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배경보다는 재능을 중시하겠다” 유재시거(唯才是擧)

삼국시대, 한국인에게 ‘핫’한 시대

중국의 역사는 약 3000년에 이를 정도로 장구하다. 기나긴 시간 중에서 가장 각광을 받는 시대가 있다. 바로 후한이 무너지면서 시작된 위(魏)‧촉(蜀)‧오(吳)의 삼국시대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 삼국시대를 좋아하는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나관중(羅貫中)의 [삼국지연의 三國志演義]가 일찍부터 ‘삼국지’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독서의 대상이 그리스 로마 신화를 비롯하여 유럽과 미국 등으로 다양해졌지만 1960~70년대만 해도 ‘삼국지’는 필독서에 가까웠다.

 

이러한 열풍을 타고 이름이 알려진 문인이라면, 예컨대 박종화, 김구영, 이문열, 황석영, 김홍신 등 한번쯤 개인 이름을 내건 ‘삼국지’를 내놓았다. 만화도 ‘삼국지’ 열풍의 대열에서 빠지지 않았다. 고우영, 이현세 등의 만화 삼국지는 문자 읽기를 버거워하는 독자층을 겨냥해서 출판되었다.

 

: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 포함된 삽화 중 한 장면.

이러한 뜨거운 관심을 두고 우려의 목소리도 많다. 첫째,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사람이 모두 남성이라는 점에서 이들의 삼국지는 남성의 편향된 관점에서 역사를 풀이하고 있다. 둘째, 다양한 버전의 ‘삼국지’들은 진수(陳壽)의 역사(정사)[삼국지]보다는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를 자기 식으로 풀이하고 있다. 이는 역사를 딱딱한 사실로 다가서는 것보다 흥미로운 소설(문학)로 다가서는 관행을 낳게 되었다.

 

셋째, 역사를 영웅 중심의 투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아무래도 사회가 다양한 세력의 경쟁과 협력으로 움직이는 측면을 소홀히 하기가 쉽다. 넷째, 인간사의 다양한 사건을 승패(勝敗)의 단순한 프리즘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이렇게 승패의 시각으로만 역사를 보면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는 게 타당해진다. 이와 같은 주장들은 다양한 버전으로 만들어진 ‘삼국지’의 탐독을 우려하는 사람들이 즐겨 지적하는 내용들이다.

 

 

한편 또 다른 입장은 소설을 소설로 보면 충분하지 다른 색안경을 끼고 볼 필요가 없다고 일축하기도 한다. 문학은 역사를 비롯하여 모든 것을 소재로 다룰 수 있다. 또 역사는 사실에 매이므로 사건과 사건의 연관성을 다 밝히기도 어렵고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기도 쉽지 않다. 이런 측면에서 역사를 소설화 하는 작업은, 문학이 지닌 상상력으로 역사(사실)의 빈틈을 메워서 독자를 ‘역사’로 끌어들인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달리 보면 글을 쓰는 작가나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개인의 관점에서 역사를 문학과 예술 등으로 재가공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은 역사학자가 역사적 실체를 규명하는 것과 다른 것이다. 역사학자는 사실이라는 엄정한 기준을 바탕으로 역사를 서술한다. 작가와 화가는 역사학자와 같은 엄정한 기준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은 제약이 없는 자유의 창작 공간을 사유화시킬 우려가 있다. 이런 측면에서 작가와 화가는 자신의 삼국지가 어디에 초점이 있는지 커밍아웃을 해야 한다.

 

 

물론 평론가들에게도 다양한 삼국지의 차이를 정확하게 밝혀내야 할 책임이 있다. 이때 우리는 그냥 또 다른 사람의 ‘삼국지’가 아니라 어떤 특징을 가진 ‘삼국지’를 만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삼국지’를 문학을 넘어 역사로 만나는 심화된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정통론: 촉한(蜀漢) VS 조위(曹魏)

삼국시대가 끝나자 ‘정통론’이 식자들의 관심사로 등장했다. 특히 송나라에 때에는 후한에서 당나라 그리고 당나라에서 송나라에 이르기까지 북쪽 유목 민족의 정부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의 문제가 학계의 현안이 된 것이다. 이러한 관심은 ‘정통론’이라는 주제로 숱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리하여 정통론은 중국 사상사와 역사학의 빼놓을 수 없는 핵심 논의가 되었다.

