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특한 철학으로 축구를 예술로 만들다 [2011.07.11 제868호]
[S라인] 15년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아스널을 이끌며 고유의 축구 철학 쌓아온 아르센 벵거 감독을 통해 엿본 감독, 그 존재의 이유
“국가대표 감독들은 허락 없이 차고에서 차를 빼내가는 사람이다. 그들은 열흘 동안 차를 타고는 기름도 채워놓지 않고 벌판에 내팽개쳐버린다. 우리(클럽 감독)가 차를 다시 가져오지만, 이미 고장나 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나 그들이 다시 와서 또 가져간다. 차가 잘 정비됐다고 기뻐하면서 말이다.”

잘 짜인 경기를 완성하는 지휘자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잉글랜드 프리미어의 명문 클럽 아스널의 아르센 벵거 감독이다. 그는 국가대표팀 감독 대신에 클럽 감독을 최고의 자리로 여긴다. 벵거 감독은 1996년 이후 지금까지 아스널을 15년 동안이나 맡고 있는데, 이 긴 세월 동안 수많은 선수와 생활하고 가르치며 ‘자신의 팀’을 끝없이 리빌딩해왔다. 국가대표팀은 이렇게 하기가 어렵다. 한정된 자원(한 국가의 선수들)을 한정된 시간(소집 훈련 및 경기)에 급히 모아서 조련하는 대표팀보다 지구 전역에서 원하는 선수를 찾아내 오랫동안(벵거의 경우 15년이며, 맨유의 퍼거슨은 무려 25년) 독특한 축구 철학으로 비범한 경지를 향해 상승하는 것은, 바로 클럽 감독만의 고결한 책무이자 아름다운 권리다.

어찌 보면, 감독 없이도 축구는 가능하고 지휘자 없이도 연주는 가능하며 뚜렷한 정치 철학이 없어도 대통령까지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로 인한 비극적 사태는 상상을 초월한다. 지휘자 없는 연주는 시작과 끝이 동일할 뿐(그마저도 틀릴 수 있다) 그 사이의 화성 진행, 음표의 보폭, 셈여림의 농도 등은 마치 화가 나서 구겨 던진 카드대금 청구서처럼 혼탁할 뿐이다. 정치 철학이 부재한 대통령은, 아뿔싸 우리 모두가 몇 년째 목격하고 있지 않은가.

다시 벵거 감독의 말을 들어보자. 지난 2003∼2004시즌에 전무후무한 프리미어리그 ‘무패 우승’, 즉 단 1경기도 패하지 않고 우승해버린 이 감독은 말한다. “내가 추구하는 플레이가 단 5분만이라도 실현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이 한마디에 감독의 존재 의미가 담겨 있다. 중요한 것은 역시 철학이다. 스포츠도 다르지 않다. 철학이 부재한 감독, 그저 자신의 옛 명성이나 과거의 훈련 기억 따위에 의존해 “내가 이거저거 다 해봤는데…” 하며 선수들을 다그치는 감독은, 더 이상 감독이 아니다.




집으로 돌아가면 뭘 하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축구 중계를 시청한다’고 대답하는 벵거는 또 이렇게 말한다. “나는 삶에서 어떤 것이든 정말로 잘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면 그것은 예술이 된다. 당신이 어떤 책을 읽고 훌륭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면 작가는 당신 안에 있는, 이제껏 당신이 스스로 발견하지 못했던 어떤 감동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작가가 당신 삶에 흥미를 불러일으켜준 것이다. 만일 당신이 동물처럼 살아간다면 당신 삶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과연 무엇인가. 우리 일상이 흥미로운 것은 우리가 그것을 예술 수준으로 끌어올리려 하기 때문이다. 축구도 그러하다. 나는, 바르셀로나의 경기를 볼 때면 그들의 축구를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펍은 내 축구 철학을 완성한 곳”

흠흠, 조금 난삽하게 들리지만 그래도 조제 모리뉴보다는 낫다. 모리뉴 감독은 언젠가 자기 팀(레알 마드리드)의 1실점에 대해 우주 운행과 지구 자전과 뜻대로 되지 않는 인간 실존의 부조리함을 뒤섞어 장황하게 말한 적이 있다.

아무튼, 벵거 감독은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의 경지를 위해 아스널의 젊은(어린) 선수들에게 무릎 아래로 흐르는 패스워크를 주문했고,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공을 두 번 이상 건드리지 않도록 조련했으며, 상대 골문을 향해 덮어놓고 세게 차는 녀석들의 공격 성향을 다독였다. 그에게 슛은, 골문의 허점을 향한 최후의 부드러운 패스였다. 격렬한 몸싸움과 놀라운 전진 돌파와 과감한 백태클이 첩혈쌍웅으로 펼쳐지던 잉글랜드 무대에서 그는, 자신의 어린 선수들을 곡예에 가까운 부드러운 몸놀림과 사방으로 눈이 달린 감각의 테크니션으로 만들었고, 기어코 무패 우승! 온갖 우려와 비난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가를 이룬 것이다.

“인생에서 거대한 성취를 이룬 사람들은 언제나 처음에는 미치광이 취급을 받았다. 그들이 그런 미친 생각을 하기 전까지는 세상이 좀더 바보 같았다.”

멋진 표현이다. 독자 중에 최고경영자(CEO)이거나 CEO를 꿈꾸거나 CEO를 보필하는 사람들이 갑자기 포스트잇을 뜯어 급히 베껴 적는 소리가 들린다. 과연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제2대학교대학원 경제학 석사 출신다운 말인데, 벵거 감독이 늘 이렇게 배운 티를 내는 사람은 아니다. 서정주 시인의 표현을 슬쩍 빌리건대, 그는 “나를 키운 곳은 8할이 펍(Pub)”이라고 말한다. (펍은 싼값에 맥주를 마시고 사람을 만나고 떠들썩하게 축구를 보는 곳인데, 프리미어리그의 입장권과 부대 비용이 급상승해- 4인 가족이 한 경기를 만족하게 보려면 50만원 이상 든다- 서민 팬들이 펍에 몰려간다.)

“펍은 내 축구 철학을 완성한 곳이다. 대여섯 살 때부터, 펍에서 자라는 것만큼 심리학 교육에 더 좋은 장소는 없다. 그곳에서 온갖 사람을 만나고, 어떻게 사람이 지독해지는지 터득할 수 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서로에게 ‘넌 거짓말쟁이야’라고 말한다. 이렇게 펍은, 어릴 때부터 사람들의 마음에 대한 현실성 있는 심리학 수업을 가르친다.”

벵거 감독은 펍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펍에 몰려드는 집합적 열정을 말하는 것이며 그 열정의 비적대적 뒤섞임과 허공으로 솟구치는 혼란함의 비정한 아름다움, 곧 축구의 모순에 가득 찬 열정을 찬양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패하는 불가해한 축구 세계

자, 그런데 이런 벵거에게도 수모의 나날이 없지 않았다. 가장 가까운 사례는 지난 3월9일 유럽챔피언스리그 16강 2차전 바르셀로나 원정 경기. 경기 결과는 바르셀로나의 3-1승. 그런데 내용은 더 충격적이다. 그날, 벵거의 아스널은 공격 욕망이 거세된 팀이었다. 바르셀로나는 90분 동안 724번의 패스와 17개의 슈팅을 날렸다. 반면 아스널은 겨우 199번의 패스에, 슈팅은? 단 1개도 날리지 못했다. 축구? 모순덩어리요, 불가해한 세계다.

정윤수 스포츠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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