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과 육체
신 창 석(대구 가톨릭대)
주제분야 : 중세철학, 심신이론, 토마스 아퀴나스
주 제 어 : 영혼, 토마스 아퀴나스
1. 문제제기
물질성과 정신성의 상호작용에 대한 문제는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어려운 난제일 뿐만 아니라 오직 인간에게만 문제시되는 피할 수 없는 과제이기도 하다. 특히 20세기의 컴퓨터 혁명과 유전공학 및 심리학의 극단적 발전은 인간이 가진 기계적 육체와 정신적 영혼의 상호작용에 대한 철학적 해명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영혼과 육체의 상호작용에 대한 문제는 심리학적 문제영역과 이념적 문제 영역을 벗어나 형이상학적 문제로 소급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를 여실히 드러내는 것은 영혼과 육체의 문제에 대한 20세기의 다양한 접근과 상이한 결론들이다. 20세기 철학자들은 영혼과 육체의 문제에 대해 주로 인식론적 관점에서 접근하여 대체로 상대주의와 회의주의로 흘러가고 있다. 예를 들어 관념론적이고 선험적 인식론은 정신적 인식을 현상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정신적 의식은 그 존재에 따라 물질적 세계와 육체에 선행하는 동시에 그 세계를 구성하는 것으로 본다. 버클리, 칸트, 후설 계열의 철학자들이 주로 이런 노선을 추구하고 있다. 이와는 달리 감각주의, 경험주의 그리고 논리실증주의는 영혼과 육체의 문제를 가상적 문제로 치부하거나 가정적 물질주의로 치닫는다. 현대에서는 흄(D.Hume), 카르납(Carnap), 파이겔(Feigel), 파이어아벤트(Feierabend)등이 이러한 노선을 추구한다. 또한 그 중에서도 논리실증주의를 기초로 하는 비엔나학파의 슐리크(Schilck), 파이겔, 파이어아벤트는 심리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이 단지 우리에게만 상이한 것으로 대두될 뿐, 사실은 동일하다고 가정한다. 결국 영혼과 육체의 상호작용에 대한 이렇게 상이한 결론들의 근간에는 육체가 속하는 물질성과 영혼이 속하는 정신성의 본질규정에 대한 형이상학적 관점이 은폐되어 있다. 따라서 본 논문은 영혼과 육체의 상호작용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고자 한다.
일찍이 서양 철학의 고전가 아리스토텔레스와 토마스 아퀴나스는 “영혼은 육체의 형상”이라는 “anima-forma-corporis” 형이상학적 원론을 개발한다. 이 학설은 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과 영혼론 그리고 토마스 아퀴나스의 형이상학주해서와 영혼론주해서에서 전개되고 있으며, 이들은 주로 신학대전에 주제화되어 요약되어 있다. 그리고 20세기의 역량있는 토미스트들은 이 학설을 따라 영혼과 육체의 상호작용을 지속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따라서 본 논문은 첫째로, 아리스토텔레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원전에서 제시되는 “anima-forma-corporis”를 신학대전의 요약을 중심으로 해설하고자 한다. 이들의 영혼과 육체의 상호작용에 대한 형이상학적 근거는 질료형상주의(Hyle-Morphism)이므로, 주로 플라톤적 이원론과 대결하는 가운데 정립된다. 따라서 본 논문도 영혼과 육체의 상호작용에 대한 일원론과 이원론의 대결과정을 추적하는 방식으로 진행될 것이다.
둘째로, “anima-forma-corporis”에 대한 20세기의 연구는 배제하되, 토마스의 원문에 충실하게 진행할 것이다. 현대의 연구 역시 주로 토마스트들에 의해서 수행되어 왔으며, 그레트(Gredt), 파브로(Fabro), 드 프리에스(De Vries), 페기스(Pegis), 라너(Rahner), 코레트(Coreth), 피퍼(Pieper)등을 거론 할 수 있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원문을 소개함으로써 현대 영혼론자들과의 대화를 준비하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한다.
셋째로, 이러한 원문에 대한 연구 결과로 다음의 물음에 대해 최소한의 근거를 제시하고자 한다. 즉 “anima-forma-corporis”에 나타난 영혼과 육체의 상호작용에 대한 형이상학적 실마리는 어디서 발견될 수 있는가? 나아가 여타 학문이 인간과 인간적 행위를 고찰하는데 필요한 형이상학적 관점을 제시하고자 시도할 것이다.
2. 신학대전의 원문 해설을 위한 전제
1) 신학대전 제1부, 76 문제의 문헌적 윤곽
토마스 아퀴나스는 영혼과 육체의 상호작용을 통일성이라는 단어로 일축하면서 영혼과 육체의 주요 문제를 시작한다. 여러 곳에서 다양하게 다루던 문제를 제1부 76문제에서 “영혼과 육체의 통일성에 대하여”(de unione animae ad corpus) 라고 주제화하면서 본격적으로 고찰하기 시작한다. 즉 영혼과 육체의 “통일성”이라는 개념 속에는 영혼이 어떤 종류의 상호작용을 하며 어떻게 상호작용하는가 라는 현실적 사태가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영혼과 육체의 상호작용은 “통일성”이라는 개념 속에 근본적으로 자리잡고 있다. 토마스는 이러한 통일성을 다음과 같이 8개의 논항으로 나뉘어 고찰하고자 한다.
제1논항, 지성적 원리는 형상으로서 육체와 통일되는가?
제2논항, 지성적 원리는 육체가 증가하는 수만큼 다수화되는가?
제3논항, 지성적 원리를 형상으로 삼는 육체 속에는 또 다른 영혼이 존재하는가?
제4논항, 육체 속에는 또 다른 실체적 형상이 존재하는가?
제5논항, 지성적 원리를 형상으로 삼는 육체는 어떻게 존재해야만 하는가?
제6논항, 영혼은 그러한 육체와 우유적으로 통일하는가?1)
제7논항, 영혼은 다른 어떤 물체를 매개로 하여 육체와 통일되는가?
제8논항, 영혼은 육체의 모든 부분에 걸쳐 온전히 존재하는가?2)
이러한 8개의 물음을 던지고 있는 신학대전 I 제76문제는 영혼과 육체의 상호작용에 대해 당시에 제기되던 반대론자들의 견해를 직접적으로 겨냥하고 있다. 철학사에서 그리스 철학적 전통과 그리스도교 철학적 전통이 충돌하는 결정적 문제가 영혼과 육체의 상호작용에 대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토마스는 이러한 문제의 충돌을 어떤 관점에서 진술하고 또 해결해 나가고자 하는가? 여기서 영혼과 육체의 상호작용에 대한 형이상학적 근거를 찾을 수 있는 실마리가 발견될 것이다.
제1논항은 플라톤적 견해와 아리스토텔레스 주석가로 대표되는 아라비아 철학자 아베로에스를 반박하는 방법으로 육체에 대한 영혼의 형상성을 전개하고 있다. 제2논항은 에베로에스 주의 연장선에 있는 브라방의 시제와 다찌안의 보에씨우스를 겨냥하고 있다. 라틴 아베로에스주의자로 불리는 이들은 물론 모든 사람을 위한 유일한 지성이 있을 뿐이고, 여기에 각각의 인간이 한 몫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라는 견해를 피력한다. 이에 토마스는 육체의 수와 동일한 지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논증해 낸다. 제3논항은 다시 플라톤의 견해를 겨냥하고 있다. 그는 개개의 인간에게는 식물적 성장혼[植魂], 동물적 감각혼[覺魂] 그리고 지성적 혼[靈魂]의 세가지 혼이 있다고 피력하지만, 토마스는 이를 강력히 논박하는 가운데 영혼의 단일성을 제시한다. 제4논항은 그리스도교철학 내의 프란치스코 수도회 신학파들을 겨냥한다. 그들은 인간에게 지성적 영혼 이외에도 또 하나의 실체적 형상이 있다는 것을 주장하지만, 토마스는 이를 강력히 반박한다. 제5논항에서 토마스는 논박할 사람들을 직접 거론하지는 않자만, 이면적으로는 플라톤주의자를 비롯하여 토마스 이후에 등장한 데카르트적 주장을 논박한다. 그들은 인간의 영혼과 육체가 두 종류의 온전한 실체임을 주장하고 있다. 또한 후대에 속하는 말브랑쉬(Malebranche)는 영혼과 육체의 결합을 기회원인론(Okkassionalismus) 적으로 해명하면서, 신에 의한 결합을 주장한다. 그 후 라이프니쯔는 자신의 단자론에 따라 영혼과 육체의 관계를 신에 의해 “예정된 조화”라고 해명한다. 토마스는 여기서 이러한 견해들과 달리 논증하므로 이들을 논박하는 셈이다. 그리고 제6논항과 제7논항에서는 영혼과 육체의 통일을 위해 제 3의 존재를 설정하는 모든 견해들을 논박한다. 끝으로 제8논항에서는 영혼과 육체의 통일성에 대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문장이 대론에 등장되며, 대답에서 그 문장들의 진의가 밝혀진다.
2) “지성적 영혼”과 “지성”의 개념적 난제
영혼과 육체의 통일성을 나타내는 토마스의 문장 형식은 유일한 형식으로 서술되지도 않을 뿐더러 일의적으로 사용되지도 않는다. 토마스는 한편 “지성적 영혼은 육체의 형상이다”(anima intellectiva est forma corporis)는 유형을 사용하면서도, 다른 한편 “지성은 육체의 형상이다”(intellectus est forma corporis)는 유형을 사용한다. 일관성이 유지되는 것은 아니지만, 전자는 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론을 주해하는 과정에서 사용되고, 후자는 아베로에스의 지성론을 논박하는 과정에서 사용된다. 여기서 문제시되는 것은 지성적 영혼과 지성은 동의어인가, 아니면 다른 의미를 가지는가? 이 문제는 이미 한국에서도 특별하게 다루어진 바 있다.3) 지성적 영혼과 지성을 동의어로 본다면, 영혼과 영혼이 가지고 있는 힘이나 능력과의 관계를 토마스 인식론이나 영혼론에 걸맞게 해명해 낼 수 없다. 즉 “지성은 지성적 영혼의 영양적 부분 그리고 감각적 부분과 구분되는 영혼의 일부분 혹은 힘으로서 지성적 영혼과 동일시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런 용어상 동일성 표현은 영혼과 그 힘들 간의 관계에 대해 토마스가 취하는 철학적 입장과 양립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그 자신의 이론 체계 내에 내적 일관성을 결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4)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토마스 해석자들 중에는 토마스가 다른 용어를 사용할지라도 실질적으로는 일관성을 견지하고 있다고들 한다. 이런 입장을 취하는 해석가로는 불어권의 베베르(É-H. Wéber)와 바잔(B.C.Bazán)을 대표적으로 거론할 수 있다. 이들에 대한 이 재경의 연구는 이들 모두의 견해가 설득력이 없음을 보여 주는 동시에 지성은 지성적 영혼과 구분되는 힘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5) 결국 베베르와 바잔의 오랜 논쟁을 원점으로 돌린 셈이다. 따라서 본고는 토마스의 논증에 나타나는 용어적 문제를 인위적으로 통일시키거나 해석하기 보다는, 시대적 상황과 논쟁의 상대자에 따라 달리 표현되는 영혼과 관련된 용어들을 그대로 수용하는 가운데 원문(신학대전, I, q.76)에 충실하게 토마스의 의도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방법을 우선으로 삼고자 한다.
3. 영혼과 육체의 상호작용
이미 살펴본 대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문헌이 가지고 있는 내적 특징은 영혼과 육체의 상호작용을 논리적 질서에 따라 해명하는 구조를 띠고 있다기보다는 시대적 논쟁 상대의 견해를 반박하는 논쟁적 구조를 띠고 있다. 따라서 본고는 영혼과 육체의 상호작용에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원문을 충실하게 선별하여 번역하고 소개하는 데에 중점을 둔다.
1) 육체의 형상으로서 지성적 원리(STh. I, q.76, a.1)
76문제의 제1논항은 신학대전 전체에 걸쳐서 가장 긴 논항 중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이는 논제의 중요성과 함께 논쟁적 대상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이 문헌에서 아주 특이한 점은 육체의 형상이 대론에서는 지성적 원리 내지는 지성으로 명명되면서 부정되고 있다. 예를 들면 “그러므로 지성은 형상으로서 육체와 통일되는 것이 아니다”는 형식을 취한다.6) 그러나 그 대답(responsio)에서는 대체로 영혼(anima)라는 용어로 육체의 형상임을 선언하고 있다.
토마스는 제1 대론에서 다른 모든 논쟁 상대자들의 견해를 제쳐두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론 III」을 인용한다.7) “첫째로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지성적 원리는 형상으로서 육체와 통일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 철학자는 말하기를, 지성은 분리되어 있으며, 육체의 현실성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므로 지성은 형상으로서 육체와 통일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8) 나아가 토마스는 이를 정면으로 논박하는 반론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서 가져온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로 하여금 아리스토텔레스를 논박하도록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왜 그렇게 하고자 하는가? 이는 여기서 논박하고자 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대표적 주석가 아베로에스를 상대하기 위한 가장 명백한 중세적 방법이다.
토마스는 이러한 방법에 따라 본론을 구성한다. 첫째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증을 추적하는 가운데 생명의 제일 원리로서의 인간적 영혼(anima humana)이야말로 인간으로 하여금 사유행위들을 실행하도록 하는 제일의 것이라는 사실을 밝혀낸다.
필연적으로 이렇게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성적 활동의 원리인 바의 지성은 인간적 육체의 형상이다. 왜냐하면 어떤 것이 제일 처음 활동하도록 하는 것[방법]은 그 활동이 귀속되는 바로 그것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육체로 하여금 제일 처음 치료되도록 하는 바로 그것은 건강이며, 영혼으로 하여금 알도록 하는 제일의 것은 지식인 바와 같다. 따라서 건강은 육체의 형상이며, 지식은 영혼의 형상이다.9)
둘째로 토마스는 영혼이 사유행위를 일으키는 제일의 것이라는 근거를 찾는다. 즉 본질적 형상이야말로 어떤 사물로 하여금 현실적으로 본질과 현존을 가지고 존재하도록 하고 활동하도록 하는 제일의 것이라는 사실을 밝힌다.
“그 근거는, 어떤 것이든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한, 전혀 활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어떤 것으로 하여금 현실적으로 존재하도록 하는 바로 그 어떤 것을 통해서 그것이 활동한다. 그런데 육체로 하여금 살아있도록 하는 제일의 것이 영혼이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생명은 생물의 다양한 단계에 따라 다양한 활동을 통해 구체화되므로,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개개의 생명활동을 제일 처음으로 실행하도록 하는 것은 영혼[魂]이다.”10)
셋째로 토마스는 영혼이 지성적 활동의 원리인 한, 영혼이야말로 형상으로서 육체와 통일되어 있다는 사실을 공고히 한다.
왜냐하면 영혼은 우리로 하여금 섭생[성장]하게 하고, 감각적으로 지각하게 하고, 공간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제일의 것이요, 이와 똑같이 우리로 하여금 인식[사유]하도록 하는 제일의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처음으로 사유하도록 하는 이 원리는 - 지성이라 불리든 지성적 영혼이라 불리든 간에 - 육체의 형상이다. 이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론 2권 2장에 나오는 논증이다.11)
이상의 논증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론을 삼단논법의 형식으로 재구성한 것며, 다음과 같이 기술될 수 있다.
제일 처음 활동하도록 하는 것은 그 활동이 속하는 것의 형상이다.
인간의 [사유]활동을 제일 처음 실행하도록 하는 것은 영혼이다.
그러므로, 영혼은 육체의 형상이다.
