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밥 도시락으로 유럽 평정한 켈리 최 "한식당 1000곳 도전"

 

황은순 기자

입력 2019.10.20 09:52

 

 

 

 

켈리 최(오른쪽)와 초밥 스승 야마모토 구니오. 켈리 최는 켈리델리를 창업하면서 파리 최고의 스시 장인 야마모토를 무작정 찾아갔다. 삼고초려 끝에 모신 야마모토는 켈리 최에게 초밥의 노하우를 아낌없이 전수해주었다. photo 켈리델리

포르투갈 리스본에 한 달여 전 작은 한식당이 생겼다. 소고기, 돼지고기를 지글지글 굽고 야채에 싸서 된장, 고추장 소스에 먹는 고기구이집이다. 한국서 공수한 고춧가루로 만든 김치도 있다. 소리 소문 없이 문을 열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포르투갈인들의 예약이 끊이지 않는다. 멋모르고 들어와서 먹는 방법도 몰라 헤매다 일단 먹으면 동공이 확대되면서 감탄사가 흘러나온다.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한 번 온 사람은 없다. 낯선 한국식 바비큐에 반한 사람들이 친구들을 끌고 다시 온다.

 

유럽에 한식이 뜨고 있다. 프랑스 파리, 영국 런던, 독일 프랑크푸르트 등에 고급 한식당들이 하나둘 생기고 K팝 팬들은 한식당을 찾아 줄을 선다. 그러나 리스본은 한식 불모지다. 올 초 상 조르제성 근처 마트의 한 푸드코트 안에 한식 코너가 생겼을 뿐이다. 그러니 테이블에 앉아 연기 피우며 고기 구워 먹는 광경은 리스본 사람들에게는 아주 낯선 문화다. 이 고깃집은 일시적으로 운영하는 팝업식당이다. 식당의 주인은 ‘파리에서 도시락 파는 여자’로 알려진 켈리 최(51) ‘켈리델리(Kellydelly)’ 회장이다.

 

켈리 최 회장은 기적 같은 성공스토리의 주인공이다. 사업에 실패해 10억원 빚더미에서 삶의 마지막까지 갔다 40대에 즉석 초밥 도시락을 파는 ‘켈리델리’를 창업했다. 켈리델리는 현재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등 유럽 11개국에 지사가 있고 매장 1000여개, 연 매출 5000억원을 자랑하는 글로벌 기업이 됐다. 급성장 곡선을 그린 켈리델리의 성공신화는 프랑스의 한 경영대학원 석사과정 교재에까지 실렸다.

 

한식 불모지 리스본에 전진기지를

켈리 최 회장이 최근 새로운 도전을 선언했다. 이번에는 한식이다. 유럽은 물론 세계에 한식을 대중화시키겠다는 목표다. 리스본은 그 도전을 위한 전진기지이다. 리스본에 있는 켈리 최 회장과 지난 10월 9일 화상전화로 2시간에 걸쳐 인터뷰를 했다.

 

“5~10년 내 한식당 1000곳이 목표입니다. 한국의 고기구이를 피자, 햄버거처럼 전 세계에 대중화된 메뉴로 만들고 싶어요. 누구나 쉽게 찾아와서 줄서서 먹는 음식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팝업식당을 열어 분위기를 보고 있는데 충분히 가능성이 있습니다.”

최 회장은 식당을 찾은 현지인들의 반응이 뜨겁다고 했다. “똑같은 고기를 이렇게 다른 방법으로 먹을 수 있다니 신기하다” “놀라운 맛이다” “고기와 함께 야채를 균형 있게 먹을 수 있어서 좋다”는 반응들이 많다면서 그의 목소리가 한 톤 높아졌다.

 

“한국 음식 중 유럽 사람들에게 가장 잘 먹힐 수 있는 것이 뭔가 오랫동안 고민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고기를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는지 수없이 테스트하면서 찾았습니다. 고기와 야채, 된장·고추장·간장 등 장류, 김치, 이렇게 3가지를 축으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발효음식 중심으로 퓨전이 아닌 제대로 된 한식을 보여줄 겁니다. 어떻게 하면 조미료 안 넣고 김치를 맛있게 만들까, 설탕 안 넣고 감칠맛을 낼까 하루 종일 연구합니다. 최고의 식재료로 최고의 맛을 내야죠. 김치 양념도 가능한 한국에서 조달할 계획입니다.”

