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침묵의 봄’ 왔지만… 투병 9년 임수혁, 일어나라

[동아닷컴]

"생명의 결정은 본인이 해야할 문제인 듯 합니다. 존엄사 논쟁은 저희에겐 일고의 가치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님의 침묵' 앞에서도 희망은 그칠 줄 모르고 타오른다. 대답없는 남편의 병상을 지킨 지 9년. 모질고 힘든 세월이었지만 포기할 줄 모르는 아내의 마음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오는 18일이면 임수혁 선수가 쓰러진 지 9년째가 된다. 2000년 4월 18일 프로야구 롯데 소속 임수혁 선수는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LG와의 경기에서 2루까지 진루한 뒤 갑자기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 급성 심장마비였다. 병원에서 간신히 맥박과 호흡은 살려냈지만 의식은 돌아오지 않고 있다. 사건 당시 유치원에 다니던 큰 아이가 중학교 3학년이 된 지금까지도 그는 병실에 누워 있다.

그의 나이도 어느덧 불혹(40)에 접어들었다. 한 참 그라운드에서 뛰어야할 생의 한 순간을 그는 병상에 누워 소리없는 투쟁으로 보냈다.

3일 임수혁 후원회 회장 김태운 씨(57)와 함께 임 선수가 입원해 있는 서울 강동구 모 의원을 방문했다. 이날 병실은 부인 김영주 씨(40)씨가 지키고 있었다. 임 선수 부부는 슬하에 1남1녀를 두고 있다. 부인 김 씨는 자신의 얼굴이 공개되는 걸 원치 않아 그의 목소리만 녹취했다.

임수혁 선수의 병세는 전혀 차도가 없다. 눈을 뜨고 있지만 의식은 전혀 없다. 간혹 눈을 껌뻑이거나, 손가락과 발가락을 움직이지만 반사적인 행동이다. 사고 당시 뇌로 피가 가지 못해 전체적으로 손상이 온 것이다.

▲동아닷컴 정주희 기자

김영주 씨는 처음에는 임 선수가 금방 일어날 것이라고 믿었다. 힘들 때는 병상의 남편을 붙들고 눈이라도 맞춰달라고 하소연 했지만, 이제는 모든 것을 받아들인 상태다. 그렇다고 아예 체념한 것은 아니다. 아이들 아빠가 일어나면 그 보다 좋은 일은 없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더 힘든 것은 없다는 것. 김 씨는 “저는 그가 있으나 없으나 아이들에게 아빠의 모습을 이야기 해주면서 지금까지 살아 왔어요”라고 말했다.

김영주 씨는 임 선수가 쓰러지고 3~4년 간은 별별 치료법을 다 시도해 봤다. 임 선수가 쓰러지자 각종 도인, 기치료사, 약장수들이 달라붙었다. 하지만 차도는 없었다. 그들은 알 수 없는 치료법을 강권한 뒤 거절하면 “왜 노력을 안 하느냐. 임 선수가 회복 되는 게 싫은 가 보다”라고 억지를 부리기도 했다. 후원회장 김태운 씨는 후원카페에도 이런 ‘장사꾼’들이 한달에 한번 꼴로 접근한다고 했다. 프로야구 관련 서적을 출간하면서 임 선수 가족들에게 수익 일부를 전달하겠다고 광고 하고 연락을 끊은 사람도 있다.

김 씨에게 최근 일고 있는 존엄사 논쟁에 대해 물었다. 얼마 전 식물인간 상태에 빠진 김모씨(76) 자녀들이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을 상대로 낸 ‘무의미한 연명치료 장치 제거 등 청구소송’을 벌여 논란이 됐다.

김 씨는 “생각할 가치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존엄사는 본인이 준비해야 할 일이죠. 평소 ‘내가 이런 상황이 됐을 대 어떻게 해 달라’고 말했다면 모르겠으나, 가족들이 결정한 일은 아닌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그는 “저희 신랑은 뇌사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존엄사의 대상도 아니라고 보고, 또 본인이 평소 삶에 애착이 많던 사람이었어요. 자기 주어진 생명만큼 살다가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했다.

현재 임 선수에 대한 후원의 손길도 계속되고 있다. 롯데 선수단과 우리 선수단이 정기적인 모금액을 보낸다. 지난해 결성된 임 선수의 후원회에서는 분기당 200-300 만 원씩 보내고 있다. 그 밖에 프로야구 팬들의 부정기적인 모금액도 있다. 그러나 일년에 3000만 원 가량 드는 병원비를 감당하기엔 벅찬 실정인 것 같았다.

가장이 쓰러지고 김 씨는 아이들을 친정어머니께 맡기고 억척스럽게 혼자 생계를 꾸려갔다. 삼성 생명의 지원을 받아 스포츠 용품점을 한 적도 있고 낮에는 미술학원 밤에는 여성복을 파는 일을 했다. 현재는 옷을 가지고 다니면서 방문 판매를 하고 시간 나는 대로 임 선수의 병실을 찾는다. 옷 가게처럼 하루 종일 메어 있지 않을 수 있어 만족 한다고 한다.

‘캔디’처럼 씩씩한 김영주 씨 가족이지만 그런 그들에게도 여전히 ‘아빠’라는 말은 금기 사항이다. 지난해 임 선수 기사에 악성 댓글이 잔뜩 붙었을 때도 한 마디 내색 않던 속 깊은 아이들이다.

“저도 아이들도 서로 조심하면서 살았어요. 저야 괜찮지만 아이들에게 ‘괜찮아 괜찮아 엄마가 더 사랑해 주잖아’ 하면서 몰아온 것이 아닌 가 후회가 됩니다. 사고 당시 저희 딸아이는 만 4살이 안 됐을 때였어요. 아빠의 기억을 물으면 비디오카메라 속에 담긴 아빠의 모습을 얘기해요. 저희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더 불행하지 않도록 하는 게 제 삶의 목표입니다.”

아이들의 이야기를 할 때는 김 씨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큰 아이는 임 선수를 닮아 키도 크고 운동도 잘해 학교에서 운동을 권하기도 하지만 김 씨는 평범한 길로 갔으면 좋겠다고 했다. 꽃피는 춘사월, 임수혁 선수 가족에게도 웃는 일이 많았으면 한다.

생에 대한 애착, 생명에 대한 존중은 어느 것 보다 귀중하다. 본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지만 임수혁 선수의 가족들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깊게 체험하고 있다. 더군다나 사랑하는 사람의 생명에 대한 것임에랴.

꺾일 줄 모르는 희망 속에 생의 한 가운데를 통과하고 있는 그들에겐 삶의 의지 그 자체가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숭고함이었다.

최현정 동아닷컴 기자 phoeb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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