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대란 더 심해질 것”… 아파트 단지 없애는 실험 시작
입력 2021.04.20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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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단지는 사유지 지키는 섬 구조
선진국엔 아파트 있어도 단지는 없어
과천 등 3개 지역서 파리형 아파트 실험
한국의 아파트 단지는 완벽한 섬이에요. 해외에도 아파트는 많지만 단지 형태는 거의 없습니다. 한국에서는 보행자 전용 공간부터 수영장까지 온갖 좋은 시설들을 단지 안에 지어놨죠. 주민이 사생활을 보호받기를 원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앞으로 차량뿐만 아니라 보행자의 출입까지 막는 고급화된 단지들이 더 늘어날 겁니다. 서울 고덕동 택배대란과 비슷한 갈등이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정말 우울한 시나리오죠.
박인석 국가건축정책위원회 위원장
고덕동 택배대란은 언젠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사건이다. 한국의 아파트 단지들은 외부와 단절돼 자족적으로 삶을 꾸리도록 설계됐기 때문이다. 그렇게 도시의 빈약한 기반시설을 극복한다. 단지는 주민이 돈을 모아서 만들어낸 사막의 오아시스, 황무지의 성과 같다. 이러한 경향은 나날이 강해지고 있다. 선진국에선 찾아보기 어려운 광경이다. 그들의 아파트는 작게 건설돼 주변 환경과 끊임없이 교류한다. 한국도 아파트 문화를 바꿔야 한다. 범부처 건축 정책을 추진하는 대통령 소속 위원회를 이끄는 박인석 명지대 건축대학 교수의 지론이다.
15일 오후 서울 강동구 고덕동 한 아파트 단지로 택배 물품이 손수레에 실려 들어가고 있다. 해당 아파트는 지난 1일부터 단지 내 지상도로로 차량이 다니지 못하도록 전면 통제 됐으며, 지하 주차장 높이가 택배 차량의 높이보다 낮게 지어져 차량 출입이 불가능하다. 뉴시스
아파트 '단지'는 한국만의 특징
아파트 단지는 개발시대의 유물이며 이제라도 결별을 준비해야 한다. 16일 서울 종로구의 집무실에 만난 박인석 위원장은 그렇게 강조했다. 한국의 아파트 단지는 정부가 가난해서 등장했다. 도시에 기반시설을 깔아줄 돈이 없었던 정부는 땅을 큼지막한 덩어리로 나눠서 싸게 팔았다. 건설업체들은 이를 분양해 아파트 단지로 만들었다. 도로부터 공원, 놀이터까지 정부가 지어야 했던 기반시설을 주민이 직접 만든 셈이다. 누가 봐도 단독주택 지역보다 아파트 단지의 생활환경이 우월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난 수십년 동안 주택가를 허물고 아파트 단지를 지어왔다.
박인석 위원장은 2012년 저서 ‘아파트 한국사회’에서 출입통제가 한층 강화된 아파트 단지의 등장을 예견했다. 고급 아파트, 스스로 격리된 아파트가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썼다. “국민소득이 늘어나면 단독주택 인기가 높아져 주거문화가 바뀔 거라는 예측이 요새 쑥 들어갔죠. 그러려면 도시의 주거환경이 아파트 단지만큼 좋아져야 하는데 정부 정책이 그렇지 않았거든요. 최근에야 생활사회간접자본(SOC)을 확충하기 시작했는데 굉장히 약한 수준이죠.”
박인석 제6기 국가건축정책위원회 위원장이 16일 서울 종로구 위원회 집무실에서 아파트 단지가 도시를 어떻게 망가뜨리는지 설명하고 있다. 고영권 기자
고덕동 택배대란, 단지 구조 자체가 문제
고덕동 택배대란은 직접적으로는 택배차량이 지하주차장에 진입하지 못해서 일어났다. 그것은 사고가 났으니 문제가 생겼다는 식의 동어반복이다. 원인은 단지 구조에 있다는 이야기다. “주민이 문제가 아닙니다. 지상을 보행자 전용구간으로 만들어놨다면 저라도 지키고 싶을 거예요. 공간구조를 그렇게 만들어놨으니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죠.”
도시는 망가지고 아파트 단지만 발전하도록 주거문화를 놔둘 것인가? 박 위원장은 지금부터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도로에 차단기를 설치해서 차량 통행을 막는 아파트 단지들이 20년 전쯤부터 등장했습니다. 최근에는 경비원과 잠금장치로 보행자 통행까지 막는 아파트 단지들이 나타났죠. 이런 아파트 비율이 현재 전체 아파트 단지의 5% 정도라면 앞으로는 60%까지 늘 겁니다.”