 

그는 리스본의 역사적인 장소에 첫 번째 식당 장소를 물색해놓고 가장 한국적인 인테리어를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특별한 장소라서 허가를 받기가 까다로워 예상보다 오픈 시기가 늦어지고 있는데 내년 3~4월이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왜 리스본을 선택했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사실 런던이나 파리처럼 이미 한식 바람이 불기 시작한 곳이 더 쉽겠죠. 또 런던은 켈리델리 본사가 있고, 파리는 처음 시작한 곳이니 익숙한 곳이기도 하고요. 상대적으로 포르투갈은 국민소득이 낮기 때문에 가격경쟁력도 없고 한식에 대한 인식도 낮습니다. 다들 왜 리스본에서 하느냐며 말렸는데 가장 어려운 곳에서 시작해 성공하면 다른 곳은 그만큼 더 쉽지 않을까요?”

 

그는 리스본에 식당을 2~3곳 오픈해서 자리를 잡은 후 매장을 10곳까지 확장할 계획이다. 다음 스페인, 프랑스에서 같은 방식으로 총 30곳 정도를 만들면 자신이 할 일은 끝난다고 말했다. “세 도시에서 직영을 통해 테스트를 하고 콘셉트가 완성되면 그 다음은 전문 CEO의 몫입니다. 초밥 도시락 브랜드인 ‘스시데일리’처럼 가맹점 체제로 시스템을 만들어서 유럽 전역에 확산시켜야죠.”

 

한식 프로젝트는 ‘켈리델리’ 본사 차원이 아니라 최 회장이 회사 밖에서 별도로 진행하는 프로젝트다. 이를테면 별동대인 셈이다. 인재도 많은 큰 조직을 업고 하면 훨씬 쉬운 일을 그는 켈리델리를 시작할 때처럼 음식 만드는 것부터 시작해 직접 부딪치고 있다. “조직이 클수록 혁신이 어렵습니다. 여러 단계의 결재를 거치다 보면 독특한 아이디어도 결국 밋밋하게 되고 맙니다. 사람도 없고 조직도 없이 하려니 힘들지만 그만큼 재미있습니다.”

그는 세계에서 한식에 대한 관심이 뜨거운 만큼 한국인들이 빨리 움직이지 않으면 주도권을 외국인에게 뺏길 수 있다고 우려했다. “런던에서는 영국인이 한국 셰프를 초청해 한식 레시피를 개발하고, 파리에서 핫한 한국 펍은 프랑스 대기업에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유럽인들이 자기들 방식으로 재해석한 것이 한식이 될 수 있습니다. 진짜 한식이 뭔지를 우리가 보여줘야죠.”

그의 목표는 스타벅스 같은 세계적 외식 프랜차이즈를 만드는 것이다. 그가 걸어온 길을 보면 불가능한 도전은 아니다.

 

켈리델리의 즉석 초밥 브랜드 ‘스시데일리’의 매장들. 까르푸 등 대형마트 한가운데 만든 키오스크형에서 출발해 그랩 앤 고(진열판매), 터미널 등 다양한 버전으로 진화하고 있다. 런던에 새롭게 디자인한 그랩 앤 고 매장은 최근 ‘2019 레스토랑&바 디자인 어워드’에서 세계 TOP 5로 선정됐다. 위부터 벨기에 터미널 매장, 런던 그랩 앤 고 매장, 스페인 키오스크 매장. photo 켈리델리

 

와이셔츠 공장에서 꿈을 꾸다

그는 전북 정읍 출신으로 6남매 중 셋째 딸이다. 가난한 마을이었는데 그의 집은 특히 더 가난했다.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어머니가 그를 불러 “고등학교를 보내줄 수가 없으니 집안일을 도와라”라고 했다. 아픈 아버지 대신 생계를 책임진 엄마의 고단한 삶을 봐왔던 그는 도저히 엄마처럼 살기는 싫었다. “이대로 가난에 질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방법을 찾았다. 서울의 한 와이셔츠 공장에 가면 야간고등학교를 다닐 수 있다고 했다. 열일곱 살 때 혼자 서울로 올라왔다. 3년 동안 공장에 다니면서 패션디자이너의 꿈이 생겼다. 복장학원에 들어가 보니 당시 패션은 전부 일본에서 온 것이었다.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그는 “세계 최고가 되자”고 마음먹었다. 최고가 못 되더라도 노력은 해보자는 생각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돈 벌며 대학에 진학했다.

