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신문] ‘엔카의 여왕’ 가수 계은숙(54)이 모친상을 당해 잠시 구치소 문 밖을 나왔다. 향년 90세인 계은숙의 노모는 지병으로 지난 27일 오전 10시 40분께 별세했다. 마약과 사기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하던 계은숙은 법원으로부터 구속집행정지를 받아 노모 사망 약 8시간 후 장례식장으로 올 수 있었다. 검은 상복을 차려 입은 계은숙은 초췌한 모습이 역력했다. 눈가에 서린 눈물 자국이 그동안의 굴곡진 삶과 어우러져 더욱 짙어보였다. 계은숙은 한풀이를 하듯 지난 일들을 회상했다. 어머니와의 추억, 잘나가던 시절, 범죄에 휘말렸던 지난날들을 쏟아냈다. 무엇보다 그녀의 말에선 노모에 대한 그리움과 더불어 세상에 대한 그리움이 간절하게 묻어났다. 28일 오후 1시 서울에 위치한 장례식장에서 계은숙을 직접 만났다.
모친상으로 구속집행정지를 받은 '엔카의 여왕' 계은숙이 일요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어머니 사망 소식은 언제 들었나.
"3일 전부터인가 구치소 방에서 같이 자는 사람들이 ‘아유 언니 왜 잠을 못자고 그래요’라고 하더라. 나는 잘 잔다고 생각했는데 대체 왜 자꾸 일어났는지 이유를 몰랐다. 일어나면 습관적으로 주문을 외우듯이 기도를 한다. 당연히 어머니에 대한 기도도 하는데 어머니의 모습이 유독 간절하게 떠오른 것 같다. 그러다 어제(27일) 소식을 들었다. 순간 몸이 부들부들 떨리면서 아무런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복도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파이프를 잡았는데 차가운 느낌이 온몸에 느껴졌다. 담당 주임한테 얘기하고 밖에 나오기까지 7~8시간이 걸렸다. 그 시간이 마치 지옥 같았다. 어머니는 제 면회를 오려고 하다가 돌아가셨다고 한다."
─어머니 건강이 안 좋았나.
"예전에 한 번 교통사고가 나서 다리 쪽을 다쳤는데 수술 이후 거동이 거의 힘드셨다. 이후 노환에 당뇨, 치매가 겹쳐 건강이 급격하게 안 좋아지셨다."
─어머니와는 상당히 각별했을 것 같다.
"어머니를 떠나서는 살아본 적이 없다. 한때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잠시였다. 어머니는 6·25 전쟁 때 고아가 되신 분이라 혼자다. 딸을 거의 대통령으로 아셨다. 가수활동 하면서 유명해지는 것도 좋지만 어머니를 호강시켜 드리기 위해 돈을 많이 벌고 싶었다. 일본에 건너간 것도 그 때문이다."
─일본에서 활동할 때가 ‘인생의 황금기’ 아닌가.
"정말 놀랄 만한 성공을 거뒀지만 데뷔 준비할 때는 너무 힘들었다. 세상에 공짜가 없다고 전국을 다니면서 노래를 부르는데 발톱도 여러 개 빠지고, 이게 노래인가 노동인가 싶었다. 나중에 잘되고 나서는 하루에 4~5시간 자고 일했다. ‘원맨쇼’로 혼자 기본 2~4시간씩 노래를 할 정도니까. 많은 일본 사람들이 열광했다. 마치 새장의 새처럼 보호받고 일부 팬들은 동경심이 커 우상화를 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 마약 사건으로 추락했다. 아직도 그 일을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다.
"일본 전국 투어 콘서트를 진행할 때다. 정말 정열적인 팬 중에 한 명이 공연 쉬는 시간 도중 커피를 건넸다. 커피를 마신 이후 노래를 하는데 어지럽고 정신이 찌릿찌릿한 게 느껴졌다. 결국 공연 중에 의사 불러서 영양주사도 맞고 해서 콘서트는 어찌어찌 끝났는데 그 이후 소속사에 그 팬이 찾아와 그것이 각성제(마약)라고 고백했다. 순간 머리가 멍했다. 알고 보니 그 팬은 일본에서 아주 유명한 집안의 아들이고 유명 영화배우의 남편이었다. 계은숙이 노래를 부르는데 그 슬픈 표정과 음색, 눈물이 싫어 도와주려고 약을 줬다고 했다. 소속사에서는 자신들이 관리를 못해서 이런 일이 생겼다며 자책했다. 그게 시작이었다. 이후 사건이 알려져 신문 1면에 대대적으로 났다. 그 충격으로 팬이 자살하는 사건도 있었다."
