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기소 SET 999,000원’ 게시물 만든 시민 “검찰 작태 한심”
한겨레 “봉사료 빼주는 고차방정식까지 동원”… 풍자 게시물 누리꾼 “플라스틱 칼보다 못한 검찰 칼날”

서울남부지검이 8일 김봉현 전 스타모빌리티 회장의 술접대 대상으로 지목된 검사 3명 가운데 1명만 청탁금지법(김영란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검찰은 검사 A씨에게 술접대한 김 전 회장, 술자리를 주선한 검찰 출신 변호사 B씨도 같은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검찰 수사 결과, 김 전 회장은 지난해 7월 A씨를 포함한 검사 3명과 변호사 B씨 등 총 4명에게 536만원 상당의 접대를 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검찰은 검사 3명 가운데 A씨만 100만원을 초과한 술·향응 접대를 받았다고 결론 내렸다.

김영란법을 보면, 1인당 접대 금액이 1회 100만원 이상인 경우에는 형사 처벌 대상이 된다. 검사 2명이 기소를 피한 까닭이다.

그러나 검찰의 ‘이상한 셈법’에 비판 여론이 거세다. 기소를 피한 검사 2명은 그날 술자리에서 밤 11시 이전에 귀가해 밴드·유흥접객원 추가비 55만원의 접대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검찰 셈법에 따르면, 기소를 면한 검사 2명은 각각 96만2000원 상당의 접대를 받은 것으로 처벌 금액 기준인 100만원에 미치지 못한다. 반면 기소된 검사 A씨는 114만5000원 상당의 접대를 받았다는 것. 

▲ 김광열씨가 제작한 검찰 풍자 게시물. 사진=김광열 페이스북.
▲ 김광열씨가 제작한 검찰 풍자 게시물. 사진=김광열 페이스북.

이에 온라인에선 ‘不기소 SET(불기소 세트) 999000원’이라는 검찰 풍자 게시물이 큰 호응을 받고 있다. 100만원 미만 접대는 죄가 안 되는 상황을 풍자한 것. 풍자 게시물을 만든 김광열씨는 9일 미디어오늘에 “초기에는 김봉현씨의 접대 자리에 검사가 없다고 주장하다가 실체적 증거가 나오니 이제는 말도 안되는 계산법으로 불기소 처리하는 검찰의 작태가 한심했다”고 밝혔다.

김씨는 “살아있는 권력을 수사하는 게 검찰개혁이라고 말한 윤석열 검찰총장은 검찰권력 또한 살아있는 권력이라는 생각은 못하는 것 같다”며 “조국 전 장관 가족 수사에서 알 수 있듯 정치권을 향한 검찰의 칼날은 날카롭다 못해 난자하는 수준이었다. 반면 김학의·진경준 검사 사건과 같은 자신들에 대한 수사는 플라스틱 케이크 칼보다 못한 것 같다”고 꼬집었다. 

9일자 언론도 검찰을 비판했다. 경향신문은 사설에서 “검찰개혁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높은데 아직도 업자들로부터 고가의 술접대를 받는 검사가 있다니 놀랍다”며 “잠재적 피의자가 검사 출신 전관 변호사를 끼고 현직 검사를 음성적으로 접촉하는 그릇된 행태에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돼야 마땅하다”고 비판했다.

한겨레 사설은 “세 검사에 대한 처분 내용을 가른 것은 각자가 접대받은 술값이 100만원을 넘느냐의 여부였다”며 “먼저 자리를 뜬 2명에 대해 접객원 봉사료와 밴드 비용 부분을 빼주는 ‘고차 방정식’까지 동원했다고 한다”고 꼬집었다.

한겨레는 “1인당 접대 금액이 100만원을 넘어야 형사 처벌 대상이 될 수 있도록 한 김영란법의 규정을 따랐다고 하지만 봉사료가 기소와 불기소를 가른 건 실소를 부른다”며 “국민들의 상식에 비춰보면 대단히 부조리하고 어처구니없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국민일보는 기소를 면한 검사 2명에 대해 “향후 징계 등 응분의 조치가 취해져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기사를 후원합니다.

카페24, 페이스북 숍스 연동…"韓 쇼핑몰 글로벌 진출 가속"

클릭 몇 번이면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 쇼핑몰 연동 가능

페이스북 숍스 구현 화면
페이스북 숍스 구현 화면

카페24 온라인 쇼핑몰들이 31억명에 달하는 페이스북 사용자들을 잠재 고객으로 맞이한다. 1인 창업자부터 대형 기업까지 카페24와 페이스북의 협업을 통해 글로벌 성공 속도를 높이게 됐다.

글로벌 전자상거래 플랫폼 카페24(대표 이재석)는 페이스북과 함께 '페이스북 숍스'(Facebook Shops, 이하 숍스)를 실시간 연동한다고 8일 밝혔다.

숍스는 자사 쇼핑몰을 뜻하는 D2C(Direct to Consumer) 사업자가 페이스북은 물론 인스타그램에서도 상품 전시공간을 만들게 한 서비스다. 간단한 클릭 몇 번이면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모두에 상품 전시공간이 구축된다. 사업 규모와 상관없이 카페24 회원 누구나 사용 가능하다.

이로써 사업자들은 전 세계 '페이스북-인스타그램' 사용자들에게 상품 콘텐츠를 선보이며, 자사 쇼핑몰로의 접속과 주문의 증대까지 기대할 수 있다.

페이스북은 지난 5월 숍스 프로젝트 안착을 위해 글로벌 8개 파트너 기업과의 협력을 발표했고, 카페24는 동아시아권에서 유일하게 참여한 전자상거래 플랫폼 기업이다.

■ ‘페이스북·인스타그램’에 세운 전시장, 쇼핑몰 고객 늘린다

쇼핑몰 운영자들에게 '숍스'의 특장점은 자사 쇼핑몰과 '페이스북-인스타그램' 간의 편리한 통합 운영이다. 카페24가 페이스북과 함께 개발한 실시간 데이터 연동 시스템을 통해 운영자들은 쇼핑몰 관리자 화면에서 '숍스'에 진열된 상품을 관리할 수 있다.

카페24 기반 자사 쇼핑몰에 상품을 등록하면 ‘페이스북-인스타그램’에 해당 사진과 상세정보가 로딩시간 없이 실시간 게재되도록 설정 가능하다. 상품 정보를 수정 혹은 삭제할 경우 별도 작업 없이도 바로 반영된다.

주문과 결제는 자사 쇼핑몰에서 이뤄진다. 상품마다 적용된 ‘웹사이트(쇼핑몰)에서 결제’ 버튼으로 쇼핑몰 유입부터 주문, 결제까지 원활히 연결된다. 사업자가 자사 쇼핑몰 충성 고객과 매출을 실질적으로 늘려가기에 유리할 것으로 기대된다.

콘텐츠를 선보이는 방식은 단순 나열이 아니라 ‘브랜드 화보집’과 유사하다. 이를 가능케 하는 ‘컬렉션’ 기능이 마치 상품 기획전처럼 특정 상품들을 분류한다. 계절이나 출시시기, 할인상품, 스타일 등 분류 기준을 사업자가 정하면서 마케팅 효과를 극대화시킨다.

■ 해외 각국에도 상품 노출...전자상거래 수출 촉매로 기대

숍스는 한국 기업의 전자상거래 수출을 지원할 기대주이기도 하다. 간편한 설정만으로 북미, 일본, 동남아 등 페이스북이 진출한 여러 국가 사용자들에게 상품을 선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특정 국가에 맞춘 ‘타깃 마케팅’이 크게 쉬워진다.

고객대응 부분에서는 사업자가 해외 사용자에게 ‘페이스북 메신저’, ‘인스타그램DM’ 등 페이스북의 소통 기능으로 신속한 상담을 제공할 수 있다. 사용자들이 자신의 지인들과 상품이나 콘텐츠를 공유하는 범위 역시 글로벌이다.

한편으로는 K스타일로 지칭되는 패션, 뷰티 등 한류 콘텐츠 분야에서도 숍스의 활용도가 클 것으로 기대된다. 숍스를 통해 온라인 쇼핑몰의 글로벌 진출이 더욱 쉬워져 다양한 국가에서 한류 콘텐츠가 더 확산될 수 있다.

