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지의 두려움
인간을 포함한 동물들의 육체와 마음은 적당히 뛰어 놀 울타리가 쳐진 마당을 필요로 한다. 불편에 대한 두려움으로도 장벽을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집착의 결과로 특정한 생각과 감정이 한곳에 오래 머물러 있다가 그것이 마음을 이루는 하나하나의 벽돌이 되는 것이다. à 미지(잠재적 위협요소)에 대한 원초적 두려움이 그 뿌리 à울타리, 집
* 생존과 번식의 본성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에 의해 물질이 생명으로 흘러간다.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이 물질에서 생명으로 넘어오면 생존과 번식의 본성이 된다.
왜 유전자가 이기적인가?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 à 인간이 철저하게 이기적인 유전자의 지배를 받고 있음을 삶에서 직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기파괴의 욕구에서 벗어 날 수 있을 때, 즉 내 안의 하나됨의 본성을 발견 했을 때, 그는 이기적인 유전자로부터의 지배를 벗어난 초의식형 인간으로 새로 태어나게 된다. 자살의 욕구가 바로 내 안에 하나됨의 본성이 있음을 발견하는 새로운 삶의 욕구를 발견하는 시작이다.
자본은 인간이 느끼는 고통(두려움)을 피하기 위한 사회적 파생물이다. 자본이라는 괴물의 생존의 비밀은 노동자의 일상 속에 있다. 자본은 물질적으로 노동자에 종속되어 있고, 노동자는 두려움이라는 끈을 통해 정신적으로 자본에 종속되어 있다. 욕망의 뿌리는 두려움이다. 노동자의 두려움이 없으면 인간의 욕망인 자본은 존재할 수 없다. 결국 자본의 힘과 노동자의 두려움의 크기는 비례한다.
* 소립자식
삶이란 얼마나 경이로운 과정인가? 시공간을 흐르는 이 소립자들의 흐름 말이다. 그것은 형체를 띠었다가는 즉시 그 다음 순간 속으로 해체되며 이어지는 사건들의 영원한 펼쳐짐이다.
소립자식을 중심으로 생존과 번식의 본성은 미래로 달려가고, 하나됨의 본성은 과거로 달려간다. 서로 반대로 달려가는 이 통 전체를 한눈으로 바라 볼 수 있을 때, 즉 시간적 균형을 공간적 균형화 할 때, 자각(현존, 구원, 깨달음)에 이른다. 소립자의 상보성(입자성=생존과 번식의 본성, 파동성=하나됨의 본성)에서 기인하여 변화와 모순이 인간 삶과 우주의 본질이 된다. 초의식형인간(=뉴에이지, 후천개벽)도 이 전체 통에 들어있는 하나의 진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미래의 고통을 피하려는 욕구(물질화, 개체화하려는 정보에너지식) =두려움 = 미래에 치우친 시간적 균형(오늘을 미래에 팔아먹는다 <-à 지금 이순간을 살아라), 개미와 배짱이
* 하나됨의 본성
존재의 육체적, 심리적 부분과의 관계를 줄여가면 당신은 순수한 정보에너지의 흐름과 더욱 깊이 동화되기 시작한다. 어느 날 갑자기 나라는 느낌이 더 이상 없어진다. 오직 궁극으로 확대된 참나가 사랑과 빛 속으로 녹아드는 느낌만이 있는다. 개인의 의식이 우주적 일체성 속으로 떨어진다. 무한 정보에너지는 외부의 에너지원과는 다르다. 이 에너지의 흐름은 당신 존재의 깊숙한 곳에서부터 나온다. 나이와도 상관없다. 이 무한 정보에너지는 늙지도 지치지도 않는다. 음식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필요로 하는 것은 단지 열림과 받아들임이다.
가장 깊은 명상에 들려면 의식을 하나의 대상에다 모으는 집중력이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인식 그 자체를 대상으로 만들 수 있어야만 한다.
어둡고 우울한 기간이 오면 그저 이렇게 물으라. 이 어둠은 누가 인식하는가? 인식하는 이 놈은 누구이고, 무엇인가? 이 질문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있음(현존)과 자각의 상태가 있고 거기서 내 몸과 내 마음이 사라지고 하나의 몸과 하나의 마음을 본다.
