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전 대통령 유언 떠올라"... '국가부도의 날' 본 고등학생 일침
[리뷰] 영화 <국가부도의 날>를 보고 고등학생들이 대한민국에 내려친 '죽비'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수업이 끝나고 선생님이 교실에서 나가자마자 복도에서 기다리던 사복 경찰들에게 연행되는 걸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다. 분명 충격적인 장면이었지만, 철딱서니 없는 몇몇 친구들은 단지 수업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마냥 좋아하기도 했다.
이튿날부터 보이지 않은 선생님들이 적지 않았지만, 그 누구도 자초지종을 아이들에게 설명해주지 않았다. 엄청난 빚을 져서 잡혀간 거라느니, 학교에 잠입한 간첩이라느니 온갖 억측이 난무할 뿐이었다. 외려 삼삼오오 모여 끌려간 분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라치면, 선생님들은 쓸데없이 잡담할 시간에 공부나 하라며 치도곤 했다.
'전교조'라는 이름을 처음 접한 건 그때였다. 낯설기만 한 이름이었지만, 평소 존경했던 한 선생님이 가입돼있었다는 사실 때문인지 거부감 같은 건 별로 없었다. 그분이 학교에서 쫓겨난 뒤, 학원 강사를 전전하다 고향으로 내려가서 작은 식당을 열었다는 소식을 몇 해 뒤에 들을 수 있었다.
우리 사회에는 네가지 부류의 인간이 있다
느닷없이 30년도 더 지난 고등학교 시절의 기억이 떠오른 건, 최근 개봉한 영화 <국가 부도의 날>을 보고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선생님과의 마지막 수업시간에 그가 독백하듯 건넨 말씀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머지않아 더 이상 수업시간에 아이들과 만나지 못하게 될 것을 이미 알고 계셨던 것처럼 한마디 한마디가 자못 비장했다.
"우리 사회에는 네 가지 부류의 인간이 있다. '사악하고 무능한' 사람과 '정의롭고 유능한' 사람, 그리고 '사악하지만 유능한' 사람과 이도 저도 아닌 '평범한' 사람. 절대다수는 '평범한' 사람들이지만, 그들이 어느 곳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사회의 운명이 결정된다.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은 '정의롭고 유능한' 사람이 늘 무릎을 꿇으며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 그 피해를 온전히 감내해야 했던 참담한 역사였다."
영화 속 주인공 넷은 선생님이 구분한 네 부류의 인간과 정확히 일치했다. '사악하고 무능한' 경제수석(조우진)과 '정의롭고 유능한' 한시현(김혜수), 그리고 '사악하지만 유능한' 윤정학(유아인)과 '평범한' 갑수(허준호). 관객 누구든 갑수의 입장에 서서 한시현을 응원하지만, 최후의 승리자는 사악한 두 부류였다. 역사적 사실에 기반 한 작품이 아니라면, 당연히 해피엔딩으로 끝났을 테지만 말이다.
'갑수 남매'의 눈물 뒤로 '20년 후'라는 자막이 나왔을 때, 거짓말일지언정 영화 속에서나마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길 바랐다. 그들은 누구보다 성실하고 올곧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아무리 우리 사회가 '사악한' 자들이 득세해온 세상이라고 해도, '갑수 남매'가 IMF 이후에도 20년 동안 고통 속에 살아왔다는 장면이 이어진다면 관객으로서 너무 괴로웠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바랐던 해피엔딩 대신, 되레 관객들에게 성찰을 요구했다. 20년 후의 달라진 갑수를 통해 'IMF가 남긴 유산'을 보여준 거다. 가족들에게 자상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그토록 따듯했던 갑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돼버렸다. 평범했던 그가 이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선 사악해져야함을 체득한 것이다.
휴지조각이 된 어음증서를 바라보며 남겨진 빚더미에 스스로 목숨까지 끊으려했던 갑수. 그의 삶을 붙든 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들이었다. 그런데, 20년 뒤 자라 어른이 된 그 아이의 출근길에 갑수는 부러 전화를 걸어 어린 아이에게 차 조심하라는 듯 이렇게 '자식 사랑'을 표현한다.
