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O도 인정한 척추교정치료 자격증, 한국선 ‘무용지물’

동아일보입력 2014-04-01 03:00수정 2014-04-01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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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S 청년일자리, 규제개혁단이 간다] 
52년간 철옹성… 높아도 너무 높은 의료법 진입규제
올해 수도권의 한 한의원에 취업한 정모 씨(29·여)는 국내 대학에서 학부와 석사과정을 마치고 미국에서 관련 자격증까지 딴 척추 물리치료 전문가다. 6년 넘게 공부를 했지만 그의 학위와 자격증을 알아주는 곳은 많지 않았다. 대학을 다니며 개인적으로 틈틈이 따놓은 스포츠마사지사, 아로마세러피스트 자격증까지 내민 뒤 비정규직 물리치료사로 간신히 일자리를 구했다. 

그가 ‘찬밥’ 취급을 받은 것은 대학과 대학원에서 6년간 공부한 전공이 국내에서 정식 의료로 인정받지 못하는 ‘카이로프랙틱(chiropractic·척추교정치료)’이기 때문이다. 의사 치과의사 한의사 간호사 조산사만 의료인으로 인정하는 현행 의료법에 따라 카이로프랙틱 치료사는 ‘불법 의료인’으로 간주된다. 국제 공인 카이로프랙틱 자격증을 따려면 4200시간 이상의 전문교육을 받고 4단계의 까다로운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어렵게 이 국제 자격증을 따도 한국에서는 쓸모가 없다. 정 씨는 “교육부가 인정한 정식 대학교육을 마치고 국제 공인 자격증을 따도 불법 의료인 취급을 받는 게 현실”이라며 “함께 공부한 친구들 대부분이 의원급 정형외과나 한의원 성장클리닉에서 비정규직 치료사로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 선진국엔 있고 한국에는 없는 대체의학 일자리

규제 전문가들은 카이로프랙틱 같은 대체의학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는 의료법의 진입규제를 질 좋은 청년 일자리 창출을 막는 대표적인 ‘낡은 규제’로 꼽는다. 미국 등 선진국들은 환자들의 요구에 맞춰 의료 서비스를 세분하고 카이로프랙틱 등 대체의학에 대한 진입규제 장벽을 낮추고 있다. 미국은 의사와 한의사 외에도 카이로프랙틱 치료사, 침구사, 족부의사 등을 의료인으로 인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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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뚤어진 척추를 손으로 교정하는 카이로프랙틱은 ‘종주국’인 미국을 비롯해 영국 스웨덴 독일 이탈리아 등 유럽의 의과대학에 교육과정이 개설돼 있다. 국가 공인 자격증 제도를 두고 의료보험까지 적용해준다. 아시아에서도 일본과 홍콩, 태국 등이 카이로프랙틱을 합법화했다. 세계보건기구(WHO) 역시 2006년 ‘기본교육과 안전에 대한 지침’을 통해 카이로프랙틱 전문가를 의료인으로 인정했다.

○ 52년간 그대로인 의료인 진입규제 

한국은 양질의 대체의학 일자리가 들어설 곳이 없다. 1962년 만들어진 의료법의 의료인 규정은 52년간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의료법의 진입장벽을 낮춰 대체의학을 합법화하려는 시도는 의료계의 거센 반발과 부처 간 이견으로 번번이 무산됐다.

국회에서는 17, 18대 국회에서 카이로프랙틱 등 대체의학을 합법화하는 내용의 의료법 개정안이 세 차례 제출됐지만 의료단체들이 “유사 의료행위를 국가가 인정하면 국민보건에 위해를 끼칠 수 있다”고 반발해 소관 상임위원회인 보건복지위원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지난해 기획재정부가 의료 분야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해 카이로프랙틱 등 일부 대체의학 관련 민간 자격증을 국가 공인 자격증으로 인정하는 방안을 검토했지만 보건복지부가 반대하면서 흐지부지됐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의료법 진입규제가 완화되면 국내 대체의료시장이 2020년까지 19조 원 규모로 확대되면서 11만 개 이상의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날 것으로 추산했다. 미국처럼 인구 6000명당 카이로프랙틱 치료사가 한 명씩 있다고 가정할 경우 한국에도 8000개의 좋은 일자리가 생길 수 있다. 

○ “청년 일자리 관점에서 규제 대안 내놔야” 

성형수술 등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국내 의료관광을 다각화하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스파나 요가 등을 의료관광 상품으로 키운 태국이나 인도처럼 카이로프랙틱 등 한국이 강점을 갖고 있는 대체의학 분야를 육성해 싱가포르 등 의료관광 선발 국가를 추격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주무부처인 보건복지부는 난색을 보이고 있다. 권덕철 복지부 보건의료정책관은 “대체의학 인정에 대해 의료계의 반발이 너무 심하다”면서 “국내에서는 의료분야의 전문화가 충분히 이뤄진 만큼 국가 공인 자격증을 확대하면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정한석 한서대 건강증진대학원 교수는 “더 늦기 전에 일자리 창출과 의료서비스 발전을 위한 사회적 대타협과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 카이로프랙틱(chiropractic) ::

그리스어로 손을 뜻하는 ‘카이로’와 치료를 뜻하는 ‘프락시스’의 합성어로 손으로 압박을 가하거나 자극해 비정상적인 척추를 교정하고 억눌린 신경을 풀어주는 치료법이다. 1895년 미국에서 시작됐다.

유근형 noel@donga.com·문병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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