더 많이 열려 있을수록 더 많은 에너지 흐름이 일어난다. 자신에게 물결이 넘쳐 쏟아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것이 손과 가슴과 다른 에너지 중추들로부터 흘러나가는 것을 실제로 느낄 수도 있다. -à 인간무의식이 ‘동물 무의식’, ‘생물무의식’, ‘물질 식’, ‘소립자식’ 및 ‘에너지식’들과의 연결관계를 완전히 회복하는 것이 곧 이완, 열반, 구원이다.
의식적이고 중심 잡힌 사람과 의식이 깨어 있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간단히 의식의 초점의 차이다. 의식 자체의 차이가 아니다.
<한발짝 밖에 자유가 있다/마이클 A. 싱어>
* 닫혀있는 이유
스트레스는 근본적으로 내적 두려움(ß> 존재를 대하는 투명함)에서, 그리고 ‘변화’를 경험하고 싶어 하지 않는 데서 생긴다. 변화야 말로 삶의 속성 그 자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à생존 역량으로서의 스트레스와 변연계 프로그램에 의해 습관적으로 과도하게 받아들여지는 스트레스를 구별하여 걸러낼 수 있는 자가 정말로 아는 사람(붓다)이 된다. 생존 역량으로서의 스트레스는 존재를 지탱하는 힘이다. 스트레스는 에너지 흐름의 막힘에 의해서 생긴다.
(삶의 본질은 불안정성이다. 살아 있는 세포는 불안정하다. 이것이 기업가 정신이다. 그러면 언제 안정될까? 세포막이 터지고 죽으면 평온하고 깨끗해진다.-안철수)
나의 성격과 행동습관은 모두 고통을 피하기 위한 것이다. 고통을 피하는 습성을 극복해야 한다. 고통을 느낄 때 그것을 그저 물질화, 개체화하려는 정보 에너지로 바라보라. 고통이 밀려올 때 계속 이완하라. 어깨와 가슴의 힘을 빼라. 고통을 놓아 보내어 당신을 지나가도록 공간을 내주라.
마음을 닫는 것은 하나의 습관이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과거의 경험에 따라 마음을 열거나 닫도록 프로그램 되어 있다.
가슴을 닫고 나면 마음은 차단된 에너지의 주위에다 온통 심리적 요새를 쌓는다. 그리고 나면 마음(생각)은 자신이 옳고 다른 사람들이 그른 이유와 당신이 해야 할 일들을 궁리해낼 것이다.—->대변인활동. 변연계 결정 전à결론 도출을 위한 분석활동, 결정 후à대변인 활동 + 대책에 대한 분석활동
사람들과 환경과 상황이 당신을 괴롭히지 못하도록 통제하려고 애쓴다면 당신은 마치 삶이 당신을 공격해오는 것처럼 느끼기 시작할 것이다. 삶은 몸부림이고 하루하루가 괴롭다.
(우리는 대개 나눔을 나와 내 식구가 배불리 먹고 남는 걸로 불쌍한 사람을 돕는 적선이나 자선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불쌍한 사람을 돕기 위해선 먼저 내가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이상한 논리가 횡행한다. 나눔의 개념이 탄생하게 된 배경 : 과다한 소유에서 오는 죄책감을 상쇄하려는 욕구. 진정한 나눔=이완을 통해 물질적, 정신적 에너지를 가두지 않는 것. 레포(rapport=신뢰관계)는 본질적으로 상대방을 그의 세계모형 속에서 만나는 것이다)
* 열려 있기
열려있는 방법의 터득은 당신에게 달려 있다. 궁극의 비결은 닫지 않는 것이다. 가슴이 닫히기 시작할 때 그저 이렇게 말하라. 아니야 나는 닫지 않겠어. 힘을 빼겠어. 저항하지 않겠어. 나는 이 상황이 일어나게 하고 거기에 함께 있겠어.
생각=닫음=긴장=저항=짧은 호흡=정체 ß> 열림=이완=순응=긴 호흡=흐름
음과 양, 확장과 수축, 행위와 무위, 모든 것에는 양극단이 있다. 극단을 그냥 내버려두라. 거기에 끼어들지 말라. 그러면 진동추는 저절로 중심에 멈출 것이다. 그것이 중심에 가까워질수록 당신은 에너지로 충만해질 것이다. 낭비되고 있던 모든 에너지가 이제 당신의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도 안에는 개인적인 것은 없다. 당신은 힘의 손아귀에 들려 있는 한갓 도구일 뿐으로, 균형의 춤사위에 참여하고 있다. 도 안에서 당신은 장님이다. 당신은 장님이 되기를 배워야 한다. 도가 어디로 가는지를 당신은 결코 볼 수 없다. 다만 도와 함께 있을 수 있을 뿐이다.
