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커버스토리]내일 ‘5·18’ 34주년… 피해자와 가해자는 지금
못다푼 恨… 못씻은 罪
1980년 5월, 광주시민들이 원했던 건 ‘정의’와 ‘자유’ 그리고 ‘민주주의’였다.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에는 들불처럼 일어났다가 꽃잎처럼 스러진 수많은 넋이 잠들어 있다. 16일 계엄군의 총탄에 목숨을 잃은 김재평 씨의 묘비에 따스한 5월 햇살이 비치고 있다. 광주=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
또다시 5월이다. 눈부시게 푸른 5월이다.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에 이르는 길도 연둣빛 초록으로 물들었다. 길섶의
이팝나무에 순백의 꽃이 보송보송 피었다. 흰 쌀밥을 나무에 흩뿌려 놓은 것 같은 모습은 34년 전 광주시민들이 함께 나눴던
주먹밥을 떠올리게 한다. 길쭉한 모양의 꽃잎은 자식과 남편을 잃고 지독한 ‘오월앓이’를 해온 어머니들의 눈물 자국 같다.
각시붓꽃, 노랑별꽃이 선들바람에 하늘거리고 층층나무와 아까시나무가 감싸고 있는 묘지는 5월 하늘만큼이나 슬프도록 시리다.
▼ 5·18둥이 김소형씨 “날 보러 오셨던 아버지가 총탄에…” ▼
80세 김현녀씨 “만삭의 내 딸에게 조준사격…내 손자는 어쩔 것이냔 말이오”
70세 김진덕씨 “고교생이던 아들 시신도 못찾아… 묻은 곳이라도 좀 가르쳐 주시오”
①아버지 김재평 씨가 숨지기 사흘 전인 1980년 5월 18일 태어난 김소형 씨. 그는 “18일은 슬픈 생일날이지만 한국 민주주의의 밑거름이 됐다”고 말했다. 광주=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②1980년 당시 계엄군이었던 사진작가 이상일 씨가 1991년 광주 북구 망월동 옛 5·18묘지에서 촬영한 ‘5월의 신부’ 고 최미애 씨. 최 씨의 유해는 1994년 국립5·18민주묘지로 옮겨져 안장됐다. 이상일 씨 제공 ③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에 봄이 다시 찾아왔다. 이 한 맺힌 공간을 아는지 모르는지 산까치 한 마리가 날고 있다. 광주=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
묘지번호 1-72. ‘아빠! 내가 태어난 지 3일 만에 돌아가셨지만 제 가슴속엔 언제나 아빠가 살아계셔요. 딸 소형.’
1980년 5월 21일 계엄군의 총탄에 목숨을 잃은 김재평 씨(당시 29세)의 묘비에 새겨진 글귀다. 소형 씨는 아빠가 숨지기 3일 전인 5월 18일 태어난 ‘5·18둥이’다. 그에게 5·18은 세상에 태어난 기쁨보다 아버지를 잃은 슬픔이 더 큰 날이다. 해마다 그날이면 아버지를 한 번도 불러 보지 못한 설움에 지독한 ‘홍역’을 치른다.
‘5·18둥이’의 슬픈 생일날
김재평 씨는 1980년 당시 전남 완도수협에서 일하던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5월 17일부터 난산 조짐을 보인 부인 고선희 씨(59)는 18일 급히 광주의 한 병원을 찾았고 그날 오전 소형 씨를 낳았다. 김 씨는 결혼 3년 만에 얻은 딸의 얼굴을 보기 위해 휴가를 내고 광주로 달려왔다. 21일 서구 화정동의 작은아버지 집에서 산후 몸조리를 하던 아내, 갓 태어난 딸을 만나 단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기쁨은 잠시였다. 이날 오후부터 계엄군의 집단발포가 시작되면서 귀청이 찢어질 듯한 총소리가 들려왔다. 총소리에 놀란 갓난아이가 울음을 그치지 않자 아버지는 창문에 솜이불을 걸치려고 일어섰다. 그 순간 ‘쨍그랑’ 소리와 함께 총알이 김 씨를 관통했다. 피투성이가 돼 쓰러진 그는 손 한 번 쓰지 못하고 절명했다.
