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나치 부역자 페탱 원수의 사망,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

[역사 공부 ‘오늘’] 1951년 7월 23일, 나치 부역자 페탱 원수, 되섬의 요새 감옥에서 사망

 

▲ 휴전협정 후 히틀러와 만난 비시 정부 수반 페텡 총리.(1940년 10월 24일)

1951년 오늘, 프랑스 비시(Vichy) 정부의 수반 앙리 필립 페탱(Henri Philippe Pétain, 1856~1951)이 아흔다섯 살을 일기로 영욕의 삶을 마감했다. 제1차 세계대전 때의 무훈으로 한때 ‘프랑스의 국부’로 칭송받았던 페탱은 자택의 침실에서가 아니라 대서양 되섬(Ile d'Eu)의 요새 감옥 독방에서 눈을 감았다.

 

1차대전 프랑스의 영웅 페탱, 감옥에서 죽다

 

나치에 대한 부역으로 프랑스의 영웅에서 ‘민족 반역자’가 되었던 페탱의 죽음이 만만찮은 역사적 의미로 다가오는 것은 그것이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의 한 단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페탱은 1916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육군을 패퇴시킨 베르됭(Verdun) 전투에서 프랑스를 구해낸 역대의 공적에도 불구하고 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을 선고받은 것이다.

 

베르됭의 구원자로 1918년 프랑스 제3공화국 군 원수로 승진한 페탱은 1920~30년대 프랑스의 주요 인물로 떠올랐다. 1940년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하였을 때 그는 부총리였다.

 

패전이 자명해진 상황에서 휴전협정을 주장한 페탱은 6월 16일 신임 총리가 되어 새 내각을 구성하고 독일에 정식으로 휴전협정을 요구했다. 페탱은 독일과의 전쟁보다는 항복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 독일 점령기의 프랑스(1940~1944). ⓒ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
▲ 재판에 회부된 페탱 원수

6월 22일 맺어진 휴전협정은 기실은 항복조약이었다. 독일 강점기의 비시 정부가 대독 협력 체제가 된 것은 전적으로 이 협정에 따른 것이었다. 협정에 따라 프랑스 영토의 북부 절반(수도 파리 포함)은 독일군에 점령되었고 프랑스 정부는 비점령 지역의 도시 가운데 중부의 휴양도시인 비시를 ‘수도’로 선택했다. 페탱 정부를 ‘비시 정권’(1940.6.16.~1944.8.25.)이라 부르는 이유다.

 

이후 페탱 정부는 프랑스의 유일한 합법 정부(Vichy France)임을 주장하며 나치 독일과 협력했다. 비시 정부는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의식적이고도 적극적으로 협력정책을 수행한’ 정부였다. 독일이 요구한 노동력 징발에 대해선 의무노동제(18~50세의 모든 남성과 만 21~35세의 모든 독신 여성을 강제 징발할 수 있도록 한 제도)로 ‘협력’했다.

 

비시 정부의 적극적 대독 ‘협력’

 

무엇보다도 비시 정부의 가장 악명 높은 협력은 ‘나치 독일의 적들을 체포·처벌·제거하’는 것이었다. 그 ‘적’이란 물론 레지스탕스, 공산주의자, 프리메이슨 단원, 유대인 등이었다. 비시 정부는 기존의 법 절차와 무관하게 레지스탕스를 탄압할 수 있는 사법기구로 ‘특별재판부’를 설치했고 레지스탕스 활동에 대한 보복 조치로 독일 군 당국이 처형할 프랑스인 인질 명단을 작성하는 일도 맡았다.