"네게 잘해주는 사람이라고 해서 무조건 믿지 마라. 아무도 믿지 마라. 오로지 믿을 사람은 너뿐이다."
IMF 이후 정글로 변해버린 사회에서 믿을 건 오로지 자신과 가족뿐이라는 각자도생의 살벌한 현실을 갑수의 대사 한마디에 고스란히 담았다. 그가 직원으로 고용한 외국인 노동자에게 '버럭'하는 모습 또한 약자에게 유독 가혹한 지금 우리 사회의 민낯이기도 하다. 우리 모두가 자조하는 '헬조선'이 20년 전 IMF로부터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박카스' 없었다면, 희망을 지워낼 뻔
그래도 보일 듯 말 듯 희망은 심어놓았다. IMF에 무릎 꿇은 한시현이 '20년 후배 한시현들'과 다시 팀을 이뤄 '사악한' 자들에게 맞선다는 엔딩 장면보다 더 뭉클한 장면이 있다. '박카스'를 한 통 들고 찾아와 채무자인 갑수를 다독였지만, 정작 자기 채권자의 빚 독촉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박 사장'의 장례식장 풍경이 그것이다.
장례식장에 홀로 앉아 죄인처럼 자책하며 소주를 들이키는 갑수의 모습에 울컥했다. '갑질'이 몸에 밴 우리 사회에서, 을이 병의 처지를 이해하고 고통을 나누려는 듯 '박 사장'은 현실에서는커녕 영화 속에서조차 낯선 허구적 인물이다. 영화 속 '박카스'는 '박 사장'의 분신으로, 힘없는 자들의 연대를 상징하는 물건이다.
영화든 현실이든 온통 '사악한' 자들의 세상이지만, '헬조선'을 치유하는 특효약이 '을과 을의 연대'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건 아닐까. 잠깐 한 눈이라도 팔라치면 보지 못할 스냅 사진 같은 소소한 장면이지만, 유독 잔상이 오래 남는 건 꼭 보고 싶었던 것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마저 없었다면, 마음속에서 희망이라는 두 글자를 지워낼 뻔했다.
두 시간이 채 안 되는 러닝 타임 동안 대한민국의 현실을 죄다 담아내려다보니, 굳이 없어도 될 인물들이 튀어나오기도 하고 스토리 전개가 어수선한 느낌도 없지 않다. 더러는 '급조한' 티가 역력하다며 작품성을 깎아내리는 이도 있는 모양이다. 오락 영화를 기대했다면 그럴 수 있겠지만, 승자독식과 각자도생의 IMF 시대를 살아온 세대라면 가당찮은 비판이다.
대한민국의 민낯을 보여주기 위해 영화 속 장면마다 감초처럼 등장하는 '소품'이 하나 있다. '대한민국의 OECD 가입을 축하하는' 내용의 현수막이 그것이다. 선진국 대열에 올라섰다며 고위관료들이 으스대는 장면에서도, 위기를 기회 삼아 부를 축적한 윤정학이 무능한 정부를 조롱하는 장면에서도, 또 정부를 믿었다가 파산당한 갑수가 눈물을 쏟는 장면에서도 어김없이 배경으로 등장한다.
금융계에서 잔뼈가 굵은 영화 속 윤정학 같은 이들을 제외하면, 당시 우리 국민 중에 OECD 가입의 의미는커녕 어떤 곳인지조차 몰랐던 이들이 태반이었다. 연일 정부는 위업인 양 자랑스레 떠들어댔고, 언론은 부화뇌동하며 평범한 사람들의 눈을 멀게 했다. 적어도 모두가 돈 걱정 안 하고 사는 세상이 눈앞에 펼쳐질 거라는 장밋빛 환상에 시나브로 빠져들었다.
이 현수막이야말로 영화의 내용과 주제를 관통하는 진짜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거칠게 말해서, 네 명의 주인공은 현수막에 내건 내용이 얼마나 허구적이고 기만적인가를 서로 다른 입장에서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해설자에 불과하다. 개봉하기만을 기다렸다는 한 지인은, 현수막의 글귀를 볼 때마다 느낌이 달랐다며, 처음 볼 땐 '웃프고', 두 번째는 '분노'가 치밀었으며, 나중에는 '다짐'을 하게 되더라고 말했다.