소형 씨가 아버지의 죽음을 어렴풋하게나마 알 게 된 건 초등학교에 입학한 무렵이었다. 5월이면 하얀 소복 차림으로 거리에 나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외치던 엄마의 치맛자락을 잡고 다니면서부터다. 그 전에는 완도군 보길도에서 함께 살던 외할아버지로부터 “아빠가 좋은 일 하시다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은 게 전부였다.
“엄마를 따라다니면서도 왜 우리 국군이 아빠에게 총을 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초등학교 4학년 때 망월동 묘지에서 신묘역(국립5·18민주묘지)으로 아버지의 유해를 옮길 때 비로소 알게 됐어요. 무고한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많이 희생됐는지….”
소형 씨는 중학교 3학년 때 ‘5·18 전국학생 글쓰기 한마당’에서 아빠를 잃은 슬픔과 5·18에 대한 다짐 등을 담은 ‘오월의 시(詩)’로 대상을 받았다. 그리고 조선대 미대에 입학해 조소를 전공했다. 주위에선 “‘5·18’을 소재로 작품을 만들어 보라”는 권유가 있었지만 정중히 거절했다. ‘5·18’을 이용한다는 말을 듣기 싫었기 때문이다.
“사진 속에서만 만나는 아빠가 그리울 때면 홀로 묘지를 찾아가 대화를 하곤 해요. 5월 18일은 저에게 슬픈 생일날이 돼 버렸죠. 가끔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아빠가 광주에 올라와 그런 일을 당하지도 않았을 텐데’라는 생각도 하고….”
소형 씨는 엄마와 단둘이 살면서 형편이 어려웠다.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어야만 했다. 결국 대학 2학년을 마치고 휴학을 했다. 그는 요즘 옛 전남도청 인근에서 웨딩숍 플래너로 일하고 있다. 틈틈이 ‘광주 5·18’을 알리는 활동도 한다. 8년 전부터 5·18민주유공자유족회 ‘5월 청년부’에서 5·18 때 아버지를 잃은 자녀들과 매달 18일에 만나 토론회나 봉사를 하고 있다.
“힘들고 지칠 때면 내가 쓴 비문을 하염없이 되뇌곤 해요. ‘아버지 조각상’을 아빠 묘비 옆에 세우고 싶은데, 언젠가는 그날이 오겠죠.”
꽃잎처럼 스러진 ‘5월의 신부’
“타앙!” 순간 날카로운 총성이 거리를 흔들었다. 맨홀 뚜껑 위에 서 있던 그녀의 몸뚱이가 허수아비처럼 퍽 주저앉았다. “의사 좀 얼른 보내 주시오! 애기가 금방 나올라고 한단 말이라우. 사, 산모가 지금 총을 맞고 죽었는디, 여덟 달 된 애기가, 막 뛰어라우! 엄마 배 속에서, 천길 만길, 펄쩍펄쩍 뛰고 있단 말이라우….” 얼마나 지났을까. 이윽고 미화의 배가 조용해졌다. “누나! 누나아아!” “으아아아아! 미화야아아! 내 딸아. 내 새끼야아!”
소설가 임철우가 1997년 발표한 소설 ‘봄날’의 일부다. 소설 속의 ‘미화’는 1980년 5월 21일 세상을 떠난 ‘5월의 신부’ 최미애 씨(당시 23세)다. 만삭의 몸이던 그는 그날 오후 전남대 부근의 집을 나섰다. 고교 교사인 남편이 제자들이 걱정된다며 휴교령이 내려진 학교에 갔다가 점심 때가 넘도록 소식이 없어 마중을 나간 참이었다. 전남대 앞에서는 시위대와 계엄군 간에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다. 시위대가 ‘짱돌’을 던지자 군인 하나가 한쪽 다리를 땅에 대고 ‘앉아쏴’ 자세를 취했다. 조준사격이었다. 잠시 후 총소리와 함께 최 씨는 힘없이 쓰러졌다.