이제 토마스의 본론은 이 삼단논법을 바탕으로 논적을 겨냥하기 시작한다. 즉 지성의 원리가 형상으로서 육체와 통일되지 않는다면, 사유는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개별적 인간의 활동으로 규정될 수 있겠는가? 개인은 육체에 기초하고 또한 모든 개개인은 그 자신이 바로 사유하는 주체라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자신의 전체로 사유하지는 않으므로, 결국 지성적 원리는 인간의 일부이며, 다른 부분인 육체와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물론 토마스는 여기서 아베로에스의 주장을 소개하면서 그 부당성을 장황하게 해명한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이 통일성 그 자체이다. 결국 영혼이라는 본질성과 육체라는 본질성에 걸쳐있는 이 통일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토마스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먼저 반론에서 도입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또 다시 해결의 실마리로 삼는다. “이 인간이 사유한다는 것은 지성적 원리가 바로 그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성의 활동 그 자체로부터 지성적 원리야말로 형상으로서 육체와 통일성을 이룬다는 사실이 밝혀진다.”12) 이를 다시 동사화 시켜 보자. “나는 사유한다”는 행위의 출발점이 바로 인간의 형상이기 때문에, 나는 사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유한다는 현실 자체로부터 사유행위의 출발점은 형상으로서 나의 육체와 통일되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결국 내가 사유하고 있는 한, 내 사유의 출발점은 육체의 형상이라는 것이다. 이어서 토마스는 영혼과 육체의 통일성을 인간의 종적 근거에 따라 해명한다. 즉 “모든 사물의 본성은 그 사물의 활동[행위, 작용]에서 드러난다. 그런데 인간인 한에서의 인간의 본래적 행위는 사유행위이다. 인간은 사유행위를 통하여 모든 감각적 존재를 초월한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윤리학 10권 7장에서 인간에게 고유한 이 행위에 궁극적 행복을 설정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러한 행위의 원리인 바의 것으로부터 종적 근거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모든 사물은 자신의 고유한 형상으로부터 종적 근거를 갖는다. 그러므로 지성적 원리야말로 인간에 고유한 형상이라는 결론이 나온다.”13) 본성은 그 자체로 관찰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행위를 통해서만 드러난다. 근본적으로 본성의 표현이 행위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은 사유행위(intelligere)로 드러나므로, 사유행위의 출발점이 종적 근거요 고유한 형상이라는 것이다.
결국 지성적 원리는 형상으로서 육체와 통일성을 이룬다. 그렇다면 통일의 방식을 진술하는 “형상”이란 어떤 방식으로 진술될 수 있는가? 토마스는 이를 “탁월성”(nobilitas)로 해명한다. “형상은 탁월할수록 물체적 질료를 고도로 지배하며, 그런 만큼 질료에 덜 제한되며 그 힘으로 더욱 더 질료를 초월한다. 따라서 우리는 혼합된 물체[육체]의 형상이 근본적 성질로부터 야기되지 않는 어떤 행위[활동]를 갖고 있는 것을 보곤 한다. 나아가 형상의 탁월성 속에서 올라가면 갈수록, 형상의 힘이 질료를 초월하는 것을 더 많이 발견한다. 그래서 성장혼은 금속의 형상보다 더 질료를 초월하고, 감각혼은 성장혼 보다 더 질료를 초월한다. 그런데 인간적 혼[영혼]은 형상의 탁월성 가운데서도 가장 높은 것이다. 따라서 영혼은 그 힘에 있어서 육체적 물질이 어떤 식으로도 교류하지 못하는 그런 행위와 힘을 소유할 정도로 육체적 물질을 초월한다. 이 힘이 바로 지성이라 불린다.”14) 본질적 형상은 이미 그 자체로 질료를 초월하면서 본질적 전체에 대해 물질만으로는 결코 이끌어 낼 수 없는 어떤 행위를 부여한다. 그 형상의 차원이 높을수록 그 존재와 행위[활동, 작용]에 있어서 질료를 탁월한 방식으로 넘어선다. 그래서 지성적 원리가 형상으로서 육체와 통일성을 이룬다는 사실은 바로 이 형상의 특수한 탁월성을 기초로 한다. 이 형상은 인간에 본질적 형상이며, 물질로서의 육체를 포함한 성장성, 감각성을 현실적 자료로 삼는다. 나아가 이 본질적 형상은 이러한 자료로부터 주체적으로 독립된 어떤 능력과 행위를 소유할 정도로 자료를 넘어서 있다. 토마스는 이렇게 탁월한 능력과 행위를 사유행위로 보고 있으며, 이들은 지성을 현실화의 원리로 삼고 있다. 따라서 토마스는 이 지성적 원리를 영혼이라기 보다는 “영혼의 힘”으로 규정하는 가운데, 영혼과 육체의 상호작용을 위한 형이상학적 근거로 삼고 있다. 즉 토마스는 영혼이 육체적 물질을 초월하는 바로 그 힘을 지성이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영혼이 육체를 초월하는 힘 그 자체에 바로 토마스 언어사용법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즉 토마스는 대론에서는 논적의 언어사용법에 맞추어 주로 지성적 원리(principium intellectivum) 내지는 지성(intellectus)을 사용하고 있으며, 본론과 대답에서는 주로 “인간적 영혼”(anima humana) 내지는 “지성적 영혼”(anima intellectiva)을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용어의 긴장 사이에는 지성이야말로 영혼으로 하여금 육체적 물질성을 초월하도록 하는 힘이라는 사실이 확보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서 토마스는 대체로 경험적 근거를 가지고 영혼과 육체의 상호작용을 해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형이상학적 근거는 어디서 발견될 수 있는가?
2) 실체적 형상의 유일성(STh. I, q.76, a.4)
지성적 영혼은 인간의 유일무이한 실체적 형상이다. 실체적 형상의 유일성은영혼과 육체의 상호작용에 대해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또한 어떤 형이상학적 근거를 마련하는가? 토마스는 이 명제를 통하여 영혼과 육체의 결합에 가정될 수 있는 실체적 형상의 다수성을 배제한다. 먼저 대론(對論)을 살펴보면, 그 중에서도 형이상학적 중요성을 띠고 있는 것은 제일질료(materia prima)의 현실성을 주장하거나 육체성의 고유한 형상을 주장하는 것이다.
“둘째로, 인간과 모든 생물은 그 스스로 움직인다. 그런데 자연학 8권[5장]에서 증명되는 바와 같이, 스스로 움직이는 모든 것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지는데, 한 편은 움직이게 하는 부분이요 다른 편은 움직여지는 부분이다. 그러나 움직이게 하는 부분은 영혼이다. 그러므로 다른 한 편은 움직여질 수 있도록 되어야 한다. 그러나 자연학 제5권[1장]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제일질료는 가능성 속에 있는 것이므로, 움직여질 수 없다. 오히려 움직여질 수 있는 것은 육체이다. 그러므로 인간과 모든 생물에는 육체를 구성되도록 하는 [혼 이외의] 다른 어떤 실체적 형상이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15)
이 대론은 영혼 이외에 제일질료를 하나의 육체로 구성시키는 또 하나의 형상을 전제하고 있다.
넷째로, 인간적 육체는 혼합된 물체이다. 그런데 혼합은 질료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오직 소멸[분열]만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본요소들의 형상들은 혼합된 육체 속에 남아있지 않으면 안되며, 이들은 실체적 형상들이다. 그러므로 인간적 육체에는 지성적 영혼 이외의 다른 실체적 형상들이 있다.16)
이 대론은 결국 “육체성의 형상”(forma corporalitatis)를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대론은 13세기의 학문이 대체로 주장하던 바이다. 즉 13세기의 철학과 신학은 영혼과 육체의 실체적 통일성을 인정하면서도, 하나의 유일한 육체에 다수의 형상들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따라서 토마스는 여기서 13세기의 일반적 지식과 대결하게 되었다. 그런 만큼 토마스의 반론은 장엄하게 전개될 뿐만 아니라 그 만큼 유명한 명제로 철학사에 기록된다. 즉 “인간에게 지성적 영혼 이외에 다른 어떤 실체적 형상이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17)
본론에서 토마스는 더 이상 사유하는 자아의 경험적 사실에 호소하지 않는다. 그는 이 명제를 통하여 형이상학적 탐구를 시도하며, 이는 다른 여러 평행 문헌에서도 비슷하게 전개된다.18) 한 사물의 통일성이란 개개의 사물을 바로 그 무엇이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성[행위. 작용, 활동]을 통해서 통일성을 이룬다. 결국 이 현실화 내지는 행위는 형상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물론 이 형상은 실체적일 수도 있고 우유적일 수도 있다. 만약에 이 형상이 우유적이라면 하나의 유일한 주체에 대해 다수의 현실적이고 실체적인 형상들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은 불가능하다. 토마스는 본론에서 실체적 형상과 우유적 형상의 차이를 통이 존재론적 근거를 밝힌다.
이를 통찰하기 위해서는 실체적 형상과 우유적 형상의 차이는 우유적 형상이 절대적으로 존재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존재를 부여한다는 사실을 통해서 드러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열(熱)은 그 [열의] 주체가 절대적 존재를 가지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열의 존재를 가지도록 한다. 이 때문에 어떤 것이 우유적 형상을 받을 경우에, 그것이 성립된다거나 생긴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되었다거나 어떤 방식으로든 관계하는 것이 되었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어떤 우유적 형상이 물러가면, 어떤 것이 절대적으로 소멸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관점에서 소멸되었다고 말한다.19)
토마스는 여기서 우유적 형상의 존재론적 특징을 공고히 하고 있다. 즉 우유적 형상은 우유적 존재자를 만들어낼 뿐이다. 이에 대립하여 절대적으로 존재자를 이끌어 내는 것이 실체적 형상이다.
반대로 실체적 형상은 절대적으로 존재를 부여한다. 이 때문에 실체적 형상의 등장을 통해 어떤 것이 절대적으로 생겨났다고 말하고, 실체적 형상이 없어지면 그것이 절대적으로 소멸되었다고 말한다. 이로 인하여 제일질료를 불이나 공기 내지는 그와 비슷한 것으로 보아 현실성 속의 존재자로 파악했던 고대의 자연철학자들도 결코 절대적으로 생성하거나 소멸한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자연학 1권[4장]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무엇이] 되는 모든 것은 일종의 다른 것이 되는 것이라는 명제를 도출했다.20)
여기서 토마스는 실체적 형상과 우유적 형상이 가지고 있는 내적 특성으로부터 하나이고 동일한 사물에 다수의 실체적 형상이 존재하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논증하고 있다. 즉 실체적 형상은 “절대적 존재”(esse simpliciter)를 부여하기 때문에, 그 사물의 존재 여부를 규정하는 반면에, 우유적 형상들은 항상 어떤 실체에 더불어 존재하기 때문에 그 사물이 어떻게 존재하는가 하는 다양한 우유적 존재를 부가한다. 결국 하나의 사물이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하는 것은 실체적 형상이요, 이렇게 있느냐 저렇게[어떻게] 있느냐를 결정하는 것은 우유적 형상이다. 따라서 하나이고 동일한 주체 속에 있는 다수의 형상들은 제일 처음의 형상에 부가되는 것이므로, 결코 실체적일 수 없으며, 오직 우유적일 뿐이다. 이렇게 우유적 형상의 근거이자 출발점이 되는 실체적 형상의 유일성은 모든 자연적 질서에 타당하게 상정된다. 자연적 질서에 대한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하나이고 동일한 주체에 다수의 실체적 형상을 상정한다면, 어떤 종류의 출산이나 번식도 불가능하게 된다. 출산이나 번식은 실체적 변천으로서 실체적 비존재에서 존재에로의 과정이다. 그런데 이미 현실적 제일질료에 다수의 형상을 상정한다면, 출산되는 것이 이미 출산 이전에 하나의 실체로 현존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게 되면 엄격한 의미의 출산은 불가능하게 되므로, 결국 어떤 생성이나 소멸도 일어날 수 없다는 결과를 낳게된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논증 역시 자연적 질서 전체에 해당된다. 토마스는 이제 이러한 자연질서 전체의 논증을 인간의 실체적 형상에 적용시킨다.
만약 지성적 영혼 이외에 영혼의 근저[주체]를 현실성 속의 존재자이도록 하는 다른 어떤 실체적 형상이 질료 속에 있다고 가정된다면, 영혼이 절대적 존재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올 것이다. 그러면 결과적으로 영혼은 실체적 형상도 아닐 것이요, 영혼의 등장에 의한 어떤 절대적 출산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요, 영혼의 물러남에 의한 절대적 소멸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이런 일들은 특정의 관점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히 허위이다.21)
실체 또는 실체적으로 “있음”, 살아 “있음”, 감각적으로 “있음”, 인간으로 “있음”이라는 서술에서 “있음”이 지칭하는 “존재”는 결국 하나이고 동일한 개별자에 대해서만 서술되어야 한다. 예를 들면 구체적으로 현실적인 “홍길동”에 대해서만 서술되어야 한다. 하나이고 동일한 주체 속에 있는 각각의 “존재” 차원이 서로 다른 다수의 실체적 형상에 결부된다면, 동일자에 대한 본질적이고 그 자체로 필연적인(per se necessario) 서술 자체가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이제 토마스는 경험적 논증과 형이상학적 논증을 토대로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이 때문에 인간에게는 오직 지성적 영혼 이외에 다른 어떤 실체적 형상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영혼은 감각혼과 성장혼을 포괄하는 바로 그 힘으로 다른 모든 하위의 형상들을 포괄하며, 다른 것들 속에 있는 불완전한 형상들이 움직이게 하는 것을 영혼 그 스스로 움직이게 한다. - 동물에게 있는 감각혼에 대해서도, 식물에게 있는 성장혼에 대해서도 그리고 불완전한 형상에 마주하고 있는 일체의 완전한 형상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22)
결국 토마스는 인간으로 까지 이끌어 온 실체적 형상의 유일성을 다시금 모든 존재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시킨다. 바로 여기에 지성적 영혼이 실체적 형상으로서 육체와 통일성을 이루는 형이상학적 근거가 마련되는 것이다.
