엇을 들었다고 쉽게 행동하지 말고
            그것이 사실인지 깊이 생각하여
            이치가 명백할 때 과감히 행동하라.
            벙어리처럼 침묵하고 임금처럼 말하며
            눈처럼 냉정하고 불처럼 뜨거워라.
            태산 같은 자부심을 갖고
            누운 풀처럼 자기를 낮추어라.
            역경을 참아 이겨내고
            형편이 잘 풀릴 때를 조심하라.
            재물을 오물처럼 볼 줄도 알고
            터지는 분노를 잘 다스려라.
            때로는 마음껏 풍류를 즐기고
            사슴처럼 두려워 할 줄 알고
            호랑이처럼 무섭고 사나워라.
            이것이 지혜로운 불자의 삶이니라.
                                   <잡보장경 제4권>

불경 중 ‘잡보장경(雜寶藏經: 중생의 인연을 중시하여 사람들에게 작복(作福)과 지계(持戒)를 권한 경)’의 한 구절입니다.
얼마나 좋은 부처님의 말씀입니까. 이 말씀대로 살면 누구도 자신을 탓하거나, 자신도 누구에게 불만을 가질 이유가 조금도 없을 것입니다.
한국인들은 국토가 좁은 탓이라 그런지 남보다 조금 우월하다는 생각이 들면 우선 목에 힘부터
주며 거들먹거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형편이 유리하다가도 어려운 상황에 봉착하면 기(氣)를 못
펴고 빌빌대는 그러한 근시안적인 삶, 사회정의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그저 유리하다고 생각되면
기세가 당당하다가도, 불리하면 유리한 쪽에 빌붙어 스스럼없이 아부와 굴욕을 일삼는 퇴폐적
사고와 폐습이 오랜 세월 동안 습관처럼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근 100여 년 동안 그렇게 살아왔고,
살아가는 방법이 또한 그러했습니다. 이건 어쩌면 숙명적인 역사적 사실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좀 달라져야 합니다.
국가의 정체성을 찾지 못한 허수아비 국가, 부동산 투기, 탈세, 권력의 시녀노릇, 가난하고 부족한 사람을 짓밟고 일어서야 출세하는 사회, 이러한 부로크시대는 이제 종말을 고할 때가 된 것입니다.
  공정하고 공평한 사회와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불자들이 먼저 앞장을 서야 할 것입니다.
  어느 한편에 편향된 불안한 사회 속에서는 그 누구든 결코 행복을 바랄 수가 없습니다. 그 대신 공정,공평한 사회에서는 모두가 안온한 행복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사실일 것입니다. 부처님이 지향하는 사회가 바로 이런 세상입니다.
  이제 부처님의 게송(偈頌)을 되새기며 다같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심사숙고(深思熟考)해봅시다.

  유리하다고 교만하지 말고, 불리하다고 비굴하지 말라.
  우리 속담에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을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형편이 좀 나아지면 자연히 이웃과 떡 한 조각을 나눠먹던 옛 시절의 배고픔과 정겨움을 잊어버리기가 싶습니다. 과거에는 모두가 허리띠를 졸라매며 어렵게 살았는데, 요즈음은 조금 나아졌다고 해서 못사는 사람을 혹시 경멸하고 있지나 않은지.
  교만(驕慢)과 아만(我慢)은 중생의 병입니다. 나아가서는 자기를 갉아먹는 고질(痼疾)로 변할 수도 있습니다. 일시적 유리함이 평생 유지되는 것도 아닙니다. 결국 많은 파란곡절 끝에 당도해 있는 이 현실을 올바르게 직시해서 미래를 대비하는 절제된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약간 어렵고 불리한 처지를 당하더라도 위축되고 비굴해져서는 안됩니다.
  특히 요즈음 쉽게 볼 수 있는 우리나라 정치꾼들의 꼬락서니를 좀 보십시오. 소위 국회의원이란 작자들이 누가 대권을 잡거나 혹은 실세다 싶으면, 국가나 국민을 생각하는 철학은커녕 배알도 없이 줄대기,아부,뇌물공세 등 갖가지 짓거리를 다하고 있지 않습니까.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런데도 그 난장판에 불교계의 승려들까지 합세해서야 되겠습니까. 넋빠진 중[僧]들이 많습니다. 정치판에 끼여들어 후보자의 부인을 마치 신라시대의 덕만(德曼: 善德女王)부인인 양 치켜올리고, 만세 부르며 손뼉 치고……. 이런 일이 많아지면 한국불교는 앞으로 희망이 없어지게 됩니다. 조심해야 될 일입니다.