 

특히 1942년 여름의 협력은 끔찍한 결과로 이어졌다. 마침내 비시의 경찰은 프랑스 주둔 독일 친위대와 협약을 맺고 대대적 유대인 검거에 나선 것이었다. 프랑스 경찰이 검거하여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간 7만6천여 명의 프랑스 거주 유대인들 가운데 단 3%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 파리를 점령, 입성하는 독일군들 .  뒤에 개선문이 보인다 .
▲ 프랑스를 점령한 뒤 파리에 입성한 히틀러와 나치 장교들

그러나 연합군이 횃불 작전으로 프랑스령 북아프리카에 상륙한 직후인 1942년 11월 11일에 나치가 안톤 작전이란 작전명으로 비시 프랑스가 통치하던 프랑스 남부를 점령해 버리자 비시 정부는 모든 권력을 상실했다. 비시 프랑스는 명맥은 유지했지만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노르망디 상륙 후 연합군이 프랑스 지역을 탈환하기 시작하자 독일군은 고립되거나 철수를 시작했고 친 독일계 경찰들은 거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1944년 8월 25일 폰 콜티츠 독일군 사령관이 항복하면서 수도 파리가 해방되자 자유 프랑스 정부의 드골(de Gaulle) 장군은 파리에 입성했다. 드골은 임시정부의 대통령 자격으로 독일과 전쟁을 수행하면서 동시에 해방된 지역에서는 나치 협력자들을 정리하겠다고 발표했다.

 

▲ 1944년 8월 25일 폰 콜티츠 독일군 사령관이 항복하면서 수도 파리가 해방되었다. ⓒ 위키백과
▲  1944년 8월 26일, 파리에 입성하고 있는 자유 프랑스 망명정부의 드골 장군.

나치에 협력한 프랑스의 반역자, 나치 협력자들에 대한 드골의 방침은 확고했다. 드골이 규정한 민족 반역자는 자유 박탈을 정당화하기 위해 프랑스의 패배를 악용한 투항주의자들, 프랑스 국민을 ‘악의 길’로 이끈 비시 정부의 고위 공직자들과 추종자들, 나치의 승리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협력한 프랑스인들이었다.

 

“국가가 애국적 국민에게는 상을 주고 민족 배반자나 범죄자에게는 벌을 주어야만 비로소 국민들을 단결시킬 수 있다.”

“나치 협력자들은 정치적 결정, 주로 정치 활동과 때로는 군사행동 그리고 행정조치 및 언론의 선전 활동 등의 변화무쌍한 형태로 프랑스 민족의 굴욕과 타락뿐만 아니라 나치 독일의 박해마저도 미화했다.

민중의 분노가 폭발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나치 협력자들의 엄청난 범죄와 악행을 방치하는 것은 국가 전체에 전염하는 흉악한 종양들을 그대로 두는 것과 같다.”

 

2차대전 직후 드골은 나치 협력자에 대한 단호한 단죄에 나섰고 대다수 프랑스 시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드골은 나치 협력자 문제는 개개인의 과오 여부의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재확립, 군국주의자들과 그 공범자들 및 그 사상의 청산, 그리고 민족 반역자 청산문제라고 보았다.

 

파리 해방(1944.8.25)을 전후한 부역자 처벌은 재판을 통한 사법적 숙청 이전에 약식 처형과 여성 부역자들의 머리를 깎는 삭발식 등의 초법적인 형태로 시작되었다. 이어진 재판을 통한 처벌은 드골 정부의 ‘명령’, 부역자재판소, 공민재판부, 최고재판소 등의 법령·기구에 의해 계속되었다.

 

▲ 프랑스의 부역자 처벌은 사법적 단죄 이전에 약식 처형과 여성 부역자들의 삭발식 등으로 진행되었다.

사법 숙청은 약 35만 명의 대독 협력 혐의자 가운데 12만 명 이상이 재판에 회부되었고, 그중 약 3만8천 명이 유무기의 징역이나 금고형을 받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부역자재판소에서 모두 6천여 명이 사형선고를 받았고 정규 법정 밖에서 약식 처형된 이가 9천 명이었던 데 비해 합법적으로 처형된 사람은 약 1500명이었다. 공민권 박탈형만 선고받은 이도 약 5만여 명이었다.

 

프랑스의 정의, 단호한 ‘부역자 단죄’

 

가장 극단적인 대독 협력을 벌였던 언론인과 문인에 대해서는 엄정하게 중형이 선고되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문인과 언론인이 첫 번째 숙청 대상으로 오른 것은 불가피한 선택으로 이들은 가장 증오받는 부역자였기 때문이다. 파리의 한 부역자재판소에서 재판받은 작가·언론인 32명 중 12인이 사형선고를 받고 그중 7인이 처형되었다.

