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죽이기' 방치하는 건,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일
[기고] 5.18을 세계화로 재생하고 복원할 때
2019.05.18 09:32:01
수구 카르텔이 광주 5.18을 짓이겼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은 사실은 성격이 단순하다. 복잡하게 비틀고 폄하하니 무슨 '괴물'처럼 보인다. 당시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하려는 음모를 꾸미며 민주주의를 압살하려 하자, 광주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이를 반대했고, 그러자 신군부가 잔인하게 총으로, 대검으로, 헬기 기총소사로 시위 시민을 학살한 것이 5.18의 시작점과 종착점이다. 여기에 무슨 사족이 필요한가.
18년 5개월 10일의 박정희 독재도 지겨운데, 또다시 정치군인들이 군부독재정권을 기도하려는 음모를 묵과할 수 없다고 맨주먹으로 저항하다가 총부리에 희생된 것이 5.18이다. 이것 이외 무슨 다른 설명이 필요한가.
그런데 진상을 감추고 조작하고 비틀었다. 40년 가까이 이렇게 집요하게 왜곡·조작하다 보니 일부 국민들은 거기에 세뇌된 측면도 있다. 구정권이 그렇게 갈라놓았다. 이 통에 5.18이란 실체는 만신창이가 되었다. 진실을 말해주어야 할 언론과 지식인이 침묵하고 외면한 사이 누더기가 되었다.
얍삽한 지식을 동원해 신군부를 위한 사족을 달아주고, 본질보다 디테일로 호도하고, 지엽말단을 본질인 양 흐리고, 괴상한 사설(辭說)로 비틀다 보니 진실이 지체되었다. 진상이 밝혀졌다고 하지만, 그래서 지금도 확연히 드러난 것이 없다.
전두환 군부세력이 권력을 찬탈한 때나 그 후 군부정권을 이어가던 때나 이들이 힘을 받은 것은 이런 언론과 부역 지식인의 침묵과 암묵적 지원 때문이다. 그래서 전두환 못지 않게 책임을 져야 할 측은 한국의 주력 언론과 병든 지성이다. 그들은 광주 5.18을 특정지역 폭동으로 한정시키고 고립시키는 데 동조했다. 군부독재 권력이 유포한대로 지역 분열 이간질의 유언비어와 흑색선전을 여과없이 보도하고 유포했다.
그러면서 이익을 함께 나누고, 권력의 한 축을 담당했다. 수구언론과 몰지각한 지성이 이렇게 이익집단으로 전락해버렸다. 그 결과 정의와 진실의 가치는 증발하고, 탐욕과 이익의 요설이 거리에 넘쳐났다.
극우세력 등 구세력이 민의의 전당에서까지 5.18 희생자를 '괴물집단'이라고 공격하고, '폭동'이라고 몰아붙인 것도 이런 언론과 병든 지성들이 침묵했거나 방관했기 때문이다. 극우단체와 함께 북한군 600명 침투설 등 폄훼를 넘어 조롱하는 수준에까지 다다랐어도 이들은 침묵을 넘어 퍼나르기까지 했다.
일부 종편과 인터넷 블로그와 SNS, 유튜브 등을 통해 온갖 억지와 궤변이 쏟아져 나온 것도 이들로 인해 용기를 얻은 탓이다. 객관적으로 정리된 역사적 평가마저도 외면하고, 이들을 부추기니 그들은 더욱 기고만장했다. 그러면서 외롭게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바보로 만들었다. 조금만 안을 들여다보고 진실 추구의 탐사보도와 연구를 했다면 아무 문제없이 역사정리가 되었을 사안이다.
피상적·미온적 진상규명이 반동을 키웠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이 집권한 때, 5.18 진실을 규명한다고 했으나 피상적이었다. 오히려 면죄부를 주었다. 민주개혁 정권은 민주적 절차의 함정에 빠져서 지능적인 보수 야권의 방해와 제동을 극복하지 못했다. 갈팡질팡 허둥댈 뿐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전두환 8년, 노태우 5년의 집권기간 동안 온갖 만행의 근거들을 은폐하고 폐기하고 변조했으니 성과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하긴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부 하에서도 폐기 작업이 자행되었으니 진실을 파헤치는 데 한계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1988년 신군부의 일원이었던 노태우 정권 시기에 열린 광주청문회 때, 군과 정보기관이 5.18 기록을 광범위하게 폐기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말하자면 광주청문회가 역설적으로 그들에게 5.18 폐기의 기회를 주었다. 진상을 밝히려는 민주진영은 순진했고, 철저하게 대비하지 못했고, 정교하지 못한 반면에, 구세력은 주도면밀하게 은폐·폐기의 노하우로 방벽을 쳤다.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탓에 5·18은 39년이 지난 지금까지 발포 명령 책임자 하나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 5·18 특조위가 '가짜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하지만, 성과를 거둘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따지고 보자. 아무리 언론을 통제하고 숨겨도 백주 대낮에 수백, 수천 명이 총맞아 죽거나 대검에 찔리고, 시신이 불태워지고 상당수의 시체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한국현대사 가운데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 비틀어진 채 묻힐 수 있는가. 수천의 영혼들이 구천을 떠돌고 있는데 망각의 강에 빠뜨려질 수 있는가.
