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은 다른 우주에서 살고 있다… 4600만명 몰린 '메타버스'를 아십니까
변희원 기자
2020.12.12. 03:39
© 조선일보
지난달 SM엔터테인먼트에서 내놓은 새 걸그룹 '에스파'는 멤버 네 명과 이들의 아바타로 이뤄져있다. 아바타는 온라인에서 개인을 대신하는 캐릭터다. 멤버 네 명은 현실 세계에서, 아바타는 가상 세계에서 활동한다. 에스파의 팬은 현실과 가상 세계를 오가며 공연을 보고 팬사인회에 참석하는 것이다. 에스파의 아바타는 현실 세계의 인간을 기반으로 하고 있고, 팬들과 가상 세계에서 소통할 수 있다. 현실을 반영한 가상 세계에서 일하고, 돈도 벌고, 여가 생활까지 즐기는 메타버스(metaverse)다.
메타버스란 초월·변화를 뜻하는 접두사 메타(meta)와 우주를 뜻하는 유니버스(universe)를 합친 것이다. 1992년 나온 닐 스티븐슨의 소설 '스노 크래시'에서 처음 등장했다. 피자 배달부인 주인공이 '메타버스'라는 가상 세계에서 아바타로 활동하는 얘기다. 엔비디아의 젠슨 황 최고 경영자는 지난 10월 온라인 개발자 행사에서 이렇게 단언했다. "메타버스가 오고 있다.(Metaverse is coming)"
블랙핑크 아바타 팬사인회 4600만명
메타버스의 개념에 대해선 아직 학계나 업계에서 일치를 본 것은 아니다. 가상 세계만 의미하는 게 아니란 건 확실하다. 일단 인간을 대신하는 아바타가 있어야 하고, 가상 세계 안에서 생산적인 활동이 일어나야 한다. 10대가 많이 하는 게임 마인크래프트나 올해 선풍적인 인기를 얻은 동물의 숲이 대표적인 예다. 마인크래프트는 현실 세계에서 레고와 비슷한 것으로, 온라인에서 블록으로 건물을 짓고, 물건을 만들어낼 수 있다. 아바타 역할을 하는 마인크래프트의 캐릭터는 서로 교류할 수 있다. 동물의 숲에서도 일해서 돈을 벌고, 집을 짓고, 결혼까지 하는 등 현실 세계에서 하는 일을 그대로 수행하는 식이다. 지식재산권(IP)을 전문으로 하는 권단 변호사는 "마인크래프트 안에서 개인이 만든 것은 창작물로 인정이 되고, 저작권도 마인크래프트가 아니라 개인에게 있다"고 했다.
가상 세계에서 지은 건물의 저작권을 인정받는다는 것은 곧 경제적 활동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메타버스의 경제적 가치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먼저 알아봤다. 래퍼 트래비스 스콧은 지난 4월 게임 '포트나이트'의 '파티 로열'에서 자신의 아바타를 내세워 공연을 했다. 1230만명이 몰렸고 스콧은 기존 공연보다 더 많은 수입을 올렸다. 포트나이트는 방탄소년단이 신곡 '다이너마이트'를 내놓자 아바타가 파티 로열에서 이들의 춤을 따라 추는 능력을 갖게 해주는 아이템도 팔았다.
네이버에선 얼굴 인식과 증강현실 등을 이용해 아바타와 가상 세계를 만드는 플랫폼 제페토를 내놨다. YG·JYP·빅히트로부터 170억원을 투자받았다. 블랙핑크가 제페토에서 팬사인회를 열자 4600만명이 몰렸다. 제페토에선 아바타에게 옷을 사 입힐 수 있는데, 나이키가 제페토에 입점했다. 제페토 개인 이용자도 옷이나 아이템을 디자인해서 팔 수 있다. 최근에는 한 달에 아바타 옷을 300만원어치 판 이용자도 나타났다. 패션 명품 브랜드 발렌티노와 마크 제이콥스도 '모여봐요 동물의 숲' 캐릭터를 위한 신상품을 공짜로 내놨다. 아바타에게 입힐 마크 제이콥스 옷을 여러 벌 다운받은 오경인(36)씨는 "어차피 집에서 게임하고, 게임 안에서 다른 사람을 만나는 건데 아바타를 예쁘게 꾸미는 게 당연한 거 아니냐. 게다가 현실 세계에선 100만원도 넘는 마크 제이콥스 옷이 아바타에게는 공짜다. 대리만족의 쾌감이 있다"고 했다.
코로나가 앞당긴 메타버스
메타버스가 처음 등장한 '스노 크래시'의 현실 세계에선 사람들이 바이러스에 감염돼 육체와 정신이 파괴되고, 주인공은 가상 세계에서 바이러스의 경로를 추적한다. 코로나 사태를 맞은 지금의 현실 세계와 비슷한 구석이 있다. 메타버스가 떠오른 데는 기술 성장도 있지만 코로나 사태 때문에 위축된 현실 세계를 가상 세계로 대체하려는 시도가 있기 때문이다.
UC버클리의 학생들은 코로나 사태 이후 마인크래프트로 캠퍼스를 만들어 '블로클리'(블록과 버클리를 합친 말)라고 이름을 지었다. 지난 5월 캠퍼스에서 졸업식을 열지 못하게 되자, 이들은 블로클리의 운동장에서 가상 졸업식을 열고 인터넷 방송 플랫폼인 트위치로 중계했다. 총장과 초대 연사도 마인크래프트 캐릭터로 참여해 연설을 했고, 학생들의 캐릭터는 졸업식이 끝나고 졸업 모자를 던지는 전통까지 재현했다. '메타버스'의 저자인 강원대 산업공학과 김상균 교수는 "코로나 이후 제페토에서 교실을 만들어서 학생들과 만났다. 다른 학교 학생이나 해외의 학생들도 찾아와서 예상치 못한 다양한 경험을 했다"고 했다.