 

숙청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비시 정부의 핵심지도자였던 국가수반 페탱과 총리 라발에 대한 처리였다. 국가적 대독 협력의 주역이었던 라발과 레지스탕스 탄압에 앞장선 민병대 총수 다르낭은 총살되었다. 1차 세계대전의 국민 영웅이었던 페탱은 단 1표 차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프랑스 해방 뒤, 1944년 9월 7일, 페탱과 그의 내각은 독일 남부의 소도시인 지그마링엔(Sigmaringen)으로 피신했다. 히틀러는 비시 정권이 독일에서 망명정부를 설립하기를 바랐고 페탱의 육사 후배였던 드골은 페탱이 스위스로 망명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귀국을 원했던 페탱은 1945년에 스위스를 거쳐 프랑스로 돌아왔다. 페탱은 자신을 적대시하는 조국의 분위기에 당황했다. 그는 ‘늙은 반역자를 처형하라, 페탱을 사형대로!’라고 외치는 2천여 명의 시위대와 마주쳐야 했고 날아드는 돌팔매와 직면해야 했기 때문이다.

 

▲  카뮈와 모리아크는 부역자 단죄에 대한 태도가 엇갈렸다 .

페탱은 파리 남쪽의 몽루즈 감옥에 수감되었고 1945년 7월 23일 역사적 재판이 시작되었다. 유럽의 모든 대중매체는 페탱 재판의 모습을 전하기 위해 파리로 몰려들었다. 부역자 단죄를 두고 관용과 용서를 주장한 작가 프랑수아 모리아크(1885~1970)와 정의를 위한 단죄를 주장한 알베르 카뮈(1913~1960)의 논쟁이 재연되었다.

 

사형선고와 종신형 감형

 

모리아크는 ‘우리들의 일부가 이 노인의 공모자일지 모른다’며 조금도 물러서지 말자고 호소했다. 반면 카뮈는 <콩바(Combat)>의 사설에서 그의 나이와 자만심의 술책에 현혹되는 프랑스인은 결코 없을 것이라며 엄정한 재판을 요구했다.

 

재판 도중 내내 묵비권을 행사하며 침묵을 지키던 페탱은 최후진술에서 ‘국민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읽었다.

 

“본인은 이 재판과정에서 자의적으로 침묵을 지켰습니다. 이러한 내 태도에 관한 이유를 본인은 이미 국민에게 설명했습니다. 내가 끝까지 집착한 유일한 생각은 국민과 함께 프랑스 땅에 영원히 남아 사는 것이었습니다.

프랑스 국민을 보호하고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무슨 일이 일어나도 프랑스 국민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베르됭을 사수했듯, 프랑스를 지켰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 본인의 의식은 내 자신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본인이 일평생 봉사한 프랑스에 마지막 인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최고재판소는 형법 75조와 87조 위반으로 페탱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국가 반역죄(75조)와, 외국에 유리한 정보를 제공한 간첩죄(87조)는 모두 최고형이 선고될 수밖에 없었다. 배심원들은 반대에 13표, 찬성에 14표를 던졌고 한 표 차로 사형이 결정되었다.

 

페탱보다 더 프랑스 국민들의 증오심을 받은 피에르 라발 총리에 대해서도 구명운동을 폈던 모리아크는 <르 피가로(Le Figaro)>에 보낸 논평에서 “그의 찬미자이든, 반대자이든 간에 우리 모두에게 절반은 배반자이며, 나머지 절반이 희생자인 비극적 모습이 앞으로도 계속 남게 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  페텡은 대서양 연안의 되섬의 요새 감옥 독방에서 복역하다가 사망했고, 거기 묻혔다.

페탱에 대한 사형을 즉시 집행할 것인가, 유예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17대 13으로 유예가 결정되었다. 드골은 사형 결정을 보고받자마자 무기징역으로 감형했다. 페탱은 1945년 11월 14일 대서양의 되섬(Ile d'Eu)의 감옥에 이송되었다. 그는 감옥에서 5년 8개월간 복역하다가 1951년 7월 23일 사망했다.

