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맞춤법 같은 걸로 매겨지는 품격이란 어차피 거품 같은 것이다
글이든, 사람이든…맞춤법을 잘 지킨다는 것이 말해줄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이 ‘활자’에 익숙하다는 것, 활자의 옳고 그름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있고, 활자 소통력이 높다는 것 정도가 아닐까
맞춤법이 갖는 위상은 딱 거기까지가 적당한 것 같다
벌써 9년 전 일이다. 당시 나는 A라는 한 뮤지션에게 완전히 빠져있었다. 그의 노래, 연주, 작사, 작곡, 편곡, 인터뷰에서 내비치는 세상을 향한 시선, 나의 재치를 봐달라고 아우성치지 않으면서 맥락 속에 은근하게 스미는 특유의 유머감각, 동료들과 함께 있을 때 언뜻언뜻 드러나는 속 깊은 언행 등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적정선에 모두 들어맞는 사람이었다. 지금은 “A 좋아해?”라고 묻기보다는 “혹시 A 알아?”라고 물어야 하는, 인기 이전에 인지도를 먼저 확인해야 하는 사람이지만, 당시에는 그래도 소소하게 마니아층이 있었고 나도 그중 하나였다.
그런 그가 어느 날 덜컥 SNS 계정을 만들었다. 그의 캐릭터를 생각해보면 생전 그런 건 만들지 않을 것 같았기에 조금 놀라우면서 약간 떨떠름한 기분으로 팔로 버튼을 눌렀던 것 같다. 원래부터 하고 있었으면 모를까, 나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이 새로 SNS를 시작하는 걸 썩 반기지만은 않는다. SNS에 실수라도 할까봐 걱정되어서도 그렇지만, 모르고 싶은, 모르기에 이 팬심이 가능할지도 모를 어떤 점을 굳이 알게 될까 봐 두려워서도 그럴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팬심을 시험받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일찍, 뜻밖의 곳에서 일어났다. 팔로한 다음날 아침, 그의 계정을 들어간 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복잡한 기분에 휩싸였다. 달랑 하나 있던 그의 첫 인사글 위로 간밤에 그가 단독으로, 혹은 누군가에게 답으로 쓴 글들이 마흔개쯤 업데이트되어 있었는데, 그랬는데, 거기까진 좋았는데, 다 좋고 좋았고 좋아야 했는데… 그의 맞춤법이 정말로, 정말로 엉망이었다. 그냥 어쩌다 틀리는 게 아니었다. 나름 확고한 법칙을 가지고 틀리는 곳을 늘 틀리는 일관성을 갖고 있었다. 그 후로도 그의 근황과 생각을 그때그때 알고 싶어 그의 계정에 하루에 수십 번은 들어가곤 했는데 볼 때마다 심란한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가 요즘 인터넷 게시판을 돌아다니는 ‘맞춤법 파괴 레전드’ 같은 황당무계한 오류를 범하는 건 아니었다. 단지 그는 사람들에게 가끔씩 출산을 종용했고(빨리 낳으세요!), 고추장찌개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가만히 끓게 놔두지 못하고 자꾸 자기 옆에 앉혔고(방금 찌개 앉혔다!), 저러다 무릎이라도 나가는 게 아닌지 걱정될 정도로 안 써도 될 곳에 무리해서 무릎을 썼다(위험을 무릎썼습니다). 그는 쌍기역을 지나치게 사랑했지만(청소할꺼야, 다시 올께), 쌍시옷은 또 싫어했고(한 시간 기다렷다, 기억낫다), 무엇보다 전쟁을 가장 싫어했던 것인지 ‘ㅝ’를 절대 쓰지 않았다(내일 갖다죠, 전화해죠). ‘귀저기’ 같은, 언뜻 보면 뭐가 이상한지 눈치 못 채고 지나가기 쉬운 참신한 단어를 번번이 쓰기도 했다.
어느 새벽, 그가 ‘옌날부터 알고 지낸 음악하는 친구들과 많은 예기를 나누고 왔다’던 그날, 나는 뭔가 한계에 도달한 것 같은 기분에 석 달 만에 처음으로 나의 SNS에 고충을 털어놓았다. 굳건할 줄 알았던 애정이 그의 글이 하나 올라올 때마다 뚝뚝 줄어가는 슬픔에 관한 글이었다. 검색에 걸릴까봐 이름은 언급하지 않았지만 대부분이 누구인지 알아챘다. 안 그래도 가끔씩 그의 글이 RT되어 들어올 때마다 ‘좀 깼다’거나, 너는 그게 괜찮은지 궁금했다거나, 매니저가 SNS 관리를 좀 해줘야 할 것 같다는 공감의 답들이 오고갈 때쯤, 이런 글이 하나 올라왔다. “가정형편도 어려운 와중에 알바하는 틈틈이 어떻게든 자기가 하고 싶은 음악 하느라 다른 걸 돌아볼 시간도 없었을 텐데 그깟 맞춤법 좀 엉망이면 어떻다고. 그걸 뭐라고 하는 사람은 참….”
