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팬덤이라 일컬어지는 ‘아미’의 저력은 방탄소년단(BTS)이라는 타인의 서사를 자신의 서사로 받아들이고 이를 삶의 태도로 연결하면서 생겨나는 확장의 힘, ‘연대’에 있다. 사진은 지난 10월10~11일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연 ‘비티에스 맵 오브 더 솔 원’ 온라인 콘서트 장면. 빅히트 엔터테인먼트 제공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진짜 걔네들이 그렇게 대단해?”작년에 방탄소년단 팬덤에 대한 문화비평서인 < BTS와 아미 컬처>를 쓰고 난 뒤 주변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이다. 이 질문에는 말 그대로 그 대단함에 설득당하고 싶은 마음보다는 ‘그렇게까지 대단한지 난 잘 모르겠는데’라는 의중이 담겨 있어, 왠지 성의 있게 대답할 의욕을 꺾는 구석이 있다. 무엇보다 ‘취향’의 영역에 해당하는 대상의 가치를 증명까지 해내야 하나 싶기도 하다. 대체 무엇으로 말인가. 압도적인 기록? 경제적 가치? 탁월한 미학? 과연 이런 것이 모이면 존중할 만한 취향에 대한 증명이 되는 걸까? 방탄소년단 팬인 나의 취향과 안목은 왠지 늘 증명의 시험대 위에 놓여 있다.※ <한겨레>가 연말을 맞아 특별제작한 피디에프(PDF)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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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중문화 산업에서 압도적인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아이돌 음악은 그간 진지하게 예술성을 논할 만한 대상으로 다뤄진 적이 별로 없다. 유행의 자리에는 올라와 있을지라도 비평 담론을 주도하는 문화적 헤게모니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 아이돌 음악이 ‘헤게모니 외부에 위치한 주류문화’라는 모순적 위상을 갖게 된 데는 바로 이 음악을 향유하는 주체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가 중요하게 놓인다. 아이돌 가수의 팬을 지칭하는 ‘오빠부대’, ‘빠순이’라는 멸칭은 주요 팬층인 나이 어린 여성뿐 아니라 이들이 좋아하는 아이돌 음악의 가치마저 동반 평가절하하는 ‘이중의 비하’ 효과를 낸다. (‘빠순이들이 무슨 음악을 알겠어, 그냥 얼굴 보고 좋아하는 거지’ 같은 익숙한 마음의 소리를 떠올려보시라.)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특정 문화의 향유 주체가 여성일 경우, 유독 그들을 한 무리로 동질화해버리는 경향이 더 심하다는 점이다. 응원 팀에 대한 애정이 지나쳐 난동과 기물 파괴를 일삼는 축구 팬 훌리건을 예로 들어보자.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훌리건의 난동이 기사화되는 경우를 종종 보지만, 그렇다고 대다수의 건전한 축구 팬들까지 싸잡아 훌리건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오빠부대’나 ‘빠순이’는 특별히 문제적 팬을 지칭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아이돌 팬 전반을 지칭하는 보편적 명칭에 가깝다. 실제 아이돌 팬덤을 이루는 다양한 개인들의 정체성은 이 ‘빠순이’라는 명칭에 한데 묶여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특정 집단을 스테레오타입화하려는 움직임은, 전통적으로 사회적 소수자에게 가해져 온 사회적 압력과 정비례한다. 동양인, 성소수자, 외국인 노동자, 그리고 여성을 향한 미디어의 스테레오타입화를 생각해보라. 할리우드 영화에서 뚜렷한 개성을 지닌 보편적 인간의 역할, 다시 말해 주인공은 여전히 높은 확률로 백인 이성애 남성의 차지다. 다양성이라는 거센 시대적 요구로 인해 나아지긴 했지만, 여성·유색인종·성소수자의 재현은 여전히 상투적 스테레오타입의 언저리를 아슬아슬하게 맴돈다. 중국동포(조선족)나 외국인 노동자를 재현하는 한국 영화의 태도도 별반 다르지 않다. 순박하거나 범죄자거나. 이런 식의 게으른 재현은 아이돌 팬덤에 대한 스테레오타입화에도 동일하게 작용한다. 하나의 정체성으로 수렴되지 않는 사람들을 집단으로 묶어 쉽게 동질화해버리는 시도, 이것이 바로 스테레오타입화 뒤에 서려 있는 헤게모니적 권력의 작동이다.
