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러스의 힘을 활용하라
지금 여기는 대구 가창댐 근처의 산속에 있는 명상원(자성의 집)입니다. 송년회 모임을 했던 도반들은 각자의 삶으로 모두 떠나시고 이 넓은 집에 사형되시는 청풍님과 저...이렇게 둘이 남았는데 사형께서도 2층에 주무시러 올라가시고 저 혼자 적막함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1시간 가량 비스듬하게 누워서 와선(臥禪) 명상에 빠져 있는데 문득 느낀바가 있어 한자락 남깁니다.
우리 조선 사람들 속담에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이 있습니다."
상대방에게 얘기할때 말을 뽄새있게 잘 하라는 뜻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더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비슷한 말이라도 그 결과는 천양지차로 벌어 질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악을 증오한다.
선을 사랑한다.
두 문장 사이에 어떤 차이점이 있는 것일까요?
겉으로 보이는 뜻은 비슷합니다.
악을 증오하는 것이 선을 사랑하는 것과 같고 선을 사랑하는 것이 악을 증오하는 것같으니까요.
하지만 전혀 틀린 내용입니다.
특히나 어떤 문장을 택하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엄청난 차이로 여러분 앞에 나타납니다.
악을 증오하는 것은 마이너스의 힘이며, 선을 사랑하는 것은 플러스의 힘입니다.
이 우주의 법칙은 아주 간단해서 내가 두려워하고 싫어하는 것은 반드시 나에게 다시 돌아옵니다. 또한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 역시 나에게로 다가오게 되어 있습니다.
두 문장이 내용은 비슷할지 모르지만 악을 증오하게 되면 그 악은 나에게로 오며 선을 사랑하게 되면 그 선은 내게로 오는 결과로 나타납니다.
전쟁을 증오하는 의식을 가진 세대는 평화를 누릴 수가 없습니다.
전쟁을 미워하는 대신 평화를 사랑해야 실제로 평화가 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 다르고 어 다르게도 이것을 구분하지 못한채 무의식적으로 전쟁의 씨앗을 퍼뜨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악해서 전쟁이 일어나는게 아니라 '지긋지긋한 전쟁'이라는 마이너스적인 집단 무의식이 실제로 전쟁을 일으킨다는 얘기입니다. 6,25동란도 그렇고 세계대전도 그렇고 중동전쟁도 그렇고 모두 그런 마이너스의 힘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평화를 사랑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죠.
전쟁은 히틀러가 일으킨 것도 아니고 나폴레옹이 저지른 것도 아닙니다.
그 당시 살던 세대의 전쟁 공포증이 일으킨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이제 사회 단체의 시위 문화도 바뀌어야 합니다.
"부시 물러가라" "김정일 때려잡자"같은 구태의연한 피켓 시위가 바로 전쟁을 일으키는 씨앗입니다. 그런 구호를 외치는 한 평화는 절대 오지 않습니다.
그런 시위를 하느니 조용한 산사에서 부시가 얼른 퇴임해 남은 여생을 평화롭게 살기를 기도하십시요.
그 염원이 전해져서 부시는 보다 일찍 정치를 걷어 치우고 낙향을 할겁니다.
노동 문화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체 언제까지 '투쟁'이라는 무시무시한 말을 외칠겁니까
노동자가 투쟁이라는 말을 외친다면 그 끔찍한 마이너스적인 힘이 사측에 전해져서 결과는 악순환을 반복하게 됩니다.
차라리 그 사장이 잘되기를 바라는 법회를 열고 기도하십시요.
집안 제사때도 "우리 사장 잘되게 해 주십시요" 라며 절하십시요.
그 플러스적인 힘이 전해져 반드시 여러분에게 미칠것입니다.
남을 잘 살게 해야 내가 잘살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잘 살 생각으로 뭔가를 하게 되면 이루어지다가도 안됩니다.
질병에 관해서 얘기해 볼까요?
암이라는 병을 증오하지 마십시요. 대신 건강함을 사랑하십시요. 암세포에겐 죄가 없습니다. 하루에도 몇백개씩 나타났다 사라지는 그냥 우리 몸의 현상일뿐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자꾸 의미를 부여하고 미워하게 되니 우주의 법칙은 우리에게 학습을 시켜 주느라고 암을 보내는 것입니다.
