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체폭탄, 새 테러 병기… 공항 검색으론 판별 못 해
음료수로 위장한 뒤 휴대전화, MP3를 기폭장치로 활용
만들기 쉽고 재료 구하기 쉬워 … 인터넷도 제조법 소개

보진카 작전(Bojinka Operation). 세르비아어로 ‘큰 폭발(Big Bang)’이란 뜻의 이 계획은 9·11테러의 총지휘자인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와 폭발물 전문가 람지 유세프가 1995년 1월 21일과 22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서울과 홍콩 등을 거쳐 미국으로 가려던 여객기 11대를 태평양 상공에서 액체폭탄을 이용해 폭파시키려 했던 사건이다. 이들은 액체폭발물을 콘택트렌즈 세척액에 숨기고 항공기에 탑승한 다음 카시오 전자손목시계를 이용해 폭발시킨다는 계획이었다.

이 계획은 같은 해 1월 6일 필리핀 마닐라의 주택가에서 발생한 화재로 들통이 났다. 당시 필리핀 경찰은 화재가 발생한 집에서 미국행 여객기에 대한 폭탄테러 계획이 담긴 노트북과 폭발물을 발견했고, 노트북을 되찾으려고 돌아왔던 테러범 한 명을 붙잡아 이 테러음모에 대한 자백을 받아냈다. 이 계획의 주범이었던 유세프는 파키스탄으로 도주하려다 체포됐었다. 유세프는 1993년 뉴욕 세계무역센터 지하주차장을 폭파시켜 쌍둥이빌딩을 무너뜨리려던 테러를 기도한 적이 있다. 당시 세계무역센터는 붕괴되지 않았지만 주차장 일부가 붕괴되면서 6명이 숨졌다. 유세프는 미국에서 재판을 받고 종신형이 선고돼 현재 복역 중이다.

▲ 미국의 한 공항 청사에 승객들의 휴대가 금지된 액체 물질이 수북이 쌓여 있다.

알 카에다의 제3인자였던 모하메드는 유세프의 삼촌으로 오사마 빈 라덴에게 처음으로 9·11 테러를 제의한 인물이다. 그는 2003년 3월 파키스탄에서 역시 체포됐으며 미국에 수감 중이다. 파키스탄 출신의 쿠웨이트 국적인 두 사람은 18명의 자원자를 모집, 폭탄 테러를 감행할 계획이었다.

실제로 액체폭탄을 이용한 테러 사건이 발생한 적도 있다. 1987년 미얀마 근해 안다만에서 115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한항공 여객기 폭파 사건에서 당시 북한 공작원 김현희 등 2명은 액체폭탄이 담긴 술병과 라디오 등을 가지고 여객기에 탑승, 기내 선반에 폭탄을 두고 내렸다고 진술했다.

▲ 한 미국 공항 직원이 승객들로부터 금지된 액체 물질을 수거하고 있다.
지난 8월 10일 영국에서 적발된 미국행 여객기 10대에 대한 테러 기도 계획은 바로 ‘보진카 작전’의 업그레이드판이다. 영국 경찰당국은 이번 테러 용의자들이 스포츠 음료에 담긴 액체폭탄을 여객기에서 터뜨리려고 시도했었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 뉴욕타임스는 테러용의자들이 아이팟(i-Pod) 등 MP3플레이어나 휴대전화를 기폭장치로 활용, 음료수로 위장해 기내에 들여간 액체폭탄을 폭발시키려 했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테러용의자들이 액체폭탄은 기존의 보안 검색 방법으로 판별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전자제품은 의심을 살 우려가 없어 최적의 조합으로 판단했다고 전했다. 이처럼 액체폭탄이 테러의 새로운 수법으로 등장하고 있다.

액체폭탄은 폭약이 액체라는 것 외에는 TNT와 같은 고체 폭탄과 다를 바 없다. 숙련된 화학 전문가라면 쉽게 액체폭탄을 만들 수 있다. 고체와 액체를 혼합해 폭발물을 제조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액체폭발물은 건설현장이나 채석장에서 많이 쓰이는 니트로 글리세린이다. 폭발성이 강력해 2~3ℓ 정도만 기내에 반입해 터뜨려도 비행기의 한 부분을 날려버릴 수 있다. 니트로 글리세린은 작은 기폭장치를 설치하고 건전지로 작동되는 이동용 전자장치로 작은 충격만 가해도 폭파시킬 수 있다.

메틸 나이트레이트라는 액체 화학물질은 다른 물질과 섞이는 즉시 폭발하기 때문에 기폭장치 없이도 폭파시킬 수 있다. 대인지뢰는 메틸 나이트레이트의 이런 특성을 이용해 지뢰를 밟을 경우 용기가 깨져 폭발이 일어나도록 만들었다. 모형 비행기 엔진의 연료 등으로 쓰이는 니트로 메탄은 활성물질만 섞으면 강력한 폭탄이 된다. 소독제로 쓰이는 과산화수소 등도 트리아세톤 트리페록사이드(TATP)라는 폭발물질과 혼합할 경우 강력한 폭발력을 가질 수 있다.