2009년 12월31일(현지시각) 미국 뉴욕 타임스스퀘어에서 신년맞이 공연을 펼치고 있는 방탄소년단(BTS). 라이브 무대에서 8분간 히트곡 2곡을 선보였다. 연합뉴스
방탄소년단 팬덤인 아미(A.R.M.Y.)는 이런 스테레오타입화에 유독 민감한 팬덤이다. 국내에서 보면, 방탄소년단은 기획사 후광이나 선배 팬덤, 방송사와 맺은 커넥션 같은 기존 아이돌 산업 카르텔로부터 동떨어진 존재로 출발해 검증된 주류의 망 바깥에서 자체적으로 생존 전략을 개척한 경우다. 엄청난 기록에 묻혀 많이들 모르지만, 외국에서 수용되는 과정도 결코 녹록지 않았다. 초기에는 신기한 아시안 아이돌 취급하며 영혼 없는 열광을 쏟아내던 국외 언론들이 점차 서구 주류 음악 산업계에서 방탄소년단이 대등한 플레이어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공장에서 찍어낸 음악”, “게이(gay)팝”, “비인간적 노예 계약으로 미성년자를 착취하는 케이(K)팝 산업”, “12살 여자애들이나 좋아하는 수준 낮은 음악” 등등 케이팝에 대한 서구의 편견을 쏟아낼 대상으로 툭하면 방탄소년단을 소환해 그들의 입지를 깎아내렸다. 국내에서나 국외에서나 이들은 늘 ‘자신들의 일원’으로 인정해주지 않는 이들 틈바구니에서 외롭게 버텨야 했다. 팬덤인 아미가 “우리가 유일한 방탄소년단의 뒷배가 돼주어야 한다”는 의식을 갖게 된 데는 바로 이런 외부자이자 소수자로서 정체성에 대한 공감이 자리한다. 팬들은 방탄소년단이 배척되는 모습을 통해 이 세계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들여다보게 되고, 그 와중에도 서로에게 의지하며 담담하게 자신의 길을 걷는 방탄소년단을 보면서 ‘연대’와 ‘팀워크’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삶의 어느 대목에서는 누구나 ‘외부자’가 되고 ‘소수자’일 수 있다는 이런 인식은 단지 방탄소년단을 보호하는 데만 그치지 않고, 유료 투표를 조장하는 잘못된 시상식 관행에 항의해 시상식 투표를 보이콧하고, 백서를 발간해 역사수정주의를 지적하며, 흑인민권운동에 100만달러(약 11억원)를 기부하는 등 더 넓은 세계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된다. 팬들 사이에 “단지 가수를 좋아하게 된 것뿐인데 어느새 나도 모르게 사회운동을 하고 있더라”는 푸념 아닌 푸념이 떠도는 이유다.
현재 팬덤 창립 7주년을 기념해 실시되고 있는 ‘아미 인구조사’(ARMY Census)는 팬덤에 대한 기존의 스테레오타입화에 저항하고 팬덤 구성원들의 다양한 실체를 객관적으로 지표화하기 위해 팬들이 스스로 발족한 프로젝트다. 설문조사를 진행하는 이들은, 방탄소년단 팬을 특정 연령층이나 성별을 가진 이들로 한정해 조명하는 미디어의 재현이 팬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더불어 방탄소년단 음악의 영향력을 축소하는 데 이용된다고 보고, 이에 대항하기 위해 전세계에 존재하는 아미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정확하게 수집해 그 데이터를 공개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현재 전세계 팬을 대상으로 총 40여개국의 언어로 설문조사가 진행되고 있으며 지금까지 40여만명에 이르는 팬들이 조사에 참여했다. 이런 시도에는 팬덤을 입맛대로 쉽게 범주화하지 말고 그 속에 들어 있는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사람’으로서 팬을 인지하라는 요구가 담겨 있다.
아미 인구조사 누리집 갈무리. 이 인구조사엔 40여만명에 이르는 팬들이 참여했다.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유튜브에 관련 키워드를 검색하면, 다양한 나이와 인종·성별·직종의 아미 구성원들이 자신의 인생 중 어떤 순간에 방탄소년단을 만났으며 그들의 어떤 메시지가 마음을 뒤흔들었는지, 그로 인해 어떤 삶의 변화를 겪었는지 고백하는 영상들이 수도 없이 쏟아져 나온다.
