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나는 노다지인 줄 알고 '가상화폐'에 이렇게 속았다" 3/31
가상화폐는 각국 정부나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일반 화폐와 달리 일정한 규칙에 따라 가치가 매겨지는 전자화폐의 일종이다.실물 없이 인터넷상으로 거래되는 비트코인(bitcoin)이 대표적 가장화폐다.
이더리움은 주식시장처럼 가상화폐 거래소에서 돈을 주고 직접 사거나 비트코인처럼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암호를 풀면 그 대가로 얻을 수 있다. 이렇게 가상화폐를 만드는 과정을 광산업에 빗대 '캔다'(채굴·mining)고 하고, 이더리움과 같은 가상화폐를 생성하는 장치를 채굴기라 부른다.
당시 이더리움 1개의 시가는 2만원, 채굴량은 한 달에 코인 11개였다. 황씨는 이를 근거로 조씨에게 투자를 권유했다. 조씨는 "미심쩍었지만 '2년 안에 원금을 회수할 수 있고, 투자금을 날리면 물어주겠다'는 황씨 말을 믿고 지난 3월 채굴기 1대 값인 284만원을 투자했다"고 말했다.
조씨는 이때부터 매주 전주시내 커피숍 등에서 열린 투자설명회에 격주간 참석했다. 미국 서부 개척시대의 '골드러시'처럼 뭔가 일확천금을 보장해 줄 것 같은 가상화폐라는 신세계에 빠져들었다. 그는 "투자설명회 때마다 8~10명이 모였고, 매번 절반 이상은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고 했다. 강사는 M사 한국지사의 사업자인 이모(40대·여)씨였다. 조씨에 따르면 채굴기를 산 투자자를 1명 이상 끌어모은 사람은 속칭 '사업자'로 불린다.
사업자는 본인이 거느린 투자자 수에 따라 군대 장성 계급처럼 파이브스타(5성 장군)·포스타(4성 장군) 등으로 나뉜다. 포스타는 자기 밑으로 채굴기를 1000대 이상 확보한 사업자를 말하는데 사업자 이씨는 포스타였다고 한다. 이씨는 투자설명회 때마다 "채굴기만 산다고 수익이 나는 게 아니라 다른 투자자를 추천하면 채굴기 1대당 보너스 200달러 등을 추가로 받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영락없는 피라미드(다단계) 사기 수법이었지만, 조씨는 이때까지 눈치채지 못했다.
조씨는 아버지와 장모에게 빌린 9000만원을 포함해 모두 1억원을 투자해 채굴기 26대를 샀다. 그는 "이씨 얘기를 듣고, 80만원 정도지만 실제 수익이 나는 것을 보니 '가상화폐가 돈이 된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채굴기가 실제 있는지도 불분명했다. 조씨는 "이씨가 '서울 목동 KT IDC센터에 채굴기가 1500대 정도 들어 있다'고 주장했는데 지난 8월 센터 측에 직접 확인해 보니 사실이 아니었다"고 했다.
제주도 K호텔에서 열린 세미나에서였다. 투자자 60여 명이 모인 이날 'M사 피해자 대책 감사위원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박모씨가 "회사 측이 투자금을 빼돌려 이더리움 채굴이 안 되고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사업자 이씨는 같은 달 20일 박씨가 작성한 '채굴기 발주 현황'이라는 제목의 실사 보고서를 조씨 등 투자자 120여 명이 모인 단체 카톡방에 올렸다. 보고서에는 "채굴기를 확인한 결과 충남 천안과 경기도 파주에 2만 대가 있다"고 적혀 있었다.
채굴기의 성능을 좌우하는 그래픽카드 사양도 기록돼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M사는 HP(휴렛팩커드)와 전속 계약을 맺고 고급 그래픽카드를 수입한다"는 당초 이씨 설명과 달리 자료에 나오는 그래픽카드는 엉뚱한 저가 제품이었다고 조씨는 전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던 조씨는 그동안 이씨와 카톡에서 나눈 대화 내용을 캡처해 공개하며 이씨의 사기 행각을 폭로했다. 이후 이씨는 9월 말부터 투자자 대부분과 연락이 끊겼다.