모든 불행의 원인은 '증오'라는 것을 일깨워 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같은 맥락에서...가난을 미워하지 말고 대신 풍요를 사랑하십시요.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풍요를 사랑하는 대신 가난을 미워하는 마이너스적인 힘을 선택합니다. 말은 비슷하지만 결과는 엄청난 차이로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것입니다.
옛선사들이나 성현들이 선악에 대한 시비를 가리려 하지 말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선악을 구분짓지 말고 두루뭉실 편하게 한 세상 살다 가라는 부처님 방귀잡는 소리가 아니라
악을 증오하는 생각을 버리고 선을 사랑하는 플러스의 힘을 활용하라는 뜻인것입니다.
우주의 법칙은 이처럼 아주 간단합니다. 내가 증오하는 것도 반드시 나에게 되돌아 오게 되어 있고 내가 사랑하는 것 역시 필연적으로 오게 되어 있습니다.
같은 개라도 내가 미워하고 때리면 사납게 변하여 나에게 달려드는 것이고 예쁘고 사랑스럽다고 하면 꼬리를 흔들며 졸랑 졸랑 안기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렇게 간단한 우주의 법칙을 우리는 여지껏 신경쓰지 않고 살아 왔으며 그래서 수많은 고통과 질병에 시달리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은 사랑대신 증오를 무의식적으로 선택하는 것일까요? 정말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사랑을 선택하게 되면 왠지 모르게 머쓱함을 느낍니다. 반대로 증오를 선택하게 되면 뭔지모를 은밀한 쾌감을 느끼게 됩니다. 내가 사랑을 선택하는게 주제넘은 짓이 아닌가 속으로 의심을 하게 된다는 얘기입니다. 예수나 부처같은 성인들의 영역에 있는 것처럼 멀게 느껴지는 것이죠.
그래서 그런 어색함을 피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스스로에게 '어리석은 인간'이라는 꼬리표를 붙여서 그런 인간에게 어울리는 듯한 '증오'를 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악을 증오한다'는 말과 '선을 사랑한다'는 말이 표면상으로 비슷해보이니까 성자의 영역에 있는 '사랑'을 건드리는 불경죄 대신 인간적인 영역에 있는 '증오'를 선택하는 것이죠. 기독교에서 얘기하는 원죄의식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성서의 본래 뜻은 "너희들은 태어날때 부터 죄를 짓고 태어났으니 함부로 까불지 말라"는 소리가 아니라 "그런 원죄의식을 너희들이 가지고 있으니 그 생각을 버리고 예수의 사랑을 택하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이상하게 변질되어 전해졌을 뿐입니다. 한 생각 달리하면 거기가 극락이요 지옥이라는 불교의 경구도 이런걸 얘기하는 것입니다. 한 생각 달리해서 플러스의 힘을 선택하라는 소리입니다.
예수도 인간이었고 부처도 인간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도 인간입니다. 구분을 짓지 마십시요. 그들이 사랑을 했으면 당신도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나에게 악행을 일삼는 사람을 억지로 사랑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 사람과 얽힌 구질구질한 삶을 증오하지 말고 그 사람에게서 벗어난 행복한 삶을 상상하며 사랑하라는 소리입니다. 그 대상은 그 악한 자가 아니라 바로 내 인생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렇게 중요한 문제인데도 불구하고 내 인생은 쏙 빼놓은채 상대방을 증오합니다.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과 행복한 관계를 이어나가는 내 인생을 사랑하십시요. 그래야 연인, 부부간에 헤어져도 앙금이 남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대상이 자신의 인생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국한됐기 때문에 헤어지고 나서 죽네 사네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과의 관계가 끝난 것이지 당신의 인생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혼동하지 마십시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원수와의 모든 악연을 벗어버린 상태를 사랑하라는 것이지 마음에 내키지도 않는데 억지로 원수를 끌어 안으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종교 지도자들이 얼마나 많은 그릇된 의식을 사람들에게 강요하고 주입시켰습니까. 자신 내면의 체득화 없이 억지로 무슨 일을 하게 되면 반드시 부작용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원수를 억지로 사랑하려고 하는데 그 사람은 나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으니 짜증이 밀려 오겠죠. 그러면 그 짜증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결국은 폭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사랑을 설파하셨지만 2천년이 지난 지금도 전쟁과 질병, 기아에 시달리는 것입니다. 부처의 자비도 마찬가지 맥락입니다. 내 스스로가 이해되지 않고 체득화가 안된 자비는 위선이며 오히려 혼란을 야기합니다.