카페24와 페이스북은 숍스를 국내와 함께 일본에도 동시 선보인다. 지난 2018년 10월 론칭한 ‘카페24 일본 플랫폼’에 연동하며, 여기에 가입한 일본의 자사 쇼핑몰 사업자들 역시 이용할 수 있다.

■ '페이스북-인스타그램'에서 쇼핑몰 이용하듯...끊김 없는 쇼핑 경험

‘페이스북-인스타그램’ 사용자들은 온라인 쇼핑 경험이 보다 풍성해질 전망이다. 스마트폰의 간단한 터치만으로 수많은 기업과 브랜드들의 ‘컬렉션(화보집)’을 펼쳐볼 수 있다. 마음에 든 상품은 ‘관심상품’으로 지정한 뒤 언제든 다시 찾을 수 있다.

숍스로 만들어진 상품별 페이지는 온라인 쇼핑몰의 상세 페이지처럼 다양한 정보들로 채워져 있다. 상품마다의 색상 종류, 사이즈 등 여러 선택 옵션들을 즉각 확인할 수 있다. 상품의 대표 사진만 볼 수 있거나 상세 정보를 보려면 별도 웹사이트로 이동해야 했던 기존 SNS 쇼핑 환경이 대폭 개선된 것이다.

또 ‘페이스북-인스타그램’ 사용자들은 등록날짜순서, 가격순서, 할인여부, 재고유무 등의 검색 필터를 맞춰가며 원하는 상품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런 구조는 카페24와 페이스북이 강조하는 ‘끊김 없는 쇼핑 경험’으로 이뤄진다. 다른 애플리케이션이나 웹페이지로 이동하는 불편을 최소화하고, ‘페이스북-인스타그램’ 안에서 글로벌 시장의 다양한 상품들을 찾아볼 수 있다.

■ 카페24-페이스북, 글로벌 협업 시너지 지속 이어가

페이스북은 이에 더해 자체 빅데이터와 머신러닝 기반의 알고리즘으로 사용자에게 알맞은 상품을 자동 추천해준다. 사용자의 상품 선택권 증대를 위한 기술 개발이 지속된다.

관련기사

온라인 쇼핑몰 180만여개를 탄생시킨 카페24 역시 기술 투자에 더욱 박차를 가한다. 글로벌 전자상거래 생태계에서 더 많은 사업자들에게 성공 기회를 제공한다는 계획이다.

이재석 카페24 대표는 "카페24와 페이스북은 IT 기술로 사람과 사람, 또 비즈니스 간의 초연결을 중요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며 "더 많은 온라인 쇼핑몰들이 글로벌 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도록 페이스북과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TAGS:

 카페24 페이스북 숍스

안희정 기자 

   

근대 19. 명성황후의 시해, <을미사변>

프로필

2018. 6. 6. 18:33

이웃추가
 

 

1895년 10월 8일, 조선의 친러 정책을 경계한 일본은 미우라 공사와 오카모토 고문, <한성신보> 기자, 극우 집단, 일본 낭인, 조선군 훈련대, 일본 순사, 일본군 등을 조직해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사건을 은폐 시도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시해 주모 자객들이 찍은 기념사진.

 

1895년 10월 8일 새벽 5시경. 일본 미우라 공사와 오카모토 궁내부 고문, 일본 극우 집단 현양사와 천우협, 일본 낭인, 일본군, 일본 순사, 일본인 기자들로 구성된 <한성신보> 사장과 기자단, 우범선 등이 이끄는 조선군 훈련대 등이 왕의 침전인 경복궁을 일시에 습격하였다. 조선군 훈련대가 경복궁 주변을 강제 방비하는 사이, 일본인들은 왕의 침천까지 들어가 고종과 태자까지 강제 구인하는 등 행패를 부렸다. 그 사이, 핵심 세력은 황후의 침천인 건청궁 곤녕합까지 들어가 명성황후를 잡아 끌어내려 했다.
  궁내부 대신 이경직이 그 앞을 막아서다가 두 팔이 잘려 나가고 허리가 베여 숨졌다. 궁녀들도 황후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던졌으나 그들 또한 힘없이 스러지긴 마찬가지였다. 


  강제로 끌어낸 황후를 능욕하고 시해한 일본인들은 황후의 시체를 불태우면서까지 시체에까지 능욕을 주는 등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흥선대원군은 새벽 가마를 타고 일본군과 함께 궁궐에 도착해 있었으며, 황후가 시해된 아침 고종의 사후 회의에까지 참석한다. 


  청일전쟁으로 청나라를 조선에서 몰아낸 일제가 조선 왕실이 러시아를 이용해 일본을 제압하려 하자 일으킨 황후 살해의 만행, 을미사변이다. 이 일로 전국 의병들이 궐기하기 시작했으며, 이듬 해 대한제국의 선포와 함께 시행한 단발령으로 갑오경장을 이끈 친일파정권은 막을 내리고, 고종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 일국의 왕이 자신의 수도 서울에서 일개 외국의 대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까지 단행하기에 이른다.
  구한말, 탐욕에 눈먼 일제가 조선 정부에 대해 일으킨 사상 초유의 테러, 을미사변으로 들어가 본다.  

친일파와 흥선대원군의 명성황후 살해 기도
 

 

경로 1) 10월 8일 새벽 5시, 일본은 광화문을 거쳐 근정전으로 진입했다. 조선군 시위대가 응전했으나 홍계훈 등이 사망했을 뿐 큰 효과는 없었다.

 

    일본 주도의 황후 살해 사건이 발생했지만, 명성황후 살해 사건은 일본만 계획을 세운 것이 아니다. 갑오경장으로 다시 세력을 잡은 박영효와 언제든지 정권 핵심으로 복권을 누리는 흥선대원군 또한 다양한 방법으로 황후 살해를 모색했다.
  같은 개화파로 김홍집과 함께 공동정권을 꾸렸던 박영효는 김홍집까지 내치고 아예 황후까지 살해해 자신들의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하려는 생각을 가진다. 그는 유길준에게 이 생각을 털어놓았으나 유길준이 이를 고종에게 밀고하는 바람에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그는 일본으로 망명한다.
  흥선대원군은 언제든지 며느리 명성황후를 제거하고 권력 중심에 앉을 생각이 있었다. 갑오경장 초기에도 명성황후를 견제한 일본의 계략으로 잠깐 정권 핵심으로 복귀했으나, 실권 없는 허수아비 존재였던 그는 이내 개화파에 의해 내치고 다시 실각한다. 그에게 오카모토 등 일본 공사관 인물들이 끊임없이 회유하고 계획에 참여할 것을 회유한 것은 여러모로 사실인 듯하다. 


  내부에선 박영효와 흥선대원군의 정권 야욕이 있었다면, 밖으로는 러시아의 남진과 이를 견제한 일본이 친러파로 돌아서는 황후를 제거했다는 설명이 설득력 있다. 명성황후는 초기에는 개화파에 그다지 반대하지 않았으나, 일본을 끌어들인 급진개화파의 갑신정변에서 의붓 오빠로 유일한 가족이다시피했던 민승호의 양자 민영익까지 크게 다치자 크게 마음이 선회했다. 


  이후 임오군란, 동학농민운동 등을 겪으면서 그녀는 청나라에 지원 요청을 하고 일본에 대해서는 견제를 지속했다. 일본은 흥선대원군을 갑오경장 초기 전면에 내세우고 을미사변 또한 그를 강제 입궐시킴으로써 책임을 그에게 덮어 씌우고 자신들의 만행을 조선의 자발적인 정치 싸움이나 정변 수준으로 포장하려 했다.
  그런 그녀가 청일전쟁에서 믿었던 청이 패배하고 그런 청을 이긴 일본이 또 러시아를 비롯한 서구 3강의 말에는 꼼짝없이 요동반도를 반환하는 것을 보고 친러시아로 방향을 바꿨다는 것이 정설이다. ‘인아거일’,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제압한다는 것인데, 이후 러시아 공사 베베르를 비롯한 러시아 정부와의 급격한 협력 기조가 조선 왕실을 이끌게 된다. 


