蘭.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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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인천안목란








억새처럼 처렁처렁 벋었다면
너에게 오래 눈붙들리지
못했으리라

뛰어오르던 봄
슬며시 허리틀어
내려오는 지엽
실바람에도 흔들리는
빛그늘의 전율이 있었다

잎끝에 내려앉는 하늘
스스럼없이 휜다 너는
그러나
휘지 않을 곳에서 휜 적은 없다

널 꺾어내린 건 부드러움이지만
널 밀어올린 힘도 부드러움이다

잎이 올라갈 때부터
허공에 이미 금그어져 있었을
한 생애의 高度

천천히 꿈을 낮춰간
너의 뼈
허공을 파고드는 절망의 핏줄
마침내 無로 넘어가버린 시간의 소실점

너는 흙이 쏘아올린
일생의 푸른 분수이다

온 줄기들이
사방으로
온전히 무너져야만
한 붓 휘달린
水墨으로 피어나는

蘭!


                       빈섬의 짧은 글  '蘭'  전문


오래전 써둔 이 글을, 내게 시를 일깨워주시는 선생님께 보여드렸더니, 아직 시 되기는 멀었다고 말씀하시면서 우선 새로움이 없어 진부하다는 지적을 해주셨다. 그런 터에 이 덜갖춘 단문을 꺼내는 일이 뻔뻔스러움에 가깝지만, 이야기의 실마리로 삼기 좋다는 핑계에 숨으며 조선 말엽의 3란(三蘭)의 삶을 살필까 한다.  난 치는 일을 그토록 마음공부로 삼던 그들은, 어떻게 살았던가. 난처럼 살았던가. 오히려 난의 뜻만 너무 커서 그 자랑을 높이느라 현실적인 위선만 키웠던 건 아닐까. 그들에게 묵란이란 지식인이라는 명함 속의 프라이드일 뿐, 난의 항심과 유연과 향기는 한낱  '구호'에 그치지는 않았던가. 보자. 3란이라 하면, 추사 김정희와 석파 이하응,  운미 민영익을 꼽을 만 하다. 그들은 당대에도 지금도, 추사란(蘭), 석파란, 운미란으로 불리며 묵란화의 중요한 꼭지점들을 이룬다.


추사 소심란

세 사람은 처음엔 승승장구하다가 유배와 축출, 망명 등 절망의 후반부를 겪은 공통점을 지닌다. 추사는 1786년생, 석파는 1820년생, 운미는 1860년생으로 대체로 40년 정도의 터울로 이어진다. 그들은 억새처럼 처렁처렁 벋어 승승장구할 듯 시작했지만,  난엽처럼 어느 능선에서 슬며시 허리틀어 허공에 주저앉으면서 세상 바람에 전율하듯 흔들렸다. 당쟁의 파편이 튀어 졸지에 내몰린 제주의 배소(配所)에서 낙망(落望)과 질병으로 몸부림치던 추사의 흔적은 그가 친구인 이재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에 가슴 저미도록 아프게 남아있다. 그토록 아끼던 책들과 글씨와 난화(蘭畵)까지도 절망을 잠깐 잊는 방편일 지언정 그를 세상의 일들에 초연해지는 경지로 이끌지는 못했다는 느낌이 있다. 고금동서를 꿰뚫는 박람강기와 탁 트인 지식의 고봉(高峯), 고난 속에서 피어난 서체의 정수를 보여준 그였지만,  맨살로 치뤄내야 하는 현실적 고통이 그를 하염없이 주저앉게 한 것도 사실이다.

대원군이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석파는 어린 아들을 왕에 앉히고 섭정하면서 권력을 주무르다가 쇄국정책과 고종의 친정(親政) 문제로 명성황후와 알력을 빚는다. 치열한 다툼 끝에 운현궁으로 은퇴한다. 그리고 다시 임오군란으로 권력에 복귀했으나 이후 청나라 군대에 의해 중국에 연행되는 수모를 겪는다. 이후 국내로 돌아와 일본을 등에 업고 갑오개혁을 이끌지만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와중에 정계 은퇴를 한다. 그의 묵란들은 4년의 억류생활 중에 더욱 아름답게 피어난다. 운미 민영익은 명성황후의 친정조카로 18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요직을 거쳤으나 24세때 갑신정변으로 아버지 민태호가 피살되는 충격을 겪었다. 그는 명성황후가 죽은 뒤 중국 상해로 피신했고 그후 일시 귀국했다가 을사조약 이후 다시 중국으로 가서 거기서 여생을 보냈다. 그는 상해의 집에다 천심죽재(千尋竹齋)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서울의 죽동(竹洞)을 마음 속으로 하루에도 천번씩 찾는다는 뜻을 담은 것이었다.



