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륭의 원사이드컷] 서울이랜드FC 신임 감독, '축구 천재' 김병수를 아시나요?
김태륭 입력 2017.01.11. 02:17 수정 2017.01.11. 09:10
천재 (天才)
[명사] 선천적으로 타고난, 남보다 훨씬 뛰어난 재주. 또는 그런 재능을 가진 사람.
“천재를 가까운 곳에서 본 적 있는가?”
정확히 15년 전, 고려대학교 축구부 신입생 시절 동계훈련 시작을 앞두고 나는 천재를 만났다.
“반갑다. 나는 오늘부터 너희들과 함께할 코치, 내 이름은 김병수다. 내 꿈은 미래에 한국인 최초로 유럽 팀의 감독을 맡는거야.”
나는 신입생답게 잔뜩 긴장했지만 처음 만나는 코치의 첫 인사가 마음 속에 그대로 박혔다.
“한국 최초로 유럽 팀의 감독이 꿈이라고? 이 사람은 도대체 뭘까?”
그날로부터 15년이 지났다. 2017년 1월 9일, ‘천재’ 김병수는 서울 이랜드FC의 감독이 되었다. 2003년 포항 스틸러스 코치를 거쳐 2008년 영남대학교 감독으로 부임한 김병수는 지난 시즌 대학무대 4관왕을 통한 대학 최초의 그랜드슬램(U리그 챔피언십, U리그 권역우승, 춘계연맹전, 추계연맹전, 전국체전)달성을 비롯하여 9년 간 무려 7개의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이 기간 동안 이명주, 김승대, 손준호, 신진호, 임채민 등이 배출되며 영남대는 2010년 이후, 한국 대학축구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을 기록한 팀이 되었다.
최근 2~3년 간 K리그 클럽 감독직에 공백이 생길 때 마다 몇몇 이름들이 거론됬다. 용인대 이장관, 성균관대 설기현, 고려대 서동원, 그리고 영남대 김병수. KBS 한준희 해설위원은 대학 축구 중계 때 마다 “U리그의 시메오네는 용인대 이장관, 과르디올라는 영남대 김병수” 라고 말할 정도로 확실한 색깔을 갖고 있었다.
그동안 해마다 여러 링크와 설이 난무했지만 김병수 감독은 영남대에 남았다. 아니 떠나지 못했다는 표현이 더 적합하다. 그 사이 K리그 클럽의 감독 자리는 대중에게 익숙한 ‘레전드’들이 차지했다. 신임 감독을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팀의 수뇌부들은 명성과 선수 경력에 보다 높은 점수를 줬다. 그래서 축구계 한 편에서는 김병수 감독의 프로 행에 대해 비관적인 시선도 있었다.
“실력은 인정하지만 아마 어려울거야.” 라는 의견도 많았다. 하지만 K리그 챌린지에서 창단 후 세 번째 시즌을 맞이하는 서울 이랜드FC는 과감한 선택을 했다. 구단의 공식발표가 나온 후, 축구팬들 사이에서 "김병수 SEFC"에 대한 많은 의견이 오가고 있지만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 그림을 보는 것이 꿈이었다.
은둔하던 ‘천재’가 드디어 세상 밖으로 나왔다. 아직 김병수가 누구인지, 왜 그를 천재라고 부르는지 대부분 공감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부터 시작할 이야기는 지난 15년 간 내가 직접 보고 듣고 느낀 감정들이다. 거짓도 과장도 없는 만화 같지만 현실에서 일어난 천재의 이야기이다. ‘천재’의 이야기를 믿으려면 우선 그 이야기 속에 나오는 몇 가지 거짓말 같은 이야기를 믿을 준비가 되어야 한다. 이 글을 빌어 하나씩 꺼내보려 한다.