  힘들여 전쟁까지 해서 얻은 대륙진출의 교두보, 조선을 일본이 포기할 수는 없다. 따라서, 흥선대원군과 조선군 훈련대를 사건의 책임으로 묻기 위해 자의든 타의든 흥선대원군을 사건 당일 입궐시키고 훈련대를 경복궁 사방에 둘러 사건을 마치 이들이 일으킨 것처럼 은폐하려 했던 것이다.


  일본의 황후 시해와 이의 은폐 조작은 오래 가지 않아 탄로났다. 왕실 수비를 돕던 미국인 교관 다이를 비롯해 많은 외국인 외교관, 협력 사절들이 사건을 직접 목격한 것이다. 그러자 일본은 미우라 공사 등 사건 핵심 주동세력을 재판한다는 핑계로 자국 소환한 다음, 이듬해 곧 천황의 격려 속에 방면해 주고 말았다. 어차피, 황후 시해를 계획하고 조선에 파견된 육군 중장 미우라나 그의 시해를 도운 세력들이나 자신들이 세운 바둑판에서 임무 충실하게 한 충신이니 그들을 가둬 둘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들은 모두 이후 일본 제국주의의 팽창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출세 가도를 달린다.   

 

 

경로 2) 침입한 자객들은 경복궁 내 연못인 경회루를 지나친다. 사건 은폐를 위해 새벽에 전격적으로 진행하려 했으나 조선군 훈련대의 합류와 시위대와의 교전 등으로 시간이 지체됐다.

 

민심을 잃었던 명성황후의 죽음, 조선은 한일 강제병탄으로 급물살

 

경로 3) 마침내 일본은 황후의 침소인 건청궁 곤녕합까지 이르러 황후를 끌어내고 살해한 뒤 시신까지 능욕하고 불태우는 만행을 저지른다. 대궐 서쪽 경로를 통해 진입한 이들은 동쪽 경로를 통해 달아난다.

 

    명성황후는 임오군란과 동학농민운동 등 민란 때에도 타도할 대상 중 하나로 지목되었다. 그녀 자신의 사치와 궁궐에 무당을 끌어들이고 국고를 낭비하는 등 실정도 요인이지만, 그녀를 위시한 여주 민씨 일가의 발호가 지나쳤기 때문이다. 따라서, 백성들 사이에선 단호한 위정척사를 초기에 내세웠던 흥선대원군에 대한 향수가 어느 정도 남아 있었으며, 이런 점 때문에 일본이 흥선대원군을 전면에 내세워 갑오경장과 을미사변 등을 무마하려고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왕실은 이미 저물었다. 급진개화파를 위시한 신하들의 발호를 막을 만한 힘도, 일본 군대의 조선 진주와 이들의 왕실 유린에도 항의하거나 거사를 도모할 만한 기개는 남아 있지 않았다. 백성들은 결기 있게 민란과 항쟁 운동 등을 일으켰으나, 2년 후인 1897년 10월 12일 황제를 칭하며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은 ‘제국’에 걸맞을 만한 위엄과 통치 행위는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이듬해인 1896년, 황후의 죽음 이후 단발령이 단행되면서 전국적인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고종은 일본을 피해 러시아대사관으로 몸을 피했으며, 분노한 민중은 김홍집 등을 살해하고 갑오경장을 좌절시켰다. 결국, 모든 마무리는 민중이 스스로 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1898년, 며느리 명성황후와 오랜 라이벌 관계를 유지했던 흥선대원군이 사망했다. 고종은 그 장례식에 가지 않았다. 1905년, 일본은 을사늑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았으며, 1910년 경술국치인 한일합병으로 조선을 강제 병탄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경로 4) 황후 시해장소인 곤녕합 앞에 놓여 있는 신발들. 장미로 표시되어 있는 곳 앞에 신발들만 덩그라니 않아 있다.

  
덧붙임
명성황후의 호칭에 대해 ‘민비’나 ‘왕비’ 등으로 부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블로그에서는 사후 2년 후인 1897년, ‘명성’(明成) 시호가 공식적으로 추증되고 11월 홍릉 안장되었으며, 고종 황제 즉위 이후 ‘명성황후’로 공식적으로 불린 것을 감안해 모두 ‘황후’ 또는 ‘명성황후’로 통일합니다.

근대 18. '일본 제국'의 시작, 청일전쟁+갑오경장

프로필

2018. 5. 30. 18:22

이웃추가

1894년 갑오년은 동학농민운동이 전개된 해이기도 하지만, 일본의 조선 합병 야욕이 본격화된 해이기도 하다. 동학농민운동을 빌미로 청, 일 양국군이 출동해 조선 패권을 둘러싸고 남의 나라에서 싸움을 벌이고 남의 나라 민중인 동학농민군과 전쟁을 벌였으며, 경복궁을 침탈해 흥선대원군을 허수아비로 세우고 갑오경장 개혁을 시작했다


동학군은 610, 관군과 전주화약을 맺고 자진 해산했다. 문제는 그전, 조정에서 청나라에게 원군 요청을 했고 청나라가 약 2,800명의 군대를 파견하면서 일본이 텐진조약에 따라 자국도 약 8,000명에 달하는 군대를 출병한 것이다. 동학운동이 해산한 뒤인지라 조선은 철병을 요구했지만, 이왕 나온 군대로 조선을 집어삼킬 생각까지 하고 있는 일본은 전혀 해산할 뜻이 없었다


오히려, 청나라에 조선의 내정개혁에 함께 힘을 합치자는 제안을 했다가 2번에 걸쳐 절교서까지 발행하면서 청일전쟁의 빌미를 만든다. 한편으로는 눈에 가시 같은 고종과 명성황후를 제거할 발판을 놓기 위해, 김홍집과 박영효를 내세워 조선 내정개혁을 추진하도록 한다. 갑오년을 물들인 양대 사건, 청일전쟁과 갑오경장의 발단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시작, 청일전쟁

갑오경장의 추진 세력 중 하나인 박영효. 이미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던 그는 조선으로 복귀해 갑오경장을 이끈 뒤 역모사건으로 일본 망명, 이후 다시 귀국해 일제강점기에 후작을 지내는 등 친일파의 거두로 자리잡는다.

내용에 들어가기 앞서, 일본이 왜 조선을 탐냈던 것인지부터 생각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얼핏 들으면 답이 뻔히 정해져 있는 질문 같지만, 양국 관계가 나쁘다고 항상 상대편을 집어삼키려고 전면전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니 당시 배경을 조금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1894년이 있던 19세기말은 서양 열강의 전세계 식민지 개척 전쟁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났을 때였다. 산업혁명으로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시대가 열리기 시작한 서구 열강들은 만들어낸 제품을 갖다 팔 시장과 제품을 만들 값싼 노동력과 원료 모두가 필요했다. 그래서 아프리카를 비롯해 아시아까지 진출해 전세계 식민지, 즉 식민지를 기반으로 한 제국주의의 기틀을 닦기 시작한다

제국주의 국가들 중에는 비교적 늦은 1853년, 뒤늦게 강제개항된 일본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1876, 강화도조약으로 조선 침탈의 신호를 올리기 불과 20년전 일본 또한 똑 같은 상황에서 강제개항됐으며, 20년 동안 일본은 자본주의의 씨앗은 물론 서구 문물을 제대로 배우는 데에 주력했다. 정치적으로는 천황제의 복구와 함께 내정 안정을 이루려 했고, 기술적으로는 서구 문물과 함께 아시아 지역으로 눈을 돌려 그들 또한 시장 팽창을 노리고 있었다

바로 옆에 위치한 조선은 그들에게 가장 좋은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오랜 기간 역사의 라이벌이기도 했지만, 남북 지역을 모두 합해 자원도 풍부하고, 근면한 노동력도 충분히 있으며, 무엇보다 섬나라 입장에서 보면 대륙과 이어지는 가교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매력이 아닐 수 없다. 좁은 섬을 벗어나 대륙으로 진입해 들어가는 통로로 조선을 지배하고 나아가 청, 아예 그를 넘어 세계 전체까지 연결되는 좋은 통로가 조선이었던 셈이다

일본이 조선을 노린 것만큼이나 중국과 러시아 또한 조선의 패권을 두고 다툴 만했다. 러시아는 얼지 않는 항, 부동항이 절실했고, 중국은 조선의 전통적인 종주국으로 조선을 잃으면 역으로 중국 또한 일본의 시야권에 들어가게 된다. 이외, 이미 중국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 독일 등 서구 국가들 또한 중국의 확장으로 조선에 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 일본이 조선 패권을 두고 중국과 전쟁을 일으키긴 했지만, 사실 그 전에 어느 나라가 조선을 집어삼킨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제국 열강들의 패권 다툼장이 중국과 그 밑 조선이었던 것이다

청일전쟁과 갑오경장은 바로 그 맥락에서 일본이 가장 빨리 조선의 지배권을 획득하기 위해 벌인 제국주의의 신호탄으로 볼 수 있다. 우선 조선부터 확보하고 나아가 중국까지 지배하며, 그 자원과 노동력을 기반으로 세계 제패까지 꿈꿀 수 있게 된 것이다. 겉으로 보면, 조선 왕실 하나만 유린된 것 같지만, 세계 입장에서 보면 일본이 국제 무대에서 제국중 하나로 데뷔하는 한 장면이 바로 청일전쟁이 아닐 수 없다.
 