광주를 말하면 직장에서 축출되고, 체포·구속돼 고문을 받은 뒤 몇 년씩 형을 산 시절이 있었다. 필자 역시 그런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살았다. 그래서 좋은 게 좋다고 그냥 넘어가면 좋겠다는 비겁한 생각도 했다. 피로증을 말하는 사람들의 짜증에 나도 모르게 순치되기도 했다.
그러나 가해자에 대한 어설픈 관용과 용서가 오늘의 망언과 왜곡을 낳았다. 군사반란자들에 대한 처벌이 유야무야된 것이 결과적으로 그들에게 용기를 주고, 내놓고 5.18 유린의 허가장을 내주었다. 김영삼 정부 시절 사형 구형에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전두환은 구속된 지 2년 만에 사면되고, 몇몇이 재판을 받았을 뿐, 현장지휘 책임자, 잔혹한 현장진압 실행자·성폭행 군인들은 단 한 사람도 체포되거나 처벌받은 적이 없다.
오히려 권력을 쥐고 특권을 향유하며 5.18을 조롱하며 떵떵거리고 살았다. 그런 세월이 자그마치 40년에 이르렀다. 이런 마당이니 전두환이 회고록을 통해 내놓고 '광주폭동'이라고 규정하고, 지만원은 “북한군 600명이 남하해 광주사태를 불렀다”고 국회의사당에까지 진출해 큰소리 친 상황이 아닌가. 처벌되지 않은 세력은 반드시 반격에 나선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똑똑히 보아왔다. 너무도 안이하고 소극적으로 대처한 결과다.
유럽은 역사를 왜곡하는 행위를 법으로 철저히 다스렸다. 독일은 2차대전 당시 잔혹한 짓을 한 전범자는 폐전국이었지만 끝까지 찾아내 처벌했고, 프랑스는 독일군에 협력했던 정치인은 물론 언론인, 문화인을 맨먼저 극형에 처하고(사회적 영향력이 더 컸다는 점에서), 지금도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도록 조치하고 있다. 곁에서 지켜보았던 사람도 동조자로 간주해 처벌했으며, 죄상이 드러나면 시제에 관계없이 징벌하고 있다.
첫 단추가 잘못 꿰어진 뼈아픈 역사를 우리는 갖고 있다. 해방 직후 친일세력이 이승만에게 정치자금을 대주고 협력하면서 그 반사이익을 얻어 고위직을 꿰차고 독립운동가, 또는 양심세력을 공격하는 굴절된 역사를 갖고 있다. 5.18 역시 그런 굴절 과정을 겪었다.
5.18 민주화운동은 단순하다
서두에서 5.18의 전개 과정은 사실은 단순하다고 했는데, 그 전개상황을 복기해보자.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고향의 후배이자 심복 김재규에게 암살되자 그 한달 후쯤 전두환 신군부가 12.12 쿠데타를 일으켜 군권을 장악하고, 군사정권을 연장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18년 6개월의 박정희 군부통치도 지겨운데 또 연장이냐며 전국의 대학생과 민주 시민들이 '군은 군으로 돌아가라'며 항의 시위를 벌였다. 군인은 군인의 본분을 지키기 위해 군으로 돌아가면 끝나는 일이었다. 박정희가 암살된 직후 민주적 절차에 따라 새 대통령을 뽑고, 새 정부를 구성하면 되는 것이었다.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혹은 또다른 후보자들)이 선의의 경쟁을 통해 국민의 선택을 받아 대통령이 되어서 국정을 수행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최규하 과도정부는 민주화 일정을 안갯 속으로 밀어넣고 민주화 일정을 자꾸만 지연시켰다. 허수아비 대통령 최규하 뒤에는 보안사령관이자 10.26합동수사본부장이자, 중앙정보부장 서리라는 헌법 자체를 무시한 전무후무한 권력을 꿰찬 전두환이 버티고 있었다. 그는 장막 뒤에서 최규하 목을 쥐어흔들면서 신군부정권 쟁취 시나리오를 펼쳐나가고 있었다. 시간을 벌면서 베일에 가린 채 제2의 군사독재를 획책하고 있었다.