  무엇을 들었다고 쉽게 행동하지 말고, 그것이 사실인지 깊이 생각하여 이치가 명백할 때 과감히 행동하라.
  사람들은 보통, 특히 한국 사람들은 무슨 말을 들으면 그 말의 진의나 그 당시의 상황을 생각해보질 않고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파르르 끓었다가 금방 식어버리는 이른바 ‘냄비기질’의 성격이 많습니다. 또 건망증도 심합니다. 한 때는 죽일 듯 흥분했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쉽게 잊어버리는, 이런 모습들이 어쩌면 오늘날 한국사회의 문제 내지는 병폐일지도 모릅니다.
  개인뿐만 아니라 국제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선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되돌아봅시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본래 두 나라는 민족의 뿌리가 비슷했습니다. 그렇지만 근세(조선시대의 임진왜란 이후)에 와서는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서로 앙숙(怏宿)이 되고 말았습니다. 36년 동안(1910~1945) 그들의 침략야욕과 내선일체(內鮮一體)의 허구 아래 종노릇하다시피 시달림을 당하다가 풀려난 지가 벌써 60년, 회갑이 다 되어 갑니다.
  그렇건만 그때의 착취와 학대, 모멸 등에 대한 보상은커녕 자긍심마저 찾지 못한 채 유야무야(有耶無耶)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지금도 한국을 마치 자기들의 머슴인 양 ‘조센징’이라고 비하하며, 망언을 일삼고 있는 데도 말입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당해야만 합니까. 아직껏 국가의 정체성(正體性)과 위신을 되돌리지 못하고 있는 이 현실은, 정치가뿐만 아니라 국민 모두의 자각과 인식의 부족 탓은 아닐는지요.
  과연 당당하게 그들과 맞설 그날은 언제쯤일지―.
  그리고 ‘이치가 명백할 때 과감히 행동하라’는 말씀은, 틀린 일에는 결코 타협하지 말고, 불리․유리를 따지기 전에 옳은 일이면 혼자일지라도 굽히지 않는 양심적 행동을 이를 테지요.

  벙어리처럼 침묵하고 임금처럼 말하며……
  필요 없는 말이나 말을 아껴야 할 때는 벙어리처럼 침묵하다가도, 말을 해야할 때는 임금처럼 권위 있고 당당하게 하라는 뜻입니다. 아울러 말을 경계하고 말에 대한 책임을 질 것과 자부심을 가지라는 가르침이기도 할 것입니다.
  사람이 신용을 잃는 것은 말[言]과 행동[行]에 의해서 입니다.
  말은 번지르르하게 하면서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사람은 어쩌면 어중이떠중이, 얼치기, 사이비인간일지도 모릅니다.
  ‘언행의 일치’가 쉽지 않은 일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言과 行을 신중하고 영향력 있게 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임금의 말 한 마디가 그 나라의 법이며 백성의 생사고락을 좌우하듯이, 가정에서의 남편과 아내의 언행은 그 가정의 행․불행을 가름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눈처럼 냉정하고 불처럼 뜨거워라.
  냉정할 때는 눈처럼 차갑다가도, 자비심이나 생의 활력소가 필요할 때는 불처럼 뜨겁게 정열적으로 행동하라는 말씀입니다.
  요즈음 한국의 부모들이 제일 잘못하는 것이 있다면 자식한테 냉정하지 못한 일일 것입니다. 그것은 자식을 버리는 일, 자식의 장래를 망치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자식을 낳아보지 않은 스님이 뭘 알겠나 싶겠지만, 지금 한국의 버릇없는 어린이들을 절대로 이대로 방치해두어서는 안됩니다. 이러다간 나라의 장래조차 기대하기가 어렵습니다. 도저히 희망이 보이질 않습니다.
  물론 한 두 자식이라 귀하기도 할 테지만 모든 분 다 한 둘밖에 없잖습니까. 부모가 마음을 합쳐서 자식을 사람답게 강하게 키워야 합니다. 그래야만 국가가 살고 사회가 정의롭게 됩니다. 값싼 동정이 인생을 망칩니다. 오늘부터라도 당장 ‘사랑의 매’를 들도록 하십시오.
  그리고는 가정생활은 결혼 초기의 맹서처럼 뜨겁게 사랑하길 노력하며, 각자가 맡은 바 직무에 성실과 책임을 다하시길 바랍니다.