모든건 자연스러워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느끼는 감정을 조절하며 스스로에게 이해되는 사랑을 해야지 어찌 당장 절대적인 사랑과 자비를 발휘하겠습니까. 그렇게 하려는 강박관념부터 버려야 합니다.
전쟁에 대한 증오 대신 전쟁에 대한 관심을 꺼버리십시요. 그리고 평화를 사랑하는 마음을 품으십시요. 원수를 사랑할 순 없어도 노력만 하면 최소한 원수에 대한 관심을 꺼버릴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그 원수와의 관계를 벗어난 새로운 인연과의 즐거운 관계를 상상하며 사랑하십시요. 그러면 정말 그런 인연이 내게 도래합니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며 플러스적인 요소를 당신의 인생에서 온전히 발휘하는 우주의 법칙입니다.
이런 생각이 당신의 마음 속에 정착되게 된다면 그때부턴 당신 스스로가 원하는 인생을 창조하며 즐겁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듣기 싫은 노래가 나오면 라디오를 끄면 됩니다. TV도 있고 비디오도 있고 즐거운게 지천으로 널려 있는데 뭐하러 싫은 노래를 듣고 있습니까? 억지로 그 싫은 노래소리에 저항하며 듣는 것이 오히려 부자연스럽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두려움에 저항하지 마십시요. 라디오를 끄듯이 두려움에 대한 관심을 끄고 대신 즐거움을 사랑하십시요. 진리란 별게 아닙니다. 이게 다입니다. 예수 말씀처럼 그 진리가 여러분들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지금 여기는 대구 가창댐 근처의 산속에 있는 명상원(자성의 집)입니다. 송년회 모임을 했던 도반들은 각자의 삶으로 모두 떠나시고 이 넓은 집에 사형되시는 청풍님과 저...이렇게 둘이 남았는데 사형께서도 2층에 주무시러 올라가시고 저 혼자 적막함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1시간 가량 비스듬하게 누워서 와선(臥禪) 명상에 빠져 있는데 문득 느낀바가 있어 한자락 남깁니다.
우리 조선 사람들 속담에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이 있습니다."
상대방에게 얘기할때 말을 뽄새있게 잘 하라는 뜻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더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비슷한 말이라도 그 결과는 천양지차로 벌어 질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악을 증오한다.
선을 사랑한다.
두 문장 사이에 어떤 차이점이 있는 것일까요?
겉으로 보이는 뜻은 비슷합니다.
악을 증오하는 것이 선을 사랑하는 것과 같고 선을 사랑하는 것이 악을 증오하는 것같으니까요.
하지만 전혀 틀린 내용입니다.
특히나 어떤 문장을 택하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엄청난 차이로 여러분 앞에 나타납니다.
악을 증오하는 것은 마이너스의 힘이며, 선을 사랑하는 것은 플러스의 힘입니다.
이 우주의 법칙은 아주 간단해서 내가 두려워하고 싫어하는 것은 반드시 나에게 다시 돌아옵니다. 또한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 역시 나에게로 다가오게 되어 있습니다.
두 문장이 내용은 비슷할지 모르지만 악을 증오하게 되면 그 악은 나에게로 오며 선을 사랑하게 되면 그 선은 내게로 오는 결과로 나타납니다.
전쟁을 증오하는 의식을 가진 세대는 평화를 누릴 수가 없습니다.