조선의 안과 밖을 모두 삼켜라, 청일전쟁과 갑오경장

청일전쟁 당시 평양전투를 그린 일본의 한 그림. 욱일기가 보이는 등 일본 제국주의의 맹아가 보이기 시작한다.

이런 일본의 야욕에 본의 아닌 좋은 빌미가 된 것이 동학농민운동이다. 자국 군대로는 도저히 동학운동을 진압할 여력이 없는 왕실에서 청나라에 구원 요청을 보내고, 청이 군대를 보내면서 텐진조약에 의해 일본에 그 사실을 알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일본은 청나라 군대의 3배 이상인 약 7,000 ~ 8,000명의 군대를 보내 조선 장악을 시도한다. 동학농민군이 해산하고 위험이 없어졌으니 돌아가라는 조선의 철병 요청에도 이들은 꿈쩍하지 않고 오히려 청나라에 절교서를 던지더니, 18947 25일 풍도 앞바다에서 청나라 함대를 공격함으로써 청일전쟁의 막은 올랐다. 이어, 충청도 성환전투에서 청군을 격파한 뒤, 81일 청나라에 본격적인 선전포고를 하기에 이른다


이때, 중요한 사건 하나가 있다. 725일 청나라를 공격하기 이틀 전인 723, 조선 왕실의 핵심인 경복궁을 먼저 공격했다는 점이다. 철군을 요청하는 고종과 명성황후가 눈에 가시였던 이들은 경복궁을 점령하고 흥선대원군을 앞에 내세우며 김홍집과 박영효를 중심으로 친일내각을 세우기에 이른다. 이들이 727일부터 시작해 1896211일까지 총 3차에 걸쳐 진행한 것이 갑오경장이다


청일전쟁은 그래도아시아의 맹주라는 중국이 어이없게도 함대와 육군 모두 대파되면서 손쉽게 일본의 승리로 기운다. 915, 평양의 청나라 육군 14,000명이 대파된 것을 비롯해, 917일에는 황해에서 청국함대가 격침되고 급기야 10~11월에는 2개 군으로 나누어 청나라 본토와 랴오둥반도 공격에 나선다. 이듬해 2, 청나라가 화해하자고 구원 요청을 보내지만, 회담에서 더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 싶은 이들은 마지막까지 밀어붙여 랴오둥반도, 즉 요동반도를 완전 점령한 4월이 되어서야 협의를 완료하고 랴오둥반도의 영유권과 배상금 2억냥의 지급을 골자로 한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한다


그 기간, 조선에서는 무려 김홍집과 박영효가 서로 세력다툼을 벌여가며 정부와 사회 차원에서의 개혁을 유지하고 있었다. 주목할 것은 일본의 경복궁 침탈로 시작된 개혁이긴 하지만, 일본이 청일전쟁과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느라 정신이 없어 내부적으로는 김홍집과 박영효가 이끌고 간, 즉 조선 자체적인 개혁적 측면도 있다는 점이다


1차 개혁은 흥선대원군을 앞세우고, 정부 조직을 의정부와 8아문, 왕실 업무를 다루는 궁내부로 분리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이후 과거제를 없애고, 반상제도, 공사노비법 등을 철폐하는 등 조선의 근간인 신분제도와 왕실 모두에 크게 손을 댄다. 위정척사의 거두인 흥선대원군은 역설적으로 일본의 도움으로 친일내각의 수장으로 다시 입궐하지만, 그 또한 자신의 세력을 넓히려 하다 18941217일부터 시작된 2차 개혁때부터는 다시 실각하고 만다


2차 개혁의 중심은 1027일 부임한 이노우에 공사다. 일본의 높은 관료였던 그는 조선에 오자마자 동학농민군에 대한 진압을 서둘러 10월 중순부터 동학농민군과 일본군 사이의 조일전쟁의 서막이 오른다. 동학농민군은 10월말 기준 11만 명까지 세를 불리지만, 11월 목천 전투에 이어 12월 우금치 전투에서 대패함으로써 1230, 전봉준 장군까지 체포되면서 미완의 혁명으로 날개를 접히고야 만다.
이 즈음이면 일본의 청일전쟁 승기도 거의 잡혔을 때다. 이때, 조선은 2차 갑오개혁이 한창이었는데, 욕심을 부린 박영효의 질주로 동반자였던 김홍집은 18955, 삼국간섭 이후 자리에서 물러나고 만다. 박영효 또한 일본과 고종, 명성황후 모두의 탐탁치 않은 시선을 받으며 반역사건에 휘말려 일본으로 재차 망명하고 만다


3차 개혁은 이노우에 이후 미우라 공사가 부임한 이후 1895년부터 시작된다. 이때 일본은 랴오둥반도를 다시 반환하라는 러시아와 프랑스, 독일의 압력에 의해 랴오둥반도를 다시 반환하고 배상금에만 만족해야 했지만, 이 배상금이 바로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인 군대를 양성하고 자국 경제를 부활시키는 데에 요긴한 역할을 한다.  


삼국간섭은 의도하지 않았던 비극을 낳았다. ‘종주국청나라까지 대파하는 것을 본 조선 왕실이 겁에 질렸을 것은 당연한 일. 하지만, 그런 일본 또한 러시아의 압력에 굴복하는 것을 본 고종과 명성황후는 이제 청나라가 아닌, 러시아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마침 부동항을 얻고 싶은 러시아와도 의견이 잘 맞아 조선에 자문단을 파견하기로 하는 등 양국의 협의는 활발히 진행되어 간다.



갑오경장은 정치제제와 사회제도 모두를 급격하게 뒤흔들어 놓았는데 가장 상징적인 사건은 단발령이 아닐까 한다. 민심과 동떨어진 급격한 개혁으로 김홍집 등 개혁 내각은 이후 피살되기에 이른다.

갑오경장 3차개혁은 바로 그 연장선에 있다. 청나라까지 제거한 일본은 단연 조선의 패권을 쥐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왕실은 그들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친일파 중 박영효는 그 세력을 잃고 망명했다. 이제 김홍집 하나 남았다. ‘인아거일’(引俄拒日,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제거하자는 적으로 적을 제압하자는 조선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까지 외치는 조선왕실은 그들에게 눈의 가시가 아닐 수 없었다.
1895713일 부임한 미우라 공사는 불과 1달 후 양국은 물론, 조선에 주재했던 외교가를 경악하게 한 만행을 계획한다. 명성황후, 청나라에 이어 러시아를 끌어들이려 한 친러파 명성황후를 제거하는 을미사변이 그것이다. 황후의 시아버지, 흥선대원군과 일본 낭인이라고 하지만 꽤 고급 엘리트 정치깡패, 조선의 신문기자까지 망라된 일대 정변이 그것이었다.
갑오경장은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난 뒤에도 계속 될 수는 없었다. 황후까지 살해되자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 대사관으로 피란을 간 것이다. ‘아관파천이 그것으로, 고종이 궁을 떠나자 김홍집 등 개혁파 또한 추진 세력을 잃고 말았다. 이미 단발령으로 격렬한 국민 저항을 불러 일으킨 그는 고종과 왕세자가 아관파천을 단행한 1896211, 퇴궐하면서 분노한 군중에 의해 살해되었고 갑오경장도 막을 내렸다.