# 선수 김병수
차범근, 김주성, 최순호처럼 축구 선수들은 주로 현역 시절의 업적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축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젊은 축구팬들은 축구선수 김병수가 낯설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은퇴하는 순간까지 그는 항상 소속팀의 왕이였지만 고려대 재학 4년 간 그가 출전한 공식전은 단 4경기, 몇 년의 올림픽 대표팀 경력과 일본 2부리그에서 4년 간 100경기 출장, 70골을 기록한 것이 현역 시절 업적의 전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축구인들은 그를 ‘10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하는 천재’로 기억하고 있다. 선수는 현역 시절의 업적으로 평가되지만 김병수는 그 업적이 필요 없을 정도로 본능적인 재능이 뛰어났다. 하지만 경신고 시절부터 시작된 발목 통증은 선수 시절 내내 그의 아킬레스건이 되었다. 발목 통증으로 인해 1년간 제대로 된 훈련을 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대학 시절 고연 정기전에서 교체 출전한 후반 20분 동안 1골 1도움을 기록하며 경기를 끝내 버리기도 했다.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대표팀을 지휘한 독일의 명장 크라머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내 축구 인생 50년 동안 처음 만난 천재다. 독일로 데려가고 싶다.”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아시아 최종예선 일본 전에서 추가 시간 터진 김병수의 결승골로 한국은 올림픽 본선 행을 확정했다. 하지만 또다시 재발한 발목 부상 때문에 본선에서는 그의 플레이를 볼 수 없었다.
대학 졸업 후 부상으로 축구를 떠나 방황하던 무렵, 94년 미국월드컵 예비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난 것을 우연히 발견하고 김호 당시 대표팀 감독을 찾아가 자신의 발목 상태를 설명한 뒤 스스로 대표팀에서 나오게 된다. 당시 김호 감독은 사라진 김병수의 근황을 찾지 못했지만 과거에 확인한 그의 천재성을 믿고 아무 연락없이 대표팀 명단에 그를 올렸다고 말했다. 김
병수의 발목 상태는 심각했다. 넉넉지 않은 환경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했고 성인이 되었을 때, 양 쪽 발목은 이미 만신창이 상태였다. 대학 4학년 때 비로소 처음 받은 수술은 28살의 이른 나이에 일본 오이타에서 은퇴할 때까지 무려 다섯 차례나 더 진행됬다. 보통 축구 선수들은 발목 인대가 0.1~0.3인치 늘어나도 큰 통증을 느끼는데 김병수는 첫 수술 당시 0.9 인치가 늘어난 상태였다.
한국 축구에는 늘 ‘천재’가 있었다. 때로는 언론에서 먼저 언급하기도 했고 김병수 처럼 그를 경험한 사람들이 자연스래 그렇게 부르기도 했다. 김병수를 천재로 부르는 이유는 그가 단순히 재능만을 타고 난 것이 아니라 동화나 신화에서 천재에게 운명적으로 주어지는 고난과 방황, 좌절과 상처를 의연하게 이겨내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과거 ‘선수 김병수’의 은퇴 무렵, 한 축구인의 인터뷰 문구가 또렷하게 기억난다.
“김병수의 은퇴로 인해 한국 축구는 50년 이상 후퇴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 지도자 김병수
1997년 일본 오이타에서의 마지막 시즌을 끝으로 김병수는 선수에서 지도자로 진화했다. 모교 경신고를 시작으로 1999년부터 포철공고에서 본격적인 코치 업무를 시작했다. 사실 당시 포철공고는 고교 무대에서 특별한 팀 이였다. 당시 고교 및 학원 축구는 지금과 같은 리그 제도가 아니였다. 연중 6~7개의 전국 대회가 있었는데 그 중 3월에 개최되는 전국 춘계 고교연맹전이 전국 150여개 팀이 총출동하는 가장 큰 대회였다.
그리고 2001년 춘계 고교연맹전에서 내가 소속된 서울체고는 3위를 차지했다. 8강 경기를 마치고 결승전에서 만날 가능성이 있는 포철공고의 경기를 동료들과 지켜봤는데 숙소에 들어와서 모두 한동안 말이 없었던 기억이 난다. 당시 우리를 포함한 대부분 팀들은 스위퍼 시스템을 사용했고 맨투맨으로 수비를 하며 압박 또는 라인 컨트롤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었다.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그게 뭔지도 몰랐다. 시즌이 개막하기 전부터 포철공고가 특이한 축구를 구사한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실제로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경기를 실제로 본 후, 우리는 모두 충격을 받았다. 전방 압박, 빌드업, 삼각형 형태의 패싱플레이, 포백을 기반으로 한 라인 컨트롤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축구와 전혀 다른 것으로 경기를 하며 상대를 압도했다.