전쟁을 미워하는 대신 평화를 사랑해야 실제로 평화가 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 다르고 어 다르게도 이것을 구분하지 못한채 무의식적으로 전쟁의 씨앗을 퍼뜨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악해서 전쟁이 일어나는게 아니라 '지긋지긋한 전쟁'이라는 마이너스적인 집단 무의식이 실제로 전쟁을 일으킨다는 얘기입니다. 6,25동란도 그렇고 세계대전도 그렇고 중동전쟁도 그렇고 모두 그런 마이너스의 힘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평화를 사랑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죠.
전쟁은 히틀러가 일으킨 것도 아니고 나폴레옹이 저지른 것도 아닙니다.
그 당시 살던 세대의 전쟁 공포증이 일으킨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이제 사회 단체의 시위 문화도 바뀌어야 합니다.
"부시 물러가라" "김정일 때려잡자"같은 구태의연한 피켓 시위가 바로 전쟁을 일으키는 씨앗입니다. 그런 구호를 외치는 한 평화는 절대 오지 않습니다.
그런 시위를 하느니 조용한 산사에서 부시가 얼른 퇴임해 남은 여생을 평화롭게 살기를 기도하십시요.
그 염원이 전해져서 부시는 보다 일찍 정치를 걷어 치우고 낙향을 할겁니다.
노동 문화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체 언제까지 '투쟁'이라는 무시무시한 말을 외칠겁니까
노동자가 투쟁이라는 말을 외친다면 그 끔찍한 마이너스적인 힘이 사측에 전해져서 결과는 악순환을 반복하게 됩니다.
차라리 그 사장이 잘되기를 바라는 법회를 열고 기도하십시요.
집안 제사때도 "우리 사장 잘되게 해 주십시요" 라며 절하십시요.
그 플러스적인 힘이 전해져 반드시 여러분에게 미칠것입니다.
남을 잘 살게 해야 내가 잘살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잘 살 생각으로 뭔가를 하게 되면 이루어지다가도 안됩니다.
질병에 관해서 얘기해 볼까요?
암이라는 병을 증오하지 마십시요. 대신 건강함을 사랑하십시요. 암세포에겐 죄가 없습니다. 하루에도 몇백개씩 나타났다 사라지는 그냥 우리 몸의 현상일뿐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자꾸 의미를 부여하고 미워하게 되니 우주의 법칙은 우리에게 학습을 시켜 주느라고 암을 보내는 것입니다.
모든 불행의 원인은 '증오'라는 것을 일깨워 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같은 맥락에서...가난을 미워하지 말고 대신 풍요를 사랑하십시요.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풍요를 사랑하는 대신 가난을 미워하는 마이너스적인 힘을 선택합니다. 말은 비슷하지만 결과는 엄청난 차이로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것입니다.
옛선사들이나 성현들이 선악에 대한 시비를 가리려 하지 말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선악을 구분짓지 말고 두루뭉실 편하게 한 세상 살다 가라는 부처님 방귀잡는 소리가 아니라
악을 증오하는 생각을 버리고 선을 사랑하는 플러스의 힘을 활용하라는 뜻인것입니다.
우주의 법칙은 이처럼 아주 간단합니다. 내가 증오하는 것도 반드시 나에게 되돌아 오게 되어 있고 내가 사랑하는 것 역시 필연적으로 오게 되어 있습니다.
같은 개라도 내가 미워하고 때리면 사납게 변하여 나에게 달려드는 것이고 예쁘고 사랑스럽다고 하면 꼬리를 흔들며 졸랑 졸랑 안기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렇게 간단한 우주의 법칙을 우리는 여지껏 신경쓰지 않고 살아 왔으며 그래서 수많은 고통과 질병에 시달리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은 사랑대신 증오를 무의식적으로 선택하는 것일까요? 정말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사랑을 선택하게 되면 왠지 모르게 머쓱함을 느낍니다. 반대로 증오를 선택하게 되면 뭔지모를 은밀한 쾌감을 느끼게 됩니다. 내가 사랑을 선택하는게 주제넘은 짓이 아닌가 속으로 의심을 하게 된다는 얘기입니다. 예수나 부처같은 성인들의 영역에 있는 것처럼 멀게 느껴지는 것이죠.