영혼과 육체의 상호작용에 대한 형이상학적 근거는 지성적 영혼의 실체적 형상이요, 그것도 하나이고 동일한 실체적 형상이라는 사실이다. 지성적 영혼은 보다 높은 형상으로서 제일질료와 직접적 통일을 이루면서 가능적으로는 다른 모든 것들을 포괄한다. 그러므로 지성적 영혼은 실체적 형상으로서 바로 그 인간적 개인에게 현실적 존재를 부여함으로써 인간을 바로 그 인간이게끔 한다. 나아가 여기서 인간을 바로 그 인간이게끔 한다는 것은 인간이 되는 바로 그 개인으로 하여금 육체적으로 “있게” 하고, 살아 “있게” 하고, 감각적으로 “있게” 하고 결국 바로 그러한 한에서의 인간으로 “있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제도 이제 토마스의 형이상학적 근거에 따라 새롭게 그러나 정확하게 이해된다. 이는 토마스의 대답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단순히 영혼은 ‘육체의 현실성이다’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가능성 속에 삶을 가진 본성적이고 분류된 육체의 현실성‘이라고 말한다. 영혼은 그러한 가능성으로부터 격리되어 있지 않다. 영혼을 현실성으로 삼는 것 속에는 영혼 역시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 명백하다. 이는 마치 열(熱)은 뜨거운 것의 현실성이라고 말하는 것이나, 빛은 빛나는 것의 현실성이라고 말하는 것이나 같다. 이는 마치 빛나는 것이 빛 없이도 스스로 존재한다는 것과 같다는 것이 아니라 빛나는 그것은 빛을 통하여 빛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혼은 육체의 현실성이라고들 말한다. 왜냐하면 육체는 영혼을 통하여 육체를 가질 뿐만 아니라 [여러 기관으로] 분류되어 있으면서 또한 가능성 속에 삶을 가지고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일 현실성은 둘째 현실성, 즉 행위[작용, 활동]의 관점에서는 가능성 속에 있다. 따라서 영혼은 그러한 가능성으로부터 격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영혼은 그런 가능성으로부터 배제되어 있지 않다.23)
4. 결어
지금까지 영혼은 물리적이고 생체적인 육체의 현실적 형상이라는 토마스의 논증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는 새로운 사실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던 바이다. 문제는 영혼이 육체와 상호작용을 하는 형이상학적 근거이다. 토마스는 논증을 진행하는 동안 영혼이 형상으로서 육체와 통일성을 이룬다는 것과 인간의 실체적 형상이 유일무이하다는 것을 공고히 한다. 이러한 논증은 독단적 탐구가 아니라 당대의 논적을 극도로 의식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작업이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형이상학적 단서는 무엇인가? 하나이고 동일한 것은 동시에 현실적으로 유일하면서 다수적일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실체적 존재자에 타당하게 서술된다. 따라서 토마스는 여기서 형상의 다수성을 형이상학 내적인 모순으로 드러낸다. 하나이고 유일한 것은 동시에 현실적으로 유일하면서 다수적일 수 없다. 왜냐하면 유일성과 다수성은 내적 형식에 따라 서로를 배제한다. 이에 대한 문헌적 근거는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는 것이 이미 연구되어 있다.24)
토마스는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론에 따라 영혼과 육체의 상호작용에 대한 형이상학적 근거를 찾고 있다. 그러나 당대는 똑같은 아리스토텔레스 문헌을 토마스와는 달리 해석하고 있었다.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를 충실하게 추적하는 가운데 영혼에 대한 당대의 오류를 오류로 드러내면서, 실체적 형상의 유일성을 영혼과 육체의 상호작용에 대한 형이상학적 근거로 공고히 한 것이다. 따라서 토마스가 신학대전에서 전개하는 논증은 결국 세계의 다양성이 유일성 속에서 조화한다는 거대한 형이상학적 주제의 일환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조화 속에서 존재와 비존재, 실존과 허무, 고통과 기쁨 그리고 인간의 영혼과 육체에 관한 논의도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새한철학회 논문집
철학논총 제27집 2002․제1권
헤겔과 하이데거에서의 존재개념에 대한 고찰
이 서 규(건국대)
[한글 요약]
이 글은 헤겔과 하이데거의 존재개념을 고찰한다.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양 철학은 끊임없이 존재에 대한 물음을 제기 하였다. 존재에 대한 물음은 이성주의철학의 정점에 서 있었던 헤겔 그리고 서양의 존재론의 해체를 시도하면서 독자적인 현상학-해석학적 존재론을 정초하려던 하이데거에게 중요한 문제였다. 헤겔은 의식으로부터 출발하여 사물의 존재를 규정하고 나아가 스스로 절대자의 단계로 나아가는 과정을 정신현상학에서 기술하고 있는데, 이때에 전개되는 내용은 주관성철학에서의 존재에 대한 이해를 종합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반면에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이러한 주관성철학을 거부하고 기초존재론에 입각한 독특한 존재에 대한 이해를 전개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양자의 존재에 대한 이해가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전개될 것이라는 것을 쉽게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사이에는 공통점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의식(헤겔)과 현존재(하이데거)가 사물의 존재를 파악하는데 있어서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 - 물론 여기에서 하이데거의 현존재라는 개념이 헤겔의 의식과 구분되어져야 하지만 - 그리고 이러한 의식과 현존재와 관계하는 세계를 벗어난 초월적 세계, 즉 물자체 또는 실체의 세계라는 것이 부정된다는 점이다.
주 제 어 : 의식, 현존재, 존재이해, 존재, 존재자
1. 서론
고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서양철학의 중심적인 주제 중에 하나는 존재를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가이다. 일찍이 파르메니데스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존재뿐이라고 말하면서 존재의 중요성을 설파하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라는 개념은 각각의 철학자들에게서 상이하게 이해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여기에서 서로 상이하게 이해되는 존재개념을 고찰하는 것은 의미 있는 철학의 주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절대적 관념론자라고 불리는 헤겔과 현상학적 해석학자라고 불리는 하이데거에서 전개되는 존재개념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헤겔은 이성철학의 정점에 서있던 철학자였으며 그런 점에서 서양형이상학과 존재론의 전통을 완결하는 위치에 있었다. 이에 반해서 하이데거는 그러한 전통적인 형이상학과 존재론을 해체하여 새로운 철학의 전통을 구축하려했던 사람이었다. 여기에서 이 양자의 철학자들의 존재개념을 비교 고찰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각각의 철학자들의 고유한 존재개념을 이해할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서양철학을 관통하는 중심적인 존재개념을 파악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1)
헤겔은 이전의 사상가들보다 더 극단적인 존재개념을 제시하는데, 그 내용은 특히 정신현상학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의식이 자기의식의 단계를 거쳐 절대의식이 되는 과정을 상세하게 그리고 있는데, 이러한 과정으로의 전개는 다름 아닌 학문의 체계를 완성하는 일이다. 여기에서 헤겔에 따르면 진리가 실존하는 참된 형태는 바로 진리의 학적 체계일 뿐이다. 헤겔에 따르면 철학은 단순히 지(知)에 대한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현실적인 앎(wirkliches Wissen)에 이르도록 나아가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헤겔은 정신현상학을 통하여 전통적으로 대립하였던 철학적인 장치들, 즉 보편적인 것과 개념적인 것, 관념적인 것과 실제적인 것, 개념과 실재, 이성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이라는 대립쌍들을 변증법적으로 매개하여 궁극적으로는 절대적인 존재를 제시하고 있다.
정신현상학이 헤겔철학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역할은 하이데거 철학에서 존재와 시간이 차지하는 비중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정신현상학이 헤겔철학의 체계에로 들어가기 위한 서론 그리고 좀더 적극적으로 말한다면 헤겔철학의 체계의 일부라고 말해질 수 있다면, 존재와 시간은 하이데거가 소위 ‘기초존재론’(Fundamentalontologie)을 출발점으로 하여 전통적인 존재론을 해체하는 작업에 기여하는 결정적인 저작이다. 하이데거는 여기에서 전통적인 인식론의 근본적인 출발점이었던 주관과 이 위에서 전개된 주관성철학(Subjektivitäts- philosophie)을 비판하면서 존재개념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구축을 시도한다. 여기에서 피력되는 존재에 대한 언급은 기초존재론적인 것인데, 이것은 한편으로 이후의 하이데거의 철학이해에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하이데거의 존재이해가 이전의 철학과 얼마나 구분되는가를 드러내준다. 이 글에서는 서로 다른 철학적 배경에서 출발하는 헤겔과 하이데거의 존재에 대한 이해가 어떻게 전개되는지 그리고 그들의 입장이 어떻게 구분되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2. 본론
1) 정신현상학에서 전개된 헤겔의 존재개념
(1) 감성적 확신에서의 존재
헤겔은 정신현상학을 통해서 자신의 철학의 체계를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의 주제는 ‘현상하는 지식’에 대해서 다루는 것인데, 그것은 단순하고 직접적인 감각의 단계에서 절대적 지식의 단계로의 발전을 그려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헤겔이 강조하는 것은 변증법적인 발전인데, 이것은 헤겔철학의 주요한 방법론적 특징이며 그의 철학의 과제1)이기도 하다. 단순한 감각적인 지식이 절대적인 지식, 개념적인 지식으로 발전할 수 있고 그리고 발전하여야 한다는 것이 헤겔철학의 전제이자 결론이다. 헤겔에 따르면 이러한 발전의 과정은 필연적인 것이며 인간에게 요구되어지는 것인데, 이런 점에서 헤겔은 정신현상학 서언(Vorrede)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로 이와 같은 요청에 따라 아직 감각적이며 통속적인 것 또는 개별적인 것에만 몰입돼 있던 인간을 그러한 상태로부터 끌어올림으로써 이제는 오직 그의 안목이 높이 떠 있는 별나라로 향하도록 하려는 힘겹고도 정성어린, 언뜻 보아 안타까우리 만큼의 노력이 뒤따르게 되었으니, 이렇게 보면 지금까지의 인간은 마치 신적인 것을 완전히 망각한 채 다만 티끌과 물에만 의존하는 한낱 벌레와 같은 순간적 생명을 지탱해 오기라도 한 듯이 보일 정도이다.”1)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인식론적인 입장에서 말하자면 현상하는 지가 절대적인 지로 지양되는 과정을 그리는 것인데, 이것은 전통적인 인식론의 문제인 주관과 객관, 자아와 타자의 갈등을 지양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단지 인식론적인 문제가 아니라 존재론적인 문제, 즉 어떻게 의식이 존재를 파악하여 가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을 제기한다. 이러한 과정은 다름이 아니라 정신이 절대적 정신이 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현상학은 “정신의 현상에 관한 이론”(die Lehre von den Erscheinungen des Geistes)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헤겔은 정신현상학 서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자기의 진정한 실존을 향하여 끊임없이 추동돼 나아가는 의식은 마침내 지금까지 자기와의 일정한 관계 속에서 단지 하나의 타자로서 존재하는 어떤 이질적인 것에 의해서 묶여 있는 듯이 보였던 스스로의 허상을 벗어던질 수 있는 결정적인 국면에 들어선다. 또 다른 말로 하면 이것은 의식이 마침내 현상과 본질이 동화되는 단계에 이름으로써 의식의 전개 및 서술이 또한 정신의 진정한 학이 성립되는 바로 그 점으로 합일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의식 자체가 다름 아닌 자기의 본질을 포착할 때 마침내 그것은 절대지의 본성 자체를 뜻하게 될 것이다.”1)
정신현상학의 전개는 ‘감성적 확신’(die sinnliche Gewißheit)에서 주어지는 소박한 앎에서 시작해서 절대지에 이르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이때에 각각의 단계는 복합한 과정으로 나누어져 고찰되지만, 그것은 의식이 자기의식을 거쳐 이성에 이르는 것과 정신이 종교의 단계를 거쳐 절대지로 다가가는 과정으로 파악된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의식에서 자기의식을 거쳐 이성의 단계로 나아가는 방대한 단계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일정한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의식, 자기의식 그리고 이성의 단계가 각각 세 가지의 과정을 통해서 지식을 매개해낸다는 점이다. 이것은 헤겔의 철학이 가지는 독특한 전개과정이다. 헤겔의 존재개념을 이해하려는 우리는 여기에서는 의식의 단계만을 살펴볼 것이다. 물론 엄밀하게 말하자면 의식의 단계에서 귀결되는 내용과 자기의 의식의 단계에서 귀결되는 내용이 서로 같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헤겔에 따르면 의식의 단계에서는 지식(Wissen)을, 그리고 자기의식의 단계에서는 지식에 대한 지식(Wissen vom Wissen)이 언급되기 때문이다. 지식과 지식에 대한 지식은 서로 다른 차원에서 논의되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헤겔이 의식의 단계에서 사물의 존재를 어떻게 파악하는가를 살펴봄을 통해서 헤겔의 철학이 사물의 존재를 이해하는 근본적인 입장을 잘 나타낼 줄 수 있을 것이다.
헤겔에게 있어서 사물의 존재가 의식에게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단계는 어떤 단계인가?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감성적 확신의 단계이다. 헤겔이 직접적인 것으로서의 존재를 다루는 것은 이러한 감성적 확신의 단계에서이다. 이러한 직접적인 단계는 의식이 절대지를 향해 가는 과정의 첫 번째 단계인데, 이 단계는 우리가 감각기관을 사용하여 사물들의 존재를 처음으로 수용하는 단계이기도 하다. 감성적 확신의 단계에서 존재는 의식에게 직접적으로 주어진다. 달리 말하자면 이 단계에서 의식과 존재의 관계는 직접적인 것으로 드러난다. 감성적 확신은 의식이 직접적인 단계에서 가져다주는 대상과의 관계이다. 물론 이러한 감성적 확신은 결코 궁극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헤겔은 정신현상학을 통해서 이러한 직접적인 단계에서 절대지로의 이행 또는 발전의 필연성을 언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성적 확신은 절대지로의 항해에 있어서 간과할 수 없는 필수적인 단계이다.
