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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인들이 지난 8일 국정원의 대선 개입을 규탄하고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한 시국선언을 했다. 16일에는 ‘공정보도 실천 결의문’도 채택했다. 전·현직 언론인이 대거 참여한 시국선언문은 근래 쏟아져 나오는 대학교수와 학생, 시민단체 등의 선언문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가 근소한 차이로 앞서 청와대 주인으로 들어서기까지, 국정원과 경찰이 조직적으로 모의하고 저지른 정권적 비리를 규탄하고 광정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규탄 대상이 이명박 정권의 야비하고 반민주적 행위라면, 요구되는 광정의 방향은 박근혜 정부의 철저한 진상규명과 국민에 대한 사과 등이다. 민주주의를 신뢰하는 국민으로서 당연한 분노이고 준엄한 요구다. 또한 진실보도가 생명인 언론인으로서는 삶의 의미와 무게가 걸린 주장이고 절규다.
그러나 현실은 보란 듯이 배반당하고 만다. 16일의 국회 국정원 청문회를 보면, 범죄자들의 한 가닥 반성의 빛도 없이 오만하고 반지빠른 태도 앞에 국민은 농락당할 뿐이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과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은 증인선서부터 거부했다. 헌정사상 초유의 일이라고 한다. 진실 선서부터 거부하니 또 다른 거짓을 들어 무엇 하랴. 새누리당 의원들의 도움을 받은 그들이 거짓변명으로 재차 국민을 속일 기회만 제공한 셈이다. 인간성과 민주주의에 대한 최소한의 기대가 참담하게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추상같은 정론언론이 필요할 때
이럴 때 국민에 희망과 위안을 주는 것이 추상같은 정론언론이다. 제도적 허점을 악용하는 그들의 오만방자한 자세를 질타하고, 주권재민의 신성함과 국기문란을 바로잡아야 할 중대성을 일깨우며, 시시비비를 가리는 언론이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다수 언론에서는 이를 기대하는 것조차 가당찮다. 많은 언론과 언론인이 순수한 정도에서 멀리 벗어나 타락해 있다.
이번 언론인 선언문이 다른 단체의 선언문과 다른 점은 반성과 자탄의 아픔으로 얼룩져 있는 점이다. 현재 언론인은 침묵하거나 왜곡보도를 강요당하고 있으며, 민주주의의 보루가 돼야 할 언론이 민주주의 파괴의 공범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자기고백이다. 그러나 모든 언론인이 이런 반성과 자탄을 한 것은 아니다. 지금 진보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보수수구 매체의 언론인은 이런 모습조차 보이는 일이 없다. 그악스런 유신체제에서도 언론의 타락이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다.
1979년 8월의 YH무역 농성사건을 떠올려 본다. 경찰 1,000여 명이 노동자 172명을 강제해산시키고 신민당 의원과 취재기자들을 폭행하는 과정에 노조 간부 김경숙씨가 사망했다. 새벽에 발생한 이 사건은 당시 석간이던 동아·중앙일보를 비롯하여 다음날 조간인 한국·조선일보 등까지 1면과 사회면을 도배질하다시피 했다. 경쟁지보다 자기 신문이 이 사건을 얼마나 크고 상세하게 보도하는가가 당시 기자들의 관심사였다. 두 달 후 박정희의 독재체제는 처참하게 막을 내렸다.
그러나 다음해 전두환이 집권하면서 언론사 통폐합과 언론인 대거 강제해직이 이어졌다. 그 때 ‘이런 상황에서 언론사에 남아 있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며 스스로 회사를 떠난 기개 있던 기자들도 적지 않았다. 다시 1987년 6월 혁명으로 부분적 민주화가 이뤄졌으나, 조중동은 상업적 자사 이기주의를 거쳐 반민주적·반역사적 길로 치달았다. 지금 공영방송에서도 국정원의 불법을 지적하는 프로와 뉴스가 방송되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국기기관의 보도 통제도 자행되고 있다. 이에 저항하는 언론인에 대해서는 징계가 이어지고 있으니, 현 정부의 비열한 언론통제가 이명박 정권과 다를 바 없다.
진실보도는 언론의 기본철학
지금 언론계는 민주화를 위해 시국선언을 하는 이들과, 압제자 편에 서서 시국선언을 하게끔 반민주를 조장하는 이들로 분열돼 있다. 그러나 명백한 사실에 대한 진실보도는 좌우나 진보·보수의 이념과도 상관없다. 그것은 언론에 들어선 자가 짊어져야 할 기본 철학이고 책임이고 숙명이다.
이번 시국선언은 단시일 안에 서명이 추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역을 중심으로 2,000명에 육박하는 언론인이 참여했다. 이는 우리의 언론현실이 치욕과 고통의 한계점에 이르렀다는 것을 보여준다. 단적인 예로 이명박 정권 때 언론자유를 외치던 언론인 20명이 강제해직됐고, 그들은 새 정부 아래서도 아직 복직이 안 되고 있다. 그들이 직장을 잃고 거리를 헤매고 있는 한, 누구도 한국에 자유 언론이 존재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또한 언론인이라면 자신의 상대적 안락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하여, 시국선언을 계기로 조중동 등 보수언론과 공영방송에 종사하는 언론인들이 예전처럼 최소한의 사실보도와 공정보도라도 하는, 언론인 본래의 자리로 복귀하기를 희망한다. 의롭고 따사로운 기자정신의 울타리 속으로 되돌아오기를 기대한다. 자의에 의하든, 타의에 의하든 변화는 어느 순간 갑자기 찾아오기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새언론포럼 회장)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