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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내달초 서해서 연합대잠훈련 실시

  • 22:48 / 수정 : 2010.08.19 01:29

양국 잠수함.구축함 참가..항모는 안올듯

한국과 미국은 북한의 천안함 공격에 대응한 군사조치 일환으로 연합 대잠수함훈련을 9월 초 서해상에서 실시한다고 18일 공동 발표했다.

양국은 이날 발표자료를 통해 “지난달에 있었던 양국 외교.국방장관회담에서 앞으로 수개월 동안 한반도 동.서해상에서 일련의 연합훈련을 실시하기로 합의했다”면서 “9월 초 서해상에서 방어적 성격의 연합 대잠수함훈련을 실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지난달 25~28일 동해상에 이어 두 번째 실시되는 이번 연합훈련은 “양국 동맹간의 대잠수함전에 대한 전술과 작전능력 향상, 각종 대응 절차 숙달에 중점을 두고 진행할 계획”이라고 양국은 설명했다.

양국은 현재 구체적인 훈련 계획 작성을 위한 실무협의를 진행 중이며, 참가 전력과 훈련 내용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이번 훈련에 미측은 7함대 소속의 이지스 구축함과 원자력 추진 잠수함을 파견할 것으로 관측된다. 니미츠급 항모인 조지 워싱턴호(9만7천t급)는 대잠수함훈련이란 성격상 참가하지 않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미 7함대는 8천~9천t급 순양함(카우펜스, 샤일로 등)과 알레이버크급(7천~8천t급)의 이지스 구축함(존 메케인 등), 상륙지원함(4천~1만5천t급), 버지니아급(7천~1만t급)의 핵잠수함(휴스턴, 버팔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 군은 한국형 구축함(4천500t급.KDX-Ⅱ)과 1천800t급 및 1천200t급 잠수함, 링스 대잠헬기, 해상초계기(P3-C), F-15K 전투기 등 핵심 전력을 참가시킬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 국방부는 “이번 연합 대잠수함훈련은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고 한반도 안보를 위한 한.미 양국간의 굳건한 연합방위태세 유지에 대한 분명한 의지와 메시지를 대.내외에 나타내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후세인 처형과 미 달러 방위


워싱턴 리포트-4

후세인이 처형된 또다른 이유
미국 달러의 방위 겨냥한 배수진


새해를 맞이하기 이틀 전인 12월 30일 전격적으로 이뤄진 전 이라크 대통령 사담 후세인의 처형으로 이라크 사태가 한층 혼미해졌습니다. 처형에 반발하는 이라크 수니파의 무력 저항이 격렬해지면서 내전으로 치닫는 이라크의 불안은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형이 확정된 지 불과 나흘만에 마치 군사작전을 하듯이 속전속결로 진행된 후세인 사형집행의 배경도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과연 이라크의 말리크 정부가 독자적으로 사형집행 결정을 내린 것인지 아니면 점령국인 미국의 원격조정에 의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설이 분분합니다.

하지만 후세인이 미군에 의해 생포된 이후 줄곧 그 신병이 점령미군 하에 있었으며 사형집형 직전에 이라크 당국에 넘겨 졌다는 점 등으로 미뤄볼 때 사형집행에 미국의 의사가 반영됐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미군이 없으면 존립이 사실상 불가능할 정도로 기반이 취약한 말리크 정권이 수니파의 반발을 뻔히 예상하면서 후세인의 처형이라는 초강수를 둔 것은 미국의 강력한 요구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미국이 왜 후세인의 전격 처형을 원했는지에 대해서는 갖가지 해석이 난무합니다. 이라크 정책의 전환을 위한 사전 포석설에서 이라크의 불안을 심화시켜 이라크 점령의 명분을 확보하기 위한 계산된 행동이라는 분석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분석들은 미국의 전술적 사항에 관한 것이라는 점에서 미국의 이라크 침공 및 점령의 근본적인 배경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달러 방위



▲ 사담 후세인 이라크 전 대통령

왜 후세인이 그토록 전격적으로 처형됐느냐의 질문은 왜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점령했느냐의 질문으로 대체될 때 비로소 숨어있는 미국의 전략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확보하게 된다고 생각됩니다. 이라크 무력 침공에 깔려 있는 전략적 동기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후세인 처형의 배경과 향후 이라크 정세의 전개에 대한 전망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것은 세계 매장량 제2위인 이라크의 석유자원을 겨냥한 것이라는 점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러나 미국에서 석유보다 중요한 것은 미국 달러 지배체제의 붕괴를 막는 것이었습니다. 전 이라크 대통령 사담 후세인은 클린턴 대통령의 임기 말기이자 미국이 대통령 선거 국면에 있었던 2000년 11월 6일 이라크 원유 판매대금의 결제를 미국 달러화에서 유럽연합의 유로로 바꾸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미국은 후세인의 원유대금 결제 통화 바꾸기 선언은 그렇지 않아도 세계기축 통화로서의 지위가 위협받고 있는 미국 달러의 세계경제 지배체체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미국의 급소를 건드린 셈입니다.