하숙집을 운영하던 최 씨의 어머니 김현녀 씨(80)는 숨진 딸을 보는 순간 풀썩 주저앉았다. 딸의 주검은 참혹했다. 총탄이 머리를 관통해 온몸은 피투성이였다. 차갑게 식어가고 있는 어미의 몸속에서 태아는 거센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
김 씨는 ‘계엄군이 주검까지 뺏어간다’는 소문을 듣고 서둘러 딸을 리어카에 싣고 공동묘지에 가매장했다. 그런데 사태가 잦아든 6월 10일경 계엄사에서 ‘임신부가 죽었다는 소문을 확인하려면 검시를 해야 한다’며 주검을 다시 파오라고 명령했다. 거부하면 ‘유언비어 날포죄’로 집어넣겠다고 협박했다. 그렇게 18일 만에 다시 파헤쳐진 딸의 주검은 검시 후 망월동에 묻혔다. 두 번의 죽음을 당한 셈이었다.
김 씨는 1988년 국회 ‘광주청문회’에 나와 ‘피맺힌 한’을 토해냈다. “임신한 우리 딸이 총에 맞았는디 죽은 사람은 있고 왜 죽인 사람은 없는 것이오? 세상에 나와 보지도 못하고 죽은 내 손자는 어쩔 것이냔 말이오? 세상에 임신한 사람인 줄 뻔히 알면서도 총을 쏘는 그런 짐승 같은 놈들이 어디 있느냔 말이오? 뭔 죄가 있어서, 뭔 죄를 지었다고….” 김 씨는 그때 ‘광주의 진실’을 말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속이 후련했다고 털어놓았다.
내 딸이 왜 죽어야 했는지 이유를 알고 싶어 여기저기를 쫓아다닌 지 30여 년. 김 씨는 이젠 학살 책임자 처벌을 외칠 힘도 남아 있지 않다고 했다. “(음력으로) 이달 4일이 제사여서 묘지에 갔다 왔는데, 하얀 면사포를 쓴 영정 속의 딸이 어찌 그리 곱던지…. 이젠 눈물도 안 나와요. 평생 흘릴 눈물을 그때 다 흘려버렸으니….” 팔순의 노모는 가슴에 묻은 딸과 살고자 발버둥쳤던 어린 손자의 넋이 편히 잠들기만을 바랄 뿐이다.
‘시체라도 찾았으면…’
지난해 5월 18일 박근혜 대통령은 5·18민주화운동 33주년 기념식 참석에 앞서 행방불명자 묘역을 둘러봤다. ‘아직 유해를 찾지 못해 묘비만 있다’는 관리소장의 설명을 들은 박 대통령은 ‘임옥환의 령’이라고 새겨진 묘비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박 대통령은 묘비를 쓰다듬으면서 “그럼 다 돌아가셨겠네요”라고 혼잣말처럼 되뇌었다.
임 씨는 1980년 당시 조대부고 2학년이었다. 공수부대가 광주 외곽을 봉쇄하고 있던 5월 22일 절에서 공부하던 친구와 전남 화순을 거쳐 고향인 고흥으로 가기 위해 새벽에 조선대 뒷산을 넘었다. 대학생 2명도 함께 따라 나섰다. 매복하고 있던 공수부대원이 임 씨 일행을 발견하고 멈추라고 명령했다. 겁이 난 일행이 달아나자 공수부대원들이 무차별 사격을 했다. 대학생 2명은 도망갔고 친구는 붙잡혀 군홧발에 차이고 개머리판으로 두들겨 맞았다. 친구는 임 씨가 총에 맞아 쓰러지는 것을 봤지만 행방을 알 수 없었다.
