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 가구 증가, 최저임금 상승 바람 타고 유통망 확장…현대인의 고독감을 달래 줄 ‘마음약방’ 자판기도 등장
▎‘꽃은 꽃집에서 사야한다’는 편견을 깬 난만(NANMAN)의 꽃 자판기. 저녁 시간대 모임 장소로 향하는 소비자를 겨냥해 큰 성공을 거뒀다. | |
농협은 지난해 11월 육류 자판기를 선보였다. 정식 이름은 ‘IoT 스마트판매 시스템’. 사물인터넷을 활용해 실시간으로 품질·재고 관리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생고기, 양념 고기 등 20여 종의 고기를 300g 단위로 진공 포장해 판매한다. 혼자 사는 직장인들을 염두에 둔 규격이다. 자판기는 서울 서대문구 농협중앙회 본관과 강남구 KT&G타워에 각각 1대씩 설치돼 시범 운영 중이다. 9월 10일 퇴근시간 무렵 농협중앙회 본관에 있는 자판기를 찾았다.
자판기 가운데에 있는 터치스크린에는 ‘한우 등심 구이’ ‘한우 불고기’ 같은 소고기 상품과 ‘한돈 삼겹살’ ‘돼지 고추장불고기’ 등 돼지고기 상품이 나열돼 있었다. 마침 직원 한 명이 자판기 쪽으로 다가왔다. 한우 등심을 택한 직원은 “집에 가서 등심 스테이크를 요리해 볼 생각”이라면서 “집 근처 정육점에서 살 때보다 20% 가까이 저렴해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이날 자판기에서 판매한 한우 등심(300g) 가격은 2만6400원. 같은 제품이 온라인쇼핑몰인 ‘농협몰’에서는 3만 원에 팔리고 있었다.
퇴근길에 만나는 ‘1인분 스테이크’ 자판기
▎서울 서대문구 농협중앙회 본관 로비에 설치된 ‘IoT 스마트판매 시스템’. 한우·한돈 상품을 시가보다 20% 가까이 싸게 살 수 있어 소비자들의 관심이 높다. | |
어떻게 이런 가격이 가능할까? 인건비와 임대료가 극히 적게 들어가는 자판기를 통해 팔기 때문이었다. 이윤을 더 남기기보다 자판기 상품의 가격경쟁력에 힘을 실었다. 농협은 육류 자판기 시범 운영 후 올해에만 전국 500곳에 설치하겠다고 공언한 터다. 농협 관계자는 “현재 오피스텔 등 1인 가구 밀집지역을 중심으로 자판기 설치 장소를 섭외하는 중”이라고 밝혔다. 그는 또 “전국적으로 자판기가 설치되면 사물인터넷의 진가가 더욱 돋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 자판기 사업의 효시는 1975년 서울 명동 코스모스백화점에 등장한 담배 자판기다. 1977년 롯데산업이 일본 샤프에서 커피 자판기를 400대 들여오면서 대중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후 음료수·과자 등으로 영역을 넓히며 급속히 늘어났으나 커피 전문점과 편의점의 확산으로 한풀 꺾이기도 했다.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시중 자판기 수는 2003년 12만여 개로 정점을 찍은 뒤 2014년에는 4만여 개까지 줄었다.
그러나 최저임금이 2년간 27% 오르면서 자판기 사업은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저장·보관 기술이 진화하면서 가공식품뿐 아니라 신선식품으로 품목을 확장해 간 덕분이었다. 결제 방식도 신용카드에 그치지 않고 ‘핸드페이(손바닥 정맥 결제)’ 등으로 다양해지고 있다. 김지완 한국자동판매기 공업협회 부장은 “커피·음료 자판기가 다수를 차지하는 자판기 산업 전체는 여전히 하락세”라면서 “다만 멀티·특수 자판기 수요는 매년 10~20%씩 성장하고 있다”고 밝혔다.
자판기 도입에 가장 적극적인 곳은 한때 자판기의 대척점에 있었던 편의점 업계다. 이마트24는 지난해 9월부터 ‘셀프형 매장’이라고 이름 붙인 자판기를 이용한 무인 편의점 2곳을 운영하고 있다.