저 뒤에 이어 붙은 말이 ‘같잖다’였는지, ‘한심하다’였는지, ‘천박하다’였는지 기억이 확실하지 않다. 무슨 말이었어도 상관없다. 뭐가 됐든 다 맞는 말이니까. 어쩌면 저기서 끝이고 아무 말도 따라붙지 않았는데 내 머릿속에서 지레 만들어 붙였을 수도 있다. 다 맞는 말이니까. 나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나를 두고 한 말이 거의 확실한 저 글을 보는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A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당연히 알고 있었다. 내가 그를 그토록 좋아했던 이유도 힘든 상황에서 시간을 쪼개고 마음을 추슬러서 끝까지 음악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럼에도 ‘고생과 노오력 서사’로 자신을 치장하지도 않고, 경쟁이나 인기에 연연하지도 않고, 그런 데에 신경 쓰는 시간조차 아깝다는 듯이 그저 노래하고 곡 쓰고 연주하는 걸 진심으로 즐기는 그의 에너지가 눈부셨기 때문이다. 갖고 있는 정보들로 그의 인생 타임라인을 대충만 그려봐도 그는 평생 음악 할 시간도 부족한 사람이었다. 생존을 위해 돈 버는 시간을 뺀 나머지 시간들은 그에게 결코 충분치 않았을 것이다. 그 사실이 그의 맞춤법에 얼마나 지배적인 영향을 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이 두 가지를 연결해볼 상상력이 아예 없었던 것이다.
그날 나는 그동안 내가 기본소양이라고 여겨왔던 것들, 사회가 기본소양이라고 설정해 놓은 것을 무비판적으로 가져다 쓰는 것들에 관해 생각했다. 그런 태도가 때로 무심코 지워버리는 것에 관해서도 생각했다. 이를테면 많은 사람들이 기본소양 중에서도 기본예절이라는 이름하에 ‘TPO에 맞는 옷’ 같은 걸 상정해놓고 그걸 지키는지 여부에 따라 사람의 기본을 판단한다. 그런데 TPO에 맞는 옷이란 대체 누가 정한 걸까? 모르긴 해도 TPO에 맞는 옷을 이미 갖고 있거나 구입할 수 있는 여건이 되는 사람들이 정했을 것이다. 적어도 정장을 구비할 여력이 없어 누군가의 결혼식 때마다 전화를 돌려 정장 빌리기에 급급한 사람들이 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맞춤법 또한 많은 사람들이 현대인이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교양의 마지노선으로 여기는 것 중 하나이다. 작곡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엑셀을 다루는 건 특정한 사람들이 하는 것이지만, 문자 메시지 하나일지라도 글을 쓰고 읽고 말하는 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이기에, 그 안에서 작동하는 사회적 약속인 맞춤법을 기본소양으로 보는 건 꽤 합리적일 것이다.
하지만 때로 이 ‘기본’이라는 지나치게 확고한 단어는, ‘기본’ 바깥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저마다 다른 맥락과 상황을 쉽게 지우기도 한다. A와 나는 성장한 과정도, 몰두하는 대상도 다른데, A의 맞춤법을 보며 나는 ‘왜 맞춤법을 모를까?’를 따져볼 생각조차 안 했다. 왜? 기본이니까. 기본이라는 것은 ‘이유불문’하고 어느 정도 ‘당연히’ 갖춰야 하는 거니까. 그래서 ‘기본’이라고 하는 거니까. 기본소양이라는 게 때 되면 어딘가에서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나이를 먹듯 세월 따라 저절로 생기는 게 아닌데, 그것을 배우거나 갖추기 위해 필요한 시간과 에너지와 환경이 확보되어야 하는 건데, 그런 확보가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기본’으로서 누군가를 판단할 때 배제되기 쉬운 불리한 어떤 입장들에 대해 잊고 있었다. 설사 같은 조건이라고 해도 사람마다 적성과 성향, 강약점은 얼마나 다른가.
게다가 ‘기본’이라는 단어에는 기본에 미치지 못하는 그 한 부분을 그 사람의 전체로 확장해버리는 힘이 있다. 한 사람에 대한 호감을 좌우할 정도로. 작곡을 못하는 건 비웃음의 대상이 아니지만 맞춤법을 모르는 건 당장 인터넷 게시판 댓글창에서부터 비웃음의 대상이 되는데, 대개 그런 글 아래에는 ‘격 떨어진다’ ‘수준 알 만하다’, 심하게는 ‘지능이 낮다’라는 비아냥들이 댓글로 달리곤 했다. ‘맞춤법 잘 모르는 사람은 절대 사귀지 말라’는 요지의 단정적인 조언들은 또 어떤가. 이 조언들을 도출했을 ‘맞춤법이 엉망이다 → 글이나 책을 안 읽을 것이다 → 상식도 이해력도 떨어지고 어리석을 것이다’라는 연산이 어찌나 강하게 뇌리에 박혔는지, 당장 A처럼 맞춤법을 빼놓고는 모든 점이 나보다 훌륭한 사람을 눈앞에 두고도 오히려 역산으로 그를 평가하려 들었다.