조선의 러시아 잡기, 그리고 '여우사냥'
청일전쟁 당시 제물포항에 상륙하는 일본군 모습. 근대식 군대이긴 했지만, 청나라에는 열세라는 분석을 뒤엎고 승리한다.

갑오경장은 갑신정변 때 급격한 변혁을 꾀했던 조선의 내부 개혁파가 다시 한번 일본을 등에 업고 개혁을 단행하려 했다는 점에서 나름 의의가 있다. 신분제 철폐와 단발령 등으로 민심과 동떨어진 정책으로 격렬한 저항을 낳기는 했지만, 임오군란 이후 사치와 궁궐 내 무당을 불러 들이는 등 국민의 지탄을 받고 있던 명성황후 또한 그다지 나을 것은 없었다.
세계 열강의 식민지 정책 앞에 조선은 이미 태풍 앞의 촛불과도 같은 상태였다. 같은 시기, 강제개항 당한 것도 같지만 적극적으로 외부 세력과 협의하고 내정을 탄탄히 할 역량은 조선 지배층 어디에도 없었고, 개혁파는 민심에 맞춰 개혁을 추진할 만한 역량이 없었다.
청일전쟁의 승리로 아시아 패권을 거머쥔 일본은 그 결과, 청나라가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안 서구 열강의 아시아 침탈도 함께 불렀다. 삼국간섭으로 상징화된 러시아의 남하는 이들에게 더욱 위협이었고, 그 와중 러시아와 줄을 이으려 하는 고종과 명성황후는 이들에게 눈에 가시였다.
3차 갑오개혁이 신호탄을 올리던 18958, 그보다 조금 앞선 723일 미우라공사는 조선을 뒤흔들 암수를 갖고 조선에 입국한다. 일국의 황후를 제거하는 여우사냥’, 을미사변이 바로 그것이다. 다음에 이를 살펴본다.

19편. 을미사변으로 이어집니다.


근대 17. '사람이 곧 하늘이다', <동학농민운동>

프로필

2018. 4. 19. 16:10

이웃추가
 

 

동학농민운동의 리더였던 전봉준 장군이 압송되는 장면. 죄인이나 가마 위에서 당당히 앞을 응시하는 '녹두장군' 전봉준 장군의 기개가 사진에서도 느껴 진다.

 

조선 엘리트들의 쿠데타인 갑신정변이 일어난 지 10여 년이 지난 1894. 이번에는 무능한 정부와 부패한 관리들까지 참아 넘기던 순박한 농민들이 대거 난을 일으킨다. 전라도 고부에서 시작한 이 아래로부터의 혁명은 곧 전주성까지 점령하지만, 외국의 개입을 두려워해 1차 해산한다.

명성황후와 조선의 왕실은 청나라에 도움을 청하고 청나라가 출병하자 갑신정변 때 체결한 텐진조약, 한 국가가 출병하면 다른 국가에 알려야 한다는 조항에 의거해 일본도 조선으로 침략의 군대를 보낸다. 일본은 청나라 군대를 대파하면서 이듬해까지 청일전쟁을 벌여 막대한 승리를 거두고, 동시에 조선 왕실을 협박해 군국기무처를 신설하고 흥선대원군을 허수아비 권력자로 복귀시켜 명분과 조선을 삼키겠다는 실리를 동시에 챙기려 한다.


농민들은 다시 일어났다. 원래는 동학교도에서 출발한 운동이었지만 어느새 동학교도가 아닌 일반 농민까지 대규모 합류했으며, 곡창지대 전라도의 불꽃은 이내 팔도 전역으로 확산되어 부패한 정권과 탐욕의 외세를 심판하려는 거센 목소리는 조선의 마지막 불꽃을 강하게 불태웠다.

 

이들은 싸워 본적이 없었다. 시키는 대로 열심히 일하고 봄에 돈을 빌려 가을에는 70~80%의 소작료를 뺏기면서도 순박하게 나라와 일을 천업으로 알고 살아온 이들이다. 이들도 외친다. ‘사람이 곧 하늘이다
조선 후기 최대의 민란으로 일본에 대한 강력한 배제와 부패한 정권을 심판하겠다는 명확한 기치를 들고 일어섰던 미완의 서민 혁명, ‘동학농민운동’(동학운동)으로 들어가 본다.
 

전라도에서 동학이 농민 혁명을 주도한 까닭
 

 

2차 봉기 동학군과 일본군의 대접전이었던 우금치 전투를 그린 그림. 동학군은 훈련도 되어 있지 않은 농민들도 압도적인 일본의 화력에 패배했다.
 

1884년 갑신정변부터 1894년 동학운동까지 10여 년의 기간은 조선 정치에서 뚜렷한 대규모 사건이 없었던 시기이다. 미국, 프랑스, 러시아 등 서구 열강과 조약을 맺고 이들이 속속 국내에 진출하면서 외세에 대한 두려움도 커졌지만, 억압받던 천주교의 자유로운 전파와 개신교 선교사들에 의한 근대 학문의 전파 등 근대 문명도 속속 눈을 뜨고 있었다.


왜 하필, 전라도에서 그것도 동학이 혁명을 주도했을까? 당시 기준으로 전라도가 곡창지대로 기름진 곡식이 가장 풍부하면서 그만큼 수탈이 많았고, 외세의 개입에 깊은 불만과 두려움을 지닌 농민들이 대거 서학에 대비되는 동학에 많은 매력을 느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동학의 핵심 사상은 인내천(人乃天), 곧 사람이 하늘이라는 평등 사상이다. 누구에게나 한울님이 깃들어 있다는 이 평등사상으로 신분에 상관없이 서로에 대한 존중을 토대로 하고 있으며, 이런 믿음이 곧 부패한 왕정과 외세의 침탈로 두려움이 커져가고 있던 민중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처음에는 전봉준 장군을 중심으로 한 동학교도들이 난을 주도했으나 곧 팔도 전역으로 급격히 확산되기에 이른 것이다.


1차 거병 후 18946, 홍계훈이 이끄는 정부군과 협상을 하고 동학군은 해산한다. 이후 전라도에서는 사실상 동학교도가 아니면 관아 통치가 어렵게 되는 등 전봉준과 손화중 등 동학의 핵심세력들이 깊이 관여해 지방 정치에 관여하기에 이르렀다.


이를 잔인하게 진압한 것이 바로 왕실에서 불러온 청과 일본, 그 중에서도 청일전쟁으로 청나라를 압박하면서 동시에 조선 왕실을 협박하고 군대를 진주시킨 일본이다. 따라서 처음 거사를 일으킬 때에는 부패한 국가에 대한 항의 성격이었다가 2차 때에는 일본에 맞서 싸우는 자주 독립의 성격으로 확장된다.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민중은 자신의 삶이 극적으로 위협받지 않는다면 일어나지 않는다. 전주 동학운동기념관 안에 있는 '후천개벽도'. 그림처럼 나무하고 농사짓고 한번 배불리 밥먹고 싶어하는 순박한 농민들이 일으킨 미완의 혁명이 바로 농학농민운동이다. 그들은 옳다.

동학운동의 직접적인 발단은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이었다. 농사를 짓기 위해 물을 가둬 두는 보에 대해 물세를 가혹하게 징수한 것은 물론, 이 보를 만드는 데에도 농민들을 무단으로 동원해 가뜩이나 어려운 살림에 피곤까지 더하게 했다. 아버지의 송덕비를 건립하자고 하는 한편, 수많은 항목을 붙여 갖가지 세금을 징발해 갔다.
살래야 살 수가 없었다. 한 기록에 의하면 당시 소작료 수준이 수확물의 70~80% 수준이라고 하니 이 정도로는 곡식을 추수했을 때 잠깐을 제외하고는 일년 내내 굶주림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여기에 각종 부역과 세금을 감당하고 보면 사실상 농민들은 이름만 남아 있을 뿐 사람으로 먹고 살기엔 어려웠다.