임 씨 아버지 임준배 씨(80)는 5월 23일 아들의 소식이 끊겼다는 연락을 받고 광주로 올라왔다. 시신을 한데 모아 놓은 전남도청 앞 상무관으로 갔다. 시신들은 하나같이 처참한 모습이었다. 어머니 김진덕 씨(70)는 조선대 뒷산과 가까운 학동으로 갔다. 그곳에서 가마니에 덮여 있는 시체 11구를 보았다. 하지만 아들은 없었다. 나중에 동네사람에게 들으니 “공수부대원들이 시체를 몽땅 트럭에 싣고 가버렸다”고 했다. 김 씨는 아들이 아무도 모르게 어딘가에 묻혀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
5월 29일 ‘광주 봉쇄’가 풀리자 아버지 임 씨는 고흥에서 대형 버스를 빌려 동네사람들을 태우고 아들이 총에 맞았다는 조선대 뒷산으로 갔다. 괭이, 삽으로 흙무더기를 파 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열흘 뒤 조선대 인근에서 포장마차를 하는 아주머니로부터 청천병력 같은 말을 들었다. 한 공수부대원이 와서 “어제(22일) 학생 한 명을 죽였다. 내가 서라고 했는데 서지 않아 쏴 버렸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는 것이었다. 그해 6월 30일 임 씨는 학교에서 제적됐다. “반에서 1등, 2등을 다퉜는데…. 열심히 공부해 서울대에 가겠다는 놈이 돌아오지 않으니 내가 눈을 감을 수 있것소.” 아버지는 “아들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몰라 아직도 대문을 열고 놓고 자는 실종자 가족의 심정을 누가 알아주겠느냐”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는 1990년 아들의 넋이라도 달래기 위해 같은 나이에 숨진 한 처자와 영혼결혼식을 올려줬다. 이승의 엄마가 해줄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었다고 했다. “생때같은 아들을 보내고 썩어 문드러진 어미 심정을 조금이라도 헤아린다면 묻은 곳이라도 좀 가르쳐 주시오. 제발 부탁이오.” 어머니의 절규가 5월 하늘에 비수처럼 꽂혔다.
▼ 군종신부 당시 보고서엔… “잔악한 계엄군이 비극 불러” ▼
발포 거부했던 이제원 중령
“신군부 핵심이 강경진압 명령… 명령에 따른 우리에게도 책임”
계엄군 출신 사진작가 이상일씨
“시민들 모습 찍어 ‘불순분자’ 보고… 제대 후 ‘망월동’ 시리즈로 속죄”
광주 국립5·18민주묘지 오른편에 자리한 유영봉안소.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희생자와 부상 후 숨진 이들의 영정과 위패를 모아놓은 곳이다. 이들의 희생과 헌신이 씨앗이 돼 ‘5월 광주’는 숭고한 민주화운동의 성지로 자리 잡았다. 광주=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
이들 ‘피해자’의 한편에 ‘가해자’가 있다. 1980년 5월 신군부의 ‘화려한 휴가’ 작전명에 따라 투입된 계엄군은 총칼로 광주를
유린했다. 당시 계엄사 상황일지와 전투교육사령부(전교사) 전투상보 등에 따르면 광주진압작전에 투입된 군 총 병력은 8만2000여
명에 이른다. 이들 가운데는 차마 시민에게 총을 겨누지 못한 영관급 장교도 있었고 속죄하는 심정으로 ‘광주의 5월’을 10년
넘게 사진으로 남긴 계엄군 출신 사진작가도 있다. 그들에게 ‘광주 5·18’은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을까.
발포 거부했던 특전사 장교
“수많은 사람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했고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귀중한 생명을 앗아버렸고 평생 불구자로 만들었으며….”