감성적 확신의 단계에서 존재는 어떤 것으로 직접적으로 주어지지만, 그러나 이것은 존재가 개념을 통해서 주어진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감성적 확신의 단계에서는 결코 존재에 대한 개념적인 파악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헤겔은 ‘감성적 확신’의 절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 먼저 또는 직접적으로 우리의 대상이 되는 知는 오직 그 자체가 직접적인 지, 즉 직접적인 것과 존재하는 것(das Seiende)의 知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이제 이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는 우리도 역시 직접적인 혹은 단지 수용적인 자세만을 취할 수 있을 뿐, 결코 우리 앞에 나타나는 知에 대하여 추호의 영향도 입혀서는 안되며 또한 단순히 이해하려는 노력 이외에 그 어떤 개념적 파악을 시도해서는 안 될 것이다.”1) 이러한 감성적 확신의 단계에서 주어지는 것은 감각을 통해서만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만약 헤겔이 이렇게 직접적으로 주어진 존재가 궁극적인 존재라고 본다면, 즉 사물의 참다운 존재라고 본다면 우리는 헤겔이 감각주의(Sensualismus)를 옹호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헤겔의 입장은 감각주의와는 분명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헤겔에게 있어서 감성적 확신의 단계에서 의식에게 다가오는 존재는 매개되지 않고 감각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일차적인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헤겔은 감성적 확신 속에서 주어지는 것을 “부유한 인식”(die reichste Erkenntnis)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에서 감성적 확신은 가장 참다운 인식으로 보일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아직 대상으로부터 그 가운데 어떤 부분도 제외시키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직 있는 그대로의 완전한 모습을 지닌 대상을 눈앞에 놓고 있기 때문이다.”1) 직접적인 확신의 단계가 가진 특성에 대한 이러한 언급은 마치 헤겔이 경험론자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러나 헤겔에게 있어서 감성적 확신의 단계는 그것이 가진 대상과의 원초적인 만남의 가능성 이외에 결코 존재에 대한 어떤 ‘내용’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이 단계에서 의식과 대상은 단지 자기 자신을 직접적으로 드러낼 뿐이다. 헤겔에 따르면 그러한 직접적 확신의 단계는 그 자체로 종결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헤겔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이와 같이 단순한 사실로서의 확신, 확실성은 가장 추상적이며 또한 가장 빈곤한 진리일 뿐이다. 이러한 감성적 확신은 자기가 아는 것에 대해서 다만 그것이 있는바(es ist)를 나타낼 뿐이다: 이러한 진리는 오로지 사태의 존재(das Sein der Sache)만을 포함한다. 의식은 자신의 편에서 보면 이러한 감성적 확신 속에서는 단지 순수한 자아(reines Ich) 또는 자아는 그 속에서 순수한 이것(reiner Dieser)으로 그리고 대상은 순수한 이것(reines Dieses)일 뿐이다.”1)
감성적 확신의 단계에서의 감각과 느낌1) 속에서 사태(Sache)인 것은 현재에 나타나지만, 인식론적 입장에서 보자면 이것은 아직 앎이 아니다. 감각과 느낌은 아직 앎을 산출해내지는 않는다.1) 감성적 확신의 단계에서 존재가 매개되지 않고 단지 직접적으로 다가온다는 것은, 즉 존재가 순수한 존재로 다가온다는 것은 의식이 이러한 존재에 대해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앎을 갖지 못하는 것을 뜻한다. 헤겔이 이렇게 감성적 확신의 단계에서는 참다운 앎이 성립하지 못한다고 보는 것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식의 구분, 즉 지식(episteme)과 억견(doxa)를 구분하는 것과 연관된다.1)
헤겔에 따르면 감성적 확신의 단계에서 얻어지는 것이 지식이 아니라는 것은 이 단계에서 파악되는 존재를 결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존재에 대해서 갖는 감성적 확신은 아직 언어를 통해서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떤 매개작용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감성적 확신에서 발견되는 존재, 즉 존재 일반(Sein überhaupt)은 의식이 추측하는것(meienen) 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아직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이다. 이 점을 헤겔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렇듯 우리는 감성적인 것을 표명할 때에도 또한 이를 일반자라는 뜻으로 언표 한다. 즉 우리가 말하는 것은 이것, 다시 말하면 일반적인 이것이며 또한 무엇이 있다(es ist)라는 경우에도 존재 일반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이때 우리는 비록 일반적인 이것, 혹은 존재 일반을 염두에 두고 있지는 않다 하더라도 분명히 우리는 일반자를 언표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이것을 또한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결코 이와 같이 감성적 확신 속에서 추측하는 것(meinen)을 말로 나타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도 그럴 것이 언어는 좀더 진실에 가까운 것이어서 모름지기 우리는 언어를 통해서 직접적으로 스스로의 사념, 속된 견해를 부정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실로 일반자야 말로 감성적 확신의 진리이며 다시 언어는 오직 이러한 진리만을 표현할 뿐이므로 말로 나타내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이 된다.”1)
존재론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감성적 확신의 단계에서는 단지 순수한 존재(reines Sein)로서 드러날 뿐이다. 여기에서 대상이, 즉 어떤 것이 순수한 존재로서 드러날 뿐이라는 것은 감성적 확신의 단계인 감각이나 느낌을 통해서는 어떤 것이 ‘매개되지 않고’ 드러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에 어떤 것이 매개된다는 것은 의식이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아직은 사용되지 않는 반성작용 또는 구성작용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감성적 확신의 단계에서는 이러한 매개작용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 단계에서의 의식은 단지 자아(Ich)일뿐 그 이외의 어떤 것이 아니다. 의식은 이 단계에서 사물이 있는 바의 것을 단지 직접적으로 만나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의식이 사물과 직접적으로 만날 때, 의식은 사유라든가 표상이 아니며 그리고 사물도 어떤 성질을 갖지 않는다. 이 단계에서 우리는 사물이 단지 있다고 밖에 할 수 없는 것이다. 헤겔에 따르면 이 단계에서는 단순히 ‘이것’이나 ‘단일자’만 인지될 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감성적 확신에서 파악되며 그리고 ‘이것’으로 지칭되는 이 순수한 존재는 결코 부정적인 계기만을 가지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감성적 확신에서 파악되는 존재의 순수한 직접성은 의식과 사물이 서로 어떤 식으로든 밀접하게 관계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주는 것이다. 헤겔은 이렇게 감성적 확신의 단계에서 나타나는 순수한 존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그러나 이 문제를 곰곰이 따져보면 이상과 같은 확신을 가능하게 하는 본질을 이루며 동시에 그 확신을 스스로의 진리로 표명하는 순수한 존재라고 하는 것에는 지금까지 논술된 이외에도 다른 여러 가지 요소들이 개입돼 있다. 말하자면 구체적인 의미의 감성적 확신이란 결코 단 하나의, 바로 옆에 있는 순수한 직접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와 같이 순수한 직접성을 나타내는 단 한 가지 예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결국 순수한 존재마당서 눈에 띄는 수많은 구별 중에서 무엇보다도 우리는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차이점을 발견하게 되는바, 그것은 즉 이른바 감성적 확신으로 받아들여진 단순한 존재 속에서는 어느덧 앞에서 이미 언급된 바 있는 두 가지의 이것들, 즉 자아로서의 이것과 대상으로서의 이것이 서로 구분되고 분리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양자간의 차이를 놓고 볼 때 바로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그 중의 어느 편도 단지 직접적으로 감성적 확신에 다다라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들은 매개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즉 어디가지나 나는 하나의 타자를 통해서, 말하자면 하나의 사물을 통해서 확신을 얻게 되었는가 하면 또한 반대로 이 사물의 측면도 역시 어떤 타자를 통해서, 즉 다름 아닌 자아를 통해서만 그 자신의 존재에 대한 확실성을 띌 수 있었다는 것이다.”1)
순수한 존재와 의식의 관계를 나타내주는 감성적 확신은 특정한 장소와 특정한 시간에 있는 단일자와 관계하지만 의식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헤겔은 ‘감각적 확신’의 끝 부분에서 순수한 존재는 그것이 결코 단일자로서만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는데, 여기에서 의식은 감성적 확신의 단계를 벗어나서 새로운 단계로의 진입을 시도한다. 이것은 헤겔에 따르면 필연적인 과정인데, 왜냐하면 의식이 이러한 감성적 확신의 단계에만 머무르면 결코 앎으로의 도약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헤겔은 정신현상학의 지각의 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직접적 확신은 결코 진리의 구실을 할 수 없으니, 왜냐하면 진리란 어디까지나 일반자일 수밖에 없는데도 그는 하나의 이것(das Dieses)만을 취하려고 하기 때문이다.”1) 감성적 확신의 단계에서 의식은 이렇게 개별자로 주어진 ‘이것’이 결코 참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파악하고 새로운 단계에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2) 지각의 단계에서의 의식과 존재
헤겔이 감성적 확신의 단계에서 주장하는 것은 감성적 확신을 통해서 주어지는 존재가 가장 구체적이고 충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추상적이고 빈약한 존재라는 점이다. 헤겔에 따르면 이렇게 감성적 확신의 단계에서 “이것”으로 주어진 존재는 결코 궁극적인 의미에서의 존재가 아니다. 따라서 감성적 확신은 의식에게 단지 소박한 단계의 존재를 제공할 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겔이 감성적 확신에서 주어진 존재에 대해서 긍정적인 것으로 언급하는 이유는 이것을 통해서 존재의 이해가 한층 더 승화되어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정신현상학에 따르면 의식은 감성적 확신의 단계에서 지각의 단계와 힘의 단계, 즉 오성의 단계를 거치게 된다. 의식은 이러한 세 개의 단계를 거쳐서 더 이상 의식의 단계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식(Selbstbewußtsein)의 단계에로 진입한다.
존재가 직접적으로 파악되는 감성적 확신의 단계에 이어서 존재를 일반자로 발견하는 단계가 지각(Wahrnehmung)이라는 단계이다. 감성적 확신의 단계에서는 사물의 존재에 대해서 아무런 내용을 가져다주지 못하기 때문에 의식은 지각이라는 단계로 진입하여 구체적인 사물의 존재를 드러내어야 한다. 이때에 감성적 확신의 단계에서 지각의 단계에로의 이행은 의식이 일종의 도약을 이룩하는 것이다. - 이러한 도약은 헤겔의 변증법의 전개에 있어서 필연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이제 지각의 단계에서 의식은 감성적 확신의 단계에서처럼 직접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을 개별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지각은 감성적 확신의 단계에서 의식이 갖는 소박한 감각들과는 구분되어져야 한다. 헤겔에 따르면 그 이유는 지각의 단계에 이르러서 의식은 이미 보편적인 것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의식이 감성적 확신의 단계에서 단지 개별자로서 자신과 대상을 생각하는 것과는 구분된다.1)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이러한 시선돌림은 어떤 새로운 의식의 출현으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전환의 계기는 의식이 이미 감성적 확신에서 간직하고 있던 것이기 때문이다.
지각의 단계에서 의식은 사물들을 더 이상 개별자로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성질들을 가진 것으로 파악한다. 이러한 다양성은 의식이 감성적 확신의 단계에 있을 때에는 결코 획득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때에 지각의 단계에서 파악되는 대상(존재)은 이미 감성적 확신의 단계에서 주어졌던 대상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달리 말하자면 지각의 대상은 감성적 확신의 단계에서는 개별자로 파악되었던 일반자인 것이다. 여기에서 의식이 지각의 단계에서 하는 작업은 다른 것이 아니라 개별자를 일반자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나 헤겔에 따르면 이러한 작업은 직접적인 것을 추상화하는 작용이 아니라, 오히려 추상적인 것을 구체화하는 작업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1)
지각의 단계에서 의식이 다양한 속성들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사물들을 경험한다는 것은 의식이 감성적 확신의 단계에서는 올바르게 언급될 수 없었던 일반자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물의 존재는 그들이 다양한 성질들을 갖는 것으로 간주되는데, 이 때문에 사물의 성질들은 다양하게 언급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소금이라는 사물의 성질은 흰색, 짠맛 그리고 각짐 등등이다. 이러한 성질들은 각각 소금과 관계되지만 각각의 다른 성질들과 동시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헤겔은 이런 점에서 이렇게 지각의 단계에서 사물이 다양한 성질들을 가지는 것을 “또한”(auch)이라는 용어로 표현한다. 이러한 또한 속에서 사물의 각각의 성질들은 서로 영향을 주지 않고서 존재한다. 이런 점에서 헤겔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모든 여러 가지 성질들은 하나의 단순한 여기 속에 뭉쳐져서 그들 모두가 서로 밀착되고 삼투되어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 가운데 어느 한 가지도 다른 어떤 것과 구별되는 저 혼자만의 여기를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하나마다가 어디서나 다른 것과 혼연일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그들은 모두가 다른 많은 여기에 의해서 따로 분리되어 있지 않은 상호 침투해 있는 상태에서도 결코 서로를 촉발하는 일이 없다. 즉 백색은 입방체를 촉발하거나 변형시키지도 않으며 또한 이 두 요소가 짠맛을 바꾸어 놓을 수도 없을뿐더러 그 하나하나의 성질마다가 단순한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유지할 뿐이니 결국 이들은 모든 여타의 것은 그대로 방치해 둔 채 다만 스스로의 무관심만을 나타내는 또한 이라는 입장에서 자기 이외의 것들과 관계할 따름이다.”1)
비록 이렇게 서로 무관심한 성질들이 비록 서로의 성질들과 모순되지 않으면서 양립할 수 있지만, 그러나 이것은 사물들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알려주지 않고 막연한 일반성을 드러낼 뿐이다. 여기에서 다양한 성질들이 단지 동근원적(gleichursprünglich)으로 존재하고 그리고 단지 자기 자신에게만 관계한다면, 이러한 성질들은 사물의 존재에 귀속하는 특정한 성질로서 받아들여 질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어떤 성질이 다른 성질과 구분되는 특정한 성질이 되려면, 한 성질은 다른 성질들과 대립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한 성질은 다른 성질을 부정하여야만 한다. 헤겔은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예기된 이러한 관계 속에서 관찰되고 또 전개된 것은 다만 긍정적 일반성의 특성을 의미할 뿐이었지만 이제 여기에는 또 한 가지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될 측면이 드러난다. 즉 이상 얘기되었듯이 만약 수많은 특정한 성질들이 서로 전적으로 무관심한 상태에 있어서 이들 모두가 다만 자기 자신과의 관계만을 고수하는데 그친다고 한다면 결코 이러한 성질들은 특정한 자기규정을 받는 것으로 볼 수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무엇이건 그것이 규정된 것일 수 있기 위해서는 어디까지나 각기 그 성질들이 서로 구별되고 또 타자에 대해서도 스스로의 대응적 입장을 나타내는 것이라야만 하기 때문이다.”1)
이런 점에서 보면 지각의 단계에서 파악되는 사물이 갖는 성질은 두 가지 측면을 가지는데, 그것은 다른 성질과 동근원적이며 스스로에게만 관계하고, 다른 편에서는 다른 성질들과 대립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두 가지 측면은 의식이 사물의 존재를 지각해나가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헤겔은 이러한 과정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의식은 이러한 지각의 단계에서 오류에 빠질 수가 있기 때문이다. 즉 지각하는 의식이 대상에 대해서 어떤 것을 추가하거나 배제한다면 여기에서 오류가 생기게 된다. 지각을 통해서 의식은 실제로는 그것이 아닌 어떤 것을 어떤 것으로 간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헤겔에 따르면 이러한 오류는 전적으로 의식에 기인한다. 왜냐하면 의식이 지각작용을 통하여 서로 상호 배타적인 상태의 성질들을 서로 구분하고 배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의식이 지각의 단계에서 갖고 있는 오류가능성에 대해서 부정적으로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지각하는 의식은 이러한 오류의 가능성을 그 스스로 자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의식은 자기 자체로의 복귀를 시도한다. 여기에서 지각의 본질적 측면은 의식으로 하여금 지각작용으로부터 야기된 오류가능성 또는 허위성이 바로 그 의식 자체에 귀속하는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한다는 것이다.
(3) 힘(Kraft)의 단계에서의 의식과 존재
의식은 지각의 단계를 거쳐서 우리에게 사물의 존재에 대한 경험-사물을 일반자로서 파악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지만, 그러나 여기에서 의식이 얻어내는 것은 참다운 일반자가 아니라 단지 감각적으로 주어진 일반자일 뿐이다. 이러한 일반자는, 엄밀히 말하자면, 개별자와 서로 대립하는 것이다. 물론 지각의 단계에서 의식은 이러한 갈등, 대립을 극복하려고 시도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것은 지각의 단계에서의 의식에게는 과도한 것이다. 헤겔은 이 점을 정신현상학 3장 “힘과 오성”의 서두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우선 의식은 감성적 확신의 변증법에서 듣는 것, 보는 것과 같은 감각적 수용상태를 지나서 지각단계를 넘어서고 난 뒤에 마침내 사상의 형태를 띠게는 되었으나, 아직도 여기서 말하는 사상은 이와 같이 분화된 점진적인 발전을 이룩하는 의식을 무조건적인 일반성 속에서 통합한 것뿐이다. 그러나 또한 여기서 뜻하는 무조건적인 것이 한낱 단순하게 정지돼 있는 본질로 간주된 것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또 다시 자기존립을 고수하는데 급급한 한쪽으로만 치우친 극단(Extrem des Fürsichseins)을 의미하는데 지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경우에는 이 무조건적인 것에 대해서 다름 아닌 비본질적인 것이 맞서게 될 뿐 아니라, 다시 이와 같은 비본질적인 것과 관련되는 한에서 이 무조건적인 것 자체는 비본질적인 것으로 화하는 가운데 마침내 의식은 여기서 지각작용에서 비롯된 기만성을 탈피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의식은 여기서 그와 같은 제약성을 지닌 대자적 존재로서의 자기 집착상태를 벗어남으로써 자신에게로 복귀하기에 이른 것이다.”1)
헤겔에 따르면 이렇게 지각의 단계에서 벗어나는 다음단계가 오성의 단계이다. 이러한 오성의 단계는 자신에 대한 존재(Fürsichsein)와 타자에 대한 존재(Sein-für-Anderes)의 구분을 지양시키는 단계이다. 오성의 단계에서는 감성적 확신과 지각에서 서로 대치되던 개별자와 일반자, 이 양자가 서로 ‘통합’되어진다. 헤겔은 이러한 양자의 통합을 염두에 두어서 무제약적-일반자(das Unbedingt- Allgemein)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의식은 지각의 단계에서 자기의 개념을 아직 개념으로서 포착하지는 못한다. 물론 지각은 감성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나 일반자를 만나지만, 이때의 일반자는 아직 개별자들과 대립하는 감성적인 일반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달리 오성의 단계에서의 의식은 개념을 개념으로서 파악(Erfassen des Begriffes als Begriff)하는 단계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오성의 역할은 아직 반성되지 않은 개념에 머물러 있는 지각에서 의식을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즉 오성은 개별자를 일반자로 그리고 일반자를 개별자로 이끌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 헤겔은 오성이 가진 이러한 능력을 다름이 아니라 “힘”(Kraft)이라고 부르는데, 용어법적으로 보면 철학사에 있어서 힘이라는 개념은 드물게 사용되는 것이다. 헤겔은 힘이라는 용어 아래에서 어떤 것을 말하려는 것일까?