 

역사를 살펴보면

후한이 쇠퇴한 뒤 위ㆍ촉ㆍ오의 경쟁 시대가 막을 열었다. 그리고 위나라가 경쟁을 끝낸 뒤에는 진(晉)나라가 수립되었다. 그렇다면 후한에서 진나라까지 어떤 나라가 역사의 정통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할까? 일견 쉬울 것 같은 문제이다. 이 중 어떤 나라가 전국적인 통제권을 장악했었는지를 살펴보면 쉽게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삼국시대의 지도. <출처: Yeu Ninje at Wikimedia.org>

하지만 정통을 정하는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이미 정통이 문제시 되는 것부터 현실과 정통의 괴리를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정통성이 있는 나라가 대대로 이어진다면 아무도 정통성을 거론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특정 시대

 

에 두 나라가 통치권을 두고 서로 경쟁하거나, 한쪽이 전국적인 통제권을 장악했지만 그 나라가 이민족인 경우에는, 어느 나라에게 정통성이 있는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삼국 시대와 위진남북조 시대는 모두 통상적인 상황이라 정통을 가르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삼국시대의 정통 문제가 크게 대두되기 전부터 역사 서술에서 정통을 두고 논란이 있었다. 과거에는 한 왕조(나라)가 망하면 다음 왕조(나라)가 이전의 역사를 정리했다. 위나라가 망하고 진나라가 등장하자 진나라는 이전의 삼국시대의 역사를 서술해야 했다. 우리나라도 통일신라와 발해, 근대사의 정통을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특히 근대사의 경우 이승만과 군사정권에 대해서는 일반인과 전문가마다 각자의 입장을 가지고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1)

서진의 진수는 [삼국지]를 서술하면서 위ㆍ촉ㆍ오 중에서 조위(曹魏)를 정통으로 보았다. 동진의 습착치(習鑿齒)는 [한진춘추 漢晉春秋]를 쓰면서 촉한(蜀漢)을 정통으로 보았다. 진수는 위나라를 이은 진나라의 태생 과정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삼국시대의 중심으로 위나라를 설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반면 습착치는 동진에서 살았으므로 상대적으로 위나라와 진나라(서진)의 승계를 고려할 필요가 없었했다. 아울러 동진은 중원에서 쫓겨나 남쪽에 터를

 잡았으므로 유비의 촉한이 서쪽 변방에 자리했던 것과 유사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렇게 삼국시대의 정통은 모든 사람의 동의를 얻지 못하고 저마다 다른 주장을 펼치는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이 문제는 당나라를 지나서 송나라에 이르러 다시 학인들 사이에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북송의 사마광(司馬光,1019~1086)은 주(周)나라에서 후주(後周)에 이르는 1362년간의 역사를 서술하여 통치의 자료로 삼고자 했다. 그리하여 책의 이름도 [자치통감 資治通鑑]이라고 지었다.2) 이때 그는 삼국시대의 조위, 남북조시대의 남조를 정통으로 간주했다.

반면 남송의 주희는 [자치통감강목 資治通鑑綱目]을 저술하여 삼국시대의 촉한을 정통으로 삼았다. 그는 현실을 움직이는 힘(성공)보다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하는 이념(가치)을 중시했다. 이러한 관점에 따라 촉한이 실패했을지라도 정통성을 갖는다고 보았던 것이다. 우리나라는 주희의 성리학이 지배적인 학문의 자리를 차지하면서 일찍부터 삼국시대를 촉한 중심으로 봐야 한다는 시각이 자리를 잡았다.

이렇게 보면 정통성 논쟁은 역사 인식의 문제에만 한정되지 않고 현재를 운영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문제와 이어져 있다. 이 때문에 정통성 문제는 항상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이 문제가 한번 제기되면 쉽게 정리되지 않는 것이다.

구현령(求賢令) : 유재시거(唯才是擧)

동아시아 역사는, 전체적으로 봤을 때 시대와 현실을 움직이는 세력과 주체가 집단에서 개인으로 변해왔다. 같은 집단이라 하더라도 과거로 가면 갈수록 집단의 규모가 커지고 복잡하며, 근대로 오면 올수록 집단의 규모가 작아지고 간단해진다.

