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관리, ‘매뉴얼’보다 ‘안전문화’가 답 |
세월호 침몰 사고 희생자 가족들이 5일 오전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초지동에 마련된 정부합동분향소 앞에서 “아이들이 웃을 수 있게 진상규명 바란다”는 등의 글이 적힌 손팻말을 들고 사흘째 침묵시위를 하고 있다. 안산/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
1994년 에스토니아호 침몰사건
852명 희생된 대형사고 겪은뒤
위기상황 공유·대처 교육 주력
기관실 등 이중설계 기술발전도
사고 원인·대책 ‘20년째 진행형’
“선장과 선원이 가장 늦게 구명정을 타야 한다는 규정은 어떤 매뉴얼에도 없다. 배가 침몰할 때 선원들이 매뉴얼에 나온 자기 임무만 다하면 모든 승객을 살릴 수 있을까? 구명정 펴는 일을 맡은 선원이 자기 임무를 끝내면 탈출해도 되는 걸까? 사고 뒤에 매뉴얼을 강화하고 구명정 수를 늘리는 것은 옛날 방식이다. 위기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안전 문화’ 교육이 중요하다.”스웨덴 해양안전청의 에리크 에클룬드 부청장은 세월호 사고를 당한 한국에 “매우 안타깝다”며 ‘동병상련’의 위로부터 전했다. 스웨덴도 세월호 못지않은 해양 참사를 겪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20년 전인 1994년 9월28일 세월호처럼 승객과 화물을 함께 싣는 ‘로로선’인 에스토니아호가 발트해에서 침몰한 사고로 스웨덴 사람 550여명이 숨졌다. 승선자 989명 중 852명이 목숨을 잃은, 2차대전 후 유럽에서 발생한 가장 처참한 해양 사고였다. 해양 강국 스웨덴은 이 사고 뒤 20년간 유사 사고를 막으려고 절치부심해 왔다. 여객선 안전 관련 정책과 기술 개발에 어떤 국가보다 앞장서 왔다. 이 사고의 기억이 생생한 스웨덴인들은 세월호 사고에 각별한 관심을 나타냈다. 현지 언론도 세월호 사고의 발생부터 원인, 수색 상황 등을 비중 있게 보도하고 있었다.
유럽연합(EU) 회원국들에 해양 안전 자문을 해주는 유럽해사안전청(EMSA)의 스웨덴 대표이기도 한 에클룬드 부청장은 당시 사고의 원인으로 “도착 시간을 지켜야 한다는 선장의 압박감”을 가장 먼저 꼽았다. “선장은 기상이 나쁘면 운항을 정지하거나 도착 시간을 늦출 권한이 있다. 하지만 에스토니아호 선장은 날씨와 상관없이 정시에 도착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꼈다.” 세월호 역시 짙은 안개 탓에 출항이 늦어지다 무리하게 출항했고, 도착 시간을 앞당기려고 평소 다니던 항로와는 떨어진 곳으로 운항하다 사고가 났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는 선박에 발생한 문제를 승객들에게 알리지 않은 점도 짚었다.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는 문화가 필요하다. 선장과 선원들만 문제를 알고 있으면 이것이 승객들의 안전과 관련한 것인지를 알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에스토니아호 사고 때도 선원들은 침수 사실을 최초 발견하고도 21분이 지나서야 안내방송을 내보냈다. “작은 문제라도 문제로 인식해 기록으로 남기고 그 기록을 공유하게 되면, 다른 배들과 관련 부처들이 진짜 문제를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사람들은 문제 발생과 이로 인한 실패를 두려워한다. 하지만 실패를 공유해야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사회가 해결해야 하는 과제가 될 수 있다.” 대통령을 필두로 책임자 처벌에만 열을 올리는 우리의 상황과는 대비되는 진단이다.세월호 사고 뒤 한국에서는 ‘해양사고 대응 매뉴얼 강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크다. 에클룬드 부청장은 이런 ‘매뉴얼 만능주의’를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매뉴얼은 항상 있었다. 매뉴얼에는 선장이 도착 시간을 결정할 수 있다고 나와 있다. 하지만 선장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매뉴얼대로 하지 않거나, 매뉴얼을 따를 수 없게 만드는 ‘현실의 이면’을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에클룬드 부청장은 2012년 1월 이탈리아 해안에서 발생한 유람선 코스타 콩코르디아호 좌초 사고 때 선장이 먼저 탈출해 승객과 승무원 32명이 목숨을 잃은 사고 역시 안전 문화의 부재 탓으로 설명했다.에스토니아호 사고를 겪은 뒤 스웨덴 해양안전청이 가장 먼저 한 일은 항해사를 배출하는 해양학교 두 곳의 교육 과정에 안전 프로그램을 강화하는 일이었다고 한다. “옛날에는 이런 사고가 발생하면 매뉴얼에 선원의 구조 임무를 강화하거나 구명정과 구명조끼의 개수를 늘리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에스토니아호 사고 이후에는 배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교육을 새로 시작했다. 더 많은 승객을 구하기 위해 이들이 위기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고 대처해야 하는지를 익히는 데 교육의 방점을 찍었다.”