최근 나는 동영상 공유 서비스 ‘틱톡’에서 한 여성의 삭발 동영상을 본 적이 있다. 방탄소년단 팬인 이 여성은 나이 서른에 유방암 선고를 받고 항암치료를 위해 남편의 도움을 받아 긴 생머리를 밀어야 했다. 애써 웃으면서 머리를 밀다가 이윽고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한 이 여성은 영상에 다음과 같은 자막을 올렸다.
“방탄소년단으로 인해 나는 이 험난한 여정 속에서도 고개를 들고 (삶을) 당당히 마주하고 있다. 그들의 팬이 된 것에 너무나 감사하고 자랑스럽다. 내 삶에 벌어진 이 어려움 한가운데서 나는 비로소 나 자신을 진실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방탄소년단을 경유해 팬들이 부여하는 자기 서사, 그로부터 탄생한 방탄소년단과 아미의 끈끈한 유대라는 게 사실은 지나친 의미 부여의 결과물이 아니냐며 조심스레 물어오는 사람들도 있다. 실은 모든 것이 회사의 마스터플랜 아래 이뤄진 기획의 결과물일 수도 있는데, 팬들이 너무 맹목적으로 휘말리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고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천재적인 기획이 존재하더라도 인위적으로 팬과 아티스트 사이의 교감을 만들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설령 가능하대도 그런 시도는 모든 콘텐츠를 나노 단위로 쪼개 보고 돌려 보고 숨겨진 이면의 뉘앙스까지 건져내는 팬들의 눈 아래 금방 들통나기 쉽다.
‘서사’(내러티브)라는 것은 본래 시간의 흐름 위에 진행되는 이야기를 뜻하는 말이다. 방탄소년단이 내민 서사가 팬들의 자기 서사가 되고 삶의 버팀목이 되기까지, 거기에는 그들과 팬들이 함께 쌓아 온 신뢰와 믿음의 시간이라는 퇴적층이 존재한다. 방탄소년단의 지난 8년은, ‘팬이 있어야 내가 있다’는, 말이 쉽지 그 의미를 지키긴 너무나 어려운 이 명제를 과연 그들이 어떻게 지켜내면서 성장했는가를 증명한 시간이었다. 검색하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방탄소년단의 영광과 기록의 거대 서사를 젖히면 그곳에는 오직 팬들만이 알 수 있는 작은 서사들이 사금처럼 촘촘하게 박혀 있다. 호텔 방에 장비를 놓고 투어 틈틈이 홀로 밤샘 작업을 하는 뒷모습, 앨범에 들어갈 마지막 노랫말 한 줄을 놓고 끝까지 번민하다 새벽녘 문득 팬들에게 띄워 보낸 편지 속 손에 잡힐 것 같은 쓸쓸함, 가끔은 깜짝 놀랄 만한 솔직함으로 자신들에게 닥친 위기와 어려움을 토로하다가도 “혼자가 아니라 일곱이니까, 그리고 아미들이 응원해주니까 반드시 해낼 수 있다”며 스스로를 담금질하는 입매, 숨 쉴 틈 없이 바쁜 와중에도 기념일에는 꼭 팬들을 위해 음악 작업을 해서 선물하는 성실함, 권위나 강요가 아니라 다정한 손짓과 눈빛 그리고 끊임없는 칭찬으로 서로를 위해주는 팀워크.
이들을 보다 보면 성공이라는 게 꼭 악해지거나 어딘가 망가지지 않더라도 가능한 거였구나, 새삼스러운 생각이 든다. 아미 중에 처음엔 그저 명불허전의 퍼포먼스에 혹해, 또는 단순히 트렌드를 좇아 관심을 줬다가 불완전한 소년들이 팬과 음악에 대한 사랑 그리고 멤버 서로에 대한 믿음만 붙잡고 한 발짝씩 천천히 성장해가는 과정이 너무 아름다워 어느덧 주저앉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이들이 많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팬덤이라 일컬어지는 아미의 저력은 결코 팬덤 머릿수에서 비롯된 화력에 있지 않다. 방탄소년단이라는 타인의 서사를 자신의 서사로 받아들이고 이를 삶의 태도로 연결하면서 생겨나는 확장의 힘, 다른 말로 하면 ‘연대’에 있다.
이지행 미디어 문화연구자, < BTS와 아미 컬처>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