의식은 감성적 확신의 단계와 지각의 단계를 벗어나서 힘의 발현으로 나타난다. 이때에 힘은 현상세계로서의 감성적 영역을 넘어서 진리의 세계, 즉 초감성적인 세계로 다가가게 하는 것이다.1) 헤겔에 따르면 이러한 힘은 두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 특성은 힘은 외화 된다는 점이다. 힘은 그 자체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이때 힘은 타자에 대한 존재(Sein für anderes)가 된다. 그러나 헤겔은 이렇게 표출된 힘은 다시 자기에게로 향한다는 점을 강조하는데, 이것이 힘이 갖는 두 번째 특성이다. 헤겔은 이렇게 자기 자신을 표출하고 다시 자기에게로 귀환하는 것을 힘의 본성이라고 본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이렇게 힘이 자신을 표출하고 다시 자기에로 귀환하는 과정은 서로 절대적으로 구분되는 단계가 아니라 하나의 운동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힘은 자기 자신을 표출하고 다시 자기 자신에게로 귀환하는데, 이러한 과정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의식이 자기 자신을 경험하게 되는 과정이다. 의식이 감성적 확신과 지각의 단계에서 파악한 존재는 오성의 단계에서는 그것이 오성의 작용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파악하게 된다. 여기에서 이러한 운동을 통해서 감성적 단계와 지각의 단계를 거친 의식은 이제 개별자와 일반자, 사물과 성질들, 힘의 표출을 거쳐서 자기에 대한 앎을 경험하게 된다. 헤겔은 “힘과 오성” 마지막 부분에서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결국 우리는 현상계에서 노정되는 내면적 존재를 통해서 오성이 진정으로 경험하는 것은 다름 아닌 현상 자체임을 알 수 있으나, 동시에 우리는 이것이 대립하는 여러 힘 사이의 유희로서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유희의 절대적이며 일반적인 계기와 또한 그러한 운동을 지탱해 나가는 유희라는 것, 그리하여 실제로 오성은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을 경험 할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1)
오성을 단계를 지나서야 비로소 의식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앎을 갖게 되는데, 이러한 상태를 헤겔은 “자기의식”(Selbstbewußtsein)이라고 부른다. 즉 감성적 확신과 지각 그리고 오성의 단계를 지나면서 의식은 비로소 자신의 대상으로 간주한 것이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사물의 존재는 의식이 자기의식이 되는 과정에서 더 이상 의식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식 속에서 용해되는 것이라는 점이 밝혀지는데, 이것은 또한 헤겔의 철학이 관념론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나타내주는 것이다. 또한 여기에서 드러나는 것은 의식이 자기의식의 단계로 이행하는 과정을 언급하는 것은 관념론자인 헤겔이 설정하는 필연적인 이행과정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이다.
2) 존재와 시간에서 전개된 하이데거의 존재개념
(1) 존재이해와 현존재(Dasein)
하이데거가 목표로 하는 것은 서양 형이상학의 해체이다. 이러한 해체작업에 있어서 주요한 출발점은 다름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비판이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작업을 1927년에 간행된 존재와 시간을 통해서 전개하고 있다. 물론 하이데거가 서양 형이상학의 중요한 개념인 존재개념을 비판하는 것은 그가 이미 프라이부르그 대학에서 강사로 활동할 때부터 시작된다. 하이데거는 1923년 여름학기에 행해진 현사실성의 해석학(Hermeneutik der Faktizität)을 통해서 자신의 독자적인 철학을 전개시킨다. 하이데거가 교수자격논문을 발표한 이후부터 프라이부르그 대학에서 훗설의 후임이 되기까지의 저술들은 존재비판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존재와 시간은 이러한 존재비판의 내용을 가장 심도 있게 드러내 주고 있다.1)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서양 형이상학의 해체를 위해서 존재비판을 하는 도상에서 존재와 시간에서-비록 이 책은 하이데거의 의도대로 완결되지 않고 단편적으로 머무르지만-하이데거가 시도하는 것은 첫 번째로 주관-객관의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제기하는 것이며, 두 번째로는 존재에 대한 물음이 인식론적인 문제가 아니라 존재론적인 문제라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존재와 시간에서의 이러한 시도는 현상학적-해석학적인 방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하이데거는 이 위에서 존재와 시간에서 다양한 사상가들, 예를 들면 데카르트, 칸트, 헤겔, 쉘러, 훗설 등을 비판하고 있다.
우리가 여기에서 우선먼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하이데거가 전통적인 존재개념을 어떻게 이해하는가라는 문제이다. 이 문제는 존재와 시간 전반부를 살펴보면 쉽게 언급될 수 있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전통적인 존재개념을 세 가지로 요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첫째로 존재가 ‘가장 일반적인 개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존재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발견된다. 그러나 하이데거에 따르면 이러한 존재개념은 명확한 것이 아니다. 두 번째는 존재를 ‘규정 불가능한 것’이라고 파악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존재를 자명한 개념이라고 이해하는 것인데, 이것은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존재를 쉽게 이해하고 있으므로 존재를 자명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이러한 존재이해는 결코 올바른 존재에 대한 이해를 가져다주지는 않지만, 그러나 우리에게 존재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요청하게 한다.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존재를 언급하는 방식은 헤겔의 방식-비록 그 내용과 의미는 구분되어져야 하지만-과 유사하다. 직접적인 것에서부터 매개된 것으로 나아가면서 존재를 언급하는 헤겔처럼 하이데거도 현존재에게 주어져 있는 존재의 직접성에 대한 논의에서부터 자신의 철학적 프로그램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전기의 하이데거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현존재의 ‘현사실성’(Faktizität)이라는 용어는 바로 이러한 존재의 직접성을 잘 드러내는 용어라고 볼 수 있겠다.
존재와 시간에서 직접적인 단계에서의 존재이해를 잘 드러내는 용어는 실존적(existenziell)이라는 용어이다. 이 용어는 실존론적(existenzial)이라는 용어와 구분되는 것으로서 존재의 직접성을 표현하는 용어이다. 비록 하이데거는 실존적이라는 용어와 실존론적 이라는 용어를 존재와 시간 전반에 걸쳐 엄밀하게 구분하여 사용하지는 않지만, 실존적인 것에서 실존론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것이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전개하려는 프로그램의 기본입장이다.
이렇게 존재의 직접성에서부터 출발하는 하이데거는 현존재가 존재와 숙명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전제하고서 존재와 시간을 시작한다. 나중에는 「휴머니즘에 대한 편지」에서 현존재인 인간을 “존재의 이웃”(Nachbar des Seins)이라고 표현하는데서 알 수 있듯이, 하이데거에 따르면 존재와 인간 사이에는 깊은 관계가 놓여있다. 현존재와 존재 사이에 놓여 있는 이러한 관계는 존재와 시간에서는 존재이해(Seinsverständnis)라는 용어로 잘 표현된다. 여기에서 존재이해라는 용어는 현존재를 다른 여타의 존재자와 구분되게 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다른 존재자들은, 예를 들면 책상, 연필은 존재에 대한 어떠한 이해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존재이해는 현존재인 인간만이 가지는 존재와의 친밀감을 말해준다. 이런 점에서 하이데거는 “존재이해는 그 자체로 현존재의 존재규정성(Seinsbestimmtheit)이다”1)라고 공표하고 있다.
이러한 존재이해는 현존재의 분석, 즉 현존재분석론(Daseinsanalytik)을 통해서 존재의 의미를 밝혀보려는 하이데거의 현상학적인 실험에 있어서 근본적인 출발점을 이루는 것이다. 존재이해는 우선적으로 현존재와 존재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인데,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이러한 존재이해가 다른 것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현존재에게 속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여 밝히고 있다. 즉 존재는 현존재가 가지고 있는 존재이해를 통해서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이데거는 “‘존재’라는 것은 실존하는 현존재에 속하는 이해로서의 존재이해 속에서 개시되어 있다”1)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하이데거의 언급을 따르자면 현존재에게 주어져 있는 존재이해는 존재와 시간에서 전개되는 존재의 의미를 정초할 수 있는 가능성의 제약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만약 우리가 이러한 존재이해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즉 존재이해가 선존재론적으로(vorontologisch) 주어지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결코 존재에 대해서 언급할 수 또는 표상 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의 주제들인 존재물음(Seinsfrage), 실존과 실존수행(Existenzvollzug)은 전적으로 이러한 존재이해의 가능성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2) 사물(Ding)과 눈앞-존재자
하이데거에 따르면 현존재의 근본적인 존재규정성으로서의 존재이해는 현존재가 가진 고유한 특성이지만, 이것은 동시에 다른 존재자들의 존재를 이해하는 출발점을 제공한다. 하이데거는 현존재를 “세계-내-존재”라고 부르면서 한편으로는 존재와의 연관성을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존재자들과의 관계성을 언급한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존재물음과 존재론적 차이(ontologi- sche Differenz)를 통해서 존재의미를 파헤쳐 나가려고 현존재분석을 시도하는데, 이것은 또한 현존재와 존재자들의 존재를 기술하는 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존재와 시간에서 현존재가 다른 존재자들과 만나는 것을 기술하는 것은 ‘세계’(Welt)의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1) 특히 기초존재론(Fundamentalontologie)의 구축을 위해서는 세계-내-존재로서의 현존재가 존재자를 만나면서 드러내는 존재자의 존재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에서 현존재와 존재자의 존재가 어떻게 연관되어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 15-18절에서 현존재가 어떻게 존재자와 관계하는지, 현존재가 어떻게 존재자의 존재를 파악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이 절에서 언급된 내용들은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의식을 통해서 사물의 존재를 파악하는 과정, 즉 감성적 확신에서 지각을 거쳐 오성을 통하여 사물의 존재를 파악하는 과정과 비교될 수 있다. 물론 여기에서 헤겔의 입장은 인식론적인 것이며 이러한 인식론적 입장은 하이데거에 따르면 우리가 사물의 존재를 언급하는데 있어서 우선적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이데거에 따르면 현존재가 존재자들과 관계하는 방식은 전적으로 존재론적인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하이데거가 언급하는 내용은, 헤겔과 연관시켜 말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사물의 존재를 파악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인데, 이것은 의식이 사물의 존재를 파악해 가는 과정을 그리는 헤겔의 입장과 비교될 수 있다.
현존재가 만나는 존재자는 세계 안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자들이다. 하이데거는 이렇게 세계 내에 주어져 있는 모든 존재자를 내부세계적 존재자(inner- weltliches Seiende)라고 부르는데, 여기에서 그는 이것을 분명하게 사물(Ding)이라는 용어와 의도적으로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다1). 왜 그런 것일까?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 우선적인 것은, 현존재는 인식론적인 입장에서가 아니라 존재론적인 입장에서 사물들과 만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 곳곳에서 언급하듯이 인식이라는 것은 이미 현존재와 존재자들의 존재를 전제로 해서만 비로소 가능한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즉 하이데거가 사물(Ding)이라는 용어가 아니라, 내부세계적인 존재자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인식론에 대한 존재론의 우선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내부세계적 존재자는 현존재가 세계 안에서 만나는 존재자들이다. 하이데거는 세계 안에 주어져 있는 존재자들을 내부세계적 존재자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내부세계적 존재자들은 현존재가 존재하는 한에서만 현존재와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우선적으로 현존재의 존재에 의존적이다. 이러한 입장은 현존재가 가지고 있는 존재이해를 통해서 존재의미를 발굴하려는 하이데거의 시도가 현존재중심적인(daseinszentrisch) 입장을 띤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이데거는 이렇게 현존재가 내부세계적 존재자 전체와 관계하는 것을 교제(Umgang)라는 용어로 설명하고, 이중에서 특히 다양한 내부세계적 존재자들과 구체적으로 교제하는 현존재의 활동을 조달(Besorgen)이라고 부른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존재자들을 조달하면서 있다. 예를 들면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화가는 유화물감, 붓 그리고 칼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는데, 화가는 그림을 그리는데 있어서 필요한 다양한 종류의 존재자들을 조달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다양한 재료들과 관계하듯이 하이데거는 현존재가 어떤 식으로든 세계 내에서 존재자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존재는 우선먼저 어떤 식으로 존재자와 만나는가? 하이데거는 현존재가 관계하는 내부세계적 존재자를 우선적으로 눈앞존재자(das Vorhandene)라고 부른다.
눈앞존재자는 현존재의 조달 속에서 드러나는 존재자의 존재방식이다. 달리 말하자면 눈앞존재자는 현존재의 눈앞에 놓여 있는 모든 존재자들이다.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이러한 눈앞존재자라는 존재방식은 현존재에게 사물의 존재가 그 모습을 우선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이다. 여기에서 눈앞존재자라는 용어는 하이데거의 용어법이 독특하다는 것을 잘 드러내준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하여야 할 것은 눈앞존재자라는 용어는 어떤 인식론적인 파악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1), 현존재의 실존수행 속에서 이루어지는 존재론적인 만남을 기술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여기에서 눈앞존재자는 단순한 사물로 파악되어져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눈앞존재자는 이미 현존재의 둘러봄(Umsicht) 속에서 만나지는 존재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현존재가 우선적으로 만나는 존재자의 존재방식인 눈앞존재자는 어떤 이론적인 세계에서 파악되는 것으로 간주되어져서는 안 된다. - 물론 하이데거에게는 이론적인 세계 그리고 이와 반대되는 어떤 세계도 결코 상정될 수 없는 것인데, 왜냐하면 기초존재론 내에서 현존재와 존재자의 만남은 존재론적인 전제이기 때문이다. 현존재의 조달, 들러봄은 현존재가 실용적인 관점에서 존재자와 관계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눈앞존재자라는 존재자의 존재방식은 현존재와의 관계를 충분히 예상하게 하지만, 그러나 현존재와 만나는 존재자 자신의 구체적인 존재특성을 드러내 주지는 않는다. 예를 들면 막연히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책들은 결코 나와의 구체적인 관계를 나타내줄 수 없기 때문이다. 현존재인 내가 책에 관심을 가지고 직접 읽어 내려가는 행위를 통해서만 그 관계가 구체적으로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존재가 존재자를 눈앞존재자로만 파악하는 것은, 현존재가 자신의 눈앞에 있는 존재자를 어떤 것(etwas)이라고 막연히 생각할 수는 있지만, 그러나 아직까지는 현존재의 손에 쥐어져서 구체적으로 쓰이는 것이 아니다. - 이러한 단계에서의 존재자의 존재방식은 헤겔의 감성적 확신의 단계에서 파악되는 사물의 존재방식과 비교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눈앞존재자라는 존재자의 존재방식은 좀더 구체적인 존재방식을 획득하여야 한다.
그러나 내부세계적 존재자가 그 자신의 구체적인 존재방식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눈앞존재자의 존재방식을 넘어서서 보다 구체적인 존재방식에서 파악되어져야 한다. 그리고 내부세계적 존재자는 우선적으로 눈앞존재자라는 존재방식으로 주어진다는 것은 모든 사물들이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 즉 현존재와의 만남을 벗어나 있는 존재자는 결코 상정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이데거의 기초존재론에서는 사물 자체(Ding an sich)라는 것은 결코 상정되어질 수 없음을 주지시키는 것이다. 이점은 현존재가 존재하는 한에서만, 즉 현존재가 조달함에서만 존재자가 드러난다고 보는 하이데거의 입장이 데카르트적인 실체개념-실체로서 사물(res)-그리고 칸트적인 물자체의 개념을 결코 상정 불가능한 것으로 보고 있음을 잘 말해주는 것이다.1)
(3) 규정된 존재로서의 손안존재자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 15-18절에서 제시하는 또 다른 존재자의 존재방식, 즉 눈앞존재자보다 더 구체적인 존재자의 존재방식은 손안존재자(das Zuhandene)라는 존재방식이다. 그렇다면 손안존재자는 어떤 존재방식으로 존재하는가? 손안존재자는 현존재와 가장 구체적으로 만나고 있는 존재자를 일컫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화가의 손에 쥐어져 지금 쓰이고 있는 붓의 존재방식이 바로 손안존재자이다. 지금 화가의 손에 쥐어져 있는 이 붓은 옆에 나란히 놓여져 있는 다른 붓들과는 달리 지금 화가에게서 구체적으로 쓰여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손안존재자는 현존재의 둘러봄 속에서 구체적으로 사용되는 존재자인데, 하이데거는 특히 이러한 구체적인 존재자를 도구(Zeug)라고 부른다.
도구라는 용어는 생소한 용어처럼 들리지만, 하이데거는 이 용어를 통하여 현존재에게 존재자가 어떻게 구체적으로 관계하는지를 잘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하이데거가 손안존재자를 도구라고 부르는 것은 철학적인 용어로는 적절하지 않다고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용어의 적절한 사용이 아니라, 어떻게 눈앞-존재자가 도구인 손안존재자로 존재방식을 바꾸게 되는가하는 것이다.