기실 현수막은, 정부의 정책이든 언론이 말하는 여론이든 늘 의심하고 따져봐야 한다는 엔딩 장면의 맺음말에 대한 복선이다. 국민은 안중에도 없고 늘 가진 자들 편에 서는 정부의 교활함을 보여주는 것이자, 정부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른 한편으론 가짜 뉴스가 판치는 현실을 꼬집는 중의적 소재라 할 수 있다.
관객들 중에는 갑수의 어제와 오늘에 감정 이입이 된 탓인지 연신 훌쩍거리는 어르신들도 있었고, 그 와중에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이들도 보였다. 방과 후 함께 영화관을 찾은 아이들은 부모님 세대의 이야기인데도 선뜻 믿기지 않는다며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반농반진 영화를 곡해하기도 하고, 기성세대를 향해 죽비를 내리치기도 했다. 아이들의 관람 평을 옮겨본다.
"신임 경제수석이 대책팀 내부의 갈등을 꾸짖으며, 조선시대의 동인과 서인 운운할 때 정말 '깼어요.' 정부의 부패와 무능을 그렇게 표현한 감독의 센스가 놀라울 따름이에요."
"'20년 후'라는 자막이 떴을 때, 다음 장면은 분명 세월호일 거라고 순간 생각했어요. 국민의 생존을 나 몰라라 한 정부의 민낯을 그보다 더 자연스럽게 연결시켜줄 수 있는 건 없다고 봤거든요."
"솔직히 이렇게 미국을 '까도' 되나 싶어 걱정이 됐어요. 이를 두고 미국이 몽니 부리면 어쩌나 싶어서요."
"역시 예나 지금이나 '철밥통'이 최고인 것 같아요. 영화를 보면서, 조금은 생뚱맞지만, 왜 주변에서 공무원, 공무원 노래를 부르는지 깨닫게 됐어요."
"영화를 보면서는 다들 분노하고 반성하지만, 영화관을 나서기가 무섭게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우리는 '윤정학'을 부러워하고, '재정국 차관'이 되지 못해 안달하잖아요."
"엔딩 장면에서 '한시현'의 내레이션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언처럼 들렸어요.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라는 그 말."
이튿날부터 보이지 않은 선생님들이 적지 않았지만, 그 누구도 자초지종을 아이들에게 설명해주지 않았다. 엄청난 빚을 져서 잡혀간 거라느니, 학교에 잠입한 간첩이라느니 온갖 억측이 난무할 뿐이었다. 외려 삼삼오오 모여 끌려간 분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라치면, 선생님들은 쓸데없이 잡담할 시간에 공부나 하라며 치도곤 했다.
'전교조'라는 이름을 처음 접한 건 그때였다. 낯설기만 한 이름이었지만, 평소 존경했던 한 선생님이 가입돼있었다는 사실 때문인지 거부감 같은 건 별로 없었다. 그분이 학교에서 쫓겨난 뒤, 학원 강사를 전전하다 고향으로 내려가서 작은 식당을 열었다는 소식을 몇 해 뒤에 들을 수 있었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 CJ 엔터테인먼트
우리 사회에는 네가지 부류의 인간이 있다
느닷없이 30년도 더 지난 고등학교 시절의 기억이 떠오른 건, 최근 개봉한 영화 <국가 부도의 날>을 보고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선생님과의 마지막 수업시간에 그가 독백하듯 건넨 말씀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머지않아 더 이상 수업시간에 아이들과 만나지 못하게 될 것을 이미 알고 계셨던 것처럼 한마디 한마디가 자못 비장했다.
"우리 사회에는 네 가지 부류의 인간이 있다. '사악하고 무능한' 사람과 '정의롭고 유능한' 사람, 그리고 '사악하지만 유능한' 사람과 이도 저도 아닌 '평범한' 사람. 절대다수는 '평범한' 사람들이지만, 그들이 어느 곳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사회의 운명이 결정된다.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은 '정의롭고 유능한' 사람이 늘 무릎을 꿇으며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 그 피해를 온전히 감내해야 했던 참담한 역사였다."