이듬해인 2002년, 나는 고려대로 진학했고 그곳에서 때마침 고려대로 자리를 옮긴 김병수(당시 코치)를 만났다. 2002년은 모두에게 한일 월드컵 4강으로 기억되겠지만 나에겐 월드컵보다 스승 김병수와의 시간으로 기억된다. 딱 1년, 개월 수로 따지면 12개월도 채 되지 않는다. 동계 훈련 시작 무렵에 와서 11월 마지막 대회 직후 포항 코치로 떠났으니까.
하지만 지도자 김병수는 1년 동안 선수들의 마음을 훔쳤다. 나 뿐만 아니라 당시 고려대학교 축구부 소속의 모든 선수들은 특별한 것을 경험했다. 당시 고려대 축구부에는 스타 플레이어가 많았다. 차두리, 이천수가 대학생 신분으로 월드컵에 출전했고 김정우, 최성국, 김영삼, 박병규 등 청소년 및 올림픽 대표 선수들도 대거 포진해있었다. 한창 자신감 넘치고 멋도 부리며 자신의 축구에 대한 고집도 생길 시기였지만 김병수 코치의 말은 법이였다.
“그가 알려준대로 그라운드에서 행동하면 완벽한 승리가 따라왔기 때문이다.”
훈련은 하루에 한 차례, 정말 길어도 2시간을 넘기지 않았다. 훈련 프로그램도 매일 조금씩 달랐다. 우리는 밤이 되면 몰래 숙소를 탈출하려는 노력 대신 최대한 빨리 눈을 감아보려 했다. 잠을 빨리 자야 내일이 빨리 오고, 내일이 빨리 와야 또 훈련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일은 무슨 훈련을 하게 될까?”
스무살이 넘은 선수들이지만 축구를 처음 시작한 초등학교 시절의 기분으로 돌아갔다.
15시에 훈련이 시작하면 한 시간 전 부터 미리 운동장에 나왔다. 1분 이라도 빨리 훈련을 시작하고 싶었다. 훈련이 끝나면 선수들은 아쉬워했고 한 세트만 더 하자는 선수들의 아우성을 뒤로 하고 김병수 코치는 웃으며 유유히 운동장을 빠져나갔다. 훈련 분위기는 항상 집중되어 있었고 우리는 서로 잘 보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김병수 코치는 선수들에게 스트레스를 주지 않았다.
한 번은 내가 전술 훈련 도중 실수를 했다. 누가봐도 왼쪽으로 공을 보내야 하는데, 볼 터치가 좋지 않아 타이밍을 놓쳐 어쩔수 없이 오른쪽으로 공을 보냈다. 곧바로 김병수 코치는 크게 ‘스톱!’을 외치며 나에게 다가왔다. 모두가 제자리에 서서 나를 바라봤고 나 때문에 흐름이 끊겼기에 창피하고 두려웠다. 혼이 날 각오를 하고 고개를 들었는데 김병수 코치가 내게 말했다.
“태륭, 방금 선택한 오른쪽도 나쁘지 않았어. 그런데 다음에 비슷한 상황이 생기면 왼쪽으로 한번 보내봐. 그럼 더 다른게 보일거야.”
‘나쁘지 않았어!’
지금도 경기 해설 할 때, 내가 자주 쓰는 말이다. 이 말이 담고 있는 의미와 힘을 직접 경험했기에 자연스럽게 자주 사용하게 된다. 김병수 감독의 걸음걸이를 보면 여섯 차례 수술의 흔적이 느껴진다. 가끔 날씨가 화창한 날에는 선수들과 가벼운 패싱 게임을 함께 진행했다. 그리고 그 아픈 발목으로 국가대표급 선수들을 볼터치와 발목 스냅만으로 꼼짝 못 하게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공을 뺏지 못한 두리 형(차두리)이 김병수 감독을 힘으로 밀어내기도 했다.
지도자 김병수는 말그대로 축구에 미친 사람이였다. 노트북 크기의 작전판을 펼치면 4~5시간 동안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작전판을 응시하며 자석 알을 바둑을 두는 것처럼 움직일 때 그는 진심으로 행복해보였다.
팀 미팅이 많진 않았지만 한 번 할 때마다 많은 명언들이 탄생했다. 그의 말에 우리는 귀를 기울였고 미팅이 끝나면 저녁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스스로 공을 들고 운동장으로 향했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부글부글 타올랐기 때문이다.