당시 11공수특전여단 ○○대대 ○지역대장이었던 최모 씨(당시 대위)는 1988년 육군본부에 ‘5·18의 회고’라는 자필 문서를
제출했다. 동아일보가 16일 단독 입수한 이 문서에 따르면 최 씨는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죄스러운 마음속에 긴
그림자를 간직하고 있다”고 ‘고해성사’를 했다. 그가 지휘했던 부대는 1980년 5월 21일 전남도청 앞 집단 발포 현장에
있었다. 최 씨는 시위대와 일촉즉발의 대치 상황에서 발포에 반대한 한 대대장의 행동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전남도청 앞에 공수부대원이 몰려 있을 때 대대장끼리 수차례 회의를 했다. 회의 내용은 ‘이대로 있다가는 부하들 다 죽이겠다.
약간의 희생자가 생기더라도 사격을 좀 해 물리치자.’ 그러나 당시 62대대장 이제원 중령만은 ‘무슨 소리를 하느냐. 당치도 않은
말을 한다’며 벌컥 화를 냈다. 지휘봉을 내동댕이쳤다. 우린 좁은 소견에 ‘참 답답한 대대장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만약에
(그가) ‘좋소’라고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 중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날 전남도청 앞에서는 공수부대의 집단
발포로 39명이 숨졌다. 최 씨가 ‘양심적인 군인’이라고 증언한 이 중령은 1995년 서울지검의 ‘12·12 및 5·18사건’
특별수사본부 조사에서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광주사태’의 주된 책임이 신군부 핵심세력에게 있다고 진술했다. 당시 진술 조서에
따르면 이 중령은 “광주사태의 책임은 나를 비롯해 그 당시 광주사태 진압에 참여했던 모든 군인에게 있다. 당시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군인들은 하등의 정치적 의도 없이 상관의 명령에 따라 진압 임무를 어쩔 수 없이 수행했다는 점에서 광주사태의 피해자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광주에 공수부대를 투입해 강경 일변도의 진압작전을 벌인 배경에 대해 이 중령은 “12·12사건
이후 군권을 장악해 실세로 부각한 전두환, 노태우, 황영시, 정호용 등 신군부 핵심세력들이 자신들의 정권찬탈 기도에 결정적인
장애요인이 될 수 있었던 광주사태를 우리와 같은 공수여단 등 계엄군을 이용해 신속히 평정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권력을 좇는 이들의 욕심이 광주의 비극을 불렀다는 것을 당당하게 밝힌 것이다.
광주 진실 알린 군종신부들
계엄군이 광주를 장악한 직후 육군본부는 비밀리에 군종신부들을 광주에 보내 천주교 성직자와 신자들을 상대로 진상 파악에 나선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은 현장 조사 후 계엄군의 무자비한 진압이 광주시민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본보가 단독 입수한 ‘광주사태 확인 방문 결과’ 문건에 따르면 육군본부는 광주가 진압된 9일 후인 6월 5일 군수참모부
운영처장(준장·육본 기독장교단 회장)과 1군 군종참모(대령), 군수사 군종장교(중령), 수방사 군종참모(소령) 등 군종신부 3명을
광주에 파견했다. 이들은 일주일 동안 천주교 성직자와 신자들을 상대로 증언을 들었다.
증언자 중에는 윤공희
대주교(89)도 있었다. 군종신부들은 ‘지탄 받고 있는 잔악행위’로 △공중전화를 하고 있는 임신부 두부관통치사 △화물차에 탑승
중인 채소 장수 일가족 3명 총격 △여대생을 브래지어 팬티만 입힌 채 엎드리게 하고 이를 제지하는 노인 구타 행위 등을 들었다.
‘광주사태’의 교훈도 6가지로 정리해 보고했다. 5월 17일 이전의 데모와 5월 18일(전국 계엄 선포) 데모 성격의 차이를
인식시키는 사전 경고 절차 없이 강압적으로 진압했으며 데모 진압 작전 시 여자, 노인에 대한 강압제지 가해행위로 역효과가 났다고
지적했다. 또 초기부터 특수부대의 투입을 지양하고 경찰, 예비군, 향토사단을 단계적으로 활용하며 최종 경고 후 특수부대를
투입했어야 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시설방어 군인에게만 총기, 탄약, 대검을 휴대하게 하고 기타 데모 진압군에게는 진압봉만 휴대하게
했어야 한다는 점도 지적했다. 진실을 말할 수 없었던 시절 그나마 종교인의 양심이 그날의 한 조각 진실을 알린 것이다.