이에 80년 봄학기가 시작되자 전국의 대학생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시위가 벌어졌다. 그 분수령이 10만명의 시위대가 모인 1980년 5월15일 서울역 시위였다.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대전 등에서도 대대적인 시위가 잇따랐다. 광주만 특별히 일어난 것이 아니다. 어느 자료에 보면 광주는 서울 대구 부산보다 오히려 조용했다고 한다. 공수특전단 병력도 광주에만 투입되었던 것이 아니다. 신군부는 5.17 자정을 기해 제주도를 제외한 전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서울의 주요 대학가와 총학생회장단이 모여있는 이화여대, 주요 거리, 지방의 주요 도시에 무장병력을 투입했다.
5월18일 오전 전남대 앞에 주둔했던 공수특전단 병력이 대치하고 있던 대학생들을 무자비하게 타격했다. 수많은 학생들이 다치고 끌려갔다. 이런 진압이 광주역 앞에서도 일어나고, 이때 시민 몇 명이 맞아죽었다. 이런 잔혹상을 지켜보던 시민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이는 1979년 10월16일 부산 마산에서 일어난 부마항쟁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때도 공수부대원들이 대거 투입돼 시위대를 무차별 공격했다. 광주와 똑같은 수법으로 진압했다. 차지철이 언명한대로 100만, 200만 부산·마산 시민을 죽여서라도 진압해야 한다는 박정희 군부는 공수여단이 부산·마산에 투입돼 민주화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시민들을 진압봉으로 때리고 군홧발로 짓이겼다. 이렇게 해서 부마항쟁을 꺾어버렸다.
광주의 정의감은 무력하지 않았다
그러나 광주는 달랐다. 부마항쟁과 같이 밟으면 끝날 줄 알았으나 불의를 보고 광주가 일제히 봉기해버린 것이다. 목숨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신군부는 부마항쟁처럼 제압될 줄 알았겠지만, 피를 보자 전 시민이 두 주먹 쥐고 거리로 나온 것이다. 길거리에 있던 구두닦이 소년, 지게꾼과 행상들이 먼저 나서고, 버스기사, 택시기사들이 나오고, 술집 종업원이 나오고, 할아버지 할머니들까지 맨주먹으로 나왔다. “공산군이 아니면 이렇게 어린 손자녀, 아들딸들을 죽일 수 없다”고 분연히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역으로 공산당으로 몰렸다.
며칠동안 신군부는 자국민을 상대로 무차별 살육전을 벌였다. 헬기의 기총소사를 비롯해 앉아 쏴, 서서 쏴 등 거총자격, 집중사격, 도망가는 시위대를 쫓아가 총검으로 찔러죽이고, 난자해 죽였다. 지시를 받은 듯 일부 군인들이 도망가는 여학생, 부녀자를 잡아 골목에서 겁탈했다. 그러나 겁먹을 줄 알았던 시민은 물러서지 않았다. 하나가 맞으면 열이 일어나고, 열이 죽으면 천명, 만명이 들고 일어났다. 결국 군인들이 광주를 빠져나갔다. 광주는 평화로운 대동 세상이 열렸다. 시민군이 무장해 치안을 살피고, 사망자를 안치하고, 부상자를 위한 헌혈이 몇백 미터 줄을 이었다. 그리고 단 한건의 강도사건도, 약탈도, 폭력사건도 없었다. 서로 주먹밥을 해나르며 민주주의를 갈구하는 서로를 격려하며 응원했다. 이때 광주는 철저하게 외부세계와 단절되었다. 무서운 고립이 있었지만 흔들림없이 사망자의 유가족을 위로하고 아픔을 공유했다.
그 열흘 후 공수부대가 중화기를 동원한 진압작전을 전개해 금남로와 전남도청을 접수했다. 시민들은 더 이상 피를 보지 않기 위해 진압군에게 길을 터주었다. 10일의 항쟁과 대동 세상으로 외부 세계에 광주의 메시지를 발송했다고 보고 휴대했던 총기류를 반납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광주 5.18은 좌절된 듯이 보였지만, 화려하게 부활했다.
이것이 사건의 전부다. 복잡할 것이 하나도 없는 사건의 전말이다.
'광주의 세계화',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구현하는 길
보수란 아량과 관용과 배려가 기본 정신이다. 그러나 한국의 자칭 보수는 잔인하고 야만적이고 표독스럽다. 보수가 아니라 탐욕에 눈이 먼 이익집단이기 때문이다.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이들의 겁박 때문에 광주는 어떤 피해의식 때문에 소극적·미온적으로 나왔다. 그것이 더 거친 반동의 빌미를 제공했다. 이들은 5.18 보상금의 프레임을 걸고, 돈 문제에 짜증이 나서 적극 나서지 못하는 광주 사람들을 묶어놓고 마음껏 패대기질 쳤다. 억울한 누명을 써도 5.18 관련자들은 어른스럽게 의연하게 대처한다는 것이 결국 이들의 야만성을 묵인해준 셈이 되었다.