  태산 같은 자부심을 갖고……
  우리가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존귀하고 그 생명 또한 귀중한 것입니다[天上天下唯我獨尊]. 또 부처님께서는 ‘일체중생 개유불성(一切衆生 皆有佛性)― 모든 중생은 부처가 될 소질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씀하셨으니 분명 인간은 태산 같은 자부심을 가질 만한 존재입니다.
  그러면 부처와 인간의 차이는 뭘까요?
단지 석가모니부처님은 깨달은 분이시고, 우리는 깨치지 못한 중생이란 차이 뿐, 우리도 당당한 부처후보생인 것입니다. 불교인으로서 적어도 금생에서 성불하겠다는 자부심 정도는 가져야겠지요.

  누운 풀처럼 자기를 낮추어라.
  하심(下心)할 줄 알라는 충고입니다. 항상 기고만장하는 태도는 버려야 합니다. 남을 모시고 위로하고 칭찬해주고 나를 낮추는 ‘하심의 인격’, 이건 결코 자신의 인격이 낮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존심을 부풀려 스스로 잘난척하는 태도야말로 불자들이 꼭 버려야 할 구습(舊習)이며 악폐(惡弊)인 것입니다.

  역경을 참아 이겨내고, 형편이 잘 풀릴 때를 조심하라.
  삶의 과정에는 순경(順境)보다는 역경(逆境)이 더 많습니다. 마음대로 되는 것보다는 마음처럼 되지 않는 것이 더 많은 게 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불교에서는 참고 견디면서 사는 세상을 일러 사바세계(娑婆世界)라 했습니다. 우리는 이 사바세계를 이겨내야 합니다. 역경을 이겨내고 나면 형편이 조금 나아질 때도 있습니다. 그때를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치와 낭비, 안이한 사고(思考)와 과욕투자는 다시 자신을 구렁텅이로 내몰지도 모릅니다. 우리 주변에는 그런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깊이 생각해 볼 문제인 것 같습니다.

  재물을 오물처럼 볼 줄도 알고……
  재산,돈, 어디 그 돈에 자기 소유라는 표시 있습니까? 재물에는 임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인연 따라 임자는 수시로 바뀌는 것, 우리는 그 재산의 일시적인 관리자일 뿐입니다.
  돈과 물질은 세상살이에는 분명 필요한 것일 테지만, 결코 그것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인간이 어디 돈만 벌려고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까. 돈 때문에 자살하고 가정을 망치는 일은 어쩌면 그 사람 자신의 잘못된 사고에서 비롯된 일일 수도 있습니다. 돈이 결코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돈을 돌[石]처럼 하찮게 여기는 여유로움도 가져 보십시오.

  터지는 분노를 잘 다스려라.
  인욕하라! 자제하라!
이 세상은 온통 분노의 투성이입니다. 그렇지만 그 분노를 함부로 행동으로 옮길 수는 없습니다.  
분노의 표출은 결국 자신을 갉아먹는 화근(禍根)일뿐더러, 남에게 상처를 주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성 잘 내는 사람은 자기 자신도 모르는 불만의 소유자며, 만족하는 자가 진정 웃을 수 있는 행복한 자입니다.
  ‘만일 보살이 분노를 터트리면 그동안에 닦았던 만 가지의 자비심은 일시에 다 달아나 버린다’고 했습니다. 자기 자신이 성이 난다 싶으면 “아, 내가 지금 성을 내고 있구나”라고 생각하면 분노는 금방 풀려버릴 것입니다. 평소에 차근한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잘 다스리시길 바랍니다.

  때로는 마음껏 풍류를 즐기고……
  멋과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정신을 살찌우는 분위기를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문학 음악 미술 등의 예술과, 자연, 여행과 건전한 취미 등도 마음껏 즐기십시오. 내일을 위한 활력소가 될 것입니다.
  종교도 가져야 합니다. 불교 같은 위대한 종교.
  부처님의 삶을 택한 여러분들은 정말 멋있고 여유로운 최상의 풍류객들입니다.

  사슴처럼 두려워 할 줄 알고……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워 할 줄 알라는 경고, 양심을 일깨워주려는 가르침일 것입니다. 어쩌면 세상은 정의롭지 못하고 악(惡)이 선(善)을 구축(驅逐)하는 비도덕일 경우가 허다합니다. 여러분은 서로가 서로를 중상모략하고 악행과 삿됨이 난무하는 난장판에 끼일 수도 있습니다. 진리와 평화를 갈구하는 불교인― 사슴처럼 연약한 여러분은 이를 감내하기가 무척이나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이럴 때 자기 성찰과 가치판단으로 삿된 사람을 구별하는 다섯 가지의 기준을 부처님께서는 미리 말씀해 놓고 있습니다.
  웃어야 할 때 웃지 않는 사람,
  기뻐해야 할 때 기뻐하지 않는 사람,
  자비심을 내야할 때 자비롭지 않은 사람,
  악행을 저지르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
  좋은 말을 듣고서도 마음에 담지 않는 사람 등입니다.
                                            
