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바닥에서 새끼줄을 한 토막 주워왔는데 그 새끼줄 끝에 소 한 마리가 매어 있었다.”  2012년 대선 당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국정원 직원들에게 선거에 결정적 영향을 준 정치댓글 행위를 지시한 혐의에 대해, 재판부는 11일 정치개입은 유죄, 대선개입은 무죄 판결을 내렸다.

 

“새끼줄 한 토막 주워왔을 뿐”이라는 가당찮은 ‘소도둑의 변명’에 재판부가 면죄부를 준 꼴이다.

 

대선 당시의 국정원 댓글과 트위터 활동이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을 지지하거나 비방하는 결과를 초래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정치개입 행위를 하게 되었지만 그것은 범행의 주된 목적은 아니라는 것이 재판부의 판단이다. “사이버 공간에서의 북한 책동을 방어하다보니 그러한 정치댓글도 새끼줄 끝에 딸려 왔다”는 것으로 선거 개입으로는 볼 수 없다는 해석이다.  

이번 재판부의 판결문을 보면, 재판부가 ‘국가기관의 선거개입’이라는 범죄행위에 대해 그 엄중함을 알고 있는 것인지, 삼권의 한 축으로서 권력분립과 사법부의 독립성을 털끝만큼이라도 인식하고 있는 것인지 답답함과 참담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판결문에 나타난 논거와 법리 해석이 법의 문외한인 일반인의 상식으로 보아도 궤변이요 억지이며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투성이임은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판결문은 원세훈 피고가 “국정운영 방침에 반대하는 정당과 정치인을 비방하도록 지시했고 조직적인 정치관여 활동이 이뤄지게 했다”고 적시하고 있다. 또한 “국가기관이 특정 여론을 조성할 목적으로 국민들의 자유로운 여론 형성 과정에 직접 개입하는 행위는 어떤 명분으로도 절대 허용될 수 없고 민주주의 근간을 뒤흔드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판결문은 “북이 사이버 공간에서 우리 국정운영에 대한 허위사실 유포, 국정 성과 비난, 국론 분열과 정부 전복을 책동하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라고 전제하고 “이 사건 범행이 위법하게 이뤄졌지만, 피고인 등의 주된 목적은 북한의 사이버상 허위사실 유포, 흑색선전 대응에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 원세훈 전 국정원장. ⓒ 노컷뉴스
 

판결문은 또 “이 사건 범행이 원세훈 지시로 야기됐지만, 원세훈이 구체적 실행 방법이나 그 글 내용까지 모두 인지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종명, 민병주 피고인에 대해서도 원세훈의 ‘위법한 지시’를 전달했지만 “상명하복이 강한 조직에서 이의를 제기하긴 쉽지 않았을 것”이라며 “범행을 주도하거나 핵심적 역할을 담당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공정한 재판은커녕 재판부가 피고인의 편에 서서 변호에 나선 꼴이다. 아전인수도 유만부동이지 수임을 맡은 변호인도 이렇게는 변호하지 않을 정도로 논리 비약이 심하다.

 

이번 판결문은, 지난 2009년 날치기로 통과된 미디어법의 권한쟁의 심판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내린 전대미문의 애매하고 이상한 판결을 연상케 한다. 헌재는 미디어법의 처리 과정에서 일사부재의 원칙을 위배했고 대리투표, 부정투표 등으로 “국회의원들의 권한을 침해했다”는 위법 판결을 내렸지만, 그 법의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에 대해서는 기각 결정을 내린 바 있다.

 

“법의 처리과정은 불법이지만, 법적 효력엔 문제가 없다”는 헌재의 이 판결은 “커닝은 했지만 합격은 유효하다”, “술먹고 운전은 했지만 음주운전은 아니다”, “오프사이드는 했지만 골은 인정된다”는 등 네티즌들의 비아냥 댓글들이 쏟아져 나와 웃음거리가 되었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말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느껴지는 이 상황에서 법을 지킬 사람은 누구인가. 선거에서 승리해 권력을 쟁취하면 모든 것이 정당화되고 있는 이런 대한민국에서 누가 반칙 없는 정직한 경쟁을 하려하겠는가. “위반은 했지만 법적 효력은 인정된다”는 이 법적 결정은 ‘정의’가 사라진 21세기 대한민국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부정선거로 당선된 대통령에게 선거부정을 지적하지도 못하고 단 한 마디의 사과도 받아내지 못하는 야당, 당선 후 선거공약 대부분을 파기해도 저항하지 않는 국민, 국가가 무고한 시민을 간첩으로 조작해도 내 일 아니라고 모른 척하는 사회, 세월호 참사의 비상국면에서 대통령이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밝혀내지 못하는 이러한 나라 등은 모두 정상이 아니다.

 

박근혜 정부는 부정으로 집권했고 선거공약을 파기했으며 무고한 시민을 범죄자로 몬 정권이다. 식언과 공언을 다반사로 하고, 국가적 참사 앞에서 자신의 행적을 밝히지도 못하고, 불리하면 모르쇠로 일관하는 대통령은 국민에게 불행을 가져다 줄 뿐이다.

 

원세훈 피고인에 대한 선거법 무죄 판결은 역설적으로 세월호 진상조사위원회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유가족들 주장의 정당성을 더욱 확고하게 해주었다.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한가. 조직적 범행의 주체인 국정원과 그 국정원의 범행으로 이익을 본 박근혜와 그 박근혜 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재판부가 짜고 치는 이 판을 뒤집어엎기 위해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올바른 세월호 특별법 제정이며 국가 개조는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