이미 앞서 언급했듯이 현존재가 우선적으로 내부세계적 존재자를 만나는 방식은 눈앞존재자라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러한 눈앞존재자의 존재방식, 즉 눈앞에-있음(Vorhandenheit)을 통해서는 결코 존재자가 현존재에게 자신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드러내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단지 존재자가 현존재의 눈앞에 주어져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눈앞존재자는 현존재에게서 사용되어지는 한에서만, 즉 현존재가 어떤 구체적인 용도(Um-zu)를 위해서 손에 쥐고 사용될 때에만 구체적인 존재자, 즉 손안존재자로 변화된다. 현존재에 의해서 눈앞존재자가 손안존재자로 변환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존재자의 존재방식은 현존재의 관심에 따라서, 그 용도에 따라서 구체적으로 사용되는지의 여부에 따라서 눈앞존재자 또는 손안존재자라고 불려진다는 점이다. 이러한 손안존재자가 가지는 존재방식은 손안에-있음(Zuhandenheit)이다. 손안에-있음의 존재방식을 가지는 존재자는 눈앞에-있음의 존재방식을 가진 존재자보다 현존재와의 더 구체적인 관계를 드러낸다.
여기에서 눈앞존재자가 손안존재자라는 존재자로 변환되는 과정은 헤겔이 감성적 확신의 단계에서 지각의 단계에로의 변환을 언급하는 것에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때에 하이데거와 헤겔의 명확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헤겔은 개별자만을 대상으로 하는 감성적 확신의 단계에서 일반자를 언급하는 지각의 단계에로의 이행을 발전의 과정으로 파악하고 이러한 발전이 자신의 정신현상학의 전개에 있어서 필연적인 것이라고 역설하지만1), 반면에 하이데거에게 있어서는 눈앞존재자에서 손안존재자로의 이행은 결코 필연적으로 요청되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이러한 이행이 발전과정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눈앞존재자와 손안존재자 또는 눈앞에-있음과 손안에-있음이라는 존재방식은 결코 어떤 것이 우선적인 것이라고 말해질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이들을 서로 상이한 존재자들의 존재방식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존재자의 존재방식은 전적으로 현존재가 존재자와 관계하는 방식을 드러낼 뿐이기 때문이다. 현존재의 관심에 따라서 눈앞존재자는 손안존재자로 그리고 손앞존재자는 다시 눈앞존재자로 쓰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1) 예를 들면 지금 화가에게 사용되는 붓은 화가의 필요에 의해서 좀더 작은 붓으로 대체될 수 있는데, 이때에 손안존재자로서 사용되는 붓 대신에 작은 붓이 화가의 손에 쥐어지기 때문에, 이전에 사용된 붓은 다시 눈앞존재자로 그의 존재방식이 변환된다. 우리는 눈앞존재자와 손안존재자의 관계를 통해서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현존재와 존재자의 관계를 언급할 때 강조하려는 것이 한편으로는 존재자의 존재방식이 현존재에 의존한다는 점-이것은 기초존재론의 중요한 결론이기도 한데-, 다른 한편으로는 존재자의 존재방식은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여기에서 후자는 현존재가 존재자의 존재를 파악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잘 드러내준다.
하이데거는 “엄밀히 말하자면 하나의 도구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1)라고 말한다. 이것은 본래 눈앞존재자인 존재자가 도구로서의 손안존재자로 변환되어 현존재와 구체적으로 관계하지만, 이러한 손안존재자인 도구는 결코 독립된 존재자로서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예를 들면 화가가 사용하는 도구들은 서로 서로가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데 있어서 긴밀히 연관성을 갖고 있다. 팔레트는 물감을 짜놓는데, 기름은 물감을 적당한 농도로 희석시키는데, 나이프는 물감을 떼어서 캔버스에 밀어 바르는데 쓰이는데, 여기에서 그림을 그리는데 있어서 각각의 도구들은 서로 연관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기름은 물감과 관계하여 물감을 녹이는데, 붓은 물감을 묻혀서 캔버스에 바르는데, 팔레트는 물감을 짜서 희석시키는 장소로 등등. 각각의 도구들은 서로의 용도와 밀접한 연관성을 드러내주는데, 이런 점에서 도구들은 그것이 손안존재자인 한에서 결코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여기에서 이러한 도구들이 가지고 있는 연관성을 도구전체(das Zeugganze)라고 부르며, 각각의 도구들이 서로에게 가지고 있는 관계를 지시(Verweisung)라고 부른다.
지시라는 용어는 손안존재자로서의 도구들이 서로 상호 연관되어 있음을 잘 나타낸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 17절에서 도구들이 가지고 있는 지시의 기능을 표시(Zeichen)라는 용어로 나타내는데, 이것은 손안존재자로서의 도구들이 서로 긴밀하게 자신들의 존재방식을 드러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움직이는 자동차의 엔진 소리가 이상하다면 그것은 엔진을 움직이는데 필요한 도구 또는 도구들이 비정상적인 상태임을 표시한다.
손안존재자의 존재는 이러한 지시와 표시라는 구조를 가지는데, 하이데거는 이를 통해서 도구들의 세계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것보다도 우리가 주목하여야 할 것은 이러한 도구들이 오로지 현존재의 둘러봄(Umsicht) 속에서 쓰여질 때만 그 연관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이데거는 “표시의 나타남, 즉 망치의 망치질은 존재자의 속성이 아니다”1)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도구들이 가지고 있는 지시와 표시라는 역할은 현존재에 의해서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 하이데거는 이렇게 현존재의 둘러봄 속에서 드러나는 손안존재자인 도구들의 존재특성을 쓰임새(Bewandtnis)라고 부른다. 쓰임새는 손안존재자들의 존재가 전적으로 현존재의 실천적인 둘러봄 속에서 파악되어진다는 것을 잘 나타내주는 용어이다. 도구들은 현존재에 의해서 쓰여지게 됨으로써 비로소 그들의 쓰임새를 갖게 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도구들 하나하나가 쓰임새를 갖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도구들의 전체성을 파악하는 현존재에 의해서 도구들은 그 각각의 쓰임새를 획득하게 된다. 이런 이유에서 하이데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본래적인 용도(Wozu)는 무엇을-위함(Worum- willen)이다. 무엇을-위함은 자신의 존재에 있어서 이러한 존재가 본질적으로 문제인 현존재의 존재와 항상 관계한다.”1)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 18절에서 존재자들의 존재방식이 갖는 내적인 관계를 “유의미”(Be-deutung) 그리고 이러한 내적인 관계성 전체를 “유의미성” (Bedeutsamkeit)이라고 부른다. 유의미는 각각의 존재자들이 갖는 지시와 표시가 현존재에 의해서 파악될 때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고 유의미성은 현존재가 존재자들의 존재방식에 얼마나 깊이 관여하는지를 잘 드러내 주는 용어이다. 이런 점에서 유의미와 유의미성을 현존재가 존재자들의 존재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주체라는 것을 자신의 현상학의 근본적인 출발점으로 삼는 현존재중심적인(daseinszentrisch) 하이데거의 입장을 적절하게 나타내주는 것이다.
우리는 현존재가 어떻게 존재자를 파악하는지를 존재자의 존재방식, 즉 눈앞에-있음과 손안에-있음의 언급을 통해서 살펴보았다. 이때 중요한 것은 존재자들의 존재방식이 절대적으로 현존재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다. 특히 하이데거가 도구라고 부르는 손안존재자의 존재방식은 존재자의 존재가 얼마나 현존재에 의존적인가를 잘 나타내 준다. 이런 점에서 존재와 시간 15-18절에서 언급되는 존재자의 존재방식은 그 의미상 구분되어져야 한다. 이런 이유에서 하이데거는 18절 끝 부분에서 존재자의 존재방식을 세 가지로 구분하고 있는데, 그것은 첫째로 우선적으로 만나는 내부세계적 존재자1)의 존재(손안에-있음), 두 번째로 손안존재자로 발견될 수 있고 규정될 수 있는 눈앞존재자의 존재(눈앞에-있음) 그리고 세 번째로 존재자를 눈앞존재자 또는 손안존재자로 만드는 현존재의 존재이다. 하이데거는 세 번째의 존재방식을 “실존론적”(existenzial)이라고 부르면서, 앞의 두 가지 존재방식과 구분하고 있다.1) 왜냐하면 눈앞존재자와 손안존재자의 존재방식은 현존재의 존재에 전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이데거의 기초존재론이 제시하는 결과의 일부분인데, 이러한 결과는 하이데거로 하여금 본질적으로 현존재의 존재를 기술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3. 결론
지금까지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감성적 확신과 지각 그리고 오성의 단계에서 어떻게 사물의 존재가 드러나는지 그리고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서 어떻게 존재자가 현존재에게 드러나는지를 살펴보았다. 여기에서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정신이 어떻게 드러나는가, 즉 의식을 통해서 어떻게 존재가 현상되는가를 드러내는 것이었고,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현상학적 방법을 사용하여 현존재에게 존재자가 드러나는 과정을 기술한다는 점에서 이들 사이에는 ‘현상’이라는 용어가 공통분모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헤겔과 하이데거는 소위 칸트철학의 결과였던 현상계와 물자체의 구분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사물의 존재는 어떤 식으로든-논리적이든 존재론적이든-의식과 현존재의 존재에 의존한다는 점이다.1)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겔과 하이데거는 서로 다른 철학적인 내용을 전개한다는 것이 간과되어져서는 안 된다. 하이데거는 서양 형이상학의 역사를 “존재망각의 역사”(Geschichte der Seinsvergessenheit)라고 단정하면서 전통적인 존재론을 비판하는데, 이때에 헤겔의 존재이해도 이러한 비판대상에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헤겔은 비록 의식이 직접적으로 주어진 감성적 확신의 단계에서 사물의 존재를 감지하지만, 이것은 의식의 작용을 통해서 반드시 매개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즉 의식에게 주어진 직접성은 불완전한 것이므로 좀더 추상적이고 구체적인 단계로 지양되어야 하는 것인데, 이러한 과정에서 의식은 자기의식(Selbstbewußtsein)을 거쳐 절대적 의식(절대자)의 단계까지 나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헤겔은 존재를 매개하는 것, 즉 개념적 사유라는 것을 존재파악의 중심내용으로 간주한다.
반면에 하이데거에게는 이러한 개념적 사유란 현존재의 근본적인 존재방식이 아니다. 그러한 방식을 통해서는 결코 사물의 존재를 올바르게 기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더 나아가 현존재와 존재의 관계를 존재론적으로 드러낼 수 없게 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그러한 개념적 파악의 과정은 오히려 존재의 의미를 왜곡시키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여기에서 하이데거는 현존재가 존재자를 만나는 것은 이론적인 파악 속에서가 아니라 현존재의 구체적인 들러봄 속에서 가능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하이데거에게는 이러한 만남은 인식론적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현존재의 존재에 의해서 가능한 것일 뿐이다. 따라서 하이데거에게는 헤겔과는 달리 인식론에 대한 존재론의 우위가 존재한다.
끝으로 논자는 한편으로는 헤겔과 하이데거의 존재개념을 보다 심도 있게 논의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생각하는 인식론, 존재론에 대한 명확한 규정과 이해에 대한 논의가 별도로 필요하다는 점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 양자의 존재개념에 대한 이해가 시기적으로 변화하기 때문에 이들이 후기에 전개하는 존재개념에 대한 비교연구가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영혼에 대한 현대철학의 해석*1)
- 존 힉의 경우 -
신 상 형(안동대)
주 제 어 : 존 힉, 종교다원주의, 영혼론, 사후세계
들어가는 말
인간은 종교적 동물이다. 이 말을 뒤집으면, 인간은 영혼의 활동을 통해 비로소 인간으로서 자격을 갖추게 된다는 뜻이다. 즉 인간이 금수와 버러지의 수준을 능가하려면 육신의 삶의 구간을 벗어난 그 이전과 이후의 삶 ―영혼―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관계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사실, 동서고금을 통해 많은 사람들은 영혼에 대한 탐구―신앙적이든 철학적이든지 간에―를 해왔다. 플라톤의 주장처럼, 사람이 죽을 때 영혼은 소멸되지 않고 그의 육신과 분리되어 살아남는다고 믿는 이들도 있고, 유가에서처럼, 심지어 영혼의 존재에 대해서조차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어왔다. 과연 영혼은 존재하는가? 만일 영혼이 존재한다면, 그 영혼은 어떻게 존재하게 되는가? 그리고 그런 영혼의 존재를 우리는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는가? 또 어떤 영혼이 한 특정인의 영혼으로서 존재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과 어떻게 결합되고 또 어떻게 분리되는가? … 이렇듯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물음은 우리의 논의를 번쇄한 것으로 만든다. 논의의 편의와 최소한의 효율성을 위해, 여기서는 인간이 종교적 동물이라는 전제 아래, 인간의 영혼은 존재한다는 가설과 더불어 이 논의를 진행시키려고 한다.
종교철학의 주제1)중에서 영혼론에 해당하는 본 논문은 구체적으로 현대의 종교철학자인 존 힉의 입장을 드러내는데 그 목적이 있다. 힉은 자신의 사상적 배경인 기독교 신앙을 한 마디로, ‘인간을 하나님께로 끌어올리기 위해 하나님 자신이 인간이 된 사건에 대한 신앙’으로 묘사하고 있다.2) 이중에서 그가 주목하는 것은 후반부이다. 즉 그는 종교활동에서 벌어지는 인간화의 모습에 착목하여 거기에 가치를 둠으로써 신앙의 교리 자체보다는 인간 삶의 종교적 의미 파악에 이르게 된다. 경험상 이종교간이나 같은 종교 내의 종파간에서도 괄목할만한 차이점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즉, 복잡한 교리나 신학적 체계를 다루는 학자들이라면 몰라도, 외형상 신앙인들의 순수한 삶은 심지어 모든 종교에서 거의 유사한 행태를 띠고 드러난다. 힉은 이런 모습을 자신이 산 잉글랜드의 버밍햄이라는 도시에 사는 다민족 종교 교도들에게서 보고, 영혼의 모든 종교활동은 경험적으로 동일한 것이라는 가설을 설정하게 되었다.
그런데 종교다원주의는 두 가지의 상호 모순적인 전제를 함축하고 있다. 첫째로, 각 종교는 진리에 있어서 대등한 위치를 갖는다는 것과, 둘째로, 모든 종교는 결국 같은 목적을 향하고 있다는 전제이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절대적 위치에 있는 어떤 초월적인 판단자가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요청되는데, 힉은 그것을 도리어 드러난 종교생활의 체험으로 끌어내려 설명하는 혜안을 갖고 있다. 사실 영혼의 불멸은 우리가 쉽사리 증명해 보일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육신의 오감을 통해 그 존재를 객관적으로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므로, 그것은 사태를 통해, 더 정확히 말해 영혼과 육신의 관련성이 변화를 일으키는 죽음의 사태를 분석해 봄으로써 영혼의 존재와 속성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어느 면으로, 그것을 제외하고는 달리 영혼을 탐구할 마땅한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 원래 이 논문은 죽음이라는 사태를 통해 영혼의 문제를 탐구하려는 시도로서, 죽음, 육탈된 영혼 및 부활 내지 환생에 대한 내용으로 구성되어야 하나, 뒤의 문제는 추후의 과제로 미루고 여기서는 육탈의 문제까지 만을 다루기로 하겠다.