─어떻게 추방을 당했나.
"추방은 아니었다. 일본에서는 나에게 생각할 시간을 줬다. 초범이고 실수로 그런 것이지만 여론이 있기 때문에 당분간 노래를 할 수는 없다고 했다. 이후 어머니와 시골에 내려가서 지냈다. 당시 어머니는 당뇨 혈당이 급격하게 올라가고 나는 실어증에 걸려 힘든 나날을 보냈다. 일본에서 함께 한 매니저, 스태프들도 모두 혈육이나 다름없는 가족이었는데 모두 패닉에 빠졌다. 결국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한국으로 가자고 결심했다. 그렇게 한국에 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다시 일본으로 갈 수 없게 됐다. 미리 일본 법무부와 재입국 관리사무소 등 절차를 밟고 동의를 얻었어야 했는데 무턱대고 힘들고 모르니까 그냥 온 것이다. 그게 추방으로 알려졌다."
'엔카의 여왕' 계은숙이 모친의 빈소를 지키고 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한국에서의 생활은 어땠나.
"30여 년 만에 한국 땅을 밟은 거니까. 공기만 맡아도 좋았다. 한동안은 길거리에서 사람들만 지켜봤던 것 같다. 그러다 저녁에는 집에만 있었다. 하도 조용히 지내니까 어머니께서 딸이 뭐 잘못된 게 아닌가 걱정을 많이 하셨다. 그 무렵 어머니에게 치매가 왔다. 이제까지 엄마만 바라보고 살았는데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시니 허탈감이 찾아왔다. 엄마를 행복하게 하고 호강시켜 드리려고 가수를 했는데, 가수 계은숙이 이젠 필요 없구나 생각했다."
─그래도 복귀 준비를 하지 않았나.
"마음을 추스르고 초심으로 가자 생각했다. 그래서 큰 회사보다는 서로 의기투합할 수 있고 같이 늙어가면서 할 수 있는 작은 소속사를 원했다. 처음에 임백천 씨 동생이 도와줬는데 회사 사정이 많이 어려워 결국 무산됐고, 두 번째 회사를 만났는데 주식 투자 문제로 40억 원의 손해를 보고 풍비박산 났다. 겨울인데 집세도 못 내고 난방도 못 하고 어머니 건강도 안 좋아지셔서 막다른 길에 몰렸다."
─극복할 방법이 있었나.
"다행히 도와주시는 분이 호텔에 머물게 해줘서 그때부터 호텔에서 지내게 됐다. 그 무렵 마약 사건이 터졌다. 호텔에 짐을 옮기고 다음 날, 소속사에서 알고 지내던 직원이 방을 찾아와 커피를 건넸다. 그걸 마시고 잠들었는데 다음 날 아침에 누군가 문을 쾅쾅 두드렸다. ‘누구세요’라고 하니 검찰에서 나왔다고 했다. 문을 열어주니 ‘당신 마약했지’라고 따져 물었다. 순간 머리에 확 스쳐지나가는 것이 전날 커피였다. 검찰에 가서 소변 검사하고 조사 받고 너무 정신이 없어 혼란스러웠다. 당시에는 연예인 마약사범에 대한 처벌이 엄중할 때였다. 해명할 여지가 없었다. 나중에 직원도 마약사범으로 잡혀 들어간 것으로 들었다."
─마약도 문제였지만 사기 사건에 연루되지 않았나.
