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시아 쇼트트랙 대표팀의 안현수가 2014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8년 만에 3관왕에 오르며 역대 쇼트트랙에서 최다 금메달을 거머쥔 선수가 됐다. / 소치 = 김도훈기자 dica@sportsseoul.com |
[스포츠서울닷컴ㅣ유성현 기자] '쇼트트랙 황제'는 여전히 강했다. 달라진 건 오직 국적과 나이뿐이었다. 21세 때 한국의 영웅이 된 안현수(29·러시아명 빅토르 안)가 8년 만에 다시 올림픽 3관왕에 등극했다. 쇼트트랙스피드스케이팅 선수로는 이미 은퇴를 하고도 남을 29세의 나이에 '러시아의 영웅'이 됐다.
2014 소치 동계올림픽 쇼트트랙은 안현수의 독무대였다. 안현수는 지난 10일(이하 한국 시각) 남자 1500m에서 동메달을 목에 걸며 화려한 부활을 예고하더니, 닷새 후 1000m 금메달을 거머쥐며 단 7개뿐인 '운석 금메달'의 주인공이 됐다. 그리고 22일엔 마침내 500m와 5000m 계주에서 금메달 두 개를 보태며 3관왕의 주인공이 됐다.
이룬 게 한둘이 아니다. 안현수는 1000m와 1500m, 5000m 계주 정상에 올랐던 8년 전 토리노 대회에 이어 8년 만에 3관왕에 등극했다. 유일하게 가질 수 없었던 500m 금메달을 이번 대회에서 획득해 남녀를 통틀어 쇼트트랙 전 종목 금메달리스트라는 타이틀도 얻었다. 여기에 6개의 금메달로 전이경(한국), 왕멍(중국·이상 4개)을 넘어 역대 최다 금메달을 차지한 쇼트트랙 선수가 됐다. 동계올림픽에서 3관왕을 두 번 기록한 것도 안현수가 최초다.
개최국 러시아의 '안방 프리미엄'을 고려하면 어느 정도 예상된 시나리오였다. 하지만 이렇게 완벽한 부활을 이뤄내리라고는 쉽게 예측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전성기를 훌쩍 넘긴 29세의 나이라는 점, 그리고 무릎 수술을 3차례나 받은 부상 이력이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는 예상도 있었다. 하지만 안현수는 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다시 한 번 세계 정상에 우뚝 섰다. 그 사이에 국적까지 바뀌었으니 이보다 더 극적인 '황제의 귀환'은 없었다.
안현수가 귀화를 선택하기 전, 그의 위상은 '잊혀진 영웅'에 그쳤다. 오랜 파벌 싸움의 희생양이 된 그는 무릎 부상 여파까지 겹쳐 2010년 밴쿠버 대회에도 나서지 못했다. 화려한 경력이 과거형으로 변하면서 재기가 불투명한 '퇴물' 취급을 받았고, 심지어 은퇴까지 종용받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소속팀 성남시청까지 해체돼 설 자리가 없었다. 결국 그는 재기를 위해 마음껏 빙판을 누빌 수 있는 러시아행 비행기에 올랐다.
온갖 시련은 '황제'의 승부욕을 더욱 자극했다. 이대로 끝낼 수 없다는 의지로 재기를 위해 차근차근 올림픽을 준비했다. 적지 않은 나이에 맞춰 주종목을 단거리에 집중했다. 갈수록 떨어지는 체력 대신 폭발적인 스피드를 더욱 살려 경쟁력을 높였다. 결국 그는 8년 만의 3관왕에 오르며 세웠던 목표를 초과 달성하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러시아 쇼트트랙 사상 첫 메달과 첫 금메달의 주인공이 됐다. 정상을 밟을 때 그가 들어 올린 건 태극기가 아닌 러시아 국기였다. 22일까지 러시아가 가져온 9개의 금메달 가운데 안현수가 가져온 금메달이 3개나 된다.
안현수의 부활은 한국 남자 쇼트트랙의 부진과 맞물려 더욱 씁쓸하게 다가온다. 이번 대회에서 한국 남자 쇼트트랙이 거머쥔 메달은 단 하나도 없다. 지난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대회 이후 12년 만에 빈손으로 귀국길에 오른다. 금메달 2개, 은메달 1개, 동메달 2개를 따며 제 몫을 다한 여자 대표팀의 성적과 비교하면 한없이 초라하다. '최약체'라는 평가를 받으며 승부 근성을 불태웠지만 흘린 땀이 결실을 맺진 못했다.
실패는 곧 변화의 시작점이다. 다시 최고의 자리에 올라서기 위해서는 이번 대회를 계기로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안현수의 부활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이 전통적으로 약한 500m 종목도 그가 정상에 섰다. 8년 전엔 동메달에 머물렀지만 서른이 다 된 나이에 금메달을 가져갔다. 늘 약하다고, 안 된다고 넘길 일이 아니라 적은 희망이라도 보인다면 가능성을 더욱 늘려가야 한다.
언제부턴가 대한빙상경기연맹은 팬들로부터 조롱의 대상이 됐다. 안현수가 러시아에서 '빅토르 안'이라는 이름으로 명성을 드높이면서 그 강도는 더욱 거세졌다. 박근혜 대통령이 체육 비리 근절을 강조할 땐 빙상연맹의 이름이 오르내리기도 했다. 나라 안팎에서 내부 개혁의 도화선에 불이 붙었다. 아무리 깊게 뿌리내린 문제라도 이제는 모두 뽑아야 할 때가 됐다.
한국이 발굴한 보물이 다른 나라의 국보가 되는 건 더없는 비극이다. '제2의 빅토르 안'이 나오지 않으려면 이제는 변해야 한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 해도 더는 늦어선 안 된다. 이제는 4년 후 평창을 준비해야 할 때다.
yshalex@media.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