“내 축구는 휴머니즘이다. 축구도 인간이 하는거라 감동이 있어야 한다.”
“개인은 평범하게, 팀은 특별하게.”
‘나’를 버리고 ‘우리’안에 들어오면 축구는 더욱 특별하고 재밌어진다.
“축구는 발도 머리도 아닌 가슴으로 하는 것.”
그가 포항 코치로 떠난 후 한동안 만나지 못했다. 다시 얼굴을 마주보고 인사를 나눈 건 그후 로부터 9년이 지난 2011년 이였다. 영남대학교 감독 김병수와 고려대학교 코치 김태륭으로.
그가 팀을 떠난 후 오랜 시간동안 우리 모두 그를 그리워했다.
"병수 쌤이 있었으면...“
“병수 쌤이였다면...”
내가 대학 3학년 때, 한밤 중 갑자기 김병수 선생님이 기분 좋게 취한 모습으로 숙소에 나타났다. 그 날 애들은 김병수 선생님을 놔주지 않았다. 그 중 몇 명은 울었다. 분명 기억난다.
내가 고려대 코치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해설을 시작할 무렵, 스승이자 영남대 감독 김병수가 조금은 편하게 느껴졌다. 돌이켜보면 20살 때 김병수 축구를 경험한 것이 오히려 어려움이 되기도 했다. 그의 후임으로 온 코치나 대학 졸업 후 활동한 모든 팀에서 지도자에 대한 나의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다. 내 축구 철학의 모든 기준은 김병수 축구에 맞춰져 있었다. 2012년 여름 무렵, 다짜고짜 용감하게 대구로 찾아가서 술 한잔 사달라고 했다.
그 자리에서 10년 동안 못한 얘기, 그동안의 그리움을 다 쏟아내며 갈증을 해소했다. 김병수 감독님은 새벽에 유럽 축구 보는 것을 좋아한다. 이제는 내가 새벽 중계를 하면 하프타임에 메시지를 주고 받으며 의견을 주고 받는다. 중계한 경기에 흥미로운 요소가 나오면 경기 종료 후 전화로 수다를 떤다. 나는 집으로, 감독님은 학교로. 아, 이제 감독님은 클럽 하우스로 가시겠지만.
영남대학교는 2008년 김병수 감독 부임 이후 대학 무대의 강호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김병수 감독은 해체 위기였던 팀을 맡아 2010년 춘계/추계 연맹전 우승을 시작으로 작년까지 대학팀이 차지 할 수 있는 모든 대회의 우승을 차지했다. 또한 FA컵에서는 내셔널리그 팀들을 꺾고 3년 연속 성남FC를 상대로 접전을 치르며 이슈가 되기도 했다.
프로팀을 상대로 해마다 다른 경기 스타일과 전략으로 성남을 곤란하게 했고 특히 2016년 FA컵에서 선보인 ‘멀티 포메이션’ (공격 시 포백, 수비 시 스리백)은 세계 축구의 트렌드를 오히려 앞서나간 전략이였다. 경기 후 영남대 출신의 성남 수비수 임채민이 한 말이 기억에 남는다.
“얘네(영남대)랑 경기하면 꼭 한 명이 비어요.”
아마 그 때 나와 내 동료들이 느꼈던 감정을 영남대 선수들도 느끼며 성장했을 것이다.
“병수 쌤 밑에서 축구를 새로 배웠어요.” 라고 영남대 선수들이 인터뷰에서 얘기 할 때 나도 모르게 살짝 질투가 났다. 이제는 서울이랜드FC 선수들이 그 느낌을 경험 할 차례다. 어쩐지 조만간 그 선수들이 부러워 질 것 같다.
# 서울 이랜드FC의 감독, 김병수
어느 분야에서나 한 사람에 대한 평가는 다른 경우가 많다. 모든 사람에게 인정 받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20살 때 김병수 감독을 알게 된 이후, 지금까지 지도자 김병수의 지도력에 대해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는 축구인을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심지어 비주전급으로 김병수 감독과 함께 했던 선수도 그의 지도 능력에 대해서는 엄지 손가락을 들어올린다. 그를 경험하지 못한 선수들에게 어쩌면 그는 동화 속에 존재하는 인물 같을 수도 있다. 아! 아니다. 모두가 어렵다고 했던 상황에서 서울 이랜드FC 감독이 된 지금 이 현실이 이미 동화 같은 이야기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지금까지 적은 모든 이야기는 100% 실화다.