영화 속 주인공 넷은 선생님이 구분한 네 부류의 인간과 정확히 일치했다. '사악하고 무능한' 경제수석(조우진)과 '정의롭고 유능한' 한시현(김혜수), 그리고 '사악하지만 유능한' 윤정학(유아인)과 '평범한' 갑수(허준호). 관객 누구든 갑수의 입장에 서서 한시현을 응원하지만, 최후의 승리자는 사악한 두 부류였다. 역사적 사실에 기반 한 작품이 아니라면, 당연히 해피엔딩으로 끝났을 테지만 말이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의 한 장면.ⓒ CJ 엔터테인먼트
▲영화 <국가부도의 날>ⓒ CJ 엔터테인먼트
▲영화 <국가부도의 날>ⓒ CJ 엔터테인먼트
▲영화 <국가부도의 날>ⓒ CJ 엔터테인먼트
'갑수 남매'의 눈물 뒤로 '20년 후'라는 자막이 나왔을 때, 거짓말일지언정 영화 속에서나마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길 바랐다. 그들은 누구보다 성실하고 올곧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아무리 우리 사회가 '사악한' 자들이 득세해온 세상이라고 해도, '갑수 남매'가 IMF 이후에도 20년 동안 고통 속에 살아왔다는 장면이 이어진다면 관객으로서 너무 괴로웠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바랐던 해피엔딩 대신, 되레 관객들에게 성찰을 요구했다. 20년 후의 달라진 갑수를 통해 'IMF가 남긴 유산'을 보여준 거다. 가족들에게 자상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그토록 따듯했던 갑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돼버렸다. 평범했던 그가 이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선 사악해져야함을 체득한 것이다.
휴지조각이 된 어음증서를 바라보며 남겨진 빚더미에 스스로 목숨까지 끊으려했던 갑수. 그의 삶을 붙든 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들이었다. 그런데, 20년 뒤 자라 어른이 된 그 아이의 출근길에 갑수는 부러 전화를 걸어 어린 아이에게 차 조심하라는 듯 이렇게 '자식 사랑'을 표현한다.
"네게 잘해주는 사람이라고 해서 무조건 믿지 마라. 아무도 믿지 마라. 오로지 믿을 사람은 너뿐이다."
IMF 이후 정글로 변해버린 사회에서 믿을 건 오로지 자신과 가족뿐이라는 각자도생의 살벌한 현실을 갑수의 대사 한마디에 고스란히 담았다. 그가 직원으로 고용한 외국인 노동자에게 '버럭'하는 모습 또한 약자에게 유독 가혹한 지금 우리 사회의 민낯이기도 하다. 우리 모두가 자조하는 '헬조선'이 20년 전 IMF로부터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박카스' 없었다면, 희망을 지워낼 뻔
그래도 보일 듯 말 듯 희망은 심어놓았다. IMF에 무릎 꿇은 한시현이 '20년 후배 한시현들'과 다시 팀을 이뤄 '사악한' 자들에게 맞선다는 엔딩 장면보다 더 뭉클한 장면이 있다. '박카스'를 한 통 들고 찾아와 채무자인 갑수를 다독였지만, 정작 자기 채권자의 빚 독촉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박 사장'의 장례식장 풍경이 그것이다.
장례식장에 홀로 앉아 죄인처럼 자책하며 소주를 들이키는 갑수의 모습에 울컥했다. '갑질'이 몸에 밴 우리 사회에서, 을이 병의 처지를 이해하고 고통을 나누려는 듯 '박 사장'은 현실에서는커녕 영화 속에서조차 낯선 허구적 인물이다. 영화 속 '박카스'는 '박 사장'의 분신으로, 힘없는 자들의 연대를 상징하는 물건이다.
영화든 현실이든 온통 '사악한' 자들의 세상이지만, '헬조선'을 치유하는 특효약이 '을과 을의 연대'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건 아닐까. 잠깐 한 눈이라도 팔라치면 보지 못할 스냅 사진 같은 소소한 장면이지만, 유독 잔상이 오래 남는 건 꼭 보고 싶었던 것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마저 없었다면, 마음속에서 희망이라는 두 글자를 지워낼 뻔했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 CJ 엔터테인먼트
두 시간이 채 안 되는 러닝 타임 동안 대한민국의 현실을 죄다 담아내려다보니, 굳이 없어도 될 인물들이 튀어나오기도 하고 스토리 전개가 어수선한 느낌도 없지 않다. 더러는 '급조한' 티가 역력하다며 작품성을 깎아내리는 이도 있는 모양이다. 오락 영화를 기대했다면 그럴 수 있겠지만, 승자독식과 각자도생의 IMF 시대를 살아온 세대라면 가당찮은 비판이다.