후한과 삼국시대의 현실과 역사는 독립적인 개인 주체보다는 혈연과 지연 그리고 학연으로 결합된 집단이었다. 개인이 아무리 유능하다고 하더라도 특정 집단의 일원에 들어 있지 않으면 실력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당시 집단을 가리키는 말로 호족(豪族), 벌족(閥族), 벌열(閥閱), 세가대족(世家大族), 명문거족(名門巨族) 등이 있었다. 이들은 국정 운영의 지분을 분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대로 축적해온 경제력을 바탕으로 공식 국가에 맞먹을 수 있는 정치력을 가지고 있었다.

 

건국 과정에는 다양한 인재가 능력을 발휘할 기회가 많다. 승패의 결과가 엄중하기 때문에 개인은 사회적 전통적 제약을 덜 받았다. 하지만 건국 이후에 국정이 안정되면 기득권 집단이 생기게 된다. 이에 따라 다양한 인재는 국정에 진출할 수 없게 되고 국가는 몇몇 가문과 집단의 권익을 유지해주는 이익 단체가 되어버린다. 특히 국정의 최고 책임자로서 왕이 어린 나이에 재위에 오르거나 국정을 장악할 능력을 갖추지 못하면 국가는 외척, 대신, 권신, 문벌의 이익을 증식시키는 사금고(은행)처럼 되어버린다.

평화로운 태평성대의 상징으로 알려진 중국 고대의 성왕 요임금의 초상화.

후한에서 삼국시대로 넘어가는 과정은 나라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반증한다. 삼국시대는 후한의 정권이 완전히 종식되지 않은 상황에서 난세의 영웅들이 혼란을 수습하는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던 시대였다. 초반의 혼전을 겪은 뒤 위의 조조, 촉의 유비, 오의 손권의 정립으로 상황이 정리되었다. 이 중에 조조는 협천자(挾天子), 즉 천자의 권세를 등에 업은 유리한 상황을 창출하면서 끝내 최후의 승리를 거두는 발판을 마련했다.

조조는 어떻게 오와 촉의 대립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을까? 여기서 그의 인재 등용과 관련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그는 모두 세 차례 인재를 구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구현령(求賢令)’(210년)으로 알려진 첫 번째 글을 살펴보자.

“만약 청렴한 선비라야 등용할 수 있다면 춘추시대의 제나라 환공이 어떻게 패자가 될 수 있었겠는가? 지금 세상에는 주나라를 도와 은나라를 멸망시킨 강태공처럼 삼베옷을 입고 맑은 꿈을 품고서 위수의 강가에서 낚시하는 사람이 없겠는가? 또 한나라 유방을 도왔던 진평(陳平)처럼 형수와 간통하고 뇌물을 받았지만 추천해준 위무지(魏無知)를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이 없겠는가? 여러분들이 나를 도와서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도 오직 재능만 보고 추천하여 내가 그런 사람을 쓸 수 있도록 하라.” (若廉士而後可用, 則齊桓其何以覇世? 今天下得無有被褐懷玉, 而釣於渭濱者乎? 又得無有盜嫂受金, 而未遇無知者乎? 二三子其佐我, 明揚仄陋, 唯才是擧, 吾得而用之.)

국정의 책임자가 위기의 상황이 닥쳤을 때 인재를 찾는 것은 특별할 것도 없다. [서경]이 바로 왕과 인재의 협력으로 이루어진 평화의 세상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임금과 순, 탕임금과 이윤의 사례가 바로 그것이다. 또 [논어]에 보면 조정이 아니라 민간에 있는 인물을 등용하여 국정을 쇄신하라는 거일민(擧逸民)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3)