셀프형 매장은 24시간 운영되는 은행 ATM과 비슷하다. 오전 6시부터 자정까지는 유인 매장과 함께 운영된다. 일반적인 방식대로 진열대에서 상품을 골라 계산대로 가져가도 되고, 자판기를 사용해도 된다. 그러나 유인 매장 영업이 끝나는 자정부터 다음날 오전 6시까지는 셀프형 매장만 운영된다. 셀프형 매장에 설치된 두 대의 대형 자판기는 삼각김밥 등 신선식품을 비롯해 유제품과 과자, 냉장상품 등 일반 편의점에 버금가는 카테고리의 상품을 취급한다. 2L 생수 6개 묶음, 휴지 등 대용량 상품을 판매할 수 있는 별도 공간 20개도 마련돼 있다. 자판기에 상품을 진열할 때 유통기한을 입력하기 때문에 유통기한이 지난 식품은 구매가 불가능하다. 이 같은 방식으로 유통기한에 민감한 유제품 등을 효율적으로 관리한다.
무인 편의점으로 최저임금 파고 넘는다
▎이마트24는 지난해 9월부터 ‘셀프형 매장’이라고 이름 붙인 자판기를 이용한 무인 편의점 두 곳을 시범 운영하고 있다. 이마트24 관계자는 “올해 말까지 셀프형 매장을 70곳까지 확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 |
이런 시도는 후발주자라는 고민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마트 24는 CU와 GS25, 세븐일레븐 등 ‘빅3’와의 점포 수 차이를 좁히기 위해 2014년 ‘24시간 영업 자율’을 내걸었다. 빅3 업체는 점주가 24시간 영업을 해야 전기료, 신선식품 폐기 지원금 등을 우선 지원해 줬다. 이 때문에 업계 1위를 다투는 CU와 GS25는 24시간 영업을 하지 않는 곳이 10%대에 불과하다. 이마트24는 정반대다. 24시간 영업을 하는 곳이 26%에 불과하다. 최저임금 인상 탓에 심야영업으로 적자를 보는 점포가 늘자 이마트24의 정책이 빛을 발했다. 올해만 7월까지 이마트24로 간판을 바꿔 단 점포가 109곳에 달한다. 새로 편의점을 시작하는 점주들까지 합치면 797개나 늘었다. 그 다음인 CU는 464개에 그쳤다.
문제는 ‘24시간 영업을 포기할 것이냐’는 딜레마였다. 손님을 경쟁 업체에 뺏길 것이라는 우려가 컸다. 덩치를 키우자고 심야영업 시장에서 철수하는 꼴이었다. 이때 ‘셀프형 매장’은 점주들의 동의를 이끌어내면서도 24시간 영업을 재개할 수 있는 복안이었다. 이마트24 관계자는 “올해 안에 신규 가맹점을 대상으로 셀프형 매장 70곳을 오픈할 계획”이라면서 “편의점 창업 문턱을 낮추기 위해 유인 매장이 아닌 셀프형 매장만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도 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 유통업 관계자는 “무인 편의점의 수익률은 유인에 비해 적어도 1.5배 이상 좋다”고 귀띔했다.
세븐일레븐은 8월 20일 자판기만으로 이뤄진 무인 편의점 ‘세븐일레븐 익스프레스’를 선보였다. 5대의 스마트 자판기에서 음료·스낵·푸드·가공식품·비식품 등 5개 카테고리의 상품 200여 종을 판매한다. 유인 점포에 딸린 위성 점포로 기능한다는 점은 이마트24의 셀프형 매장과 다른 점이다. 세븐일레븐 관계자는 “재고를 점검하고 부족한 상품을 보충하는 등 기본적인 운영·관리는 일반 가맹점의 점주나 근무자가 한다”면서 “편의점 접근성이 떨어지는 사무실이나 외곽 지역에 설치할 경우 새로운 수요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자판기도 ‘물품소비’에서 ‘경험소비’로
▎세븐일레븐은 8월 20일 자판기만으로 이뤄진 무인 편의점 ‘세븐일레븐 익스프레스’를 선보였다. | |
CU는 자판기 대신 모바일 앱을 선택했다. ‘씨유 바이셀프(CU Buy-Self)’로 명명한 앱을 통해 소비자가 상품 스캔부터 대금 결제까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했다. 앱을 실행해 사려는 상품의 바코드를 직접 스캔하고 구매 수량을 결정하는 방식이다. 상품을 고른 뒤 앱에서 결제까지 가능하다. 쇼핑의 모든 단계가 앱을 통해 이뤄진다는 점에서 무인 편의점과 일맥상통한다.