1. 방법론: 다원주의
존 힉의 종교철학적 방법론은 다원주의이다.3) 힉은 스미스 Wilfred Cantwell Smith의 다원주의 입장을 받아들여 종교를 말한다. 즉, 지구에는 수많은 광범위한 긴 역사적 실재 내지 체계로서 기독교, 힌두교, 이슬람교, 불교 등이 있는데, 각각은 내부의 신념 골격 체계를 갖고 특정한 종교적 삶의 형식의 틀을 제공하면서, 다른 종교 및 세속 세계로부터 구별되는 두꺼운 외피 조직으로 싸여 있다. 따라서 이들은 특정한 신조를 품고 있는 상반된 사회․종교적 실재들이며, 각 개별 종교는 상호 배타적 집단의 일원으로 간주된다. 이런 경쟁적 종교 신념의 장치를 근거로 한 종교적 삶의 이해는 종교에 관해 어떤 방식으로 의문을 제기하도록 우리를 유도한다. 즉 한 종교가 고백하는 신념들은 하나님이나 궁극 원인에 대한 신념이며, 그 자체로서 그것은 인간구원이나 해방의 방법을 규정하고 따라서 영적 생사의 문제가 되기도 한다. 세상의 종교들은 다원적인 측면에서 볼 때 우리에게는 구원의 진리를 소지하고 있다는 경쟁적 주장들로 주어진다. 각 집단은 자기 자신의 복음이 진리이고, 다른 교리들은 자신들과 다른 만큼 거짓이라고 믿고 있다. 각각은 자기가 증거하는 구원의 방식이 영원한 축복에 이르는 인증된 길이자, 유일하게 확실한 길이라고 믿고 있다. 이런 다양한 주장에 직면하면 당연히 제기되는 질문은, 어느 것이 참된 종교인가? 이다.
그러나 여기서 힉은 그 질문을 약간 회피하면서 스미스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종교의 우열을 가리는 것은 그 기준이나 방법이 모호하여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우선 ‘종교’라는 개념을 지나친 기독교나 유대교 식이라고 보고, 대안 개념으로 ‘신앙’ faith이라는 개념을 채택, 이것을 ‘생생한 종교적 의미를 지닌 무엇‘ something of vital religious significance으로 부른다.4) 그는 이것을 사용하여 궁극적 신적 실재에 대한 개인의 드러난 대응으로 구성된 영적 상태나 존재론적 조건을 지칭한다. 이 상태의 범위는 신적 현전에 맹목적인 자기 폐쇄적 의식의 부정적 대응에서부터 점차적으로 우리를 변형시켜 구원, 해방 혹은 계몽이라 불리는 신성에 대한 긍정적 개방에까지 이른다. 이 변형을 힉은 상이한 종교적 맥락에서도 동일하다고 본다. 그는 이 변형을 공식적으로 ’인간 존재의 자기 중심성으로부터 실재 중심성으로의 변형‘ 이라고 정의한다.5) 사실 이것은 세계관의 변화로서 다양한 종교적 전통으로 얻어지는 궁극자에 대한 상이한 지각이기도 하다. 이것은 개인마다 문화마다 오랜 역사를 통해 누적적으로 다른 형식을 띠고 발전하였다. 이런 형식으로 힌두교도, 불교도, 유교도, 유대교도, 이슬람교도, 기독교도들이 생겨났다. 이들은 서로가 다를 뿐더러, 같은 것이라 하더라도 지역에 따라 역사적으로 크게 달라지게 되었다. 번쇄해진 교리와 복잡한 의식 그리고 다양해진 교파는 어느 종교에도 예외가 아니어서 그것들은 소위 수 백 가지의 종교 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런 지경에서 어떤 특정 종교의 주장을 기준으로 한다는 것은 형평성의 원리에 어긋나는 일이다. 나아가 그 모든 것을 이해하기 전에는 그런 시도 자체가 무리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종교를 논하기 위해서는 어떤 입장에 서야 하는데, 힉은 자신이 속한 기독교 입장에서 그 용어를 사용하여 세 가지 선택지를 기술하고 있다.6)
우선, 배제주의 exclusivism가 있다. 이것은 자기의 종교 안에만 구원 혹은 해방이 있는 것으로 한정하면서 다른 집단은 그런 가능성에서 배제하는 것을 말한다. 소위, ‘기독교 밖에는 구원은 전혀 없다.’는 입장이다. 이것은 기독교적 구원 교리, 즉 아담의 범죄로 빚어진 인간의 죄성으로부터의 해방을 원한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통한 용서를 받는 절차를 거쳐야 하고, 이럴 경우 구원은 당연히 기독교 신앙 공동체로 한정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반대로 구원이 자기 삶을 자기 중심성에서 실재 중심성으로 변형시키는 것이라면, 이것이 꼭 어떤 한 역사적 전통, 즉 종교에 한정될 필요는 없다. 사실 이런 변화는 수준이나 방법이 다르기는 해도 거의 모든 종교에서 발견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극단적인 기독교의 배제주의는 이제 중심선에서는 사라지고 있다고 힉은 보고 있다.
두 번째 입장은 포섭주의 inclusivism이다. 이것은 구원에 대한 인간 존재 개념의 변형인데 그 핵심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집행은 모든 인간적 죄를 망라하였으므로, 모든 인류는 이제 하나님의 자비에 열려 있고 심지어 기독교의 그리스도를 들어본 일이 없고 또 십자가의 죽음을 몰라도 구원이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역이 어떻게 어디서 일어나건 간에 보편적인 신적 로고스, 거룩한 삼위일체의 2위로서 일 때 그러하다. 말하자면, 힌두교의 미지의 그리스도나 기독교의 미륵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세 번째는 구원 혹은 해방 및 누적적인 종교 전통 사이에 대한 다원주의 pluralism이다. 다원주의란 인간 존재의 자기 중심성으로부터 실재 중심성에로의 변형이 모든 위대한 종교 전통들의 맥락 내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견해이다.7) 기독교식으로는 신성한 계시의 다양성이 있어서 인간 구제 응답 형식의 다양성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그러나 보다 포괄적 입장인 다원주의적 입장이 이 세 가지 중에 가장 합리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전통적 기독교가 포섭주의를 거쳐 다원주의로 옮아가는 데는 삼위일체 및 성육신의 교리가 장벽으로 가로막고 있다. 이것은 기독교를 유일한 종교로 만들게 하는 골간을 이루는 것으로 성자 예수는 성육화한 삼위일체의 2위격이라는 교리이다. 비록 이것이 세속적 지식으로는 비실재적이라 하더라도, 니케아 및 칼세도니아 회의에서 이를 기독교의 교리로 공인하고 또 모든 기독교가 이 기초 위에서 그 자격을 갖추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동시에 배타적인 속성을 갖는 기독교리인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것은 받아들이는가 아닌가 라는 양자 선택의 교리 all-or- nothing Christologies 인데, 힉은 여기에서 등급 교리 degree Christologies를 제안함으로써 또 한번의 도약을 시도한다.8) 즉 양자 선택의 교리는 칼세도니아 정의에 따르는 것으로, 그리스도를 두 가지 본성, 즉 그의 신성에 따른 성부와의 동질성 및 인성에 따른 우리와의 동질성으로 고백하는 교리이다. 실체는 논리적으로 a가 b와 동일한 실체로 구성되어 있거나 아닌, 혹은 동일한 본질을 갖고 있거나 아니거나 라는 의미에서 양자 선택의 교리이다. 이 두 가지 본성은 그리스도에 대한 것으로, 그가 완전한 신성과 인성을 겸비하고 있다는 교리이다.
등급 교리에서는 ‘성육신’이라는 개념을 인간 삶에 드러난 하나님의 영 혹은 하나님의 은혜의 활동에 적용하여, 신성한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한다. 이런 종류의 재해석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시도되었다.9) 한 인간이 하나님에게 열려 있고 또 반응한다면, 그래서 하나님이 개인 안에 그리고 그를 통해 활동할 수 있다면, 우리 하나님의 구원 활동은 인간의 삶에 체현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종교적 체험에서 드러나는 모순10)은 예수의 삶에만 한정되지 않는다고 본다. 그런 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든 인간적 반응에서 ‘다양한 등급으로’ 발견된다는 것이다.11) 물론 여기서 힉은 모든 현대의 등급 교리가 기독교의 종교 다원주의의 수용을 촉진시키는 방향으로 발전된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 다만 이것이 해묵은 실체 교리의 대안으로 제시될 수 있다고 본다. 실체 교리에서 출발할 때 그리스도와 기독교 교회의 유일한 우월성이 선험적으로 보증되는데 반해, 등급 교리에서 출발할 때 그것들은 역사적 증거에 의해 확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학적으로 진술된 다원론은 위대한 세계적 신앙이 실재 혹은 궁극원인의 상이한 지각과 개념들 및 따라서 그것에 대한 상이한 대응들을 인간이 되는 다양한 주요 문화적 방법들 내에서 체현한다는 견해, 즉 각각의 방법 내에서 인간 존재의 자기 중심성으로부터 실제 중심성에로의 변형이 분명히 일어나고 있다는, 인간적 관찰에 관한 한 동일한 정도로 일어나고 있다는 견해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그것은 인간의 영혼의 활동에서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2.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음에 대해 자연주의적이거나 인간적인 수용이 틀림없이 있을 수 있다. 인문주의자들 사이에서 죽음에 대한 해석은 상이할 수 있으나 대부분 생물학적 접근에 대해서는 합리적이라고 수용한다. 이런 견지에서 죽음이란 개인의 발전 과정의 필요한 부분이라 보여진다.12) 인간을 포함한 어느 종이라도 죽음을 통한 지속적 손실로 균형을 맞추는 이런 징발 없이 새로운 구성원이 태어난다면, 지구는 곧 그들을 위한 공간과 자양분이 없어질 것이고, 그 종들은 그 결과 넘쳐 나서 자멸하게 될 것이다. 각 세대는 번갈아 가면서 다음 세대를 위해 제거되어야 하는 운명을 갖고 있다. 생명의 시초로부터 이러한 종의 새로운 개체 구성원들의 지속적인 계승이 있어왔다. 종이 환경의 변화에 적응력을 증진하고 대응할 수 있게 된 것은 각 세대에서 일어나는 작은 임의적 차이를 통해서이다. 자연적 죽음은 따라서 변화하는 조건에 순응할 수 없는 개체군의 제거로 간주된다. 외부의 물리적 세계의 변화는 항상 도처에 널려 있어서, 어떤 한 종의 생물학적 효과는 자연스럽게 확증된다. 재생산과 순응의 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 낡고 비효율적인 것들은 자연사에 의해 제거되고, 재생산과 적응에 효과적인 새로운 것들에 의해 대치된다. 한 인문학자는 자기 자신의 미래의 소멸을 계속되는 경주의 삶에 대한 기여로 신중하게 수용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힉은 Crew를 인용해서 말한다. ‘나는 늙었으므로, 죽음이란 개별적인 것이요, 나의 종말이라는 생각을 군말 없이 수용한다… 과학자로서 내 활동의 몇 가지 업적은 내가 봉사하려고 시도한 그 과학의 피륙에 체현되었다’13) 이것은 모든 과학자가 희구하는 소위 그들의 영혼불멸이다. 인간은 단순히 동물로서, 다른 생물의 종들처럼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다. 인간의 의식과 개성은 절대적으로 하나의 총체인 두뇌와 육체가 죽을 때 두뇌의 기능에 좌우되고 존재하기를 멈춘다. 의식은 포유류의 신경체계의 일시적 부산물로서 일정 수준의 복잡성까지 진화한 것이다. 따라서 육체의 죽음에서도 살아남는 의식적 개성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런 인문주의적 가설의 함의에 대해 버트란드 러셀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인간은 도달해 가는 목적에 대해 전혀 예견을 갖지 못한 바인 그 원인의 산물이고, 자신의 기원, 자신의 성장, 자신의 희망과 공포, 자기의 사랑과 자기의 신념은 단지 원자들의 우연적 배열의 산물일 따름이고, 아무 불, 영웅주의, 사고나 감정의 강렬함도 개인의 삶을 무덤 너머까지 보존시킬 수 없고, …’.14)
러셀이 여기서 인간의 조건에 대해 그리는 그림은 명백히 비관적인 것이다. 이 지구상의 삶은 조만간 끝나게 되어 있고, 그 과정에서 개발된 가치는 인간과 더불어 사라지게 될 것이다. 사실 인간은 무한히 광대한 시공간 속에서 덧없고 우연적인 현상에 불과할지 모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사랑, 우정, 충성과 선함, 자연세계와 인간의 예술적 창조의 끝없는 아름다움, 그리고 인간의 사상과 과학의 성취는 모두가 자기 정당화일 뿐 아니라, 그 가치는 인간의 궁극적 사태의 인문주의적 이해에 의해 축소되지 않는다. 더욱이 이 지구는 거주가 불가능하기 전에 인간이 태양계 내에서 다른 곳으로 이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인류 종족이 불멸하고 계속되는 세대인 것이 판명되어 인간 존재의 가치를 끝없이 즐기도록 될는지 모른다.
이 정도가 되면 인문주의는 삶에 대한 낙관적 견해를 제공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자신의 인간적이고 특별히 나은 관점을 넘어서서 총체적으로 인간의 상황을 검토해 보면, 그것의 가능성을 성취하는 측면에서는 인간의 삶의 만족스러움에 대해 최대로 생각할 수 있다. 인간의 잠재력은 공통된 원인을 가진 사람 사이에서 사랑과 우정 및 협동, 그리고 자연 세계의 향유와 인간의 사상과 예술의 여러 측면의 감상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잠재성은 사실 다만 극소수의 인간의 삶에서만 어느 정도까지 실현되고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지구 거주자들은 만성적 영양 실조, 기아의 위협 하에 살아가며, 아주 많은 사람들은 압박, 착취, 노예 상태로 살아가야 한다. 그들은 살아 있으나, 자신들의 잠재력을 충분히 실현할 수가 없다. 그들은 절대 빈곤으로 고통 당하고 있으며, 삶의 조건들이 제약을 받아 출생 때부터 가진 인간 종의 잠재력 실현을 거부당하고 있다.
이런 암울한 현실을 고려할 때 우리는 모든 삶이 고(苦)라고 하는 석가의 가르침을 부인하기가 힘들다. 우리는 이 다음 단계로 종교들이 열반이건 절대심과의 일체의 실현이건 간에 인간적 성취의 본성에 대해 제공하는 관념에 도달해야 한다. 현재 힉이 주목하고자 하는 통찰력은 그런 성취가 단일한 세상의 삶에서는 도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석가가 보리수 아래에서 정각에 도달했을 때, 그에 앞서 이미 수십만의 삶이 있었다는 것이다. 즉, 한 사람의 세상 삶은 깨달음에 도달하는 데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
서양의 기독교 전통에서도 우리가 인간 존재의 선한 목적을 인간의 잠재력의 실현으로 이해한다면, 단순한 한 세상의 삶의 공간 내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하나의 삶 내에서 단지 몇 사람이 인간의 잠재력 성취를 향한 긴 여정을 가고, 대부분은 조금 진보하는데 비해, 상당수의 사람은 거의 진보하지 않고, 어떤 이들은 심지어 역행하기도 한다. 일반적인 모습에서, 인간의 잠재력은 통상 이 현재의 삶에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에리히 프롬의 말대로, ‘삶은 계속적인 출생의 과정이다. 거의 모든 인간의 삶에서 비극이란 우리가 완전히 태어나기 전에 죽는다는 것이다.’15) 여기서 우리는 이런 관념의 차이와 그들 각각의 장점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동서 양쪽의 종교들이 갖고 있는 공통적 시각이다. 이것은 인간의 잠재력이 개인 남녀의 삶에서 성취된다면, 그들의 삶은 우리의 현존하는 육체의 존재 너머에까지 한계가 연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완성되어야 할 자아는 동물적 유기체의 간단하고도 불안전한 진전을 초월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계속되는 인간의 사후 세계라는 형식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죽음 후 마음의 형태는 어떠할까?
3. 육탈(肉脫)된 마음의 생존
육체가 없는 의식은 어떨까? 그 경우 인간은 무엇을 의식할 수 있을까? 다른 사람들은 각각 어떻게 식별될 것인가? 육탈된 마음의 생존 개념은 프라이스 H. H. Price에 의해 명료한 가설로 바뀌었다.16) 그는 세 단계로 자신의 이론을 펼친다. 그는 사후의 지각이 꿈에서의 지각과 똑같은 일반적인 종류가 될 것을 시사한다. 즉, 사후 지각들은 마음에 의존되는 것으로 사람의 육화된 삶의 기간 동안 획득된 심리적 상들로부터 형성되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의 육체가 보이는 그대로 자신과 주위의 물리적 환경에 감지되는 대로 갖는 상을 포함할 것이다. 그것을 체험한 사람의 시각에서 그 결과는 자기가 육체적 유로 존재하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세상의 지각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은 우리의 현재 세상과는 우리의 꿈 가운데 있는 사건들의 진행과 배열이 깨어있는 삶의 그것과 차이 나기가 쉽다는 방식으로 다를 수 있다. 때때로 꿈에는 갑작스러운 일탈과 변형이 보여지기 때문이다. 사후세계의 법칙들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심리학적인 것일텐데, 우리의 생존이 물리적 생존이기보다는 심리학적 생존일 것이기 때문이다.
