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림으로는 일 못해요. 그게 일하는 사람의 습관이에요 | ||||||||||||||||||||||||||||||
20년 갈아 닦아야 겨우 초보 벗어나 기술자라 할 수 있다 전통인 듯 전통 아닌 것들이 전통처럼 자리한 인사동을 바꾸자 [노동이 머문 오래된 공간을 찾다]인사동 표구 거리와 묵호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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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거리를 거닐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외국인들은 이 거리에서 대한민국의 ‘어떤’ 전통을 만날까. 전통인 듯 전통 아닌 것들이 전통처럼 자리하고 있지는 않은가. 아니 자리해야 할 전통은 거리 밖으로 내몰리고 있진 않은가. 인사동거리의 이 야릇한 전통. 바다 건너 찾아온 이들이 인사동거리에서 만난 이 야릇한 전통을 생각하며 한 남자를 만났다.
열다섯 손용학. 강원도 묵호가 고향인 손용학은 가정 형편이 어려워 다니던 중학교를 그만두고 서울로 왔다. 1970년이었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너무 거창하고 사치스러운 상경 이유다.
“먹여 주고 재워주기만” 하면 궂은일을 가리지 않고 일할 자세로 서울에 온 것이다. 일자리는 생존이었다. 청량리시장 과자 도매상을 거쳐 청계천 철물점에서 심부름을 하던 그는 표구사에 밀가루를 납품하던 이웃 아저씨의 소개로 <동산방>과 인연을 맺었다.
1920년대 세워진 <박당표구사>와 1930년대 문을 연 <문화사>가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이후까지 맥을 이었다면, <상문당>, <영일표구사>, <상신당>, <동산방>, <낙원표구사>는 한국전쟁 이후 세워진 표구사다. 이곳에서 표구를 배운 이들이 이후 한국 표구업계의 굵직한 계보를 형성한다.
표장 기술자로 조선시대 말 벼슬까지 지낸 한응엽이 1910년께 세운 <수송표구사>는 해방 이후에도 맥을 이었다. 그런데 1980년대 화랑으로 전업했으나 운영이 어려워 결국 문을 닫았다. <동산방>은 현재 표구는 하지 않고, 화랑으로 이름을 이어 오고 있다. 1925년 열 살적 표구사에 처음 들어간 김용복처럼 1970년 열다섯 살 나이로 처음 표구를 배운 손용학도 <동산방>에서 밥하고, 청소하고, 심부름하고, 풀을 쑤는 게 일과였다. “말이 열다섯 살이지 중학교 다니다 올라 왔으니 체격이 작은데, 풀 쑤는 솥이 커요. 그 풀 쑤기가 힘이 보통 드는 게 아니 거든. 그러니까 처음에는 그나마 혼자서 못하고 보조로 있다가 위의 선배가 니 혼자 쒀라. 그렇게 시키고 그러지. 큰 솥으로 하루에 한 솥 씩 쑤는데, 매일 일과가 정해져 있어요. 풀 쑤는 것, 오늘 풀 쑤어 놓으면 내일 아침에 풀을 걸러요. 풀이 묵같이 딱딱하잖아. 그럼 덩어리가 지니까 채에다 거른다고. 아침에 할 일이 많아요. 아침에 밥 해야지. 청소해야지. 연장들 챙겨줘야지.”
밀가루가 담긴 큰 통의 물을 날마다 갈아주는 일도 손용학의 몫이다. 당시 <동산방>에는 일곱 명이 일했고, 많을 때는 열 명이 넘기도 했다. 이들의 끼니를 손용학이 책임졌다. 낙원시장에 가서 밑반찬과 국거리를 사서 밥상을 차렸다. “밥할 때 밥그릇 수가 장난이 아니었거든. 낙원시장이 가까우니 매일 시장에 가서 밑반찬 대충 사고, 찌개꺼리 준비하고, 김치 같은 것도 사다 먹고 했어요. 날마다 장보러 가니까 시장 가게 할머니가 혀를 차며, ‘아이고! 참 날씨도 추운데 날마다 오고’ 그랬어요.”
풀을 쑬 때 장작을 쓰지 않은 게 그나마 손용학에게는 복이었다. <동산방>은 6층짜리 건물을 새로 지어 들어갔던 터라 프로판가스를 연료로 썼다. 아침밥 짓기로 하루를 시작한 손용학은 바쁠 때는 새벽 2시까지 일을 하기도 했다.