자판기는 구매 가능한 품목을 넓히고 결제 방식을 쉽게 만들면서 편의성을 꾸준히 개선해 왔다. 그러나 ‘무미건조하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있다. 자판기와 사람의 관계는 돈을 넣고, 버튼을 누르고, 물건을 갖는 단조로운 과정으로 이뤄져 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철학자 장석주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동판매기에는 깊이가 아예 없다. 교양과 지혜가 없고, 그것을 만들 생각도 없다. 내면으로의 여행, 사유, 멜랑꼴리,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에 대해서도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제 자판기는 물물교환을 넘어 경험교환을 시도하고 있다. 복합쇼핑몰인 스타필드 고양에서 만난 ‘설렘 자판기’가 그 가운데 하나다. 설렘 자판기는 무작위로 책을 추천해 준다. 5000원을 넣고 여행·추리·로맨스·자기계발 등 8가지 장르 중 하나를 선택하면 책이 담긴 상자가 나온다. 상자를 뜯기 전까지는 어떤 책이 나올지 몰라 그야말로 ‘설렘’을 느끼게 된다.
▎경기 고양시에 있는 ‘스타필드 고양’ 매장에 가면 카테고리별로 설정된 버튼을 누르면 무작위로 책이 나오는 ‘설렘자판기’를 확인할 수 있다. | |
상자 속 책에도 나름의 의미가 담겨 있다. 청계천 헌책방 주인들이 미리 선별해 포장해 둔 책이기 때문이다. 국제 비영리단체 인액터스(Enactus) 소속 학생들이 ‘헌책방 살리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기획했다. 지난해 6월 설치돼 두 달 만에 매출 700만원을 올렸다고 한다.
서울 대학로의 서울연극센터 1층에는 ‘마음, 어디가 어떻게 아프세요’라고 묻는 자판기가 있다. ‘마음약방 자판기’로 불린다. 500원을 넣고 ‘미래막막증’ ‘현실도피증’ ‘자존감 바닥증후군’ ‘사람멀미증’ 등 20개에 이르는 증상 중 처방이 필요한 증상의 번호를 누르면 그에 맞는 처방전이 나온다. 시, 그림, 영화 등 예술 작품을 추천하거나 테마 지도, 비타민, 엿, 초콜릿 등 소소한 재미와 이야기가 있는 물품을 처방한다. 2015년 2월 설치 후 석 달여 만에 1만629명이 찾았다. 마음의 병을 치유하고 싶은 바람과 그것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욕망이 자판기라는 형태로 표현된 셈이다. 자판기를 운영하는 서울문화재단은 대학로에 이어 노량진 일대에 2호점을 낼 계획이라고 밝혔다.
돈이 아니라 쓰레기를 먹는 자판기도 있다. ‘네프론’이라 불리는 재활용품 자판기로, 재활용 가능한 캔이나 페트병 등을 넣으면 인공지능이 선별·압착·저장한다. 하나씩 투입할 때마다 페트병은 10포인트, 캔은 15포인트를 적립해 준다. 포인트가 쌓여 2000점을 넘으면 현금으로 쓸 수 있다. 외형적으로는 쓰레기를 포인트로 바꾼 것이지만, 내용적으로는 폐품을 주고 환경을 받은 형태다.