코로나 때문에 재택근무와 화상회의가 일상화하자, 아예 메타버스에서 업무를 보는 경우도 생겼다. 예를 들자면 영화 킹스맨이나 스타워즈에서 사람들이 홀로그램으로 나타나 회의를 하는 것처럼 아바타나 가상 사무실을 만들어 일하는 것이다. 미국 IT 기업 스페이셜은 사람의 사진을 갖고 15초 만에 3D 아바타를 만들어내고, AR 기기로 이 아바타가 눈앞에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이들은 가상 사무실에서 회의나 협업도 할 수 있다. 업무에 필요한 자료도 물론 가상으로 구현된다.
저마다 메타버스를 갖는 시대
현실과 가상의 인물이 공존하는 에스파가 등장했을 때 팬들은 아바타가 악용될까 봐 걱정했다. 온라인 게임 '롤'이 게임 캐릭터를 모아 'K/DA'란 걸그룹을 만들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지만 딥페이크 기술을 활용한 K/DA의 포르노도 나왔기 때문이다. K/DA는 허구의 캐릭터일 뿐이지만 만약 현실 세계 인물을 본떠 만든 에스파의 아바타로 딥페이크 포르노나 다른 영상물을 만든다면 어떻게 될까. 권단 변호사는 "성범죄 피해자는 인간이라고 명시가 됐기 때문에 형사처벌을 할 수가 없고, 모욕죄도 성립하기 어려울 것 같다"며 "정신적 피해 보상을 요구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지금 우려하는 것은 연예인 딥페이크 포르노 정도지만, 성범죄뿐만 아니라 사기나 명예훼손 등 현실 세계의 범죄가 메타버스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법조계에선 아바타에 법적 인격을 부여할 수 있는지, 메타버스 안에서의 경제적·신체적·정신적 피해를 어디까지 인정할 수 있는지 아직 정해진 게 거의 없다는 입장이다. 예를 들어 10대 사이에선 이미 SNS를 통해 일어나는 사이버불링(온라인상에서의 집단 괴롭힘)이 다른 메타버스에서 더 실감나게 일어날 수 있다. 남과 똑같이 생긴 아바타를 만들어 사칭을 하고 다닐 수도 있다. 메타버스가 유토피아는 아니란 얘기다.
누구나 메타버스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제페토의 가입자 수는 1억9000만명에 달한다. 해외 이용자가 90%, 10대 이용자가 80%를 차지한다. 네이버 관계자는 "40대 이상은 제페토란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날 때부터 스마트폰을 손에 쥐는 '디지털 네이티브'는 이미 어릴 때부터 일상의 절반 이상을 메타버스에서 보냈다. 더 밀크(실리콘 밸리의 언론사) 코리아의 김인순 대표는 "오큘러스(VR 헤드셋)를 처음 사와서 10대 딸에게 씌워줬을 때 너무 자연스럽게 적응해서 놀랐다. 나중에 오큘러스로 콘퍼런스를 할 때 딸을 참석시켰는데 회의장 바깥에 있는 농구장을 찾아가서 놀고 있더라. 이들은 가르쳐주지 않아도 직관적으로 메타버스를 이해하고 받아들인다"고 했다.
코로나 사태 때문에 초등학교 입학식을 화상으로 치른 2010년 이후 출생자의 인생에서 메타버스의 비율은 더 높아질 것이다. 김상균 교수는 "학교를 못 가게 되면서 학생이 학교에서 배우는 게 단지 공부뿐만이 아니란 걸 깨닫지 않았나. 메타버스에서 배운 지식이나 기술을 현실에 얼마나 적용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내 수업의 학생들이 제페토 안에서는 학교나 인종과 관계없이 다른 학생과 잘 어울렸지만, 현실에서 그들을 만났을 땐 다른 반응을 보일 수도 있다"고 했다.
아버지는 TV로 뉴스를 보고, 어머니는 유튜브로 드라마를 감상하는데, 딸은 제페토에서 트와이스를 만나고 있다. 우리는 같은 지구에서 살고 있지만 저마다 다른 우주를 갖게 됐다.
☞메타버스
초월·변화를 뜻하는 접두사 메타(meta)와 우주를 뜻하는 유니버스(universe)를 합친 말. 가상세계 이상을 의미한다. 사용자의 자아를 가진 아바타가 상호 교류나 생산적인 활동을 하는 가상 세계.
'MAMAA, 미래 ,ICBM > XR,NFT,Metavers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온택트 열풍에 메타버스 관심↑...콘텐츠 산업 새로운 가능성 (0) | 2021.05.28 |
---|---|
낯선 공간, 메타버스 올라타기 (0) | 2021.05.28 |
Apple 이벤트 - 2021년 4월 - Apple (KR) (0) | 2021.04.21 |
지엔코, VR 가상매장 서비스로 고객경험 극대화 (0) | 2021.04.19 |
애플, 페이스북, 구글의 메타버스 하드웨어 경쟁 (0) | 2021.03.09 |
아직도 유튜브, 인스타? 우린 메타버스에 산다 (0) | 2021.03.06 |
게임으로 세계를 만들 수 있을까? '메타버스'의 모든 것 (0) | 2021.03.06 |
가상공간서 입학식까지…'메타버스'에 투자하라 [이슈+] (0) | 2021.03.06 |
넷플릭스 최대 경쟁자는 여기다, Z세대가 열광하는 ‘메타버스’ (0) | 2021.03.06 |
코로나 시대 급부상한 ‘메타버스’, 들어보셨나요? (0) | 2021.03.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