  호랑이처럼 무섭고 사나워라.
  성내고 혼낼 때를 가려서 제대로 하십시오.
  절집의 금강문에 붙어 선 두 금강역사(밀적금강, 나라연금강)의 무서운 모습을 보셨는지요. 한 분은 입을 다문 채 침묵으로 꾸짖고, 또 한 분은 입을 벌리고 달려들 듯하니 두 분 다 무섭더군요. 이렇듯 내면의 침묵과 외면의 사나움은 상배방을 조복(調伏)하여 진리의 문으로 들게 하는 방편이기도 하겠습니다.
  부처님의 ‘자비’가 소중하다고 해서 자식들을 너무 사랑만 한다면 자칫 사회의 낙오자, 생존경쟁의 탈락자를 양산할지도 모릅니다. 또 사회의 부정,부패에는 과감히 항거할 줄 아는 용기, 국가 간의 조약이 위법이며, 일방적으로 불리할 때는 분연히 국가의 시책에 동참할 수 있는 불굴의 정신이 바로 참다운 정의인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불자의 삶이니라.
  여러분은 이미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는 참된 불법의 수행에 들어선 분들입니다. 지혜로운 삶이란 너와 내가 함께 하는 대승보살(大乘菩薩)의 삶이며, 사람과 사람, 사람과 시간, 사람과 공간 사이에 좋은 인연을 맺는 가치 있는 삶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다짐해야 할 일을 다시 한번 결론을 내립니다.
  가정과 사회의 고통은 결국 자신이 만든 것임을 자각하고 스스로 반성하는 참회의 정신을 가집시다. 왜 ‘남탓’을 해야만 합니까.
  불교는 자업자득(自業自得)을 가르치는 종교입니다. 불자는 정말로 ‘내탓’을 인식할 마음의 수행을 쌓아야 합니다.  
  결국 자신의 인생은 자기가 주인이 되어 스스로 행․불행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인생은 자신의 책임이며, 이것이 세상의 법규입니다.
  이 ‘잡보장경’의 말씀을 마음에 잘 새겨서 항상 지혜롭게 사시길 바랍니다.
  걸림 없이, 멋지게, 알차게. 권선(勸善)                    
  
  올 여름에도 우리 동포들은 엄청난 폭우피해를 당했습니다.
  해마다 왜 이런 일이 되풀이되는지, 똑 같은 상황을 겪으면서도 왜 미리미리 대비하지 못하는지 정말 정치하는 자들과 관계당국이 원망스럽기만 합니다. 국민들의 인명 피해는 물론, 재산 손실만도 5조 원이 넘는 어마어마한 피해였습니다.
  법회를 시작하기 전에, 이번 피해에 회생되신 여러 영혼들을 위해 잠시 그들을 위로하고 천도하는 묵념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딱,  딱,  딱.
  죽비(竹扉)소리에 법당은 물을 끼얹듯 조용했다. 그들 모두는 우리의 동포, 형제, 자매가 아닌가. 좋은 곳에 가소서. 행복한 곳에 다시 태어나소서.
  딱,  딱,  딱.
        일어나 앉아라. 잠을 자서 그들에게 무슨 보탬이 있겠는가.
        화살 맞아 고통받는 이에게 잠이 웬 말인가.
        일어나 앉아라. 평화를 위해 일념으로 배워라.
        그대들이 게을러서 그 힘에 굴복한 것은
        죽음을 당해 그대들을 헤매지 못하게 함이니라.
        게으름은 때[垢]와 같은 것, 때는 게으름 때문에 생긴다.
        애써 가꿈으로서 또한 밝은 지혜로서 박힌 화살을 뽑아라.
                                        
        잠 못 드는 사람에게 밤은 길고
        갈 곳 모르는 이에게 길은 멀어라.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생사가 둘[二]이려니
        그것은 바로 지혜를 모르기 때문이다.
        바른 진리는 불멸의 길, 꿈의 길이라 하느니
        탐하지 않으면 죽지 않을 것이요.
        모르는 자는 스스로 죽을 것이다.
                                     <출요경(出曜經)>