작년에 K리그에서 이슈가 된 P급 지도자 자격증. 지도자 라이센스 중에 가장 레벨이 높은 것이 P급이다. 4년 전, 김병수 감독이 P급 라이센스를 취득 할 때 세계적으로 유명한 베테랑 강사 리차드 베이트가 강습회를 진행했다. FIFA에서 주로 활동하며 전 세계에서 P급 강습회를 진행한 리차드 베이트가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사람이 바로 김병수다.
“전 세계에서 지도자 강사로 40년 활동했지만 김병수는 특별한 재능을 갖고 있다.” - 리차드 베이트
지난 15년 간 김병수는 지도자로 활동했다. 그의 첫 제자들 중 몇몇은 이미 선수에서 은퇴하여 스승처럼 지도자의 길을 걷고 있고 성남에 입단한 김윤수처럼 이제 막 프로 커리어를 시작하는 제자도 있다. 해설을 하며 K리그 현장을 찾을 때 자연스럽게 선수들과 인사를 나눈다. 재미있는 사실은 ‘김병수 축구’를 경험한 김병수의 제자들은 초면에도 불구하고 유독 말이 잘 통한다. 시대와 팀은 달랐지만 같은 철학의 축구를 배웠고 그것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지니고 있으며 감독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고려대 선수 시절, 김병수 감독의 지도를 받은 이성규 (현 인천 유나이티드 유스 감독)는 김병수 감독의 프로 행 소식에 SNS로 소감을 전했다.
‘그라운드에서 순종만하면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경험한 선수 중 한 명입니다. 김병수 감독님 존경합니다. 감독님의 축구를 맘것 펼쳐주십시오. 응원합니다.’
신진호(상주 상무)를 비롯한 옛 제자들도 자신들의 SNS으로 소감을 전했다. 재미로 하는 이야기지만 김병수 감독의 제자들로만 팀을 꾸릴수 있다면 어마어마한 스쿼드를 만들 수 있다.
김병수 감독은 첫 공식 인사 영상에서 자신의 포부를 간단하게 밝혔다.
“여기까지 오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것이 경력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길 희망합니다. 볼을 소유하고 경기를 통제하며 신명나는 축구를 하도록 특별한 노력을 하겠습니다.“
서울이랜드FC는 3대 감독으로 김병수 감독을 선택했다. 구단의 권성진 지원실장은 "팀의 방향성과 가장 잘 맞는 김 감독을 선택했다. 서울 이랜드는 사람을 가장 중요시한다. 직접 경기를 하는 선수와 관람하는 팬 모두 만족할 수 있는 축구를 펼칠 수 있는 사람이 김 감독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어 "전술적으로 뛰어난 축구, 기존 한국 축구에서 볼 수 없었던 참신한 축구를 보여줄 수 있을 것" 이라며 기대감을 나타냈다.
‘
김병수의 SEFC’는 이번 겨울을 바쁘게 보내야 한다. 서울이랜드는 새 시즌을 앞두고 전력의 변화가 크다. 주민규, 김동철, 김동진 등 주축 선수들이 대거 이탈했고 아직까지 큰 이슈가 되는 영입 소식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외국인 선수 역시 전면 교체 대상이며 김병수 감독은 대폭 젊어진 선수단으로 프로 첫 시즌을 맞이할 가능성이 높다. 사실 시기는 썩 좋지 않다.
서울이랜드 선수단은 동계 프리시즌 훈련 둘째날 새로운 감독을 맞이했고 대구에서 영남대의 새로운 시즌을 구상하던 김병수 감독은 이제 남해에서 처음부터 새롭게 팀을 구상해야 한다. 또한 영남대 초창기부터 호흡을 맞춘 김현준 코치도 감독 이적에 따른 영남대의 혼란을 최소화 하기 위해 영남대에 남아 지휘봉을 이어 받을 예정이다. 사무국 역시 바쁘다. 새로운 팀에 팔요한 적합한 재료를 빠르게 찾아 식단 구성을 완료해야 한다.