“일이나 빨리 끝나면 괜찮은데, 일이 바쁠 때는 열두 시 한 시, 심지어 두 시까지 일한 적도 있어요. 그렇게 보통 3년을 (잔일)하는데, 밑에 시다가 안 들어오면 계속해야 해.”
사람 손이 많이 딸린 때라 손용학은 1년이 지난 뒤 본격적으로 표구 일을 배울 수 있었다. 처음에는 초배 일을 시킨다. 초배는 액자나 병풍의 틀에 종이를 붙이는 일이다. 작품에 종이를 붙이는 배접을 해야 기술자 소리를 듣는데, 최소 3년 넘게 초배나 재배를 하며 풀칠을 익힌 뒤에 배접은 한다.
표구 기술자 소리를 듣는 일은 쉽지 않다. 어떤 기술을 스무 해 가량 익혔다면 ‘왕 고참’ 소리를 들음직한데, 표구업계에서는 “한 이십 년 해도 겨우 시다바리(초보) 면했다”고 한다.
표구 기술자가 되려면 풀과 종이에 대해 도통해야 하는 것은 물론 작품을 채색한 안료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한다. 배접을 하기 위해서 풀칠을 하거나 물을 뿌렸을 때 종이에 안착이 되지 않은 먹이나 물감을 쓰면 확 번지거나 변색이 되어 작품이 훼손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풀칠도 마찬가지다. 어떤 종이를 썼느냐, 혹은 어떤 형태의 표구를 하느냐에 따라 풀의 농도가 다르다. 일반적인 기준은 있지만 새로운 종이와 안료들이 나오기 때문에 그야말로 몸으로 체득하지 않으면 실수를 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표구는 선배가 가르쳐 준다고 해서 기술을 배우는 일이 아니다.
일제강점기에 기술을 배운 김용복도 “기술을 배우는 데에는 어느 법도가 있거나 선배들의 지도가 있었던 것이 아니고 배우는 사람이 선배들의 표구 작업을 어깨너머로 배워야 했다”고 말한다.
표구 기술이 이론적 체계가 없어서 직접 기술 전수를 하지 않은 게 아니다. 표구란 표구 기술만 익혀서 되는 일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롭게 창작되는 작품에 맞춰 그때그때 변화무쌍한 기술을 발휘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름답데 돋보이지 않아야 하는 미가 있다. 돋보여야 할 것을 더욱 빛나게 하는 미를 갖추되, 자신은 결코 보이지 않으면서 자신의 자리를 아름답게 지키며 존재하는 패러독스의 미’가 표구이지 않는가. 풀칠이 스무 해를 배울 만큼 어려운 기술이냐는 도발(?)적인 질문에 손용학은 차분히 답한다.
“그거 가르쳐줘 봐야 소용없어요. 본인이 알아서 터득해야지. 처음에 코치는 하겠죠. 풀 좀 되게 해라. 하지만 결국 자기가 소화를 해야지, 누가 가르쳐주지 못하잖아요. 그래서 경험이 중요한 것이죠. 그리고 새로운 것에 대한 적응력이 빨라야 해요. 요즘은 벼라별(별의 별) 재료에다 다 해가지고 와요. 예전에는 동양화, 물감, 분채, 석채, 아교 섞어 쓰는 두세 가지였는데, 지금은 이름도 모르는 희한한 물감에다가, 심지어 요즘 애들은 거기다 커피를 섞는다. 이렇게 해야 자기 느낌과 표현이 제일 좋다고 그래서. 이처럼 재료들은 수시로 변하고 그러기 때문에, 딱 만져보고, 이것은 풀이 어느 정도야 되겠다, 알아야지. (풀 농도) 가르쳐야 소용없어요. 그게 안 되면 무조건 풀을 되게 쓰거든요. 그런데 된풀을 쓰면 나중에 작품을 수리할 때 수리하기가 어려워진다는 거지. 분리가 안 되기 때문에. 언제든지 필요할 때 배접은 분리가 되어야 해요. 그냥 풀칠해 붙이기만 하는 것 같으면 기술도 아니지.”
배접을 한 작품이 필요할 때 분리가 되어야 하지만 분리하기 전까지는 절대 떨어지지 않고 붙어 있게 하는 게 기술이다. 표구 학원에서 기술자를 양성한 때도 있었다. 3개월 만에 기술자가 되어 표구사를 여는 실정이었다. 박순원의 「우리가 잃어버린 고급전통문화」에 나온 내용이다.