  지금부터 약 1500년 전의 일입니다.
  중국 당나라의 보림전(寶林傳)에는 불조(佛祖)의 역사와 내력 등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 저 먼 인도에서 얼굴이 아주 험상궂게 생긴, 인도 향지국(香至國)의 왕자였던 스님 한 분이 중국의 광주(廣州) 땅에 도착했습니다(527년).
  그런데 이 스님은 인상도 험악한데다 도저히 시정아치로서는 이해하기 어렵고 처음 들어보는 말씀만 하시면서 거리를 헤매고 다녔지요. 그랬으니 어렴풋이 불교에 대한 이야기란 것을 짐작으로만 알 뿐, 온 나라에 ‘이상한 사람’, 혹은 ‘큰스님일지도 모른다’는 소문만 무성해졌을 수밖에요.
  드디어 그당시 중국 양(梁)나라의 임금, 무제(武帝)도 이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때 양무제(梁武帝)는 온 나라에 절과 탑을 세우고 경전을 간행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불교를 믿도록 권장한, 중국의 불교전래 이후 가장 신심이 강한 황제로 숭앙을 받고 있는 터였습니다. 자신 스스로도 황제보살, 불심천자(佛心天子)라고 으스대기도 했으니까요.

  ― 이야기를 조금 돌이킵시다.
  우리나라에도 불교를 융성시킨 분은 많았습니다. 신라시대에는 불교를 삼국통일의 원력으로 삼아 황룡사 9층탑을 건립한 선덕(善德, 재위 632~647)여왕 같은 분도 계셨고, 고려시대에는 과거제(科擧制)를 실시하여 문(文)․무(武)․승(僧)과를 두어 훌륭한 스님들을 많이 배출한 광종(光宗, 재위 949~979) 임금도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국가의 통치이념이 숭유억불(崇儒抑佛)정책으로 바뀐 탓에 많은 시련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연산군(재위, 1494~1506) 때에 와서는 승과(僧科)조차 없어진 것을, 가까스로 명종(明宗, 재위 1545~1567)의 모후 문정왕후(文定王后, 1501~1565)가 승과를 부활하여 임진왜란 때에 혁혁한 공을 세운 서산 대사 휴정(休靜, 1520~1604) 같은 분을 배출하기도 했지요.
  만약에 문정왕후의 이러한 변혁의 시도가 없었더라면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구하고 불교를 중흥시킨 서산대사와, 그의 제자 사명(1544~1610) 스님 같은 걸출한 영웅을 기대조차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이야기를 다시 본론으로 돌립시다.
  양무제가 인도에서 왔다는 그 이상한 큰스님을 뵙자고 했습니다.
  사실 그 큰스님은 우리가 잘 아는, 중국 대륙에 최초로 선(禪)의 뿌리를 내린 달마(達磨, ?~536?) 대사였습니다.
  “짐(朕)은 불사를 크게 일으키고, 스님들께 공양을 올리며,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 많은 보시를 하고 있소. 나의 사후공덕은 얼마큼이나 되겠소?”
  자신의 공덕만을 바라며 아상(我相)을 내보이려던 양무제의 거만한 말투였습니다.
  “공덕은 무슨 공덕, 전혀 공덕이 없나이다.”
  놀라고 무안해진 양무제는
  “어째서 공덕이 없단 말이냐?”
  “황제께서 복을 짓는 것은 인과응보의 결과에 따른 것일 뿐, 황제의 공덕은 황제 자신을 위한 겉치레에 지나지 않습니다. 순수한 공덕이란 자랑하고 과시하며 거드름 피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황제의 공덕은 무공덕(無功德)인 것이지요.
  이는 바로 어떤 물건의 그림자와 같아서, 물건이 없어지면 그림자도 없어지는 법인데 그 공덕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나이까.”
  황제의 위엄조차도 하찮게 여기는 달마 대사의 일갈이었습니다.
  물론 공덕과 보시가 중요한 덕목이란 사실을 대사는 속마음으로 인정을 하면서도, 굳이 공덕의 대가를 바라는 그 태도가 미웠던 것입니다.
  무주상(無住相)보시였으면―.
  인과응보의 철칙에 따라 선인선과(善因善果)로 인연 지어질 것을―.
  “그렇다면 당신이 말하는 혹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진정한 공덕이란 과연 어떤 것이냐?”
  “진정한 공덕이란 맑고 밝은 지혜를 깨쳐야만 아는 것입니다. 이런 지혜는 본래 말로써 할 수 없고 침묵 속에 있는 것이며 세상의 사량분별(思量分別)로는 측량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물론 폐하의 보시공덕도 인연 따라 나타날 것이기는 하겠지요. 그러나 그보다도 더 중요한 근본적인 공덕은 참다운 것, 영원불멸의 진리를 찾음에 있나이다.”
  “그러면 부처님의 여러 가지 말씀 중에 가장 성스러운 가르침은 어떤 것이냐?”
  약간은 누그러워진 황제의 물음이었습니다.
  “성스러울 것도, 일일이 말할 것도, 따질 것도 없나이다.”
  적어도 황제라는 자가 불성의 참뜻을 이렇게도 모를까? 달마의 야무진 질타였습니다.
  “뭐라고? 그럼 너는 누구냐?”
  “모른다!”