이미 재정비를 마치고 프리 시즌에 돌입한 다른 팀들에 비해 스타트는 늦은 감이 있다. 2017시즌 K리그 챌린지는 과거 어느 해보다 치열한 경쟁이 예상된다. 클래식에서 강등된 성남FC은 박경훈 감독을 영입하여 강력한 전력을 구축했다. ‘조리뉴’ 조진호 감독을 영입한 부산 역시 탄탄한 스쿼드로 성남과 함께 리그 내 가장 강한 구성으로 평가된다. 나머지 8개 팀의 전력은 사실상 차이가 없다. 박경훈, 조진호를 비롯하여 김종부, 조덕제, 이흥실 그리고 김병수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3년 차 서울이랜드, 그리고 김병수 감독의 프로 데뷔 시즌이 궁금해진다. 김병수 감독이 스스로 말한것처럼 서울이랜드는 그의 경력에 끝이 아닌 시작이 되길 기원한다.
“축구는 감동입니다. 선수들을 먼저 감동시키고 그 원동력으로 팬들을 감동시키는 축구를 하 겠습니다.” - 서울이랜드FC 감독 김병수
첨부: 2002년 12월, 코치 김병수 고려대학교를 떠나며 제자들에게 남긴 편지
나 김병수.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보면 참 웃기는 일이 많았어. 내가 난데라며 잘난척 하던 너희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단다. 정규 알지? 광윤이는 어떠했고, 정우또한 어떠했냐. 그리고 성용이의 투정. 또 광현이는 심각하게 선생님에게 얘기했지. 대체 무엇이 잘못 되었느냐고....
명청하게 말이 없던 기원이 보다는 기특했다. 묵묵히 발전했던 영근이는 대견했어. 진우의 순진함에 가슴이 아프기도 했고, 재완이가 뇌가 부었다고 할 때는 어이가 없기도 했다. 석근이의 당당함은 나에게 기쁨을 주기도 했단다. 낙영이의 성장을 보면서 미래를 기도했고, 무엇보다도 모범생이었던 영삼이와 병규에 대한 나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아 기쁘기 그지 없다.
얼굴로 잘난척하는 수진이는 아직도 걱정이 태산이니 어찌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늘 자기들끼리만 어울려 다니는것도 마음에 안들고... 경환이는 머리 잘라라. 동헌이 성민이 그리고 용형이는 일년간 수고했다. 성국이는 마지막 수업을 기억하고, 길훈이 효진이는 경쟁력을 갖길 바란다. 민행아 용찬아 부디 열심히 해라. 병민이 승환이는 팀에 합류하는 정신이 부족한것 같아 걱정이다.
철호야 너는 스스로가 알거야 ....착한 철호야...... 그리고 착한 태륭이 작전판 만들어 주어서 고마워.
후 힘들다. 너희들을 통제하면서 힘이 들었고, 적어도 언젠가는 나의 뜻을 이해할거라 믿으며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려 노력했단다. 실수와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우리들의 기대치 즉 너희들의 발전을 나는 숨죽여 지켜 보면서 때론 나 역시 힘이 많이 들었었단다.
너희들은 모르거야 내가 가지고 있었던 사랑을 말이야. 가슴 절이며 구애했던 나의 열정을 너희들은 아마 모를거야. 항상 머리로 생각하지 말고 가슴으로 느끼길 기대하마.
내년에는 문제 없을거야. 너희들은 모르겠지만 이미 나는 너희들에게 축구를 하면서 나아갈 방향을 몸으로 느끼게 만들어 주었어. 절대로 용기를 잃지말고 정진하길 바래.
우리가 올해에는 성적을 못내었지만 그것은 예견된 일이었고 나는 너희들에게 미래를 위하여 근본적인것을 교육시켰기에 후회는 없어. 언젠가 먼 훗날에 우리가 다시 만날때에는 서로가 부끄럽지 않도록 각별한 노력 하기를.... 적어도 나는 너희들을 사랑했었어.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다가섰다는것을 잊지않길 바래.
그리고 언젠가 너희들이 잘난척하는것을 몸소 보고 싶기도 한 밤이야. 멋대가리 없는 자식들아 잘 있어...... 응제 현호 성민아 유종의 미를 거두었으면 좋겠다. 내게 있어 첫 졸업생인 너희들을 사랑한다. 정형이는 열심히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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