쿠웨이트를 침공했다가 아버지 부시 대통령의 미국을 비롯한 다국적 군에게 반격을 당해 쿠웨이트에서 쫓겨난 뒤 목숨을 부지해온 후세인은 프랑스, 러시아, 중국 등과 거래를 통해 힘을 비축하자 이번에는 석유를 통해 미국에 반기를 든 것입니다. 유럽연합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독일과 프랑스를 비롯 러시아, 중국 등 후세인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온 국가들은 후세인의 반미 도전에 미소를 지었습니다.

유로화 결제 선언

후세인은 2001년 초부터 실제로 석유대금의 결제를 유러화로 받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반미 성향이 강한 이란도 동조할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친미 국가였던 사우디아라비아가 문제였습니다. 왕정 독재국가인 사우디의 파드 빈 압둘 아지즈 국왕은 친미주의자여서 문제가 없었지만 병약한 인물로 알려진 파드 국왕을 계승할 압둘라 왕세자는 아랍 민족주의에 동조하는 성향을 보이고 있었다는 점에서 미국은 사우디의 장래에 대해 불안감은 느끼고 있었습니다. 압둘라는 후세인과도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압둘라 왕세자가 왕위를 계승할 경우 석유매장량 세계 1위인 사우디아라비아, 2위인 이라크, 그리고 3위인 이란이 반미 동맹을 결성할 경우 중동의 석유에 크게 의존하는 미국 등 선진경제국들은 심각한 위협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미국으로서는 방관할 수 없었던 셈입니다. 하지만 임기를 불과 한 달정도밖에 남겨 두지 않았던 클린턴 대통령은 레임덕에 빠져 속수무책으로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이 지난해 11월8일 백악관에서 연 기자회견에서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을 해임하고 로버트 게이츠 전 CIA국장을 임명하기로 했다고 발표한 뒤 고개 숙인 럼스펠드 장관을 쳐다보고 있다. 로이터 연합

2001년 플로리다주 재검표 소동을 거쳐 천신만고 끝에 백악관에 입성한 부시 미국 대통령이 당면한 최대의 과제 가운데 하나는 위협받고 있는 달러의 방위였습니다. 부시 대통령은 딕 체니 부통령, 도날드 럼스펠드 국방장관 등 정권의 핵심인사들과 후세인의 도전을 비롯한 중동 사태를 본격적으로 논의했습니다. 이들 가운데에서도 체니 부통령이 논의를 주도했습니다. 체니는 아버지 부시 정권 시절 국방장관을 지낸 바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 굴지의 에너지 관련 기기 제작 및 건설회사인 핼리버튼의 사장을 지내는 등 안보 및 에너지 분야의 풍부한 경험과 지식을 겸비한 베테랑이었습니다. 국제문제는 물론이고 국가 경영에 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던 부시 대통령에게 체니는 길라잡이 역할을 했습니다.

석유 장악

◁딕 체니 미국 부통령

체니의 지론은 미국이 세계 헤게모니를 계속 장악하기 위해서는 석유를 장악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체니는 친구인 베이커 전 국무장관에게 에너지 전략 보고서를 작성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베이커는 이 보고서에서 앞으로 전 세계가 심각한 석유 공급 부족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하면서 이라크를 불안정 요인으로 지목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베이커 보고서는 미국이 새로운 게임의 규칙을 만들지 않으면 미국의 기업, 소비자, 그리고 정부는 현재보다 취약한 상태에 놓이게 될 것이라면서 근본적인 대책 마련의 필요성을 강조했다고 합니다.

체니는 베이커의 조언에 입각해 부시 대통령에게 에너지 보고서를 제출했는데 그 핵심 내용은 미국이 어떻게 해외 석유자원을 확보하느냐 였습니다. 체니는 특히 주요 석유생산국의 상당 부분이 반미성향의 국가들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부통령이 되기 전인 핼리버튼의 사장 시절 체니는 세계 석유매장량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중동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을 언급하면서 “우리는 석유가 있는 곳은 어디든지 가야 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부시 취임 직후부터 이라크 표적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911테러가 발생하기 전에 이미 부시 정권의 핵심부에서는 석유매장량이 풍부한 이라크에 대한 대책이 구체적으로 거론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부시 정권의 초대 재무장관으로서 2002년 후반기에 쫓겨난 폴 오닐 재무장관은 알카에다의 911테러 공격이전에 부시 대통령이 이미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 축출 계획을 결정했었다고 폭로했습니다. 오닐은 2004년 1월 미국 의 유명한 탐사보도 프로그램인 <60분>에 출연해 “부시 대통령은 취임 직후부터 ‘후세인은 사악한 자이다. 그를 보낼 필요가 있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고 증언했습니다. 또 오닐은 부시 대통령의 취임 10일째부터 최대의 관심사는 이라크였다고 주장했습니다.