  여러분은 ‘나는 누구일까’를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나를 여기 이 법당까지 오게 한 것은 누구이며, 나는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조차도 모르면서 살고 있지나 않은지. 이 세상에 무엇 하러 왔다가 무엇을 알기나 하고 갈 것인지―.’
  부처님은 “너 자신을 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을 알기 위해 노력하는 일, 바로 이것이 수행입니다. 나는 무슨 물건일까. 지금의 이 생(生)은 어떤 삶이며, 내생(來生)은 또 무엇으로 태어나서 어떻게 살 것인가.
  삶이란 단지 육도윤회를 수 없이 거듭하는 것만이 아니라, 주어진 오늘의 이 사바(娑婆)에서 참답게, 중생에게 이익 되는 삶을 삶으로서 다음 생에는 적어도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겠다는 원력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요.  
  부처님 말씀 중에

      진실로 인생에 보탬이 되고 부처님 같이 살려고 한다면,
      재물․권세 등을 자랑하고 사는 것보다는 이웃을 권유하여
      진리의 길을 함께 가는 ‘권선(勸善)’의 마음이 중요하다.

  겉치레나 가꾸고 거들먹거리며 아무런 신심이나 원력도 없이 사는 삶이 무슨 보람이 있겠습니까. 내가 닦은 진리의 수행을 남과 더불어 하는 보람― 권선을 꼭 잊지 말아 주시길 바랍니다.
  오늘 초3일 법회를 기해 이렇게 절집을 찾아 법문을 듣고 불교를 믿는 것은 여러분께서 전생에 쌓아놓은 복(福)중의 복인 것입니다. 이 복이 내생에서는 더 큰 복이 되도록 여러분의 끊임없는 수행정진을 바랍니다.
  여러분은 오늘 이 법당, 진리의 문을 나서면 다시 온통 거짖투성이가 가득한 사바의 세상으로 내몰리게 됩니다. 그렇더라도 남이 나보다 잘나고 잘사는 것처럼 보여서 자신을 비하하고 한탄하며 세상의 분위기에 편승되지 마십시오.
  어느 때 중생들이 ‘어떤 것이 최상의 행복인가’를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어리석은 자들과 친하지 말고 현자와 가까이 하며
         존경할만한 사람을 받드는 것, 이것이 최상의 행복이니라.
         적당한 장소에 살며 평소에 공덕을 쌓아 스스로 올바른 목적을
         달성하려고 마음에 다짐을 하는 것, 이것이 최상의 행복이니라.
         부모를 섬기고 처자를 사랑하며 일에 질서가 있어 혼란을
         일으키지 않는 것, 이것이 최상의 행복이니라.
         보시와 이치에 맞는 행위와 친족을 사랑하고 비난을 받지 않는
         행위, 이것이 최상의 행복이니라.
         악을 싫어하여 멀리하고 술을 금하고 덕행에 소흘하지 않는 것,
         이것이 최상의 행복이니라.
         존경과 겸손, 만족과 감사, 때때로 가르침을 듣는 것,
         이것이 최상의 행복이니라.
         인내하는 것, 온순한 것, 수행자를 만나 시의(時宜)에 대한
         논의를 하는 것, 이것이 최상의 행복이니라.
         수양과 깨끗한 행위, 성스러운 진리를 찾으며 마음의 안정을
         느끼는 것, 이것이 최상의 행복이니라.
         세속의 습관에 부딪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두려움이
         없으며 악에 물들지 않는 것, 이것이 최상의 행복이니라.
         이와 같이 행하면 어떤 일을 당해도 폐하지 않으며
         어디를 가나 행복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이것이 너희들의 최상의 행복이니라.
  
  이처럼 자신의 입장과 푼수를 잘 살펴서 스스로 행복한 삶을 찾으시길 바랍니다. 행복은 결코 남과 비교하는 데 있지 않고, 자기 마음속에 있다는 것을 항상 명심해 주십시오.