미숙한 표구사가 계속 양산되었고 심지어 3개월만 배우면 월수 100만원에 3년 기술을 취득할 수 있다는 허구에 찬 감언이설에 속은 표구학원생이 계속 배출되었다. 〔……〕 손이 가는 풀 종류는 지업사에서 판매하고 있는 도배용 풀로 대치되었고 바르면 된다는 식의 표구가 성행하는 가운데 후진적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인사동 거리에서 장인의 정신을 배우며 표구를 익힌 손용학은 이런 풍토가 안타깝다. 급속한 산업화는 빠르고, 간편하고, 잔득 만들고, 많이 파는 노동을 ‘실용’이라는 이름으로 바꿔 천박한 노동을 강요하고 있다. 오래 쓸 수 있는 전자제품을 만들면 망하고, 빨리 빨리 바꾸도록 소비 욕망을 추동해야 경쟁력 있는 기업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처럼. “초배, 재배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당기는 힘의 균형이 안 맞아. 그럼 (액자 틀) 배가 뒤로 볼록 나와요. 초배를 세 번 정도 앞뒤를 맞춰 해야 하는데, 초배를 달랑 한번만 했을 때는 확 휘게 되어 있어요.”
병풍이나 액자 틀에 초배만 했는지, 재배를 했는지, 작품을 붙일 곳에 ‘공간 띄우기’를 했는지는 겉모습만 봐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모든 공정에는 이유가 있다. 빠르고 간단하게 할 줄 몰라서가 아니라 귀찮고 힘들더라도 빼먹지 말고 해야 할 이유.
“사실 이거 액자 하나 초·재배 하는데 종이 값이 몇 백 원이에요. 천원 미만. 그런데 한 번 바르는데 시간을 잡아먹는 거예요. 시간이 아까운 거야. 일 하나를 더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한 번 간편하게 가는 쪽으로 길을 들이면 다시 이쪽으로 오기가 힘들어요. 나빠졌다 좋은 쪽으로 오기 힘들기 때문에 나는 그렇게 안 가려고 그러죠. 그 다음에 내가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누구보고 똑바로 하라고 하겠어요.”
고객들이 표구 가격을 깎으려고 하는 데도 문제가 있긴 하다. 좋은 재료를 구하기 힘든 실정도 있다. 하지만 손용학은 가격은 깎아 줘도 품질을 깎지는 못한다. 양심이자, 습관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서 제 양심상으로 그렇게 못해요. 깎아 줬다고 해서 그런 식으로 날림으로는 일 못해요. 그게 습관이에요. 일하는 사람의 습관이에요. 그 안에 꼬박꼬박 발라줘야 되는 사람은 뭔가 중간에 (공정을) 빼먹고 안한 느낌이 들어서…… 저는 꼬박꼬박 다 발라주거든요.”
표구 장인들은 어깨 너머로 ‘기술’을 배운 게 아니라 일하는 사람의 ‘습관’을 배운 거다. 그 습관은 기술자의 본능으로 뼛속에 새겨진 노동의 고귀한 정신이기도 하다. 손용학만이 아니다. 표구를 제대로 익힌 이에게는 혈통처럼 이런 정신이 흐르고 있다. 김산호도 『장황의 기록, 손의 기억』에 담긴 인터뷰에서 표구 기술자는 예술인이라며, 장인 정신을 중요하게 여겼다.
“예전에 우리 집에 있던 기술자들이 자신을 ‘풀쟁이’라고 부르는 걸 본 적이 있어요. 왜 스스로를 격하시키느냐고, 우리는 ‘예술인’이라고 말했죠. ‘무슨 예술이요?’라고 되물을 때 대답했어요. 선과 각의 예술이라고. 그러니 예술가다운 정신을 가지고 작업을 해야 하지 않겠어요? 장인 정신이 중요해요. 겉과 속이 같아야 해요. 후대에게 작품을 전달한다는 정신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장인들의 말을 믿어줄 수 있어야 해요. 안 그러면 너무 고독한 길이니까요.”
<낙원표구사>의 이효우는 ‘표구’ 대신 조선시대에 썼던 ‘장황’이라는 말을 살리자고 한다. ‘표구’라는 말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들어온 말이다. ‘장황’을 쓰자는 의미는 일본식 표현을 없애자는 뜻도 있지만 표구 장인의 정신이 오늘날 절실하다는 안타까움이 담겨 있는 듯하다. 『장황의 기록, 손의 기억』에 나온 이효우의 목소리를 듣는다.
