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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와 불교


워싱턴 한인 천주교회

조규혁 마태오



종교적 신념은 올바른 것일 때는 좋으나 만약 잘못된 것일 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해악을 인간에게 끼친다. 자기가 믿는 종교만이 진리요 다른 종교는 모두 사교이고, 그것을 믿는 사람들을 모두 이교도라고 단정해 버리는 편협성은 우리 민족의 단일성, 정통성조차 파괴해 버리기 쉬운 위험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국민적 위화감(違和感)과 이질감(異質感)은 특히 어떤 종교의 교리에 지나치게 보수적으로 집착하는데서 빚어진다. 우리 나라의 가장 큰 종교집단은 역시 불교와 천주교(개신교 포함)일 것이다.


불교와 천주교는 유심론(唯心論)과 유신론(有神論), 범신적(汎神的) 우주관(宇宙觀)과 유일신적(唯一神的) 우주관(宇宙觀), 윤회생사(輪廻生死)의 긍정과 부정 등 여러모로 그 교리가 대립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천주교와 불교는 서로 미신시하기 쉽다. 그러나 과연 천주교와 불교가 그토록 상반적인 교리를 가지고 있는 종교일까? 물론, 내가 신학이나 종교학을 전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 있게 말하기엔 아직 조심스러우나 불교와 천주교가 서로 상통하는 점이 많다는 것을 나는 요즈음 많이 느낀다. 제일 먼저 그 유사성을 꼽을 수 있는 것이 석가와 예수의 존재이다.


석가는 태어나자마자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예수도 항상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나를 믿는 것은 하느님을 믿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결국 두 성인은 다같이 자신의 존재에 자신만만했다는 점에서는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의 해석에 따라 불교는 다신교(多神敎) 또는 무신론적 유심철학(無神論的唯心哲學)이요, 천주교는 유일신교(唯一神敎)라는 가장 커다란 차이의 문제가 극복될 수 있다고 본다. 즉, 유아독존(唯我獨尊)의 아(我)를 석가라는 개인에 국한시키지 않고 모든 인간(人間) 또는 중생(衆生)으로 볼 때에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란 모든 인간은 지극히 존귀하다는 뜻으로 해석되어 실유불성(實有佛性)의 의미와 아주 잘 들어맞게 되는 것이다. "실유불성"이란 모든 중생은 다 부처라는 것이니 확실히 유아독존의 아(我)가 부처님 일개인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천주교의 예수 그리스도도 마찬가지다. 예수는 "나는 곧 하느님의 아들이다"라고 말하여 하느님의 권위를 빌어 "아들"이라는 비유를 썼다. 그리고 그는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칠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야훼 신을 부르게 하였다. 그러면 예수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들에게는 하느님은 "아버지"가 된다는 말이다. 예수도 하느님의 아들이고, 우리도 다 하느님의 아들이니 예수와 우리는 형제가 되고, 좌우지간 모든 인간은 다 "하느님의 아들"이란 권위를 가진 존귀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또 예수가 자신은 곧 하느님이라고 했으니, 그것은 다시 발전하여, 모든 인간이 곧 하느님이라는 뜻이 된다.


석가의 "천상천하유아독존"이나 예수의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라는 표현이나 다 같이 '인간은 지극히 존귀하다'라는 뜻에선 같은 것이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는 당시 유대교의 전통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에 인간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하나의 방편으로 하느님의 가르침을 "아들"이라는 상징적 표현에 결부시킨 것이 다를 뿐이다.


천주교의 삼위일체(三位一體)도 불교이론과 흡사한 점이 많다. 즉, 성부(聖父), 성자(聖子), 성령(聖靈)이 일체라는 것은 불교에서 법신(法身), 화신(化身), 보신(報身)이 일체라는 교리와 아주 흡사한 이론이다. 법신(法身)은 불법(佛法) 그 자체 우주의 원리라는 뜻이니, 성부(聖父) 즉 우주의 주재자 하느님의 의미와 상통한다. 화신(化身)은 법(法)이 인간의 육신으로 화하여 나타난 석가모니를 말하는 것이니, 성자(聖子) 즉 예수 그리스의 의미와 맞아떨어진다. 또한 보신(報身)은 불법의 보응(報應)을 말하는 것이니, 하느님의 뜻이 성령(聖靈)에 의하여 시행된다는 천주교의 교리와 흡사하다.