프라이스가 둘째로 말하는 것은, 우리의 꿈은 다른 사람들이 단지 독립된 의식 중심에 의해 활기가 불어넣어지지 않은 현상일 뿐인 사적 체험인 반면, 사후 세계는 이 삶 가운데 과외의 감각 지각으로 불리는 것으로 다른 마음과 상호 작용하고 실제 교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직접적인 텔레파시 활동이 있어서 시청각 이미지를 산출하므로, 나오는 체험은 다른 사람을 보고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듣는 것과 매우 흡사할 수가 있다. 마찬가지로 촉각, 미각 및 후각적 이미지들도 있을 수 있다. 사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어 거주할 일관성 있는 삼차원적 세상이 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많은 상이한 사후세계 뿐 아니라, 도덕적이고 미적 관점에서 보면 보다 고차적이고 저차적인 세계들이 있을 수 있다.
셋째로, 다음 세계는 우리의 욕구의 힘에 의해 형성될 것이다. 이리하여 프라이스는 다가 올 세상의 가상적 거주자들에 대해, ‘그들의 기억과 욕망이 그들이 어떤 종류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가를 결정할 것이다. 내가 그것을 그렇게 한다면, 그런 세상의 질료 또는 재료가 결국 사람의 기억으로부터 오고 그것의 형식은 사람의 욕구로부터 올 것이다.’17)라고 말한다. 그러나 프라이스는 소원 성취의 영역이 반드시 절대적으로 즐겁다고 가장하는 것은 반대한다. 왜냐하면 이 꿈들은 오류 없는 정확성을 갖고 우리 욕구의 진정한 성격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더욱이 동양적 사고 유형과 관계를 가진 대안적 가능성으로서, 욕구는 궁극적으로 채워져서 죽고, 우리의 개별적 인간의 삶은 그와 더불어 사라지고, 열반의 초인적 상태로 몰입되어 들어가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이리하여 물리적 생존과 구별되는 심리적 생존의 기본적인 가설 내에서 프라이스는 두 가지 원리, 즉 첫째는 사후 세계의 심리 독립적 특성과, 둘째는 인간적 욕망의 힘에 의한 그들의 구성으로 작업을 한다. 이런 원리는 심리학적 생존의 가능 형식의 전 스펙트럼을 일으키며, 한 극단에서는 유아론적 해석에서부터, 다른 편으로는 심리 물리적 인간의 부활 내지 재구성이라는 전혀 상이한 개념에 분명히 경계를 두는 견해까지를 망라하고 있다. 프라이스 자신의 스펙트럼은 이 스펙트럼의 중간 어디에―사적 심리 세계 그림과 육체 부활의 그림 사이의 중간―서 있다. 그러나 이론상 욕망의 힘에 의한 사후세계의 구성이라는 관념과, 그런 세상은 많은 마음들 사이에서 텔레파시 연결을 통해 공통되어 있다는 관념 사이에 갈등이 있다.
개인은 상식적인 의미로 다른 사람들과 공통된 환경 내에서 상관하고 있으며, 새롭고도 상이한 이미지들을 자기의 기억 창고에 덧붙이는 새로운 체험을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다. 반면에 그는 존재하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의식을 갖고 있으나, 자기 자신의 마음에서 벗어난 실재들과는 상호작용을 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깨어 있는 삶과 비교해 보면, 아주 생략된 생생한 의미에 이르는 정도이다. 만일 우리의 꿈이 심리적으로 결정된 사건이라면, 우리는 꿈의 삶 가운데서 자유 선택의 환각만을 가지게 될 것이다. 반면에 우리의 꿈이 완전히 결정되지 않았다면, 연장된 꿈속에서 우리는 윤리적 결정을 해야 할 것이고, 따라서 성격의 발전 가능성이 있으리라는 일관성 있는 가설이 되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꿈속에 다른 사람들이 있다는 것과, 꿈꾸는 사람은 그들이 사람들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 모두를 요청한다. 그런데 사실 그는 자기가 꿈꾸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가 꿈꾸는 사람들을 독립적 의식 및 의지의 중심으로 간주해야 하고, 자기가 도덕적 선택을 하도록 요청 받은 상황들을 ‘실제적 삶’의 상황들로 간주해야만 한다. 이런 조건들이 주어진다면, 개인이 아무리 유아론적 상황에 처하게 되더라도 도덕적으로 진보하고, 신학적으로 말해서, 하나님에게로 더 가까이 접근한다고 상상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런 조건이 우리의 사후세계에 적용된다면, 그것의 거주자들은 사실 중대한 의미에서 살아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신성하게 창조된 우주는 관리되어야 한다는 방식에 관한 우리의 견해에 반대하는 상황 내에는 환각과 속임의 요소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동물이어서, 다른 사람들과 상관하는 한 사람으로서 존재하고 발전해 간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상상하는 사후세계에서 인간의 사회적 환경은 비실제적이고, 다른 사람들과의 교제는 환각적이다. 이런 고려사항은 분명 어느 정도 적어도 이런 종류의 이론과는 역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그림에서 인간의 생존은 자기 자신의 유아론적 꿈을 실현하는 개인의 생존이다.
하나의 공통 세계라는 관념과 소원 성취의 주제 사이의 긴장을 주목해 보자. 소원 성취란 공적인 후의 삶보다는 유아론적 삶을 지시한다. 분명 사적 세계들의 다원성만이 각 개인을 자기 자신의 개인적 욕망의 혼합에 적절한 사후 환경을 체험하도록 허락할 수 있다. ‘각인의 정화는 다만 자기 자신의 욕망의 자동적 귀결일 것이다.’18) 따라서 사후 세계는 인간의 소원에 의해 창조되었다 라는 말과, 사후 세계는 수많은 사람에게 공통적이다 라고 말하는 것을 결합시키기란 쉽지 않다. 욕망은 개인에게서 유래하고, 보통의 일상적 소원의 수준에서 두 개인의 욕망과 큰 집단의 욕망은 같은 사태에서 동일하게 성취되도록 전혀 부합하지 않는 것 같다. 우리는 실제로 상이한 사람들의 집단이 가진 욕구로 창출된 정합적 세상을 상상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왜냐하면 상이한 개인들의 상이한 소원은 그들에게 맡겨 둘 때, 환경의 상이한 면모와 사태를 산출한다. 두 부부가 동일한 장소에 나란히 있으면서 각각 다른 소원을 가진 경우를 생각해 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공통적이고 공적 세계의 그림 안에, 개선된 방식으로 소원 성취의 원리를 남겨 둘 수 있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는 각 개인의 소원이 자기 사후 환경의 창조에서 주제라는 관념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대신에 수많은 마음의 기억과 욕구들이 공통적 환경을 산출하기 위해 모이는 상황을 그려야 한다. 각각은 비록 이것이 예외적으로 어떤 한 개인의 기억에 바탕을 두거나 예외적으로 한 개인의 소원을 표현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들 모두가 사는 세상에 공헌할 것이다. 그 성격을 결정하는 욕구는 많은 개인의 욕구들의 폐기나 상호 강화에 의해 산출된 복합 결과를 대표하여, 감지할 수 있는 내용에서 그런 세계는 수많은 개인 사진의 겹치기 인화로 형성한 ‘총체적 그림’과 유사할 것이다.
이리하여 그 특성이 완전한 인간 종족의 감정, 욕구 및 기억의 합성인 죽음을 넘어서는 단일 세계라는 개념은 유명한 구약 성경의 주제 즉, 개인이 더 큰 사회 조직 안에서 세포로 존재하는 종족의 집합 공동체의 개념과 일치한다. 반면에 상대적으로 더 개인주의적인 신약성경의 전망은, 상이한 영적(문화적이 아니라) 수준에 존재하는 천국의 위계라는 개념과 더 일치한다.19)
그러나 인간적 욕구로 형성된 사후 세계를 그려보는 이론들에 반대한 일반적인 신학적 고찰이 있다. 이 고찰은 우리로 하여금 이론 스펙트럼의 유아론적 종말로부터 나아가 소원 성취의 원리 사용을 벗어나게 한다. 이 고찰은 주로 악에 대한 신학적 문제와 관련이 되어 있다. 이것은 2세기말의 이레니우스의 사상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사상에 따르면, 우리의 세상적 존재의 목적은 인간이 도덕적, 영적으로 지각 있는 사회적 동물의 상태로부터 우리의 인간 본성의 완성을 대표하는 존재의 질을 향해 발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 세상은 성장이 이루어지는 환경이도록 의도되어진다. 세상이 우리 인간의 소원에 유연해서는 안되고 주어진 자연 질서를 그 자체의 확고한 특성과 법칙들을 구성해야 하는 것은 이런 인간 만들기에서는 본질적이다. 인간의 지성과 성격이 발전한 것은 우리가 일부가 된 객관적 환경의 요구와 맞붙어, 우리에게 할 일, 풀 문제, 만날 난점, 견딜 장애물들을 제공하는 것을 통해서였다. 이런 방식으로 기능하는 세상이, 값있는 질적 창조를 위한 장면으로서, 인간의 욕구에 의해서는 형성될 수 없고, 반대로 인간의 욕구와는 독립적으로 그 자체의 고정된 구조를 가져야 한다.20)
사람 만들기는 이 세상의 삶 가운데서 벌어지며, 죽음을 맞을 때까지 거의 완성되지 않는다. 만일 사람 만들기 과정이 성취되어져야 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육체적 죽음 너머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그래서 이것은 구성적 과정으로서 인간 삶의 실제적 지속을 요구하는 것 같다. 이런 고찰은 프라이스를 통한 힉이 주창한 이론의 유형에 대해 결정적으로 반대되지는 않으나 차이는 있다. 그의 이론은 현재 삶과 미래 삶 사이의 중요한 구별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 구별은 이레니우스의 그림을 약화시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구별에 따르면, 현재의 삶이 우리의 개성이 다른 사람들과 연관을 갖고 객관적이고 변화하는 환경의 문제를 물고 늘어짐으로써 강화되는 반면, 어떤 미래의 삶도 극단적으로 다른 성격을 갖고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지고 우리가 스스로를 적응시켜야 하는 세상 대신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이 창조한 세상에 거주하면서, 우리 자신의 욕구를 표현할 것이다. 그런 세상이 시작된 인간 만들기 과정을 지속할 수 있을까? 세상은 똑 같은 과정을 계속하지는 않을 것이 분명한데, 환경이 인간의 욕구와 독립적으로 그 자체의 고정된 특징을 가지는 것은 이것에 대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소원 성취의 세상이 특성을 형성 할 수 있는 듯이 보이는 것은 기껏 이미 지구상에서 진척된 욕구와 경향의 세련과 순화밖에 없다. 이러므로 이런 특별한 신학적 관점에서 분출하는 고찰은 우리를 소원의 성취라는 측면에서 분리되게 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고찰들은 이것을 현상 세계가 그것을 의식하는 마음과 관련시켜 객관적인 방식으로 이해되기만 하면, 심성 독립적 측면과 일치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힉을 통한 프라이스의 고찰을 살펴보았다. 그는 관념론적 형이상학자들이 개발한 실재의 이해는 현재의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으나, 내세에 대해서는 참이 될 수 있는 이론을 말했다. 그런데 왜 이 세계는 원초적 성격에서 여느 다른 세상과 다른가? 두 세계가 하나님의 창조 활동을 통해 존재하며 동일한 사람 만들기 목표에 이바지한다고 주장하는 이레니우스 견해를 가진 사람에게는 반대를 주장할 이유가 없는 한, 양자는 동일한 기본적 본성을 가질 것이다. 그 둘은 궁극적으로 천국, 열반, 하나님의 나라와 같은 그런 관념들로 상징화되며, 현세적이기보다는 영구히 극단적으로 다른 사태로 우리를 이끌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죽음을 너머 더 직접적으로 놓여있는 무엇을 생각한다면, 적어도 그것이 우리의 현세와 형이상학적으로 유사한 상태를 가진다고 기대할 일차적 사례가 있다.
힉의 프라이스 해석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의 중요한 결론은 우리가 육탈된 마음의 사후 존재를 지각하려고 시도하자마자, 이것은 결국 참된 육탈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리적 세계에 거주하는 물리적 몸이 전혀 없다면, 마음은 꿈의 세계에 거주하는 자기 자신의 몸을 제공해야만 하는데, 꿈은 꿈의 세계를 물리적 세계로 경험하는 자들에게는 실제적이다. 왜냐하면 지속적 인격의 동일성은 한정적 의식의 지속을 요구하며, 환경 내에 있는 특별한 전망에서 그 환경을 의식하며, 그 환경과 관련시켜 의지 작용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오는 말
지금까지 힉의 논의를 살펴보았다. 그는 종교 전통의 다양성을 관용하는 측면에서 배제주의나 포섭주의를 넘어서기를 권한다. 왜냐하면 그것들로서는 세계 종교 전통의 다양성과 역사성을 무시하고, 자기가 속한 종교의 일면을 절대시하여 타종교의 존재를 거부하는 배타성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포섭주의를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한 종교의 상대적 절대화의 오류를 벗어나기는 어렵다. 힉이 예로 들고 있듯이, 기독교의 삼위일체의 2위의 예는 타종교의 신관 혹은 신앙관을 용해하기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21) 포섭주의를 넘어설 경우, 종교에 대한 이해는 상대주의적 성격을 갖는 종교 다원주의를 수용할 수밖에 없다고 힉은 주장한다. 힉이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하는 이유는, 각종교가 나름의 체계와 역사를 갖고 있으며 이것은 그 나름대로 가치를 지닌 신념체계이기 때문이다. 이것 각각을 ‘전부 아니면 전무’ 라는 교리를 통해 평가하는 것은 무리이며, 도리어 ‘정도’의 교리를 통해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생각을 힉은 하고 있다.
죽음은 생물학적 측면에서는 인간 삶의 종국적 끝자락이다. 그러나 인문학적으로 볼 때 그것은 사람(의 직능)에 따라 비록 의미가 다르긴 하지만 삶의 의미에 있어서 한 계기이지, 결코 끝은 아니다. 더욱이 (종교다원주의를 통해 이해한다면), 인간의 자연사적 죽음은 결코 (종교적) 인간의 영혼의 소멸을 의미하지 않는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죽음은 새로운 각성에 이르는 누적적인 과업의 과정임과 동시에, 종교적 선업을 이룩하는 초월의 실현이다. 자연적 죽음을 통해 인간의 본질을 꿰뚫는다는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죽음을 통과하는 사람이 만나는/만난다고 가정하는 다음 단계가 육탈된 영혼이다. 힉에 따르면, 육탈된 영혼의 사후세계의 형태에 관해서는 개인 욕구의 소원이 성취된 모습과 자신의 순화된 변형 인격이 어느 차원에서 내용상 조합되느냐가 철학의 과제이다. 우리가 가정하는 세계가 심리적 형태를 띠든, 수학적 형식을 갖든, 아니면 가상 공간의 모양을 갖든지 간에, 현재의 우리의 신분과 같으면서도 다른 인간의 모습을 영혼은 갖고 있어야 하겠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힉의 다원주의적 영혼의 설명은 많은 다른 역사와 형식을 갖고 있는 종교들로부터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섭취해서 발전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힉의 종교 다원주의적 시도는 일정한 한계를 가진 듯이 보인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통해 힉의 한계를 지적해 보는 것은 일면 타당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종교가 인성에 근거하여 이룩될 수 있는가? 역사적 증거가 종교 교리의 우월성이나 평가의 기준이 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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