“6-70년대가 되면 기술이 없이도 표구사를 열 수 있는 시대가 되었어요. 그러다가 일감이 없어지니까 기술이 발전하는 게 아니라 가격 깎는 경쟁이 되었어요. 표구가 위기를 맞은 거죠. 그러면서 오히려 표구를 단순히 병풍, 액자, 족자를 꾸미는 일을 하는 것으로 인식하지 말자. 표구의 본래적 가치를 찾자는 생각까지 하게 되는 거 같아요. ‘장황’으로 돌아가자는 생각이 더 드는 거죠.”
2002년 인사동 언저리에 <묵호당>을 개업한 손용학은 ‘문화재청 지정 기능자’이며, <사단법인 한국표구협회> 이사장이기도 하다.
<동산방>에서 나온 손용학은 인사동 표구업계를 대표하는 <낙원표구사>에서 1986년부터 일을 했다. <동산방>에서 장인의 기량과 정신을 익혔다면 <낙원표구사>에서는 전통표구에 대한 새로운 눈을 떴다.
“전통 표구 방식에 대한 관심을 많이 갖게 되었어요. 고고학을 연구하시는 분들이 옛 서적을 가져와서 수리를 많이 맡겼거든요. 낙원표구사 이효우 사장님은 제가 문화재 등 옛 것에 관심을 가지니까 자기가 아끼던 카메라가 있어요.
그때 당시에는 꽤 고급 카메라 같은데, 그걸 빌려주시고, 슬라이드 필름으로 기록을 남기게 필름도 미리 사다가 준비해주시며, 자료 필요하면 찍으라고 도와주셔서 그런 쪽의 연구를 많이 했어요. 옛날 두루마리 해체하면서 사진 쭉 찍어서 기록하고.”
병풍을 접을 때 쇠로 된 경첩 대신 종이 날개 방식의 ‘돌쩌귀’를 처음 만들어 사용한 게 우리 선조들이다. 돌쩌귀는 전후를 마음대로 접을 수 있고, 연결부분이 표가 나지 않고, 연폭 연결 병풍 형태의 표장이 가능하고, 연결 부분이 치밀하여 방풍의 효과를 높일 수 있다. 전통 방식을 찾고, 계승하려는 까닭은 옛 것이라서가 아니라 훌륭하기 때문이다.
표구에 평생을 몸담아 온 손용학과 같은 장인은 ‘장식으로 표구’를 넘어 문화재 보존과 복원의 측면에 애를 쓴다. <묵호당> 상호 옆에 ‘지류 문화재 수복 연구소’가 함께 적힌 까닭도 이와 다르지 않다. 손용학은 요즘 인사동 표구 거리를 살리는데 관심이 높다. 인사동거리가 말뿐인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전통문화의 거리에 머물러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표구사들의 공동 작업장을 인사동에 만들어, 초배하는 모습, 배접하는 과정, 병풍을 만드는 광경을 관광객들이 볼 수 있게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한다.
손용학의 바람은 또 있다. 작품을 감상할 때 표구의 아름다움을 잊지 말아 달라는 바람. “사람들이 작품을 사진 기록으로 남길 때 보면 액자든 족자든 그런 건 같이 안 찍어. 그게 불만이야. 표구되어 있는 작품 전체를 찍어야 예술을 제대로 감상하는 거지. 그래야 표구의 안목도 높아져. 족자가 참 멋있더라. 액자 표구의 비단과 비율이 멋있더라 하면서 말이지. 그림만 책에 실어야 하는 경우는 어쩔 수 없지만 관리하고 기록하는 거면 표구를 같이 찍었으면 좋겠어.”
그렇다. 표구는 실존한다. 작품의 부속물이 아니라 작품이다. 그래서 표구는 예술이다. 패러독스에 갇힌 미美가 이제 인사동의 주인으로 서야 하는 건 아닐까. 오늘의 인사동거리를 노동의 땀으로 일군 표구사들이 오르는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해 자꾸 언저리로 밀려나는 현실이 서럽다. 전통이란 ‘전통’이라는 글자를 앞세운 상점들로 지켜지고 빛나는 게 아니다. 그 전통을 만든 땀을 소중하게 여기고 빛낼 때 가능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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