특히 요즘 《인도에서의 예수의 생애》 등의 저서가 출간되면서, 불교와 천주교의 유사성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고 있다. 성서 고고학자들의 노력에 의해 신약성서의 수수께끼로 되어 있는 예수의 열살 때부터 서른 살까지의 행적이 차츰 밝혀져가고 있는 것이다. 현재까지 연구된 바에 의하면 예수는 인도와 티베트 등지로 유학하여 불교의 교리를 배우고 왔다는 것이고, 또 티베트의 불경 가운데는 《이사경》이라는 것이 있는데 인도에서의 예수의 행적을 잘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한다. 그러니까 예수는 불교의 심오한 교리와 유대교의 교리를 합치시키고, 거기에 자신의 예지력(叡智力)을 첨가하여 새로운 종교혁명을 일으킨 셈이다.

종교란 그것이 발생된 지역의 전래신앙이나 그 지역의 풍토와 뗄수 없는 불가분의 관련을 갖고 있다. 그러니 육식을 위주로 하는 유목민족의 종교인 천주교(또는 유대교)와 채식을 위주로 하는 농경민족의 종교인 불교(또는 힌두교)는 그 표상의 양식이 다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종교를 논할 때 그 나라의 정신적 문화적 풍토를 외면해서는 안될 것이다. 함석헌 선생의 《들사람 얼》이라는 글에서 "모든 신화는 요컨대 하나다. 하느님과 인간과 만물이 서로 통했다" 라고 쓰고 있는데, 이것은 참으로 적적한 지적이라 하겠다. 신화와 종교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만큼, 모든 종교의 교리고 결국은 하나인 것이 아닐까? 즉, 인간이 하느님이라는 것, 모든 만물을 존귀하다는 진리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사랑"이나 부처님의 "자비"나, 표현은 다를지언정 행동목표는 같을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유교의 "인(人)"도 마찬가지다.


예수 그리스도의 비유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탕자(蕩子)의 비유"가 있는데,, 이 비유는 불교의 《법화경》에 나와있는 "궁자(窮子)의 비유"와 흡사하다. "궁자의 비유"는 아버지가 왕인지도 모르고 거지처럼 거리를 헤매 다니던 아들이 결국 아버지에게 발견되어 영광된 왕자의 지위에 오르게 된다는 얘기다. 여기서 "아버지"의 상징이 하느님이던 불법(佛法)이던 간에 인간이 자신의 존귀한 가치를 모르고서 미망(迷妄) 속을 방황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점은 결국 같다고 하겠다. 아버지의 자식에 대한 지극한 정은 하느님의 사랑도 되고 부처의 자비도 된다.


또 예수가 말한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은 불교의 공즉시색(空卽是色) 즉 마음을 비워 욕심이 없어져야 재물(財物)을 얻을 수있다는 말과 통하는 말이요,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기보다 어렵다"는 말은 보시(普施)를 강조한 말로써 불교와 그 속뜻이 통한다.


지금까지 내가 살펴본 불교와 천주교의 유사성이 너무나 피상적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는 타종교의 신봉자들과 더불어 지혜와 사랑으로 서로 대화하고 서로 협조하면서 그리스도의 신앙과 생활을 증거하는 한편, 그들 안에서 발견되는 정신적, 윤리적 선(善)과 사회적, 문화적 가치를 긍정하고 지키며 발전시켜 나갈 것을 모든 신자들에게 권하고 싶다.


"우리가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들 가운데에서 한 사람이라도 형제로 대하기를 거절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감히 모든 사람들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을 것이다."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 5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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