음료수 캔 한 개에 15원 재활용품 자판기도 등장
▎쓰레기를 넣으면 돈이 나오는 자판기도 등장했다. 서울 동대문구의 한 주민이 재활용품 자판기 ‘네프론’에 알루미늄 캔을 버리고 있다. | |
자원순환정보시스템에 따르면 2018년 8월 기준 압축 페트병과 알루미늄 캔은 ㎏당 각각 251원, 1099원에 거래되는데, 네프론은 이보다 비싸게 회수하는 셈이다. 네프론 관리 업체에 따르면 월 30만원 넘게 버는 이용자도 있다. 네프론을 운용하는 동대문구 관계자는 “네프론 1대가 연간 8t이 넘는 재활용품을 수거한다. 구에서 쓰레기 선별장을 통해 수거하는 양의 3%에 해당할 정도”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예상치 못한 것이 자판기 상품으로 나오기도 한다. 중국 최대 전자상거래 기업 알리바바가 미국 포드와 손잡고 만든 자동차 자판기가 그렇다. 중국 광저우 바이윈구에 들어선 5층 높이의 구조물 전체가 ‘자판기’다. 앱으로 원하는 차를 고르고 신분증만 확인하면 해당 자동차가 자동으로 아래층까지 내려온다. 정식으로 구매하지 않더라도 보증금 99위안(약 1만6000원)만 내면 사흘간 시험 주행까지 할 수 있다. 10% 계약금만 넣으면 명의 이전이 진행된다.
올해 1월 미국 전자상거래 기업 아마존이 오픈한 무인 슈퍼마켓 ‘아마존 고(Amazon Go)’를 보면 입이 저절로 벌어진다. 소비자는 매장에 들어갈 때 아마존 고 앱만 실행시키면 된다. 그리고 필요한 물건을 집어 나오면 앱에 등록된 결제 수단으로 비용이 지불된다. 소비자가 어떤 물건을 집어 들었는지는 수백 개의 자율주행 센서가 달린 카메라가 추적해 파악한다. 아마존 고는 공간 자체가 자동판매기인 셈이다. 아마존은 ‘계산하려고 줄을 서지 않아도 된다(No Lines, No Checkout)’고 자신한다.
▎중국의 전자상거래 기업인 알리바바는 미국의 포드자동차와 손잡고 중국 광저우에 ‘자동차 자판기’를 만들었다. 앱으로 원하는 자동차를 고르고 신분증만 확인하면 해당 자동차가 아래층까지 내려온다. | |
미래형 편의점, ‘기술주의 매몰’ 경계해야
▎아마존은 올해 1월 미국 시애틀 아마존 본사 건물 1층에 무인상점 ‘아마존 고’를 개장했다. | |
기존 유통업체로서는 긴장할 수밖에 없다. CU가 SK텔레콤과 손잡고 ‘미래형 편의점’을 만들기로 한 것은 아마존 고를 곧바로 겨냥한다. SK텔레콤의 AI 비서인 ‘누구’가 소비자를 응대하고, 생체 인식 등을 적용해 소비자를 인지하고, 스마트 선반 등으로 재고를 관리하는 식이다. 현대백화점은 8월 20일 아마존 자회사 ‘아마존 웹서비스’와 직접 손잡았다. 두 기업은 2020년 개점하는 현대백화점 여의도점에 ‘아마존 고’ 같은 첨단 기술을 대거 적용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사람들이 원하는 이상적인 쇼핑이 ‘No Lines, No Checkout’인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미국 시장조사 업체 YouGov가 2016년 12월 미국 성인 1039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66%가 “아마존 고의 쇼핑 방식에 돈을 더 지불할 의사가 없다”고 밝혔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는 “무인화·자동화가 이뤄진 미래형 매장의 등장과 확산은 피할 수 없는 흐름”이라면서도 “온라인 거래가 오프라인 거래를 완벽히 대체하지 못했듯 무인화 점포가 유인 점포를 모두 대체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 글 문상덕 월간중앙 기자 mun.sangdeok@joongang.co.kr / 사진 박종근 기자 park.jongkeu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