사진으로 속죄하는 계엄군 출신 작가
5·18 진압군이었던 최모 당시 대위가 육군본부에 1988년 제출한 ‘5·18의 회고’ 육필 원고(위)와 군종신부들이 육군본부의 의뢰로 현장을 조사하고 제출한 방문결과 보고서(아래). |
1980년 5월 19일 스물다섯 살이었던 이상일 씨(59)는 계엄군 정보사령부 소속으로 광주에 투입됐다. ‘불순분자 색출’이
그의 임무였다. 사복 차림으로 사진 채증을 하고 시민들의 상황을 보고했다. 경남 산청 출신으로 중·고등학교를 검정고시로 마친 그는
제대 후 뒤늦게 대학에 들어가 사진을 전공했다. 5월의 기억은 그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다시 광주에 가야 한다고 생각한 게
1985년.
“대구에서 막차를 타고 광주에 도착해 어두워질 때를 기다려 슬금슬금 망월동으로 기어들어갔죠. 그때 제 손에는 카메라가 들려 있었습니다.”
그는 두려웠다. 누군가가 자신을 기억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망월동 묘역에는 가로등도 없었다. 제단에 담배
한 개비를 올려놓으면 달빛에 반사된 영정 사진들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가장 눈에 밟힌 건 ‘5월의 신부’ 최미애 씨의 영정
사진이었다. ‘저 많은 사람은 왜 여기에 누워 있는 걸까. 나는 그때 무슨 짓을 한 걸까.’
그는 카메라에 모든
영정 사진을 담기 시작했다. 찍은 필름을 암실에서 인화할 때 그 사람들 얼굴이 서서히 드러날 때면 견딜 수가 없었다. 자책감이
밀려왔다. ‘그래 광주를 알리자. 역사적 소명 같은 거창한 게 아니라 내가 해야 할 몫이라 생각하자.’
그렇게
2000년까지 해마다 5월이면 망월동 옛 묘역과 5·18민주묘지를 찾아 사진을 찍었다. ‘망월동’ 연작 사진으로 2011년 일본의
저명한 사진상(賞)인 ‘이나노부오상’을 받았다. 지난해 5월 처음으로 부산에서 11명의 사진작가와 함께 ‘5월 항쟁 33주년
기념전시회-그날의 훌라송’을 열었다. 그는 5·18에 대한 역사왜곡을 보면서 여전히 광주는 ‘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시가
대한민국 역사에서 광주가 어떤 곳인지를 한 번이라도 생각하는 계기가 되길 바랐다.
이 씨는 부산에서 고운미술사진관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아직도 광주에 대한 ‘원죄’를 안고 있다고 했다. “명령에 따라 움직이더라도 인간은 해야 할 일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거부하지 못한 데 따른 것이 원죄인 거죠.”
그는 지금껏 수만 컷의 ‘5월 사진’을 찍었지만 흑백 사진뿐이다. 컬러 사진은 없다. ‘광주’를 화려함으로 포장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계엄군 출신 사진작가에게 광주는 여전히 무겁고 어두운 도시였다.
올 5월은 여느 해보다 쓸쓸하다. 세월호 참사 애도 분위기 속에 17일 전야제가 취소됐다. 국가보훈처의 ‘임을 위한 행진곡’
5·18 기념곡 지정 거부로 올 기념식도 지난해처럼 반쪽 행사로 치러질 것으로 보인다. 숭고한 ‘민주화의 꽃’으로 피어난 지
34년. ‘자유’와 ‘평화’, 그리고 ‘인권’의 5·18정신이 민들레 홀씨처럼 뿌려지는 5월 하늘을 언제나 볼 수 있을까.
광주=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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