"빚이 많아서 이것을 청산하려면 인감과 통장을 양도해야 한다고 아는 동생이 접근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맡겼는데 이게 결국 사기에 이용됐다. 수입차 리스 사기사건도 그 동생이 주도했다. 동생은 매스컴에 잘 알려졌다시피 김종필 전 총리의 처조카이자 박근혜 대통령의 오촌 조카다. 나는 그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나중에 대체 왜 그런 사기를 저질렀냐고 물어보니까 사기가 아니니까 여러 군데 우선 소송을 걸라고 했다. 그 말을 하도 들어서 나중엔 질려버렸다. 나중에 검찰에 알고 보니 동생은 수십 건의 사기 건에 연루돼 있었다. 한때 그 사람과 내가 내연관계라는 소문이 난 것도 안다. 동생이 나보고 30년 동안 사랑을 나눈 사람이라고 얘기하고 다녔다. 하지만 그 동생은 내 첫 번째 남편의 친한 동생이다. 그렇게 알게 됐고 한동안 연락도 안하고 지냈는데 나중에 이런 식으로 얽혀 버리니 할 말이 없었다."
─현재 항소를 한 상태 아닌가.
"마약 부분은 어쩔 수 없었다 치고 죄를 인정하고 정말 용서를 구한다. 하지만 사기 부분은 너무 억울하다. 선고가 얼마 후에 있다. 억울한 부분은 씻고 가고 싶다."
─구치소 생활은 어떤가.
"어느덧 11개월이란 시간이 흘렀다. 처음에는 적응을 못해서 독방에 수감된 적도 있었다. 독방을 도배하면 그 독방에서 나간다는 구치소 풍문이 있는데, 정말 도배를 다할 무렵 독방을 나가게 됐다. 그 무렵 제가 있던 독방에 한명숙 전 총리가 들어왔다. 얘기는 못하고 그냥 목례만 하고 지나갔는데 작고 왜소한 체구의 그 분을 보니 만감이 교차해 기도를 드렸다. 구치소에서 방장도 하고 있고 주변 동료들이 상담이나 사인을 해 달라 하는 등 많이 따른다. 다만 죄가 있어 사인은 정중히 거절하고 있다. 봉사하며 기도하며 조용히 지낸다. 구치소로 여러 편지도 온다. 대부분 지난날의 잘못들을 반성한다는 편지다."
─향후 노래를 부르고 싶은 마음이 또 있나.
"이미 지나간 일은 변명하고 싶지 않다. 굴곡 많은 제 인생이지만 그만큼 절망과 눈물에 빠진 사람들을 치유하고 꿈과 희망을 심어줄 수 있는 노래를 하고 싶다. 일본에서 한창 활동할 때 주변에서 개명하라는 요구가 있었지만 끝까지 하지 않았다. 계은숙이라는 한국 이름에 자부심이 있었고 한국인으로서 끝까지 싸워보자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랑하는 고국에서 힘차게 노래하고 싶다."
박정환 기자 kulkin85@ilyo.co.kr
‘엔카의 여왕’ 가수 계은숙은? 1977년 ‘럭키샴푸’ CF 모델로 연예계에 데뷔했고 2년간 모델 활동을 했다. 1980년 ‘노래하며 춤추며’, ‘기다리는 여심’을 발표하며 <MBC> 10대 가수 가요제 신인상을 수상했다. 이후 1984년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의 황혼’으로 데뷔, 수많은 곡을 히트시키며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1세대 한류가수’라는 평을 들으며 한국 가수로는 최초로 1988년 전일본유선방송대상 가수 1위, 1990년 전 일본가요음악제 특별상, <NHK> 홍백가합전에 7년 연속 출연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가 계은숙의 팬클럽 회장을 맡기도 했다. 1992년 2월에는 3살 연상의 사업가와 조용기 목사의 주례로 여의도 순복음교회에서 결혼했다. 하지만 결혼 6년 만에 이혼했다. 이후 2007년 11월 각성제 소지 혐의로 도쿄 자택에서 체포됐으며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2008년 한국으로 건너와 복귀를 준비했지만 2억 원대 스포츠카 사기 사건에 휘말려 계획에 차질을 빚었다. 설상가상으로 마약 혐의까지 받으며 지난해 징역 1년 6개월과 벌금 80만 원을 선고받고 수감됐다. [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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