오사마 빈 라덴이 뉴욕의 세계무역센터를 공격하기 8개월전에 이미 부시 대통령과 체니 부통령 등은 후세인을 축출하기 위한 군사행동을 모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911과 후세인은 전혀 관련이 없었습니다. 또 미국이 이라크 침공 이유로 제시했던 대량살상무기도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입증됐습니다. 이라크 침공이 911테러에 대한 보복의 성격이었다면 미국은 이라크가 아니라 사우디 아라비아를 먼저 응징했어야 마땅했습니다. 15명의 테러 용의자 가운에 무려 5명이 사우디 출신이었으며 사우디의 왕족의 관계자들이 911테러범들을 지원했던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911테러와 후세인은 전혀 관련이 없다는 점을 부시 대통령 자신도 2006년 의회 중간선거를 앞두고 인정했습니다.

오일 달러

미국이 이처럼 명문 없는 이라크 전쟁을 강행한 것은 그만큼 달러화의 기축통화 지위 약화 등 사정이 절박했기 때문입니다. 닉슨 대통령이 1971년 달러화의 금 교환 정지를 선언한 이후 종이쪽지에 불과한 달러가 세계기축통화로서의 지위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이른바 ‘오일달러’ 덕분이었습니다. 2차세계 대전이후 미국 주도하의 세계금융체제는 35달러=금 1온스라는 비율로 미국 달러를 금으로 바꿔주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브레튼우즈 체제’로 유지돼 왔습니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에 천문학적 규모의 돈을 퍼붓는 바람에 미국은 달러를 바꿔줄 금의 보유고가 거의 바닥이 나자 달러의 금 교환 정지라는 극약처방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위기에 몰렸습니다. 사실상 브레튼우즈 체제는 붕괴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 비결은 1973년 의 1차 중동전쟁과 아랍국가들의 오일금수조치, 그리고 석유수출기구(Organization of Petroleum Exporting Countries, OPEC)의 석유가 인상 등으로 촉발된 이른바 ‘오일 쇼크’와 ‘원유가격의 달러화 가격 표시’에 있었습니다.

OPEC가 하루아침에 원유가를 4배로 인상함에 따라 전 세계는 고유가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OPEC 국가들은 원유가 인상으로 약 570억 달러의 추가 수입을 올리게 됐습니다. 당시 원유가격이 배럴당 12달러 수준이었음을 상기하면 이 금액은 당시의 세계경제규모를 감안해 현재 시세로 환산하면 약1조달러에 상당하는 큰 규모였습니다. 전 세계의 원유 수입국가들은 숨통이 막히는 고통을 겪어여 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휘파람을 불었습니다. 미국과 OPEC은 회원국들이 원유대금을 미국 달러로만 받기로 협약을 맺었기 때문입니다. 독일 마르크화나 일본의 엔화로는 원유를 살 수 없었습니다. 미국은 자국 통화인 달러를 인쇄해서 그 돈으로 원유를 사면 됐기 때문에 별다른 고통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원유 결제대금의 달러화 고정으로 세계 각국은 달러를 매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공생관계

뿐만 아니라 OPEC가 추가 유가 인상을 위협함에 따라 세계각국은 원유대금으로 지불할 달러를 항상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됐기 때문에 달러화에 대한 수요는 원유에 대한 수요가 있는 한 존재하게 됐습니다. 2년전 달러의 금교환 정지 선언으로 세계 기축통화 지위를 상실할 위기에 몰렸던 달러는 오일쇼크를 통해 회생한 것입니다. 미국과 OPEC의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공생관계가 형성된 셈입니다.

이 때 구축된 원유가격의 달러 결제 관행은 현재까지도 대체로 그 뼈대가 유지돼 왔습니다. 미국은 달러의 세계기축통화 지위를 유지함으로써 달러화를 찍어내는 것으로 적자를 메꿀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2조달러가 넘는 누적 재정적자와 1조달러에 육박하는 경상수지 적자에도 불구하고 국가경제의 파탄을 겪지 않고도 풍요로운 생활을 즐겨 왔습니다.

원유가격의 달러가격표시제

오일 쇼크는 미국의 금융자본에게는 축복이었습니다. 오일 쇼크가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던 1974년 미국의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은 사우디 아라비아 정부와 ‘미국-사우디 아라비아 경제협력 공동위원회’ 설립 협정을 체결했습니다. 이 협정에 따라 사우디 정부는 비밀리에 미국의 재무부 증권을 대량으로 매입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OPEC 국가들은 원유가격 인상에 따른 재정수입의 70%를 해외 금융시장(특히 미국과 영국의 금융기관)에 투자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오일달러는 고스란히 미국과 영국으로 흘러 들어왔습니다. 이른바 앵글로색슨 금융자본의 대호황기였던 셈입니다.

일각에서는 중동전쟁이 이른바 ‘왕복 외교’로 키신저 국무장관의 농간에 의한 것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오일 쇼크는 석유 자원이 빈약한 제3세계국가들에게 엄청난 재정 부담를 주었습니다. 그 결과 1980년대에 들어 제3세계 국가들의 외채문제가 심각한 상황에 이르게 되는데 그 뿌리는 오일쇼크로 인한 고유가에서 있었던 것입니다.

오일 쇼크를 통해 미국은 닉슨 쇼크로 불렸던 달러의 금교환 정지로 비롯된 달러화 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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