침몰 3년 뒤에 나온 에스토니아호 사고 보고서는 원인을 크게 두 갈래로 정리했다. 선원들의 대처가 너무 늦었다는 점, 그리고 선박 설계의 잘못이 지적됐다. 안전 문화 강조는 전자에 대한 대책이었다. 스웨덴 정부는 설계 결함에 대한 대책으로 선박 안전을 강화하는 기술 개발에 직접 나섰다. 에클룬드 부청장은 “선박에 기관실을 이중으로 만들도록 했다. 두 기관실 사이는 격벽으로 막아 한쪽이 침수 또는 화재로 쓸 수 없게 돼도 다른 쪽은 보호되도록 했다. 배의 제일 꼭대기, 선교에만 있던 조타실도 사고에 대비해 아래쪽에 하나 더 만들었다. 전기설비도 구간별로 나눠 배선을 하도록 했다. 어느 구간에 문제가 생겨도 배 전체가 정전이 되는 일을 막았다.”
이런 기술은 문제가 생긴 배 자체를 ‘커다란 구명정’으로 만들려는 것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침수가 되더라도 배가 뒤집혀 승객들이 바다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배의 복원력을 유지하는 기술을 개발하려고 애썼다. 약간 가라앉은 채로라도 가장 가까운 항구로 배 자체가 이동하는 게 승객들을 가장 많이 살릴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실제 승객들이 구명조끼를 입고 바다에 뛰어내린다고 해서 목숨을 건진다는 ‘보장’은 없다. 에스토니아호 사고 당시 발트해의 수온은 매우 낮았다. 승객들은 바다에 뛰어들고도 상당수가 저체온증으로 숨졌다. ‘고장난 배를 그대로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커다란 구명정으로 쓰자’는 역발상은 여기서 출발했다.
이중 기관실, 이중 조타실, 구간별 배선 등의 기술을 모두 적용한 여객선 그레이스호가 핀란드에서 건조돼 지난해부터 스웨덴~에스토니아 노선을 오가고 있다. 현재 스웨덴 해양안전청에서는 그레이스호처럼 새로운 기술이 적용된 배에 사고가 발생했을 때 선원들이 어떻게 인명 구조를 해야 하는지를 ‘시뮬레이션’하는 프로젝트(2013~2016년)를 진행 중이다. 에클룬드 부청장은 “정부가 할 일은 발전된 기술을 가지고 어떻게 사람을 구하고 사고를 방지할 것인가를 교육하는 일이다. 이 프로젝트가 끝나면 새 기술에 맞는 새 매뉴얼이 생길 것이고, 모든 사람들이 이런 변화를 인지하고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에스토니아호 사고 시점으로부터 20년 넘게 스웨덴은 원인을 꼼꼼히 조사하고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 왔다. 서해훼리호 사고 21년 만에 또다시 세월호 사고를 당하고도 여전히 똑같은 대응을 되풀이하고 있는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목이다. 스톡홀름/진명선 기자 tora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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