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조선판 ‘세월호’와 태종의 사과
1403년(태종 3년) 5월5일 대형 참사가 일어났다. 경상도 조운선(각 지방에서 거둔 세금 현물을 운반하는 배·사진) 34척이 바다 한가운데서 침몰한 것이다.
이 사고로 선원 1000여 명과 쌀 1만석이 수장되고 말았다. 비보를 들은 태종은 장탄식했다.
“사람들을 사지로 몰아넣었구나. 거센 풍랑에 배를 띄우는 게 아니었는데…. 쌀을 버린 것은 아깝지 않지만…. 죽은 사람들의 부모·처자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참사의 다른 원인이 파악됐다. ‘화물적재량을 감독하지 않은 데다 용렬한 선장에게 배를 맡겼기 때문’(<태종실록>)이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모든 재난은 이유없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부르는 것(災不虛生 由人所召)”(<인조실록>)이라고 하지 않던가. 모든 재난은 인재(人災)에서 비롯된다는 말이다.
태종 역시 선장과 선원, 혹은 지방수령을 엄중처벌하는 선에서 수습할 수 있었다. 필요하다면 사정기관인 사헌부나 의금부를 총동원해서…. 그러나 태종은 아랫사람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았다. “이 모든 책임은 과인에게 있다”고 선언한 것이다. 태종뿐이 아니었다. 옛날의 군왕들은 재난의 책임을 대체로 스스로에게 돌렸다.
오죽했으면 2000년 전 부여에서는 ‘기상이변으로 오곡이 영글지 않으면 국왕을 바꾸거나 죽인다’고까지 했을까.(<삼국지> ‘위서·동이전’)
신하들도 재변이 일어나면 “군주가 책임져야 한다”고 다그쳤다. 예컨대 1632~1633년 사이 기상이변이 잇따르자 홍문관(자문기관)과 대사헌 강석기 등이 상소문을 올렸다.(<인조실록>)
“민심을 잃어 이 지경이 됐습니다. 초심을 잃은 겁니까. 예전의 폐단에 사로잡힌 겁니까. 사사로운 감정에 빠진 것입니까. 신상필벌에 미진한 겁니까.”(홍문관) “전하의 10년 치하에서 덕과 정치가 잘못되어 하늘의 마음을 잃은 것 같습니다. 백성의 원망이 극에 달하니 이 같은 변고가….”(강석기)
명색이 군주인데, 너무 심한 추궁이 아닌가. 그렇지 않았다. 강석기가 임금에게 독설을 퍼부은 뒤 던진 말을 보라. “하늘은 이런 경고(재난)를 내렸습니다. 임금 스스로 반성하고 몸과 마음을 닦으십시오. 재난이 상서(祥瑞)로 바뀝니다.”
재난을 맞은 지도자가 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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