진(秦)나라 효공(孝公)은 국내외적으로 인재를 찾는 명령을 내렸고, 그 결과 상앙을 만나서 통일의 기반을 다졌다. 사실 진나라에서 실력을 발휘할 수많은 인재는 자국 출신이 아니라 외국 출신이었다.4) 한나라 무제(武帝)도 자연재해가 일어나자 인재를 추천하라는 ‘현량조(賢良詔)’를 내리고 기성 관료에게는 국정을 쇄신할 대책을 올리라는 명령을 내렸다.5) 조선도 통상적으로 과거를 통해서 인재를 선발했지만 특별한 경우 추천을 통해서 숨은 인사를 발굴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조의 ‘유재시거’는 파격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사전에 어떠한 정보 없이 개인의 재능만을 보고 과거의 전력을 문제 삼지 않겠다고 공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고졸이나 지방대 출신은 이력서를 내도 대졸이나 명문대 출신에 비해 동등한 기회를 갖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고졸과 지방대 출신이 모두 실력이 없고 대졸과 명문대 출신이 모두 실력이 좋은 것은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고졸이나 대졸, 지방이나 서울(수도권)을 따지지 않고 실력만으로 사람을 뽑는다면, 취업 준비생들에게 희망의 세상이 열릴 것이다. 조조는 바로 이와 같은 희망의 목소리를 전했던 것이다.

시대정신: 한실부흥 VS 공치천하(共治天下)

조조는 1차 ‘구현령’으로 부족했던지 두 차례 더 비슷한 명령을 내렸다. ‘구일재령(求逸才令)’(217년)으로 알려진 세 번째 글을 살펴보자.

“옛날에 이윤은 요리사였고 부열은 노예 출신이었지만 명재상이 되었다. 관중은 환공을 죽이려던 적이었지만 협력하여 제나라를 패자의 나라로 만들었다. …… 지금 세상에 존경받을 덕망을 가지고서도 재야에 방치된 사람이 없는가? 용감하여 제 목숨을 돌아보지 않고 적에 맞서서 힘써 싸우며, 번거로운 일을 처리하는 하급 관리라도 남다른 재주와 실력을 가지고 장수를 맡을 수 있다. 오명을 뒤집어쓰고 웃음거리가 되었거나 잔인하고 불효를 저질렀지만 치국과 용병의 실력을 갖출 수 있다. 각자가 알아낸 사람을 추천하여 한 사람이라도 빠뜨리지 않도록 하라.” (昔伊贄傅說出于賤人. 管仲, 桓公賊也. …… 今天下得無有至德之人, 放在民間? 及果勇不顧, 臨敵力戰, 若文俗之吏, 高才異質, 或堪爲將守. 負汚辱之名, 見笑之行, 或不仁不孝, 而有治國用兵之術. 其各擧所知, 勿有所遺.)

이 포고령은 재주만 있으면 개나 소나 가리지 않고 쓰겠다는 식으로 오해를 받았다. 이것은 결국 조조가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사람이라는 걸 반증한다는 식으로 확대 해석되었다. 첫 번째와 세 번째 포고령을 읽으면 조조가 불인불효한 사람만을 쓰겠다는 것도 아니고 불인불효했던 실력자만을 쓰겠다는 것도 아니다. 그는 염사(廉士), 지덕지인(至德之人)을 찾을 뿐만 아니라 제 실력보다 덜 알려진 사람과, 과거에 범죄를 저질러서 처벌을 받았지만 치국과 용병의 자질을 가진 사람을 찾고 있다. 조조는 후한시대에 인재를 찾던 방식의 외연을 최대한으로 넓히고 있다. 즉 인재풀의 제한을 없애고 있는 것이다.

보저우(亳州) 조조기념관의 조조 동상과 보저우 기차역의 조조 동상. 같은 인물이지만 다른 특성을 포착하는 개성을 발휘하고 있다.

유재시거는 ‘한실(漢室) 부흥’을 내걸었던 유비 집단과 차이를 보여준다. 유비는 조조의 권력 장악을 개인의 욕망으로 보았다. 조조는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도 않는 것이다. 따라서 유비는 조조의 부당한 권력을 박탈하고 원래 한실이 가진 권력을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상황 인식에 따라 그는 ‘한실 부흥’을 목표로 내세웠다.

 

유비는 반(反)-조조와 복(復)-한실의 기치를 내걸었으므로 조조에 반대하는 세력과의 연합을 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한실에 실망했던 사람을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일 수 없었다. 이렇게 보면 유비는 처음부터 ‘나쁜 조조’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한실을 부흥시킨 후의 대책이라 할 만한 포스트 이념이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유비로 하여금 외연 확장을 힘들게 하는 요소였다.