 

일본에 가서야 패션의 중심은 프랑스라는 것을 알았다. ‘프랑스에서 최고가 되면 세계 최고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무작정 프랑스로 갔다. 프랑스어라고는 한마디도 못했다. 오죽하면 달러를 환전해갈 만큼 프랑스에 대해 무지했다. 그는 통역을 데리고 원하는 대학을 찾아가 “입학만 시켜주면 6개월 안에 프랑스어를 익히겠다”고 호언장담을 해 편입허가를 받았다. 혼자 힘으로 고교를 졸업하고 낯선 일본을 거쳐 프랑스까지 날아갔으니 당시엔 자신감이 하늘을 찔렀다. 하지만 현실을 알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프랑스어는 일어처럼 빨리 안 늘었고 말이 안 되니 아르바이트를 할 수도 없었다. 휴학도 하고 밥 먹듯 굶으면서 버텨낸 것은 공부 욕심 때문이었다. 프랑스에서 손꼽히는 디자인 대학 두 곳을 졸업하고 패션회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공부로 창의성을 키우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DNA부터 다른 유럽 디자이너들을 따라잡기는 힘들었다. 패션으로는 최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이직과 미국행을 고민할 때 전시·광고업을 하던 친구가 쉬는 동안만이라도 일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일을 도와주다 본격적으로 친구와 사업을 했다. 친구는 프랑스를, 그는 한국 지사를 맡아 9년 동안 성공한 사업가로 화려한 생활을 누렸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하고 경험도 미숙했다. 성공에 취해 자만에 빠져 있는 사이 회사는 점점 방향을 잃었다.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으로 대규모 자동차 박람회에 빚을 내 올인했는데 결국 망했다.

 

친구와 회사를 정리하고 빚을 떠안았다. 성공이 화려했던 만큼 실패는 처참했다. 2년여를 집안에 틀어박혀 자책으로 시간을 보냈다. 사장으로 일했는데 누구 밑에 들어가서 일하기도 싫었다. 어느 날 친한 후배가 연락을 해왔다. 차비가 아까워 한 시간 걸어서 후배를 만나러 갔다. 후배는 자신의 성공담을 열심히 떠들어대는데 그는 집중할 수가 없었다. 마음속으로는 커피값과 주머니 속 남은 돈을 계산하고 있었다. 눈치 보다 결국 커피값을 안 내고 돌아오는 길, 그를 버티고 있던 마지막 자존심마저 무너져내렸다.

 

센강에 서서 몇 시간,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순간 엄마가 떠올랐다. 그는 늘 엄마의 자랑거리였고 희망이었다. 엄마는 그가 다시 일어나야 할 이유였다. 처음으로 실패한 자신과 대면했다. 10억원 빚을 지고 살은 10㎏이 쪄서 패배의식에 젖은 못난 모습이었다.

 

기적은 행동에서 나온다

그날 그는 센강에서 죽고 다시 태어났다. ‘잘나가던 나’를 내려놓고 ‘현재의 나’에 집중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나섰다. 민박을 하고 관광가이드를 뛰며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진짜 내 사업을 해보자’ 결심했다. ‘경기를 타지 않을 것, 돈이 많이 들지 않을 것, 내가 미쳐서 할 수 있는 일일 것’. 세 가지 기준을 세우고 찾은 것이 즉석 초밥 도시락이었다. 대형마트에서 파는 초밥 도시락은 공장에서 만들어와 마트에 진열되고 팔리는 시간까지 3~5일이 걸리니 당연히 맛이 떨어졌다. 그는 마트 안에 오픈 매장을 만들고 초밥을 만드는 과정을 쇼처럼 생생하게 보여주는 콘셉트를 구상했다.

 

그가 구상을 현실로 만들어낸 과정은 치열했다. 그는 2년 동안 마트에서 살다시피했다. 초밥 판매 동향은 물론 고객의 동선, 사람이 많이 몰리는 시간대, 고객 연령 등을 관찰하고 기록했다. 값비싼 흰색 난초가 많이 팔리는 곳, 고급 와인이 많이 진열된 곳이 초밥 판매량이 많았다. 같은 동선 내에서도 왼쪽과 오른쪽 진열대의 판매량이 달랐다. 자연스럽게 ‘촉’이 생겼다. 그때의 경험 덕에 지금도 매장 위치만 보면 어느 정도 매출이 나올지 감이 잡힌다고 한다.