전라도는 곡창지대 때문에 임진왜란 때도 집중적인 수탈의 대상이 되었고, 바로 그 기름진 논밭 때문에 일제시대 때에도 수탈이 더 이어진 곳이다. 들은 노랗게 빛나지만, 그 황금 같은 곡식은 자신이 가져갈 수 없는 처절한 상대적 빈곤 지역이 바로 호남이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렇다고 경상도 황해도 평안도 등 다른 지역의 사정도 달랐을 것 같지 않다. 조선 후기 민란만 60여 차례 이상 일어났다고 하는 것을 보면, 거의 매년 여러 건의 민란이 소소하게 발생했다는 것인데, 눈 앞의 곡식을 두고 굶어 죽거나 싸우다 죽거나 어차피 죽는 것이라면 이왕 태어난 삶, 장렬히 인간의 핵심가치인 평등이라도 외치고 죽어야 사람 답게 죽지 않겠는가.


동학농민운동의 핵심 주역은 전봉준 장군이다. 일제가 동학운동을 빌미로 군대를 출병하고 청나라를 궤멸시키고 조정을 장악하는 동안 그는 호남지역과 곧 이어 영남 충청 지역까지 동학교도들과 헐벗은 농민들을 큰 세력으로 불러 일으키고 마지막까지 잘못된 정권과 외세에 항전을 그치지 않았다. 일본의 허수아비로 돌아온 흥선대원군이 그와 연락을 취해 실질적인 정권 장악을 꾀하려 했으나 동학이 이에 대해 호응한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흥선대원군의 일방적인 구애였던 것으로 보인다.


농민들을 규합해 1만여 명의 군사로 일본에 맞선 전봉준 장군은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수십 번의 전투 끝에 500여 명 밖에 남지 않으며 결국 항전의 최후를 맞이한다. 1894122일 체포된 그는 이듬해인 18952, 재판을 통해 교수형을 언도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매관매직과 사치 등으로 농민들을 일어나게 한 장본인인 조선 조정과 민씨 외척들은 농민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까지 끌어들이는 오판까지 자행했다. 그 결과, 일본이 들어와 역으로 경복궁까지 밀고 들어와서 군국기무처를 신설하며 흥선대원군의 복귀와 청일전쟁까지 일으키는 영향을 낳았다.


민씨 내각의 상당수는 나중에 친일파 세력으로 변절되어 자신의 사리사욕을 지속적으로 채우며 계속 탐욕의 시절을 이어 나간다. 동학농민운동의 진압을 위해 나섰던 이들도 마찬가지다. 당시 장흥 부사 이용태는 이완용 내각에서 학부대신을 지내고, 민란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던 고부군수 조병갑은 고종의 배려로 판사로 관직에 다시 복귀해 1898년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에게 사형을 언도하는 장본인이 된다.
이들은 계속 탐욕과 변절의 역사를 이어 나갔다. 이에 맞선 숱한 농민들과 개혁 세력의 움직임은 암울한 시대에 기댈 곳 없이, 몰락해가는 왕조와 시시각각 다가오는 일제의 탐욕의 그림자에 가진 것 없이 날것으로 바로 마주 설 수밖에 없었다.


민중의 파랑새로 높이 날아오르고자 했던 녹두장군은 아쉽게도 1년만에 지고 말았다. 녹두꽃은 떨어지고 그를 따라가려던 청포장수들은 울고 지나갔다. 조선은 패망을 향해 급속도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일제의 칼날이 겨눈 곳, 그곳은 경복궁 깊은 곳 명성황후였다. 을미사변으로 가기까지 갑오경장과 청일전쟁, 그 현장에 대해 다음에 알아본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간다

- 동학농민운동 전봉준 장군을
가리키는 듯한 민요로 전국에서 전래
 

 

서울 종로구 운현동 맞은 편에 있는 천도교 중앙대교당. 의암 손병희 선생께서 1918년에 시작해 1921년 완공했다. 중간에 3.1운동을 위한 자금을 모으느라 완성이 늦어졌다.

드라마 '녹두꽃' 마지막회를 보고...

프로필

2019. 7. 16. 11:12

 이웃추가

의병대를 진두지휘하는 대장 백이강은

일본군을 공격하기 위해 의병대 대원들과 매복해있다

공격 싸인을 주기 전에 그가 의병대를 향해 외친다

"우리가 누구~?!" "의병~~"

"사람은 머~?!" "하늘~~"

선봉에 선 백이강은 서릿발같은 용호의 눈빛으로

우뢰와 같은 함성을 지르며 적진을 향해 돌격한다

"자, 가자~~~"

이것이 마지막 엔딩장면이다.

드라마 '녹두꽃'

48부작 대장정을 무사히, 아니 훌륭하게 마치고

드디어 끝이 났다.

끝까지 드라마 '녹두꽃'은 멋졌다

대하드라마라는 길고긴 분량 속에서도

스토리텔링은 탄탄했고, 인물들도 중심을 잃지 않았으며

배우들의 연기는 단연 으뜸으로 빛났다

조정석이라는 배우는 완벽하게 백이강이었다.

우금티 전투에서 마지막까지 싸우자고

열변을 토하는 장면이나.

처형길에 오른 녹두장군을 마지막 배웅하면서

피눈물로 결의에 찬 맹세를 하는 장면이나.

동비해서 얻은 것이 뭐냐고 묻는 부친 백가를 향해

"사람으로 살아본 사람만이 아는 것"이라고 답변하면서

단단하게 빛나던 눈빛도.

감옥으로 찾아온 이현과 등지고 앉아

마지막 대화를 나눌 때의 냉소와 질시의 표정도.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의병대 선봉에 서서 돌진을

외칠 때의 칼날같이 단호하고 매서운 눈빛 연기까지.

조정석은 없고, 백이강만 있었다.

녹두장군도 마찬가지.

송객주가 마지막으로 사진을 찍는 장면에서는

실제 전봉준장군과 싱크로율 백퍼일 정도로

표정이나 눈빛이 거의 흡사했다

"녹두꽃은 이미 수없이 보았다

삼례에서 우금티에서, 또 지금 내 눈앞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배웅하는 이강에게 그는

또 다른 수많은 녹두꽃들이 되어 싸워주길 당부했다.

"나는 속지 않았고, 자네는 속았어.

문명의 탈을 쓴 야만의 일본에게.

진짜 속았던, 속은 척을 했던 건 간에 어느쪽이든

자네가 개자식이라는 사실은 변함없을 걸세."

옥사로 찾아온 이현을 조소하면서 냉엄하게 한방 날린 대사.

"부탁이 있소. 내 귀를 좀 씻어주오.

가는 길에 개소리를 너무 들어 더러우니.."

처형 직전 마지막 순간의 대사까지 너무 멋졌다..ㅎ

장례길도 모시게 되어 영광이라는 최경선대장도

조연 아닌, 조연으로 그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내 눈에 멋졌으면, 그걸로 게임 끝이다..ㅎㅎ

다음 이미지

이현에 의해 최후를 맞는 황진사도 열연했다.

양반이라는 기득권을 놓지 못하고

내적 갈등을 그리도 열심히 하더니,

의병대 포로가 되어 이현과 피할 수 없는 재회를 하는 자리에서

살아서는 이현을 용서할 수 없고, 사과도 하지 않겠다며

끝까지 이현에게 굴복하지 않는다.

"이 나라를 망친 것은 양반인 나와

모리배인 너같은 놈들이다"

그나마 늦게라도 깨달았으나

말 그대로 너무 늦었다

이현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었던 건 사실이니까.

황진사와의 마지막 대면에서 이현은 절규한다

"나를 이렇게 만든 건, 당신이야~!!"

그래서 백이현이 모자란 놈이다.

본인이 못난 걸, 남 탓이나 하고 있으니.

황진사로 인해 상처를 받았다는 건 백번 양보해서 그렇다 치자.

그러나 이현의, 신분차별에 대한 부당함과 양반에 대한 분노는

얄팍하게도 사적인 복수심으로 삐딱하게 치닫고 만다

누구의 탓도 아닌, 본인이 자초한 일이다.

그는 스스로 도채비가 되어 무고한 창의군들을 학살했다.

문명을 빌미삼아 오니라는 일본의 앞잡이가 되었고

그로 인해 죄없는 민초들은 수없이 죽어갔고 우금티전투는 완패했다.

도채비도, 오니도, 결국은 그가 선택한 제 인생이니

결국 지 인생, 스스로 책임지는 것이 당연치 아니한가.

