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인 블랙리스트... '잔여임기 1년' 박근혜 정부의 운명

[하성태의 사이드뷰] 트럼보와 밥 딜런, 그리고 블랙리스트의 시대

16.10.21 18:00최종업데이트16.10.21 18:00

영화 <트럼보>의 포스터.ⓒ (주)그린나래미디어


<굿나잇 앤 굿럭>(2005)과 <트럼보>(2015). 매카시즘과 블랙리스트 광풍에 관해 할리우드가 응답한 최근의, 최선의 '원투펀치' 작품들이다. 그 이전엔, 우디 앨런이 주연만 맡은 매카시즘 시대 풍자극 <프론트>(1976)나 그 시절 영화감독을 연기한 로버트 드 니로 주연, 어윈 윙클러 감독 정통극 <비공개>(1991> 등이 이미 관객들의 뇌리에 각인돼 있다.

조지 클루니 '감독'의 두 번째 연출작 <굿나잇 앤 굿럭>은 1950년대 중반, 미 전역을 냉전의 광기로 몰아넣었던 매카시 상원의원과 맞섰던 언론인 에드워드 R. 머로우와 그의 미 CBS 시사프로그램 'See It Now'팀의 몇 년간을 따라잡는다. "오늘날 개인과 국가 사이의 관계에 있어 이와 같은 (매카시즘과 같은)일이 발생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 자신의 책임이다"라고 했던 머로우는 사회적인 압박에도 불구하고 줄기차게 반박 보도를 내보냈다.

조지 클루니의 이 흑백영화가 표현의 자유와 블랙리스트를 연결 지었다면, 올해 개봉한 <트럼보>는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로 인해 다시금 회자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시절 '빨갱이'로 낙인찍힌 천재 시나리오작가 트럼보의 이 눈물겨운 투쟁사를 할리우드는 위트와 휴머니즘, 정치적 균형감을 동반해 형상화했다. 필명으로 오스카 각본상까지 받고 명예를 회복하기까지, 만신창이가 된 트럼보와 동료들의 삶은 분노와 슬픔을 자아낸다.

그리고, 2016년 10월 대한민국. 때아닌, 아니 이미 오래전부터 예견된 블랙리스트 파문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 대상이 너무나 광범위하고 목적 역시 치졸해서 더 어이없는, 그래서 '나 예술 좀 한다'는 문화예술인이라면 꼭 이름을 올려야 할 것 같은 이 9473인의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가 던져준 문제의식은 간명하다. 동시대를 넘어, 다시 문화와 예술이란 무엇인가.

"모든 위대한 예술 작품은 좌파적입니다"

문화예술인들이 18일 오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우리 모두가 블랙리스트 예술가다' 문화예술 긴급행동 및 기자회견에 참석해 예술검열 반대와 블랙리스트 사태를 규탄하고 있다.ⓒ 유성호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밥 딜런의 '반전의식' 직전, 매카시즘에 대한 자성이 있었다. 이 자성이 반전의식으로 연결된 것이다. 또한, 1960~1970년대를 휩쓴 반전의식은 동시대 '뉴아메리칸 시네마'라는 사조로 귀결된다. 반전과 자유, 인권의 기치를 영화 속에 이식한 것이다. 그 이후 할리우드는 심심치 않게 매카시즘은 물론 마녀사냥이란 화두를 세계 관객들에게 타전했다.

이것이 특정 영화인이나 예술인들만의 문제의식이었냐고? 그럴 리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도 다를 것은 없다. 심지어 <1984>와 <동물농장>의 소설가 조지 오웰의 평론집 제목은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였다. 그의 전성기던 1930~1940년대야말로 좌파와 프로파간다, 예술은 동류로 받아들여졌었다. 마치 전염병처럼.

"존재하는 것을 긍정하기보다는 존재해야 할 것을 추구하는 게 좌파라면, 그래서 늘 더 많은 자유, 더 많은 인권, 더 많은 민주를 요구하는 게 좌파라면, 모든 진정한 예술가들은 본질에서 좌파이고 모든 위대한 예술 작품은 깊은 곳에서 좌파적입니다. 실제로 그가 어떤 정당을 지지하건 상관없이 말입니다. 창작이라는 것은 본래 왼쪽에서 뛰는 심장이 시켜서 하는 일입니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산문집 <느낌의 공동체>(2011) 중 '예술은 왼쪽 심장의 일' 중 일부다. 그는 당시 한국예술종합학교와 황지우 총장을 좌파 운운하며 탄압했던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게 쓴 서간문 형식의 산문에서 "예술의 영역에서 고답적인 좌우 논리는 별 의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지극히 촌스러울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라며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이게 2011년이었다.