 

그 결과를 단 4쪽짜리 사업계획서로 만들어 당시 유럽 1위 마트 기업인 까르푸에 보냈다. ‘라이브 쇼 비즈니스와 초밥 도시락 사업을 접목한 즉석 초밥 도시락 매장을 마트 내에 만들겠다. 성공한 초밥 식당은 한국인이 운영하는 경우가 많다. 손이 작고 젓가락 사용으로 손놀림이 세심한 한국인이 만든 초밥은 맛있다. 나는 디자인을 전공해서 맛, 건강은 물론 보기에도 좋은 초밥을 만들 수 있다.’ 이런 내용이었다. 60대인 까르푸 회장의 나이까지 고려해 최대한 간략하게 쓴 것이었다. 예상대로 까르푸 회장은 두꺼운 수십 개의 서류더미에서 켈리델리의 서류를 집어들었다. 그렇게 리옹에 만든 1호점에 대한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세계 각지의 대형마트와 요식업체 사람들의 견학이 줄을 이었다.

 

그 과정을 그는 2017년에 펴낸 ‘파리에서 도시락을 파는 여자’라는 책에 자세하게 담았다. 책은 지금까지 5만권 이상이 팔렸고 인세는 미혼모, 스타트업 등을 도와주는 데 쓰고 있다고 했다. 첫 사업 실패에서 배운 경험은 켈리델리의 기업철학에 그대로 녹아 있다. 그는 자신의 노하우를 아낌없이 전파하려고 한다. “가난했고, 난독증이라 책 읽기도 어렵고, 말도 어눌하고, 이런 제가 어떻게 실적을 낼 수 있었을까요? 어느 날 보니 습관이 변했더라고요. 성공한 사람들도 다 저와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고등학교를 못 가게 됐을 때 그냥 주저앉지 않고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은 뭘까요?”

 

그는 그것을 “생각 파워”라고 했다. 생각 하나 바꾸면 인생을 180도로 바꿀 수 있다는 것. 그는 ‘생각 파워’를 소셜미디어, 강연 등을 통해 전파하고 있다. 그는 한국 사람들은 실패를 너무 두려워한다고 했다. “자주 실패하라, 빨리 금방 실패하라, 돈을 적게 들이고 실패하라, 실패하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실패다.” “도움을 받는 유일한 방법은 도움을 청하는 것이다.” “한 분야의 책을 100권 이상 읽으면 대학 학위 하나 딴 것과 마찬가지다.” 그가 “켈리도 하는데 왜 못 해?”라면서 기회 있을 때마다 하는 말들이다.

 

“한식 한류 함께할 사람을 찾습니다”

그는 켈리델리가 안정되자 전문 경영인을 영입했다. 2016년부터 1년 동안 남편의 꿈인 세계 요트여행을 떠났다. 그의 경영철학은 ‘켈리가 없어도 잘되는 회사’이다. “리더는 핸들을 잡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목적지를 정하는 사람이다”라고 그는 말한다. 시스템을 만들고 직원을 키우면 회사는 잘 돌아가게 돼있다. 그는 네 명의 직원을 키워 자신의 빈자리를 메웠다. 켈리델리는 ‘스시데일리’ 외에도 ‘딤섬데일리’ ‘밤부’ ‘코마키친’등 사업을 계속 확장하고 있다. ‘스시데일리’도 마트 밖으로 나가 ‘터미널’ ‘그랩 앤 고(Grab and go·진열판매)’ 등 다른 버전으로 확대했다. 식품수입 회사인 ‘켈리 러브스 지극정성’도 론칭했다.

 

켈리델리는 창업 초기부터 ‘가족 같은 기업’을 내걸고 5가지의 가치를 만들어서 모든 직원이 공유하게 했다. ‘전적으로 함께, 끊임없는 호기심을, 전문적인 완벽함을, 겸허하면서 정직하게, 완전히 열정적으로’이다. 켈리델리는 가맹점주를 뽑을 때 회사의 가치에 공감하고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을 뽑는다. 그렇지 않은 경우 아무리 돈이 많고 매장 여러 곳을 하겠다고 찾아와도 거절한다. 그는 “한식 브랜드도 돈보다 한식에 대한 열정과 의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함께하기를 원한다”면서 한식 한류를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든지 연락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 마라톤에 도전하고 있다. “몸의 근육뿐만 아니라 생각의 근육을 키우려면 운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올봄 풀마라톤에 도전했고 연말에 또 한 번 도전한다. 마라톤이 끝나면 다음 목표는 철인 3종 경기이다. 끊임없이 도전하는 그의 10년 후 목표는 아시아 음식을 넘어 아시아의 라이프스타일을 파는 기업으로 세계 ‘톱’이 되는 것이다. 그는 “나는 도전하고 성장해야 행복한 사람이다. 내 목표는 성공이 아니라 행복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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