심지어 나에게는 전적들마저 있었다. 고백하건대 맞춤법으로 누군가를 판단한 게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네’가 들어갈 자리에 ‘내’를 쓰고(그랬내요, 몰랐내요) 겹받침이 자주 틀리는 거래처 사람을 두고, 만나보기도 전에 ‘분명 일을 못할 것이다’라고 단정 지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겪은 그 누구보다도 유능하고 명민했으며, 서로 술친구가 된 지 10년이 넘은 지금, 살면서 누군가의 조언이 필요할 때 내가 찾는 몇 안되는 사람 중 하나이다. 단지 그는 고등학생이 되면서부터 글을 읽고 쓸 일이 그리 많지 않은 업종에 뛰어들었고, 다른 데 눈 돌리기에는 새로운 기술을 익히고 응용하기만도 벅찼고, 활자에 특별히 관심이 있거나 민감하지 않았을 뿐이다.
맞춤법을 잘 지키는 것이 말해줄 수 있는 건 뭘까? 비아냥 댓글들 말마따나 한 사람의 품격, 수준, 지능? 맞춤법을 잘 모르는 사람보다는 책을 많이 읽었고 그래서 더 박식할 확률이 높다는 것? 그렇게만 생각하기에는 완벽한 맞춤법과 문장으로 이루어진 글을 쓰는 사람의 빈약한 사유를, 다독이나 박식이 딱히 지혜나 어떤 품격으로 연결되지 않는 경우를 우리는 이미 많이 목격했다(지식인이라고 추앙받는 일부 사람들의 언행이나 하다못해 국회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지식의 양과 지식을 지혜로 응용하는 능력은 엄연히 다르고, 아는 것이 많은 것과 제대로 아는 것, 아는 것을 실천하는 것 역시 전혀 다르다. 맞춤법을 잘 지킨다는 것이 말해줄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이 ‘활자’에 익숙하다는 것, 활자의 옳고 그름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있고, 활자 소통력이 높다는 것 정도가 아닐까. 맞춤법이 갖는 위상은 딱 거기까지가 적당한 것 같다.
그렇다면 맞춤법이 엉망인 A의(A가 아니더라도 잘 알지 못하는 타인의) 글은 어떻게 봐야 할까? 그냥 맞춤법이 엉망인 글이라고 보면 된다. 거기서 끝. 저 사람은 키가 168㎝구나 같은 느낌으로. 실망할 것도 없고 비아냥댈 것도 없고 안 보이는 부분까지 판단할 것도 없이. 틀린 맞춤법을 쓰는 저 사람이 활자로 표현하는 데에 능숙하지 못해서 그렇지 암묵지를 어느 정도 갖고 있는지, 어떤 품격을 지니고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지능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도 않다). 다른 근거가 함께한다면 모를까 일단 맞춤법 하나로 누군가의 품격을 매길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야말로 어떤 룰 안에서는 기본 미달의 사람이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9년 전의 나는 (지금도 상당부분 그렇지만) 정말이지 같잖고 한심했고 오만했다.
이런 내가 장래에 맞춤법 책을 쓸 운명을 지닌 사람과 결혼하게 된 것은, 그래서 그 책의 제목을 같이 정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은 정말 얄궂은 일이었다. 제목을 놓고 이곳저곳에서 여러 의견이 나왔는데 우리는 그중 ‘품격’이 들어가는 제목들은 어김없이 탈락시켰다. 이를테면 ‘사람의 품격을 높여주는 맞춤법’ ‘글의 품격을 완성하는 맞춤법’ 같은 것들. 물론 맞춤법을 잘 지키면 그렇게 ‘보이는’ 효과가 있다는 걸 알지만, 실제로 맞춤법으로 사람이나 글의 품격을 평가하는 시선도 있지만, 그것이 당연한 사실인 양 긍정하는 제목은 절대 쓰고 싶지 않았다(최종적으로 정해진 제목은 <책 쓰자면 맞춤법>이지만 사실 나는 이 제목도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맞춤법 같은 걸로 매겨지는 품격이란 어차피 거품 같은 것이다. 글이든, 사람이든.
그 시절 나에게 쓴소리를 했던 그분은 여전히 나의 SNS 친구이다. 덕분에 언젠가 어떤 대화를 계기로 그분께 깊은 감사를 전할 수 있어서 좋았다. 한편 A는 1년도 채 못 되어 SNS에 뜸해지더니 몇 달 후에 결국 계정을 없앴다. 그래서 지금은 그의 맞춤법이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 까짓거와 상관없이 그는 여전히 멋지다.
▶필자 김혼비
퇴근하는 것이 너무 좋아서 출근하는 것을 멈추지 못하는 직장인이자 틈틈이 이런저런 글을 쓰는 에세이스트이다. 축구와 술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2018년에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를, 2019년에 <아무튼 술>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