그러나 이현은 끝까지 못났다.

스스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면서 아버지 백가에게 말했다.

아버지께 드리는 선물이라고.

죽으면서는 아버지 백가를 비꼬고 원망한 것이다.

황진사는 자기 인생 망쳤고, 아버지는 지 목숨 끊게 만들었다고.

ㅉㅉㅉ....

남 탓하지 말지어다.

지 인생 지가 사는 것이고, 결국 그렇게밖에 살지 못한 건

지가 그만큼밖에 안되는 놈이기 때문이다.

'유약한 인텔리 멘탈'이라는 변명도 구차하다

그의 죽음에 동정도 아까운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다음 이미지

백가네의 몰락은 인과응보, 사필귀정이다.

"세상은 거시기, 도채비로 살아야 되는 것이여"

"동생을 위해 자결을 혀. 형 노릇 지대로 하고 가"

아무리 고쳐 들어도, 아비가 자식한테 할 말은 아니다.

아니, 사람이 사람한테 할 말은 더더욱 아니다.

백가가 누렸던 짐승만도 못한 삶의 귀결은

결국 정승아버지를 만들어주리라 기대했던 아들의 자살이었다.

그것도 바로 제 눈 보는 앞에서.

그는 과연 아들을 자식으로 사랑했을까.

한놈은 정승아버지 만들어줄 놈이고

한놈은 그런 동생을 위해 자결해 줄 놈이고.

백가에게 있어 이현과 이강은 자식이 아니라, 자식이기 전에,

정승아버지라는 위대한 꿈을 이루기 위한 도구들이 아니었을까.

다음 이미지

이 드라마의 백미이자, 꽃.

바로 송객주와 명심아씨이다.

송객주는 워낙에 당찬 인물로 그려졌고,

끝까지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멋진 모습을 보여줬다.

주목할 인물은 명심아씨이다.

양반댁 규수로, 참해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생각과 행동에 주관이 뚜렷한 모습은 살짝 의외였다.

그녀는 황진사의 극심한 반대에도 이현에 대한 사랑을 끝까지 지킨다.

"기다리겠습니다. 언제 어디서건

도련님이 오시는 길이라면

거기, 서있겠습니다"

용감하게 사랑을 지킨 명심아씨를 먼저 배신한 건 이현이다.

도채비 근성을 들켜버린 이현은 뒤도 안돌아보고 명심을 떠나버린다.

그리고 훗날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돌아와서

마지막 한 올 지푸라기를 잡듯 명심을 찾아온다

"당신만큼은 날 달리 대해줄 줄 알았는데..."

그러나 변절한 이현 앞에서 명심은 흔들리지 않는다.

"고통스러워한 것은 백이현이지, 당신이 아니오.

내가 사랑했던 백이현은 죽었소.

그는 아름다운 사람이었으니까"

이 멋진 두 여성은 이후에도

각자의 자리에서 의병대가 된다

송객주는 돈을 버는 의병대가 되고

명심아씨는 학당에서 교육하는 의병대가 된다

다음 이미지

비록 녹두장군은 가고 없지만

그가 뿌린 수천의 녹두꽃들은 지지 않고 피어나

일제에 항거하는 독립투사들이 된다

그 선봉에 백이강이 서있다.

"우리는 비록 패했지만, 틀리지는 않았다"

그것을 보여준 것이, 저 백이강이라는 녹두꽃이었다.

수천이 모여 이룬 녹두꽃들은

인내천의 평등세상을 꿈꾸고 열망했던

민초들의 분노였고 함성이었고 절규였다.

다음 이미지

"전쟁은 증오가 만들지만, 혁명은 사람이 만든다"

녹두장군의 말대로, 동학은 이미 혁명이었다.

그리고 지금,

더이상은 전설로 남은 미완의 혁명이 아니다.

대한독립투쟁으로 이어졌고, 419혁명으로 이어졌고

518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으며,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졌다

2016년 박근혜탄핵촛불로 타올라

2017년 문재인대통령 당선까지

인즉천의 세상을 꿈꾸는 민초들의 염원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동학 혁명은 실패로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도 진행중이며 언젠가는 완성될 그날까지

숭고한 그 정신을 계승해 나가야할

우리 모두의 숙명적인 과제인 것이다.

게다가 요즘 불붙은 일본불매운동!

이 역시 동학 정신의 일환이다.

내 자존심이 곧 내 나라 자존심이다.

내가 지키고 싸워야 한다!!!

마지막으로.

처형당하는 녹두장군 마지막 순간에

이 노래가 흘러나와서 깜짝 놀랐다.

대학 때 민중가요로 불리던 노래였는데

공중파 드라마에서 BGM으로 듣게 되다니...

알기로는, 김남주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노래로 알고 있다

지난 13일 조국수석 또한 녹두꽃 드라마를 보는 중에

이 노래가 나와서 페북에 올렸다가

또 한번 씨끌벅적 잇슈가 되었던

그 죽창가...

확실히 세상은 변했다.

역사는 더디지만 앞으로 가게 되어 있다.

이 노래를 기가 막히게 부르던 선배 생각도 나고

어깨너머로 주섬주섬 따라 불렀던 생각도 나길래

가사를 옮겨 적어보았다

죽창가 - 김남주

이 두메는 날라와 더불어

꽃이 되자 하네 꽃이

피어 눈물로 고여 발등에서 갈라진

녹두꽃이 되자 하네

이 산골은 날라와 더불어

새가 되자 하네 새가

아랫녘 웃녘에서 울어예는

파랑새가 되자 하네

이 들판은 날라와 더불어

불이 되자 하네 불이

타는 들녘 어둠을 사르는

들불이 되자 하네

되자 하네 되고자 하네

다시 한번 이 고을은

반란이 되자 하네~ 반란이

청송녹죽 가슴에 꽂히는

죽창이 되자 하네

되자 하네 되고자 하네

다시 한번 이 고을은 반란이 되자 하네

청송녹죽 가슴에 꽂히는 죽창이 되자 하네

청송녹죽 가슴에 꽂히는 죽창이 되자 하네

안치환의 '죽창가' 가사 원문

다음 이미지

드라마 '녹두꽃'.

근래 들어 보기드문 수작이었다.

보는 내내 같이 울고 같이 웃고

슬프면서도 또 기쁘면서

녹두꽃과 함께 뜨겁게 행복했다.

........

♡♡♡♡♡♡


 여의도 국회의사당.
▲  여의도 국회의사당.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국회의원 '월급'이 이상합니다. 우선 이름이 여러 개입니다. 누구는 세비, 누구는 보수라고도 합니다. 부르는 이름도 다양한 국회의원이 받는 월급, 이것의 진짜 이름은 '수당'입니다. 왜냐하면 '국회의원 수당 등에 관한 법률(아래 국회의원수당법)'에 그렇게 정해져 있기 때문이죠.

이름은 잘 모르더라도, 국회의원 수당은 논란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해마다 '셀프 인상', 상대적으로 높은 연봉 등이 언론에 회자되곤 합니다. 사실 국회의원이 어떤 수당을 얼마나 받고 있는지 일반 국민들은 제대로 알기조차 쉽지 않습니다.

이름도 헷갈리는 국회의원 월급... 진짜 이름은 '수당'

이름조차 아는 사람만 아는 국회의원 '수당', 참여연대가 국회사무처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21대 국회의원이 받는 수당의 종류와 월 평균액을 살펴봤습니다. 그런데, 역시나 뭔가 이상합니다.

 
국회의원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일까요? 법을 만들거나 고치고, 회의에 참석해 법을 심사하고 논의하는 것이 국회의원 역할의 기본 중 기본일 겁니다. 그러나 지금도 국회의원들은 입법활동에 쓰라고 '입법활동비'를, 회의에 참석했다고 '특별활동비'를 별도 수당으로 지급받고 있습니다. 

상임위원회 회의, 본회의에 참석하면 주는 특별활동비 또한 이상한 관행에 따라 지급되고 있었습니다. 법안을 심사·논의하는 상임위원회 회의나 최종적으로 법안 가결 여부를 결정하는 본회의는 회기 중에만 열립니다. 회기 중에 회의가 열리지 않으면, 국회의원 전원이 회의에 참석한 것으로 간주해 하루 3만1360원씩 지급합니다. 아무리 봐도 이상합니다.