                  이 육신이 내 것인가                
                  세상에 온들 오는 길을 알지 못하고
                  떠나간들 떠나는 길을 알지 못하거늘
                  그 어디서 오고가는 중생들을
                  ‘내 아들’이라 하여 슬퍼 눈물 흘리는가.
                  설사 오는 길을 알지 못하고
                  그 떠나는 길을 알지 못한다 해도
                  그 때문에 괴로워하고 슬퍼하지 말라.
                  그것이 바로 인생의 과정이니라.
                  찾지 않았는데 그는 왔고
                  허락하지 않았으나 그는 여기서 떠나갔다.
                  그는 어디에선가 이곳으로 왔다가
                  잠깐 머물다가 떠나지 않는가.
                  여기서는 다른 중생이 되어가고
                  저기서는 또 다른 중생이 되어오니
                  오고가는 사람마다 그 모양이 바뀌어 오고가니
                  가는 듯이 온다면 그 무엇을 슬퍼하랴.
                  아, 내 가슴속에 숨겨진 화살은 사라지고
                  깃들었던 슬픔의 화살을 뽑아내니
                  아들의 죽음 때문에 괴로웠던 모든 슬픔이
                  멍든 내 가슴에서 멀리 사라지네.
                  모든 슬픔과 고통을 멀리 벗어나
                  내 가슴은 기쁨과 환희로 가득하나니
                  거룩하신 부처님과 법과 스님들께 귀의하여
                  마음의 평온을 얻었기 때문일세.
                                        <비구니의 노래>