조씨 등 M사 투자자 40여 명은 "지난 19일 M사 사업자 이씨와 이씨가 채굴기 구매금 입금 창구로 소개한 G사 간부 이씨 등을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상 사기 등의 혐의로 전주지검에 고소했다"고 23일 밝혔다. 고소 대상에는 이들을 투자에 끌어들인 추천인들도 포함됐다.
이들 투자자가 구매한 채굴기 값을 바탕으로 현재까지 확인된 피해 금액만 15억원이다. 조씨 등은 피해 진술서와 투자금이 오고간 거래 내역 증명서 등을 검찰에 제출한 상태다. 조씨 등은 "형사고소와 별도로 손해배상청구 소송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투자자들은 전업주부부터 자동차 딜러, 체크카드기 사업자, 직업 군인 등 2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하다. 조씨는 "대부분 몰래 모은 비상금이나 가족이나 지인에게 돈을 빌려 투자한 사람들"이라고 주장했다.
조씨 등에 따르면 사업자 이씨는 본인을 소개할 때 과거에 국회의원 보좌관과 대기업 연구원 등을 지냈다고 말했다고 한다. 조씨 등은 이씨를 '가족 사기단'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번 사건에 이씨 남편과 이씨의 친언니·오빠·시동생 등도 끼어 있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이씨의 시동생 김모(45)씨가 일하는 전주의 한 자동차매매상 동료 9명은 "가상화폐에 투자하면 돈을 벌 수 있다"는 김씨 말을 믿고 채굴기 구매에 모두 2억원을 투자했다가 날릴 위기에 놓였다.
하지만 김씨는 "형수(이씨)를 10여 년을 봐왔는데 사기 칠 사람이 아니다"며 혐의를 부인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조씨는 "현재 국내에 있는 이더리움 채굴기는 5만대로 추산되는데 1대당 380만원으로 계산하면 1900억원 규모"라며 "이씨 같은 포스타급 사업자가 전국에만 수십 명인데 이들도 사기꾼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M사 측은 지난 20일 회사 홈페이지에 해명성 글을 올렸다.
이 업체는 "현재 회사에서 가진 채굴기는 6000대밖에 없다. 지난 8월 이후 홈페이지에 뜬 이더리움 채굴량은 한국에 있는 운영위원들이 조작했다. 이들을 한국 검찰에 고소했다"는 내용의 공지를 띄웠다. M사 미국 본사와 한국 측 운영위원들 사이에 진실 및 법적 공방으로 번지는 모양새다.
이 때문에 지난 21일 대전광역시 KT 인재개발원에서 'M사 피해자 대책 모임'이 열렸다. 이날 모임에는 M사 투자자 1000여 명이 모여 투자금 회수 대책 등을 논의한 것으로 확인됐다. 검찰 수사 결과에 따라 실제 피해자는 수만 명까지 늘어나고, 피해 규모도 수천억원대로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조씨는 "피해자가 더 이상 나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 검찰 수사를 의뢰했다"고 말했다. 그는 "아직도 이게 사기인지 모르는 투자자들이 많기 때문에 이씨가 구금돼야 추가 피해를 막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번 사건은 전형적인 폰지사기"라고 덧붙였다. '폰지(Ponzi)사기'란 신규 투자자의 돈으로 기존 투자자에게 이자나 배당금을 지급하는 방식의 다단계 금융사기를 말한다.
이와 관련해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수익모델이 없는데도 높은 수익과 원금을 보장한다며 투자를 권유하는 경우에는 유사수신일 가능성이 크다"며 "유사수신 피해가 의심되면 경찰에 신고하거나 금감원 불법 사금융피해신고센터(1332)에 제보해 달라"고 말했다.
전주=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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