국민 월급에서도 떼가는 세금, 국회의원 수당에서는 떼가지 않는다?

ad
심지어 별도 수당으로 지급되는 입법활동비와 특별활동비는 별다른 증빙서류 첨부 없이 고정적으로 지급되는 수당입니다. 입법활동비와 특별활동비가 매월 고정적으로, 별도의 증빙서류 필요 없이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주는 수당이라면, 별도의 경비가 아니라 기본 수당으로 처리해 과세하는 것이 상식적일 것입니다. 

그러나 국회사무처는 국회의원 급여 중 입법활동비와 특별활동비 항목이, 근로 대가에 따른 소득이 아니라 '업무에 대한 경비'라며 이를 비과세(과세 않음)하는 게 정당하다고 합니다. 국회의원 수당도 국민이 받는 월급처럼 과세하는 게 공평한 게 아닐까요? 
참으로 이상합니다. 

구속돼 일할 수 없는 국회의원에게도 보수를 준다?

감옥 또는 교도소에 있는 국회의원이 직무를 수행할 수 있을까요? 아마 아니겠죠. 그러나 직무수행이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국회의원이 직무상 상해를 입거나 사망한 경우가 아니라면 수당을 계속 지급받습니다. 국회의원수당법에는 다른 지급 불가 사유가 명시돼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관련 기사: 
구속된 최경환 의원에게 '꼬박꼬박' 수당 지급? 왜냐하면).

2019년 기준액으로 계산할 때, 국회의원은 기본 수당으로 670여만 원, 입법활동비 320여만 원을 합해 매월 최소 990여만 원을 지급받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를 기준으로 추산해 볼 때, 2018년 1월 4일 구속돼 2019년 7월 11일 의원직을 상실한 최경환 전 의원은 약 18개월 구속기간 동안 약 1억 8000여만 원을 수령했을 것으로 추산됩니다. 물론… 공직선거법, 정치자금법,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등 혐의로 구속기소된 정정순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최소 1000만 원은 지급받고 있겠죠?
   
 국회사무처 정보공개청구에 따른 정정순 민주당 의원의 수당(월급) 수령 예상액.
▲  국회사무처 정보공개청구에 따른 정정순 민주당 의원의 수당(월급) 수령 예상액.
ⓒ 참여연대

관련사진보기


법관 보수는 국회의원이, 국회의원 보수도 국회의원이 인상한다?

국회의원 보수는 '관행'적으로 차관급에 준하여 지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차관에 준하여 지급하여야 한다는 명문화된 근거 규정이 없습니다. 법관의 경우, '법관의 보수에 관한 법률'에 매월 정기적, 일률적으로 지급받는 보수액을 명시하고 인상여부를 국회가 결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회의원의 수당은 '국회의원 수당 등에 관한 법률'이 '국회의원 수당 등에 관한 규칙'에 위임하고, 이 규칙은 다시 한 번 '국회의원 수당 등 지급에 관한 규정'에 위임하여 지급하고 있습니다. 국회의원 스스로 '셀프 인상'하면서도 법률도, 규칙도 아닌 규정에 위임해 '꼼수 인상'을 해오던 것이라 볼 수 있는 겁니다.


국회의원에게 지급하는 기본수당과 입법활동비는 국회의원 직무이행을 위한 대가로 지급하는 것이며, 직무이행을 하지 못하는 분명한 사유가 있을 때는 감액하거나 지급하지 않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국회의원의 직무이행이 불가능한 분명한 사유가 있는 경우, 지급하지 않도록 관련법을 시급히 개정해야 할 것입니다.

2021년에도 똑같이? 법 개정 의지 물으니 '있다' 답한 의원, 28명 중 셋뿐 

참여연대는 법적 근거도 미비하고 이상한 국회의원수당법을 재정비할 의지가 있는지에 대해 국회 운영위원회 소속 28명 위원들에게 물어봤습니다. 그중 개정에 동의하는 의원은 단 3명, 즉 더불어민주당의 김원이
(전남 목포시)·이용빈 의원(광주 광산구갑) 그리고 정의당의 강은미 의원(비례대표)뿐이었습니다.
    
'꼼수인상, 중복지급, 면세특혜' 등 논란의 화근인 국회의원 수당은, 지금이야말로 근본적 제도 개선이 시급한 상황입니다. 사실 직접 보수를 받고 있는 국회의원들은 무엇이 문제인지 아마 알고 있을 것도 같습니다. '이상한 수당'을 직접 수령하는 국회의원 스스로가, 이를 고치기 위해 국회의원수당법을 전면 개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덧붙이는 말. 2021년 예산안은 이미 통과되었습니다. 이제 국회 운영위원회가 국회의원 수당에 대해 어떤 결정을 할지, 여러분도 관심있게 함께 지켜봐주세요!

☞<참여연대>가 조사해 발표한 국회개혁리포트 '
국회의원 수당의 비밀' 보기

덧붙이는 글 | 본 글은 참여연대 홈페이지와 네이버 포스트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댓글6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3,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천주교 사제·수도자 4000여명, '검찰개혁' 지지 선언

오세중 기자 입력 2020.12.07. 13:11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7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천주교 사제·수도자 3951인도 검찰개혁 지지에 동참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날 이들은 기자회견을 통해 "지난 1일 검찰개혁을 촉구하는 종교계 100인 선언을 지지한다"며 "검찰은 오늘 이 순간까지 자신이 걸어온 시간을 돌아보면서 참회하길 바란다"고 호소했다. /사진=뉴스1


천주교 사제·수도자 4000여명이 검찰개혁 지지 동참에 나섰다. 이는 천주교·개신교·원불교·불교로 구성된 종교계 100인이 지난 1일 검찰개혁 지지 성명 발표에 대한 추가적인 지지 의사를 내비친 것이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7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지난 1일 검찰개혁을 촉구하는 종교계 100인 선언을 지지한다"며 "검찰은 오늘 이 순간까지 자신이 걸어온 시간을 돌아보면서 참회하길 바란다"고 호소했다.

이들은 "잠잠히 고요하게 지내야 할 사제와 수도자들이 이렇게 나선 것은 숱한 희생과 헌신 끝에 이룩한 우리의 민주주의가 또다시 갈림길에 놓였기 때문"이라며 "많은 사람들이 '검찰개혁'이라는 네 글자에 주목하는 이유는 지금이 아니면 영영 어려울 것이라는 위기의식 때문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누구라도 가졌던 것을 내놓기는 쉽지 않고, 하물며 독점적으로 행사하던 권한들을 포기하는 일은 더욱 그럴 것"이라며 "하지만 매미 같은 미물도 때가 되면 허물을 벗는다. 과거의 허물을 벗는 일을 겁낼 필요가 없다"고 강조했다.

또, 사제단은 "법무부 장관이 제기한 (윤석열 검찰총장에 대한) 직무배제의 여섯 가지 이유에서 여실히 드러났지만, 남의 허물에 대해서는 티끌 같은 일도 사납게 따지면서 자신에게는 한없이 관대해지는 검찰총장의 이중적 태도는 검찰의 고질적 악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고도 지적했다.

아울러 "특권층의 비리와 범죄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눈감아 주지만 자신의 이해와 맞지 않으면 어떤 상대라도, 그것이 국민이 선출한 최고 권력이라도 거침없이 올가미를 들고 달려드는 통제 불능의 폭력성을 언제까지나 참아줄 수 없다"고 비판했다.

특히 사법부의 책임론도 거론했다.

이들은 "'재판관 사찰'이 만천하에 드러났는데도 대법원장을 비롯한 사법부의 구성원들은 뚜렷한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있다"며 "재판관에 대한 사찰과 정보정치를 업무상의 관행이라 강변해도 그저 묵묵부답하는 대목에서는 불안과 의구심을 떨치기 어렵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편, 이날 성명에는 김희중 대주교 등 대주교와 주교 6명과 사제 926명 등 모두 3951명이 참여했다.

오세중 기자 danoh@mt.co.kr


사료로 본 한국사


http://contents.history.go.kr/front/hm/list.do?treeId=010701

 

 아마존 한국 진출 드디어 확정 l 아마존 국내 진출이 소비자들에게 대박인 이유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