유린의 수준은 좌시할 수 없을만큼 선을 넘었다. 용납할 수 없는 오만의 극치로 치달았다. 따라서 이제는 수준을 넘어선 자에 대해서는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도록 해야 한다. 관련 처벌법이 국회에 계류중이지만 통과시키도록 발벗고 나서야 한다. 한국당의 방해로 처리되지 못한다고? 여야의 정치공방으로 5.18 진상규명이 표류하고 있다고? 그것은 변명이다. 도대체 그들이 막을 명분이 무엇인가. 왜 막는가. 의지를 갖는다면 해결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이제는 상처받은 5.18을 재생하고 복원해야 할 때다. 그 순수가 꽃피어야 한다. 그것이 바른 역사로 가는 길이다. 그동안 움츠린 결과 음해와 모함의 언어들이 남발되었다. 그래서 그것이 사실인 양 호도되고, 지역분열의 도구로 악용되었다. 구세력은 5.18을 광주라는 특정 지역으로 가두기 위해 온갖 폭력을 서슴지 않았다. 그래서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 정면으로 당당하게 나서야 한다. 점잖게 대응하면 자기들이 옳은 양 더욱 설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5.18을 전국화해야 한다. 해당 지역에서만 행사를 할 것이 아니라 서울 부산 대구 대전 등지에서 지역대표들과 연대해 행사를 갖고, 학술대회, 사진전, 시민발언, 폭로의 시간들을 갖는다. 동시에 끊임없이 5.18 진상을 요구해야 한다. 내년 5.18 40주기가 기폭제가 될 수 있다.
5.18 당시 투입됐던 지휘관과 병사들을 찾아내 양심고백을 받는 작업도 병행해 나가야 한다. 그들 역시 정치군인의 정권야욕에 이용된 희생자들이다. 그런 면에서 13일 1980년 당시 미 육군 501 정보여단 광주파견대에서 미 군사정보관으로 근무했던 김용장 씨의 기자회견은 시사점을 준다. 전 광주 505보안대 허장환 특명반장의 기자회견도 5.18 진상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했다. 제2, 제3...제10의 김용장, 허장환이 등장해 5.18의 진상을 용기있게 증언하고 고백할 수 있도록 설득하고, 여론의 마당으로 이끌어야 한다. 그런 다음 피해자와 가해자가 화해해야 한다. 서로가 군부반란자의 피해자 아닌가.
범죄를 끝까지 은폐하고 반성하지 않는 군사반란자는 세상 끝까지 추적해 단죄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역사의 정명을 증명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다시 법을 손질하고, 범죄사실을 캐내고, 수사할 것은 다시 수사해야 한다. 필연코 언제까지 이럴 것이냐고, 짜증을 내는 세력이 있고, 여전히 음해하는 세력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뛰어넘지 않으면 역사의 진전도 없다.
다시 말하지만 다 지나긴 일, 그러니 잊자, 좋은 게 좋잖나, 덮고 가자고 하면 정의가 설 수 없다. 그런 자들은 때가 되면 다시 기어오를 것이다. 자기 과오를 인정치 않고 상황론을 들먹이며 역습해올 것이다. 나쁜 놈들에게 너그러울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반성의 절차 없이 넘어가면 그는 필시 다시 오만해질 것이며, 용기를 얻어 또 세상을 밟을 것이다. 그들은 피해자를 다시 무덤속에 쳐박을 것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반성하고 책임을 질 때 용서하자. 피해를 받아서 고통받는 이에게 어떤 위로가 될까를 성찰하는 자를 마음의 컴컴한 동굴에서 끄집어내 안아주는 것도 피해자의 도량이다. 용서에도 고통이 따르는 것이다. 용서는 가해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피해자를 위한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이 문제를 해결해나가기를 바란다.
끝으로 5.18의 세계화다. 자유 민주 평화 인권의 인류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운동이란 점을 세계에 선양해야 한다. 워싱턴 런던 베를린 파리 도쿄는 물론 아프리카 유럽 남미 등지에도 광주 5.18을 수출해야 한다. 민주주의를 갈구하는 나라에 '광주 민주정신'이 펼쳐져 민주화를 촉진시키는 기제로 작동하도록 견인하는 것도 5.18 민주화운동의 임무다. 온 인류가 자유 민주 평화 평등 세상이 구현되도록 선구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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