대한민국의 민낯을 보여주기 위해 영화 속 장면마다 감초처럼 등장하는 '소품'이 하나 있다. '대한민국의 OECD 가입을 축하하는' 내용의 현수막이 그것이다. 선진국 대열에 올라섰다며 고위관료들이 으스대는 장면에서도, 위기를 기회 삼아 부를 축적한 윤정학이 무능한 정부를 조롱하는 장면에서도, 또 정부를 믿었다가 파산당한 갑수가 눈물을 쏟는 장면에서도 어김없이 배경으로 등장한다.
금융계에서 잔뼈가 굵은 영화 속 윤정학 같은 이들을 제외하면, 당시 우리 국민 중에 OECD 가입의 의미는커녕 어떤 곳인지조차 몰랐던 이들이 태반이었다. 연일 정부는 위업인 양 자랑스레 떠들어댔고, 언론은 부화뇌동하며 평범한 사람들의 눈을 멀게 했다. 적어도 모두가 돈 걱정 안 하고 사는 세상이 눈앞에 펼쳐질 거라는 장밋빛 환상에 시나브로 빠져들었다.
이 현수막이야말로 영화의 내용과 주제를 관통하는 진짜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거칠게 말해서, 네 명의 주인공은 현수막에 내건 내용이 얼마나 허구적이고 기만적인가를 서로 다른 입장에서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해설자에 불과하다. 개봉하기만을 기다렸다는 한 지인은, 현수막의 글귀를 볼 때마다 느낌이 달랐다며, 처음 볼 땐 '웃프고', 두 번째는 '분노'가 치밀었으며, 나중에는 '다짐'을 하게 되더라고 말했다.
기실 현수막은, 정부의 정책이든 언론이 말하는 여론이든 늘 의심하고 따져봐야 한다는 엔딩 장면의 맺음말에 대한 복선이다. 국민은 안중에도 없고 늘 가진 자들 편에 서는 정부의 교활함을 보여주는 것이자, 정부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른 한편으론 가짜 뉴스가 판치는 현실을 꼬집는 중의적 소재라 할 수 있다.
관객들 중에는 갑수의 어제와 오늘에 감정 이입이 된 탓인지 연신 훌쩍거리는 어르신들도 있었고, 그 와중에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이들도 보였다. 방과 후 함께 영화관을 찾은 아이들은 부모님 세대의 이야기인데도 선뜻 믿기지 않는다며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반농반진 영화를 곡해하기도 하고, 기성세대를 향해 죽비를 내리치기도 했다. 아이들의 관람 평을 옮겨본다.
"신임 경제수석이 대책팀 내부의 갈등을 꾸짖으며, 조선시대의 동인과 서인 운운할 때 정말 '깼어요.' 정부의 부패와 무능을 그렇게 표현한 감독의 센스가 놀라울 따름이에요."
"'20년 후'라는 자막이 떴을 때, 다음 장면은 분명 세월호일 거라고 순간 생각했어요. 국민의 생존을 나 몰라라 한 정부의 민낯을 그보다 더 자연스럽게 연결시켜줄 수 있는 건 없다고 봤거든요."
"솔직히 이렇게 미국을 '까도' 되나 싶어 걱정이 됐어요. 이를 두고 미국이 몽니 부리면 어쩌나 싶어서요."
"역시 예나 지금이나 '철밥통'이 최고인 것 같아요. 영화를 보면서, 조금은 생뚱맞지만, 왜 주변에서 공무원, 공무원 노래를 부르는지 깨닫게 됐어요."
"영화를 보면서는 다들 분노하고 반성하지만, 영화관을 나서기가 무섭게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우리는 '윤정학'을 부러워하고, '재정국 차관'이 되지 못해 안달하잖아요."
"엔딩 장면에서 '한시현'의 내레이션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언처럼 들렸어요.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라는 그 말."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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