 

페탱은 사후에도 논쟁의 중심이었다. 1951년 ‘페탱 원수를 추억하는 조직’이 결성됐고 페탱의 이름이 들먹여질 때마다 좌우 양 진영은 충돌했다. 그러나 프랑스인들에게는 페탱의 비시 정부가 숨기고 싶은 어두운 과거다. 이는 프랑스인에게는 ‘비시 신드롬’이라 불릴 정도로 치유하기 어려운 트라우마였던 것이다.

 

청산 없는 과거, 한국의 선택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은 즉각적으로 우리나라의 식민지 역사 청산을 매우 씁쓸하게 환기해 낸다. 4년이 아니라 36년 가까운 식민지 시대의 역사를 우리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넘겨버렸다. 그예 근대화가 이루어진 시기라며 그 시대를 미화하려는 반역사적 시도가 주류 권력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다.

 

▲  이용우 저 ( 역사비평사 , 2008)

과거사 청산은 ‘기억에 바탕을 둔 진실과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이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프랑스와 달리 치욕의 역사를 청산하지 못한 한국 현대사는 한국인에게 오로지 국가와 민족의 이해가 아니라, 일신의 안일과 행복을 위해 시대와 힘에 기꺼이 순응하라고만 가르칠 뿐이다.

 

1998년에 나치 협력자의 심판대에 오른 비시 정부의 보르도 경찰서장 모리스 파퐁의 사례가 시사하는 진실은 아프고 무겁다.

 

비시 정권하에서 레지스탕스에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져 단죄를 피했고, 사회당 정부의 장관까지 지낸 이 거물은 프랑스에 있던 유대인들을 독일로 넘기는, 곧 죽음으로 몰아넣는 행위를 방조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법정에 서야 했다.

 

당시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고 있던 유대인들을 사지에 몰아넣은 행위는 형사 시효가 배제되는 비인도적 범죄였기 때문이었다. 모리스 파퐁은 10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는데 그의 나이는 아흔 살이었다. 무려 반세기 전에 나치에 부역한 일로 그는 재판정에 서야 했다.

 

<르 몽드> 기자가 한 중학생에게 “반세기나 지났는데 그를 재판정에 세운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하고 물었다. 이 학생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인간적으론 안 된 일이지만 역사를 위해 꼭 필요한 일입니다.”

 

만약 한국에서였다면, 그리고 그들이 일제의 식민지배에 부역하였다면, 페탱이나 모리스 파퐁은 어떻게 되었을까. 단언컨대 해방도 그들의 기득권을 털끝 하나 다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주류 계급으로 기득권을 유지하면서 자신의 과거를 하나씩 지워갈 수 있었을 것이다.

 

식민지 청년들에게 징병제를 찬양하며 일제의 침략전쟁에 지원하라고 권유하고 다닌 이 나라의 내로라하는 지도자들을 보라. 그들은 ‘반민족행위자’로 <친일인명사전>에 올랐지만, 그 허물은 해방 이후에 ‘조국 근대화에 이바지한 공적(!)’에 고스란히 가려졌다.

 

국군 고위 간부가 된 일본군이나 만주군 장교 출신의 부역자들은 어떠했는가. 간도 지역 내 항일세력 토벌을 위해 관동군이 만든 특별부대인 간도특설대 출신의 백선엽과 김백일은 지금도 한국전쟁의 영웅으로 기려지고 있다.

 

36년 피지배의 역사를 기억 속에서 지워 버리려는 일련의 시도들이 집요하게 이어지고 있는 2016년의 한국, 해방 71년의 광복절을 가늠해 보며 서가에서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을 꺼내 뒤적여 본다.

 

* 이 글은 이용우(동덕여대) 교수의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역사비평사, 2008)[서평 : 뉴라이트·조중동에 프랑스를 가르칩니다]와 2009년 한국프랑스문화학회 추계학술대회에 발표된 이학수(해군사관학교) 교수의 논문 “카뮈와 모리악의 그랑 데바- 대독 협력자 처벌을 중심으로-”를 참고함.

 

 

2016. 7. 22. 낮달

 



출처: https://qq9447.tistory.com/413 [이 풍진 세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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