“예부터 천명을 받거나 중흥을 한 군주가 어찌 현인과 군자를 얻어서 그들과 함께 천하를 다스리지 않는 사람이 있었는가? 현자를 구해도 집 밖을 나서지 않는다면 어떻게 군주와 현자가 서로 만날 수 있겠는가?” (自古受命及中興之君, 曷嘗不得賢人君子, 與之共治天下者乎? 及其得賢也, 曾不出閭巷, 豈幸相遇哉?)

반면 조조는 ‘유재시거’를 통해 한실에 반대하는 인물을 끌어들여서 ‘공치천하’로 새로운 시대를 열겠다는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조조는 이 비전을 얼마나 현실화시켰는가에 따라 평가를 받아야 한다. 우리는 보통 조조의 성공을 난세의 간웅(奸雄)에서 찾는다. 이것이 바로 과도하게 문학화된 ‘삼국지’의 병폐라고 할 수 있다.

 

문학 작품에서는 삼국시대의 두 주인공인 조조와 유비를 교활한 승자와 비운의 패자의 도식으로 엮는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조조는 성공해서 욕 얻어먹고 유비는 실패해서 동정을 받으니 결국 두 사람이 모두 승자가 되는 셈이다. 이것은 대단원의 해피엔딩이 될 수는 있겠지만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라고 할 수는 없다.

 

주희는 조위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현실을 힘의 논리보다는 이념의 지도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조조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유재시거’와 ‘공치천하’는 신진 사대부가 문벌 귀족을 넘어서 이전과 다른 사대부의 나라를 세울 수 있는 중요한 기틀이 되었기 때문이다. 역사를 편향된 시각으로 보면 피아의 논리밖에 없지만 객관적 시각으로 보면 과거 속에서 미래를 길어낼 수가 있다.

신정근 이미지
신정근 |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후 서울대학교대학원에서 석,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균관대 동양철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마흔, 논어를 읽어야 할 시간] (2011), [인문학 명강, 동양고전](공저, 2013), [불혹, 세상에 혹하지 아니하리라](2013), [신정근 교수의 동양고전이 뭐길래?](2012), [논어](2012), [어느 철학자의 행복한 고생학](2010)] 등이 있고, 역서로는 [소요유, 장자의 미학](공역, 2013), [중국 현대 미학사](공역, 2013), [의경, 동아시아 미학의 거울](공역, 2013) 등 30여 권의 책이 있다. 앞으로 동양 예술미학, 동양 현대철학의 새로운 연구 분야를 개척하고, 인문학과 예술의 결합을 이룬 신인문학 운동을 진행하고자 한다.
발행2014.04.15

주석

1
이승만은 개인의 욕망을 앞세운 실패한 지도자와, 독립운동으로 근대국가의 기틀을 다진 지도자라는 모순된 평가를 받고 있다. 박정희는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낸 근대화의 지도자와, 경제적인 결실에도 불구하고 악법으로 반대자의 입을 막은 독재자라는 극단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2
권중달이 온갖 어려움 끝에서 사마광의 [자치통감]을 31권으로 완역해 냈다.
3
[논어]에는 ‘거일민’ 이외에도 거직(擧直), 거선(擧善), 거현재(擧賢才), 거인(擧人) 등의 말을 사용하여 인재 등용을 중시하고 있다. 사실 선거로 집권파가 바뀌지 않으므로 새로운 인재의 수혈이야말로 막힌 정국과 정치 실패를 치유할 수 있는 좋은 카드라고 할 수 있다.
4
효공은 즉위하던 해(BC 362년) “빈객과 관료들이 진나라가 강성한 나라가 될 수 있는 획기적인 방안을 제시한다면 나는 관직을 높여주고 토지를 나누어줄 것이다”라는 구현령을 내렸다.([사기] ‘진본기’ 참조)
5
한 무제는 즉위하던 해(건원 원년, BC 140년)에 “현량, 방정, 직언, 극간하는 선비를 등용하고자 했다.”(擧賢良方正直言極諫之士) 그는 원광 원년(BC 134년) 5월에 ‘현량조’를 내려서 인재를 찾고자 했다. 이때 동중서(董仲舒) 등이 나오게 되었다.([한서] ‘무제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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