추사 향조암란



추사란은 기존의 난화가 지녔던 부드러움에 반란을 꾀한다. 둥글게 돌아가던 난엽들은 그의 붓끝에서 직선으로 휙휙 내달리고 구부러지고 꺾어짐도 식물의 생태적 성격보다는 자유자재의 운필의 맛에 치중한 감이 있다. 먹의 짙고 묽음과 빛나고 메마름[潤渴]이 거리낌없이 병행된다. 풍성하던 먹이 뚝 끊어지면서 잎의 끝이 뭉툭하다.그 스스로 자신의 난화는 예서와 초서를 섞은 기(奇)의 법으로 그렸다고 말한다. 이 대목에서 나는 묵란을 치던 추사의 소일이 그를 달랜 것이 아니라, 난과 그가 함께 분노하고 내달으면서 하나의 기이한 경지로 내달렸다는 생각이 든다. 붓은 바로 추사이며 화지(畵紙)에 지금 막 전율하는 난은 한 인간의 롤러코스터 인생을 투영한 '멀미'의 흔적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고 붓끝이 함부로 나아간 것이 아니라, 흉중의 벌떡이는 에너지를 청고고아(淸高古雅)의 품격으로 업그레이드 시킨 뒤 어눌한 입을 떼듯 툭툭 먹빛을 뿜어나간다. 잎끝에 내려앉는 하늘, 그 무게를 안고 스스로 몸을 휜다. 그러나 추사의 삶 전부를 보면 휘지 않을 곳에서 휜 적은 없다.

3
석파 묵란

석파란은 뿌리는 굵고 힘있게 시작하지만 줄기로 갈 수록 칼날처럼 가늘고 날카로워진다. 화면 가득한 여백 한 켠에 한 떨기 춘란이 함초롬히 여인처럼 앉았다. 난초를 치는 것이 가장 어렵다(寫蘭最難)고 말했던 추사도, 그의 제자이기도 했던 이하응의 솜씨에는 손을 들어주었다. 석파란은 깊은 경지에 이르렀으며 자신의 묵란을 구하느니 그의 것을 구하는 것이 더 낫다고까지 말하였다. 당시 '귀인의 난'이라고 불렸던 석파란을 사겠다고 부탁하는 일본인도 많았다 한다. 그림을 사겠다는 사람이 많아지자 대원군은 사랑방에다 아예 대필화가를 앉혀놓고 묵란을 치게 한 뒤 자신은 이름을 쓰고 도장을 찍는 일만 하기도 했다 한다.

영조의 5대손으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시절에 한직을 맡으며 출세의 야망을 키웠던 이 정치가에 대한 평가는 지금으로선 굿(GOOD)보다 배드(BAD)가 더 많지만, 그 삶을 전체적으로 조망해보자면 승천과 급전직하를 경험했던 또다른 청룡열차 인생이었다. 때가 오기를 기다렸던 날들이 유독 많았을 그에게 묵란은 그 내부에서 일어나는 격한 전쟁의 그래프가 아니었을까. 어느 석파묵란 위에, 위당 정인보는, 난잎의 끝이 마지막에 힘을 잃고 있는 것이 스스로의 운명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취지의 글을 남기고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석파는 널찍한 여백의 한 켠에다 난심(蘭心)의 작은 '본부'를 세운다. 거기서 아주 날카롭고 에너제틱한 촉수를 쏘아 그 허공을 장악한다. 석파란이 아름답고 감명적인 것은 그 가늘고 여려보이는 줄기가 허리를 비틀면서 환한 여백에 긴장감을 발생시키는 그 맛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묵란은 바로 그 사람이며, 그의 마음이다. 인품이 고고하지 않고는 화품이 높을 수 없다는 추사의 서화동원(書畵同源)론은 틀린 것은 아니겠지만, 그림에 담는 인품과, 정치적 사회적 현실을 살아나가는 인간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음을, 저 석파가 보여준다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운미 묵란(상,하)


43

민영익의 난초는 석파란과는 대조적이다. 난은 지면에 꽉 차 있으며 여백을 별로 두지 않았다. 추사와 석파가 뜻을 그리는데 마음을 쏟았다면, 운미는 다시 리얼리즘을 데려왔다. 붓끝이 날아다닌 석파의 난에 비해, 운미는 붓의 중간을 시종일관 꺾어 고른 줄기와 뭉툭한 끝을 만들어낸다.  이하응처럼 난잎 끝을 휘휘 늘어지게 하지도 않는다. 줄기들은 서로 얽히지 않아 정리된 느낌을 주고, 그 줄기의 살찌고 여윔이 거의 없어 강직한 느낌을 준다. 왕당파였던 정치적 입지가 키운 보수성이 그의 묵란에 나타난 것일까. 기교보다는 성실한 사란(寫蘭)에 무게를 둔다.


느낌이 부드럽고 안정된 구도의 그의 묵란은, 대원군의 것과는 다른 의미에서 세련된 뉘앙스를 풍긴다. 젊은 시절 유럽과 미국을 두루 돌아다녔고 오랫 동안 중국생활을 했던 사람이라, 나름대로 묵란에 사실적인 화풍을 도입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역사적으로 비교적 '나쁜 사람' 쪽에 서 있다. 안중근의사가 그의 도움을 얻으려 만남을 시도했으나 민영익은 그를 피했다. 일제하 독립운동을 기술하는 사람들은, 여러 자리에서 민영익에 대해 비판을 하고 있다. 그의 소심과 보수성이 '모험'을 피한 것으로 내게는 읽혀진다. 그의 흉중이라 한들 저 난초의 씩씩한 기백이야 왜 없었겠는가. 그는 뿌리가 드러난 노근란(露根蘭)을 그렸다. 나라없는 백성은 난을 그릴 때 뿌리가 묻혀있어야할 땅을 그릴 수 없다는 옛고사를 빌려온 그의 뜻에는, 고통스런 자기 정체성이 느껴지기도 한다. 3란 모두에게 묵란은 일생을 내달린 고뇌와 고통의 궤적이었을지 모른다. 사방으로 온전히 무너져야만 한 붓 휘달린 수묵으로 피어나는.



운미 묵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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