그래서 그런 어색함을 피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스스로에게 '어리석은 인간'이라는 꼬리표를 붙여서 그런 인간에게 어울리는 듯한 '증오'를 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악을 증오한다'는 말과 '선을 사랑한다'는 말이 표면상으로 비슷해보이니까 성자의 영역에 있는 '사랑'을 건드리는 불경죄 대신 인간적인 영역에 있는 '증오'를 선택하는 것이죠. 기독교에서 얘기하는 원죄의식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성서의 본래 뜻은 "너희들은 태어날때 부터 죄를 짓고 태어났으니 함부로 까불지 말라"는 소리가 아니라 "그런 원죄의식을 너희들이 가지고 있으니 그 생각을 버리고 예수의 사랑을 택하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이상하게 변질되어 전해졌을 뿐입니다. 한 생각 달리하면 거기가 극락이요 지옥이라는 불교의 경구도 이런걸 얘기하는 것입니다. 한 생각 달리해서 플러스의 힘을 선택하라는 소리입니다.
예수도 인간이었고 부처도 인간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도 인간입니다. 구분을 짓지 마십시요. 그들이 사랑을 했으면 당신도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나에게 악행을 일삼는 사람을 억지로 사랑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 사람과 얽힌 구질구질한 삶을 증오하지 말고 그 사람에게서 벗어난 행복한 삶을 상상하며 사랑하라는 소리입니다. 그 대상은 그 악한 자가 아니라 바로 내 인생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렇게 중요한 문제인데도 불구하고 내 인생은 쏙 빼놓은채 상대방을 증오합니다.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과 행복한 관계를 이어나가는 내 인생을 사랑하십시요. 그래야 연인, 부부간에 헤어져도 앙금이 남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대상이 자신의 인생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국한됐기 때문에 헤어지고 나서 죽네 사네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과의 관계가 끝난 것이지 당신의 인생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혼동하지 마십시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원수와의 모든 악연을 벗어버린 상태를 사랑하라는 것이지 마음에 내키지도 않는데 억지로 원수를 끌어 안으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종교 지도자들이 얼마나 많은 그릇된 의식을 사람들에게 강요하고 주입시켰습니까. 자신 내면의 체득화 없이 억지로 무슨 일을 하게 되면 반드시 부작용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원수를 억지로 사랑하려고 하는데 그 사람은 나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으니 짜증이 밀려 오겠죠. 그러면 그 짜증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결국은 폭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사랑을 설파하셨지만 2천년이 지난 지금도 전쟁과 질병, 기아에 시달리는 것입니다. 부처의 자비도 마찬가지 맥락입니다. 내 스스로가 이해되지 않고 체득화가 안된 자비는 위선이며 오히려 혼란을 야기합니다.
모든건 자연스러워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느끼는 감정을 조절하며 스스로에게 이해되는 사랑을 해야지 어찌 당장 절대적인 사랑과 자비를 발휘하겠습니까. 그렇게 하려는 강박관념부터 버려야 합니다.
전쟁에 대한 증오 대신 전쟁에 대한 관심을 꺼버리십시요. 그리고 평화를 사랑하는 마음을 품으십시요. 원수를 사랑할 순 없어도 노력만 하면 최소한 원수에 대한 관심을 꺼버릴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그 원수와의 관계를 벗어난 새로운 인연과의 즐거운 관계를 상상하며 사랑하십시요. 그러면 정말 그런 인연이 내게 도래합니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며 플러스적인 요소를 당신의 인생에서 온전히 발휘하는 우주의 법칙입니다.
이런 생각이 당신의 마음 속에 정착되게 된다면 그때부턴 당신 스스로가 원하는 인생을 창조하며 즐겁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듣기 싫은 노래가 나오면 라디오를 끄면 됩니다. TV도 있고 비디오도 있고 즐거운게 지천으로 널려 있는데 뭐하러 싫은 노래를 듣고 있습니까? 억지로 그 싫은 노래소리에 저항하며 듣는 것이 오히려 부자연스럽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두려움에 저항하지 마십시요. 라디오를 끄듯이 두려움에 대한 관심을 끄고 대신 즐거움을 사랑하십시요. 진리란 별게 아닙니다. 이게 다입니다. 예수 말씀처럼 그 진리가 여러분들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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