의식이 맑아지면 삶의 사건들은 정말 마치 느린 화면이 전개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 어떤 일도 더 이상 당신을 혼란에 빠뜨리고 압도하지 못할 것이다. 혼란에 빠져있기를 그치면 매사가 단순해진다. 좋고 싫음이 없이 오로지 중심에 머물러있기만을 원하여 중심을 더듬어 가고 있는 동안에 삶은 절로 펼쳐진다.
* 이완
이완=의식의 교감 수준을 정보에너지식(識)까지 확대한 상태
이완이 곧 영성 회복이며 깨달음이다. 영성 회복과 깨달음의 과학적 표현이 이완이다.
행복은 조건과 상관없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느끼는 불행의 진정한 정체는 아내가 집을 나간 사실 자체가 아니라 우리 존재를 지탱해주는 의식에너지가 차단되고 결핍될 때 느끼는 고립감, 부족감, 무력감, 불안감, 두려움 등의 복합적인 느낌이다.
정말 영적으로 살면 당신은 보통사람들과 완전히 달라진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당신은 원하지 않는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들을 당신은 온전히 받아들인다. 자신의 틀이 깨지기를 원하고 자기 안에 혼란을 일으키는 일이 일어날 때 그 경험을 소중히 받아들인다.
광합성은 에너지가 물질화 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에너지는 물질의 조합을 바꾸는 접착제 역할을 한다. 태양의 에너지가 지구로 흘러 오기 때문에 인류의 진화(변화)가 흘러가고 있다. 순응은 시간이 가역적일 수 없음의 다른 말이다. 순응 안에 방향성간의 다툼인 저항이 있다.
테스토스테론=기독교=Work, 도파민=힌두교=Play, 코르티솔=불교=love, 균형점=이완=순응=도교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마하라지>
내가 서른 넷에 스승님을 만났고 서른 일곱에 깨달았어요.
욕망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충일감에 가득해서 더 이상 아무런 바램이 없더군요. 순수한 자각의 대양 안에서, 보편적 의식의 표면 위에서 무수한 현상적 세계라는 파도들이 시작도 끝도 없이 부침하는 걸 보게 되었지요. 의식이라는 면에서 그들은 모두가 바로 나이고, 사건이라는 면에서는 모두가 나의 것이었어요. 또 그것들을 돌봐주는 신비한 힘이 있었어요. 그것이 바로 알고 있음 즉 자각이지요. 내게는 이 육체가 ‘하나의 몸’이지 ‘내 몸’은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의 마음’일 뿐 ‘내 마음’이 아니고요. 마음이 몸을 잘 돌보고 있으니 내가 간섭할 필요가 없지요.
여러분들은 자신들의 생리적 작용을 잘 의식하지 못하겠지만 생각이나 느낌 욕망과 두려움에 관해서라면 대단히 민감하게 느낄 겁니다. 내 경우는 그런 것조차도 의식되지 않아요. 마치 깨어있음이 육체적 활동을 자동적으로 하는 것 같아요. (삶이라는 유치한 게임의 전모를 알아버리고 유유자적하게 되는 것이지요. 두려움과 변화라는 삶의 본질이 의식 앞에 자그마하게 온전히 실체를 드러내게 되는 것이지요)
스승님에 대한 신뢰와 그의 말씀에 대한 복종을 통해 나의 본성을 깨달았고 나의 인간적인 면들은 그들의 임무가 다할 때까지 내버려 두게 되었지요. 때때로 옛날의 반응들이 감정적(변연계 프로그램)으로나 사고적(신피질)으로 일어나지만 그 즉시로 발견되니까 즉각 놓아지지요.
사람이라는 것이 참모습의 그림자에 불과하며 참모습 자체가 아니라는 걸 깨닫고 나면 거기에 매달리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내면으로부터 인도를 받는데 동의하게 되고 알려지지 않은 세계 속으로 여행하게 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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