  오늘은 지장재일입니다.
  얼마 전에는 그렇게나 무덥고 장마비가 세차더니, 오늘은 벌써 가을인 듯 낙엽이 하나 둘 지기 시작하는군요.
  문득 저 떨어지는 낙엽을 보면서 ‘우리의 인생도 저렇게 떠나가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 부처님 당시에 어느 어머니가 7대 독자를 잃은 적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슬프고 기가 막혔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전지전능하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와 엎드려 빌면서
  “전능하신 부처님이시여, 내 아들만큼은 꼭 좀 살려 주십시오.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자식이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 여인의 어깨를 살며시 토닥거리며
  “그래, 그 슬픔을 내가 안다. 걱정 마라. 내 말대로 할 수 있다면 내가 틀림없이 네 아들을 살려주마.”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면 이 아랫동네에 가서 일곱 집씩을 다녀보거라. 그리하여 집집마다 가족 중에 죽은 사람이 있나 없나를 잘 살펴보아라. 만일 죽은 사람이 없는 집을 한 곳이라도 알아오면, 내 너의 아들을 바로 살려주마.”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한 집, 두 집…… 일곱 집. 또 일곱 집, 또 시작.
  여인은 지쳐 쓰러질 듯 했습니다. 온 동네를 뒤쥐다시피했지만 사람이 죽지 않은 집은 한 곳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집집마다 나와 비슷한 슬픔을 다 지니고 있구나. 아쉬움과 아픔도 나와 같구나.’
  어떤 때는 같이 울며 슬픔을 함께 나누기도 했습니다. 여인의 마음도 차츰차츰 가라않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만일 죽는 사람이 없다면 어떻게 오늘의 우리가 현생을 누릴 수 있으며, 또 우리가 죽어야 후손들도 살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어떤 의미에선 현세적 삶이란 차츰차츰 죽음으로 다가가는 운명적 과정의 연속일지도 모릅니다. 자식의 의젓함이나 손자의 성장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생, 아니 살아 있는 모든 것은 그렇도록 규정지어져 있습니다.
  저 변화하는 자연을 보십시오.
  사시사철, 봄에는 싹 틔어 생동하고, 여름이면 싱그럽게 약동(躍動)하다가, 가을이면 조용히 결실을 맺어 중생을 살리고, 겨울이면 제 살덩이 털어 거름을 삼아 다시 내생을 준비하는 나무, 나무, 나무들…….
  인생도 저 나무 한 그루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변화하는 계절처럼 그렇게 흘러가는 것을―. 하물며 인간도 자연의 일부임에랴.
  항상 그대로[常]인 상태는 있을 수 없습니다.
  물질이든, 자연의 현상과 조건이든 모든 것은 변한다는 무상(無常) 그 자체가 바로 진리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1879~1944) 선생은 이렇게 읊었던 것일까요.
  “만남은 헤어짐을 전제하고, 새로운 만남을 기약한다.”
  다만 삼라만상(森羅萬象)과 삶의 현상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성․주․괴․공(成住壞空)의 과정을 거치는 시공의 연장일 뿐, 인연 따라 흘러가며 변화할 따름입니다.
  이 삼라만상 중에 ‘무엇을 만든다’는 것은 여러 인연을 종합시키는 행위일 뿐 전혀 없던 것을 새로이 만드는 창조의 의미일 수는 없습니다.
  석가모니부처님의 깨달음만 하더라도, 전혀 없던 것을 새로 만들어 낸 진리의 창조자가 아니라 진리의 발견자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최초로 설한 진리는 연기(緣起)의 법칙입니다.
  ‘연기’라는 것은 세상의 일체만유는 하나도 예외 없이 그것이 형성될 수 있는 조건과 인연에 의하여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이러한 인연의 진리는 부처님 이전에고 있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할 것이며, 그 진리를 발견하고 체득하신 분이 바로 붓다[佛陀]인 셈이지요.
  여러분이 기적처럼 알고 있는 예수의 탄생과 부활, 석가가 태어나자마자 일곱 발자국을 내지르며 ‘천상천하유아독존’을 부르짖었다는 설화, 단군신화 등은 위대한 분을 숭앙하기 위한 상징적 표현일 뿐 창조적 의미로는 보기가 어렵습니다.
  오늘은 부처님께서 불교의 근본 교의(敎義)를 나타낸 세 가지의 진리, 삼법인(三法印)에 대한 말씀을 되새겨보았으면 합니다.
  첫째는 제행무상(諸行無常)― ‘모든 존재와 현상은 항상 변화하므로 고정불변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진리입니다.
  그런데도 중생은 좋고 행복한 것, 즐거운 것 등이 항상[常] 그대로 유지되기를 소원하며, 그런 착각 속에서 무상(無常)을 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항상 그대로 이기를 바라는 마음, 그것 때문에 고통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연 ‘나는 누구이며 이 변화하는 삶 속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깊이 생각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네 육신이 네 것이냐?”
  일순간, 자기가 지닌 몸뚱이는 분명 자기 것일 거라는 착각도 일어났습니다. 그러다가 한 참 후에
  “아닙니다.”
  “그렇다. 이 육신을 나라고 말할 순 없느니라. 만약에 이 육신이 진정한 나라고 한다면, 내가 고통스러워하는 병이나 괴로움이 이 육신에 생기지 않아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여러분 당연하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두 번째는 제법무아(諸法無我)― ‘만유의 제법은 인연에 의하여 생긴 것이므로 변치 않는 참다운 실체[自我]는 없다’는 진리입니다.
  모든 것이 변한다면 변하지 않는 내 것이란 어디에 있는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나[我: 아트만]라고 하는 아집(我執)으로 진정한 자기 것이라도 있는 양, 착각 속에서 오늘의 삶을 영위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런데도 나만 잘 난 척, 상대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 삶의 태도는 ‘아만(我慢)․교만(驕慢)․무지렁이의 태도일 수밖에 없습니다.
  중생세계는 더불어 살게 되어 있는 것을―.
  세 번째는 일체개고(一切皆苦)입니다.
  이 세상에 고통 아닌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모든 것은 변하고(無常) 내 것조차 없다(無我)라는 사실은 어쩌면 여러분을 허무주의(虛無主義)에 빠지게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진 않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나면 세상을 더 충실하고 행복하게 살아야 되겠다는 각오가 서질 않겠습니까.
  여러분은 위의 제행무상․제법무아․일체개고의 세 가지 진리는 알았을 것입니다.
  ‘모든 것은 변한다, 나[我]라는 실체는 없다. 일체가 고통이다.’
  결국은 인연으로 화합된 것은 그 인연이 다하면 흩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런 진리를 깨달은 것만으로도 여러분은 오늘부터 순간순간 열심히 살 것을 다짐해야 합니다. 그야말로 오늘이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누구는 말했습니다.
  “매일매일을 잘 사는 것이 인생의 최대 행복이다.”
  어쩌면 오늘 이 법당에서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 드리는 이 인연이, 여러분의 인생 중 가장 귀중하고 가치 있는 시간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자기자신을 잘 건사하는 의미에서 부처님의 게송 한 가지를 더 들읍시다.

          비록 백 만의 적을 물리친다 하더라도
          홀로 자기를 눌러 이기기만 못하나니
          자신을 이긴 자가 최후의 승리자다.
          먼저 자신을 바르게 하고
          다음에 남들을 가르쳐라.
          먼저 자신을 옳게 할 때 비로소 훌륭한 사람이니라.
          자기의 마음을 스승으로 삼을지니
          남으로 자신의 참 스승을 삼지 말라.
          자기를 스승으로 삼는 사람이라야
          진실로 지혜로운 법을 얻는다.
                                  <법집요송경 제2권 기신품>
  여러분, 모두 진리의 길에 들어 지혜롭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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