이런 액체폭탄은 무엇보다 쉽게 만들 수 있다. 인터넷은 ‘사제폭탄의 학교’이다. 레이 켈리 뉴욕 경찰청장은 “폭탄 제조법이 마치 일반 요리법(recipe)처럼 인터넷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고 밝혔다. 검색 사이트인 구글과 야후에서 액체폭탄의 영문 철자를 클릭하면 혼합 공식과 제조법이 뜬다. 네티즌끼리 주고받은 액체폭탄 실험 내용까지도 검색이 가능하다. 클리퍼드 존슨 영국 애버딘대 교수는 “제조법이 간단하고 재료도 구하기 쉬운 데다 살상력마저 갖추고 있다”고 지적했다.

▲ 미국 경찰이 뉴욕 JFK 공항에서 경계 근무를 하고 있다.
특히 현재의 보안 검색기술로는 액체폭탄을 식별해 내기 어렵다는 데 문제가 있다. 뉴욕타임스는 9·11 테러 이후 미국은 막대한 돈을 들여 공항 검색요원 수를 늘리고 금속탐지기와 엑스선 검색기를 개량했지만 액체폭발물 검색기술 개발은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다고 지적했다. 공항에서 여행객 가방을 검사하는 장비 제조업체인 하니웰 인터내셔널의 칼 라이스든 부회장은 “액체 폭탄은 새로운 위협”이라면서 “현재의 검사 기술로는 가방에 액체가 담겨있는지 알 수 있을 뿐 이 액체가 위험물인지 아닌지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말했다. 이번 폭탄 테러는 사전에 적발되어 미수로 끝났지만 전세계 비행기들은 액체폭탄이란 가공할 만한 위협에 완전히 노출되어 버린 셈이다.

때문에 각국은 액체 물질의 휴대 반입을 엄격히 제한하는 등 새로운 보안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영국의 경우, 전자 제품 기내 반입은 일절 금지됐고, 투명한 비닐 백에 지갑, 여권 등 필수품만을 넣어 휴대한 채 비행기에 탑승해야 한다. 우유라는 맛을 보고 난 다음 아기 우유병 정도만이 겨우 공항의 보안시설을 통과할 수 있을 뿐 모든 종류의 액체 물질은 휴대가 금지되고 있다. 미국도 역시 영국과 비슷한 조치를 취하고 있다. 마이클 처토프 국토안보부 장관은 “이번 테러 기도사건으로 모든 액체와 음료, 헤어젤, 로션 등을 기내에 갖고 들어갈 수 없도록 했다”고 밝혔다.

앞으로 각국이 같은 조치를 취할 것으로 보여 여행객들의 불편은 지구촌 전체로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기내 반입 물건의 엄격한 제한 조치에 따라 외국을 가는 여행객은 준비를 꼼꼼히 하지 않으면 낭패를 볼 수 있다. 음료와 헤어젤, 로션, 콘택트렌즈 세척액 등 액체는 기내 반입이 일절 금지된다. 로션이나 크림, 치약 및 유사 물질도 마찬가지다. 유아용 음료나 인슐린 등 특정 약품은 예외지만 이 역시 먼저 검사를 받아야 한다. 휴대용 컴퓨터와 카메라, 휴대전화, DVD플레이어, MP3 및 배터리가 들어간 전자제품도 갖고 들어갈 수 없다.

테러리스트들이 민간 여객기를 테러 대상으로 삼는 이유는 무엇일까? 민간 여객기는 글로벌리즘과 고도의 기술을 상징한다. 또 공중 폭파나 납치할 경우, 미디어의 관심을 극대화할 수 있다. 또 기체에 작은 구멍을 내거나 소형 폭탄을 터뜨려도 추락하는 등 취약한 측면도 있다. 핵무기나 핵 물질과 재래식 폭탄을 혼합한 일명 ‘더러운 폭탄(dirty bomb)’, 독가스, 세균 등보다 훨씬 구하기 쉽고 숨기기 용이한 액체폭탄으로도 여객기를 간단하게 폭파시킬 수 있다. 9·11 테러처럼 민간 여객기를 납치해 건물에 충돌시킬 수도 있다. 이 경우 많은 희생자가 발생할 수 있다. 특히 세계화가 심화되면서 각국을 오가는 승객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이들에 대한 보안 검색을 아무리 강화한다고 해도 폭발물을 탐지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도둑 한 사람을 열 사람이 못 잡는다’는 말이 실제 상황이 된 셈이다.


이장훈 국제문제애널리스트(truth21c@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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