정치논리를 기계적으로 문화예술과 예술교육에 들이댈 수 없다는 주장은 사실 매우 일반적이다. 심장은 차치하더라도, 표현의 자유와 자율성을 제한하는 정치논리가 예술에 개입하는 순간, 조지 오웰의 '프로파간다'의 정반대 편에 위치시킬 수 있을지 모를, 레니 리펜슈탈의 <의지의 승리>와 같은 히틀러와 나치 다큐멘터리가 출몰할 수 있다는 점은 관련 대학 교양수업을 수강한 학생도 알 수 있는 '진리'다.

그러나, 벤자민 버튼도 울고 갈, 박근혜 대통령의 시계는 거꾸로 간다. 유인촌 전 장관이 좌파 운운했던 이명박 정권 당시 KBS 블랙리스트가 나돌았다면, 이제는 더욱더 광범위한 블랙리스트가 실질적으로 문화예술 정책과 지원에 영향을 미치는 시대착오적인 일이 벌어진다. 그 결과, 필연적으로 이러한 '블랙'리스트들은 더 많은 추문과 음모론, 피해자를 양산하기 마련이다.

김기덕 감독이 블랙리스트를 거론할 수밖에 없는 이유

문화예술인이 18일 오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우리 모두가 블랙리스트 예술가다' 문화예술 긴급행동 및 기자회견에 참석해 예술검열 반대와 블랙리스트 사태를 규탄하는 피켓을 들어보이고 있다ⓒ 유성호


지난 17일, 김기덕 감독의 김기덕 필름은 "편당 9억 미만의 엄청난 제작비를 지원하는 2016년 예술영화제작지원 사업에서 23편의 후보작들과 심사위원들을 공개하지 않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며 영화진흥위원회(아래 영진위)에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3편의 선정 작품과 선정 이유만 공지되고, 심사위원 리스트를 공개하지 않은 이유가 석연치 않다는 주장을 펼친 것이다. 더불어 김기덕 필름 측은 "특히 문화인 블랙리스트가 논란이 되는 시점에서 오해를 받지 않으려면 지원작 리스트와 심사위원 리스트가 공개되어야 한다"고 꼬집기도 했다.

이에 영진위가 화들짝 놀라기라도 한 걸까. 지난 18일, 영진위는 '2016년 예술영화제작지원사업 심사결과'와 관련 추가로 공지했다. 영진위는 "예술영화제작지원사업은 한국영화가 보여준 높은 예술적 성취를 유지, 발전시키기 위해 시행되고 있다"며 "공정한 심사와 개인정보보호 차원에서 비공개했던 사항들을 심사위원의 동의를 구해 추가 공지한다"고 밝혔다. 그리면서 발 빠르게 그간 비공개를 유지했던 (5인의) 심사위원 리스트를 공개했다.

영진위는 비선 실세 의혹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는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기구다. 특히 문체부는 전임 김종덕 장관과 청와대 비선 실세와의 연루설까지 불거진 상태다. 영진위 또한 전임 조희문 위원장의 해임 전후로 불공정한 심사와 지원책으로 인해 영화계의 불신과 비판을 지속해서 받는 상태였다.

이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가 현실화되면서 김기덕 감독과 같이 영향력 있는 인사가 공정성을 요구할 가능성도 커졌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블랙리스트의 반대편엔 '제 사람 키우기'나 '특정 인물 찍어내기', '예산 몰아주기'가 자리하기 때문이다. 당장 영진위만 해도, 이번 국정감사를 통해 김세훈 위원장과 박환문 사무국장의 영화발전기금 남용을 포함, 입맛에 맞는 특정 사업에 대한 예산 몰아주기 정황이 포착되면서 문체부의 특별감사가 예정됐다.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전해진 뒤 며칠 후인 18일 오전, 우리 문화예술인들은 '우리 모두가 블랙리스트 예술가다'란 기자회견과 퍼포먼스를 열었다. 문화예술계 특유의 신명과 비판의식이 살아 있는 현장이었지만, 그 자체로 시대를 역행하는 슬픈 현장이 아닐 수 없었다. 더욱이 그 근거가 '세월호'와 특정 정치인 지지 선언이라니.

그렇게 우리는 트럼보의 시대도, 무엇도 아닌 블랙리스트의 시대를 살고 있다. 박근혜 정권이 거꾸로 돌린 시계를 다시 21세기의 시간으로 되돌리지 않으면 안 될 시점이다. 예술에 대한, 창작에 대한 이해가 전무한 인사들이 더는 우리 시대의 문화예술을 검열하고 재갈을 물리게 해서는 안 될 일이다.

당사자들의 적극적인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흐지부지 이 사안을 넘길 것으로 보이는 정치권이 잠잠하다면, 결국 당사자들이 나설 수밖에 없다. 레임덕을 온몸으로 부정 중인 이 정권의 실질적인 잔여 임기는 고작 1년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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