과천 등 3개 지역서 파리식 아파트 실험
변화를 위한 실험이 시작됐다. 국가건축정책위원회와 한국토지주택공사(LH) 국토교통부는 3기 신도시를 개발하며 단지가 아닌 아파트 주거지역을 공급한다. 과천과 안산신길2, 수원당숙 모두 3개 공공택지지구가 선정됐다. 각각 7,000여세대 규모로 계획안 공모를 마쳤다. 과천은 도시계획 확정이 코앞이다. 거칠게 말하면 저층 아파트들 사이에 상가, 도서관, 체육관과 공원이 들어서는 ‘프랑스 파리형 아파트 지구’를 짓는 셈이다.
물론 한국 현실과의 타협점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도 이것이 시작이다. 실험이 성공해야 국민이 ‘단지가 아닌 아파트에서도 살만 하구나’ 생각하게 될 거라고 박 위원장은 강조한다. “우리 국민의 60%가 이미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으니까 공감대를 얻기가 힘든 싸움이죠. 그러나 실제로 해보면 주민들은 싫어할리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난해 3월 과천지구 도시건축통합 마스터플랜 설계공모에서 최우수작으로 선정된 시아플랜건축사무소 컨소시엄의 계획도 일부. 아파트 단지 대신 개별 아파트들이 들어섰고 지상층에는 상가 등의 시설이 계획돼 있다. 국가건축정책위원회 제공
과천에 들어설 아파트 주거지역 계획도 일부. 아파트 블록들이 잘게 나뉘어져 있다. 블록들 사이로 공공공간들이 설계돼 있다. 보행로와 차도는 동선이 나뉘어져 있다. 국가건축정책위원회 제공
오해1: 땅이 좁아서 고층 아파트 단지가 필요하다
일각에서는 한국은 국토가 좁아서 고층 아파트 단지를 지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박 위원장은 오해라고 설명한다. 고밀도 개발 방식이 반드시 고층 단지일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일본의 유명한 도심형 주거지 프로젝트인 치바현 마쿠하리 베이타운의 경우 5층 아파트로 180~230% 용적률을 구현한다. 파리 도심을 채우고 있는 5, 6층 건물들 역시 대부분 아파트다. 박 위원장은 ‘아파트 한국사회'에서 이들 지역의 건축 밀도는 한국의 신도시 초고층 아파트 단지보다도 높다고 지적했다.
그림 A는 8m 격자에 20층 아파트 세 동을 배치한 것이다. 한 층 높이를 3m로 가정하면 건물 높이가 60m이니 건물 사이 간격과 높이가 1 대 1이상이 되도록 64m를 띄워서 배치해야 한다. 그림 B는 똑같은 공간에 5층 아파트를 배치한 것이다. 건물 사이 간격은 24m다. 용적률은 178%(A)와 200%(B)로 20층보다 5층의 밀도가 더 높다. 현암사 제공
오해2: 선진국형 주거구조는 개발비용이 더 든다
유럽식 개발이 더 비싸지도 않다고 박 위원장은 주장한다. 총비용은 같다. 단지 누가, 언제 비용을 부담하느냐의 문제다. “아파트 단지든, 파리 형태의 주거지역이든 어차피 누군가는 도로와 상하수도, 공원을 만들어야 하죠. (파리처럼 만든다면) 국가가 땅을 작게 나누고 기반시설까지 개발한 단계에서 건설업체에 팝니다. 소비자가 최종 비용을 부담하는 것은 똑같습니다.”
국민에게 당당히 평가 받아야
반발도 있다. 한 시범사업 예정지에서는 ‘대기업 브랜드 아파트 단지가 지역에 들어와야 한다’고 반발했다. 건설업계에서도 이런저런 말이 많다. 박 위원장은 “익숙하지 않으니까 어쩔 수 없죠. 모든 일은 시민의 공감 없이는 이뤄질 수 없어요”라면서 앞으로 사업이 진행될수록 새로운 주거문화를 만드는데 공감하는 사람이 늘어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니 공공이 먼저 시범사업을 펼쳐야 돼요. 우리 사회가 많이 발전했습니다. 이제 저렴하면서도 품격 높은 설계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거든요. 국민의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김민호 기자 km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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